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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친절하게 애정을 가지고 서로 먼저 존중하며 11. 일을 게을리 하지 말고 영이 뜨거운 가운데 [주]를 섬기며 12. 소망 중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늘 절박하게 기도하고 13. 성도들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며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 14.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15.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고 슬피 우는 자들과 함께 슬피 울라. 16. 서로를 향해 같은 생각을 가지며 높은 것들에 생각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겸손히 행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것으로 여기지 말라. 17.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의 눈앞에서 정직한 일들을 예비하라. 18. 가능하다면 너희가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라. 19.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 20.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불타는 숯을 쌓으리라. 21. 악에게 지지 말고 도리어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10-21 KJV)
마음가짐의 태도
저는 오랫동안 마음이 가난해 지기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측면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몰락으로 물질적인 가난은 쉽게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가난에 이르는 길은 그보다 더 험난하고 긴 여정으로 지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습니다.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요, 모순의 시간들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빈정거림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힘겨웠습니다. 아직도 여전히 가난은 버겁습니다. 하지만 가난을 통해 저는 영적으로 많은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간단한 일상을 통해서도 신앙의 승리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만큼 영적으로 민감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도 순간적으로는 여전히 가난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몰려올 때나 갑자기 꼭 필요한데 그것을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가 등장했을 때는 단순히 경제적 어려움뿐만 아니라 저 자신과도 씨름을 벌여야 합니다. 때론 너무 화가 나고 낙담이 되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 상태가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면 빨리 주님 곁으로 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오늘도 저는 가난에 굴복해 버릴 것인가? 아니면 인내와 끈기로 그것을 극복해 낼 것인가를 두고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만큼 세상의 공격은 집요합니다. 현실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는 막중한 인생의 무게는 사실 돈에 의해 어느 정도 극복되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제 마음속의 저항이 세상의 공격을 이겨낼 때까지 끈기 있게 버틸 것인가, 아니면 그저 주저앉아 패배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대개는 저의 선택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상황에 의해 모든 것은 결정 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게 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저의 마음을 정하는 것은 여전히 저의 몫입니다. 이 말은 곧 태도가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가난을 택한 저의 마음을 늘 공격합니다. 항상 가장 힘든 상대는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빈정거림은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몰이해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난코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실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도 가난을 택한 저는 끝까지 그것을 유지할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복음이 말하는 진정한 진리라고 확신합니다. 제 자신이 이렇게 어려운 과정을 겪었고 또 겪고 있기 때문에 아직 자녀가 어린 사람들에게는 강력하게 그것을 전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일치된 상태에서 우리에게 조금 더 큰 공동체가 주어지면 아마도 더 쉽게 그것을 말하고 실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복음의 승리이며 기쁨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로마서 12장의 마지막 구절을 실천하는 일에 있어서도 관건은 바로 우리의 태도입니다. 어둠의 세력의 지배를 받는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악과 직면해야 합니다.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그 악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고 절망하며 포기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사와 권세들을 정복하셨을 뿐 아니라, 그 승리를 우리와 함께 나누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악과 대항해 싸울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사와 권세를 정복하셨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우리에게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동기와 능력과 기쁨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그리스도의 승리를 상기시켜 주고, 매일의 삶과 일상 속에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우도록 격려해 주는 지체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늑대들이 사냥을 하는 모습을 보면 일단 사냥 대상이 되는 동물들을 흩트려 놓는 것으로 사냥을 시작합니다.
흐트러져 달리기 시작하면 부상당한 녀석들이 드러납니다. 조금 오래 달리다보면 늙은 녀석들이 쳐지기 시작합니다. 또 강한 녀석의 경우도 자신의 강함을 믿고 무리로부터 이탈하여 고립되면 그 역시 손쉬운 사냥감이 됩니다. 이러한 늑대들의 사냥을 생각할 때 오늘날 오늘날한국 교회를 떠올리게 됩니다. 교회들이 갈라지면 사단의 손쉬운 먹잇감이 됩니다. 물론 먼저 부상이 있거나 늙은 동물과 같은 약한 교회들이 무너질 것입니다. 하지만 강한 대형교회라도 고립되는 순간 사단의 공격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임을 믿고 모든 교회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체가 되기 위해 복음을 향한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하는 하나님 백성 개개인들입니다. 그런 사람들만이 진정한 기독교 공동체를 이루어 그리스도의 전체 몸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악에 의해 (계속해서) 정복당하여 살지 말며, 아주 그 반대로, 선 안에서 (선으로) 그 악을 정복하며 사십시오.
개인과 공동체
본문에 사용된 선과 악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은 17절에서 사용한 단어와 동일한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그 단어들에 의미심장한 약간의 문법적 변화를 주어 그것을 단순히 정리 요약한 것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면밀히 살펴볼 때 본문에 담긴 더욱 큰 의미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선 로마서 12장에 등장하는 동사형태의 변화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바울은 6절부터 계속해서 분사를 사용했는데, 완전한 문장 대신 단순하고 간결한 구들을 사용해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 무엇인지 요약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두 곳에서 강력한 명령형 형태의 동사를 사용하여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14절에서는 복수 계속 형 동사를 사용해 원수를 공동체적이며 지속적으로 돌볼 것을 명령했고, 또 19절에서는 복수 결정형 동사를 사용해 하나님의 진노에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자리를 내어줄 것을 명령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대한 두 번째 인용구절인 20절에서는 명령형 동사와 미래형 동사를 모두 단수 형태로 사용했습니다.
이것은 그 출처인 잠언 25:21-22의 동사들이 단수 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더 이상 구약성경을 인용하지 않는 구절에서도 본문의 두 동사를 모두 복수형태가 아닌 단수 형태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악을 극복해 내느냐 아니면 악에 의해 정복당하고 마느냐의 문제가 결국 각자의 개인적 문제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에 대한 최종적 강조는 공동체로부터 우리를 분리해 내 단독적인 존재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구절이 13장의 메시지에 대해 준비시켜 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전체 몸이라는 구조와 지원을 통해 각자 홀로 싸워야 하는 싸움에 대해 격려를 받지만, 궁극적으로 이 싸움에 대한 자신의 태도는 궁극적으로 우리 각자의 개별적 책임입니다. 제 가난에 대해 이해하는 사람들은 제 곁에서 한결같은 지원과 격려를 해줍니다. 그들의 도움이 힘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가난은 결국 저 홀로 싸워야 하는 제 문제입니다. 주저앉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이를 악물고 버텨내야 할 사람은 바로 저 자신입니다.
그러나 공동체의 기쁨은 용기와 인내로 우리를 무장시켜줍니다. 불편합니다. 무시를 당하는 것은 변함없이 힘겹습니다. 마음의 욕구는 결코 줄어들지 않습니다. 남을 이기고 싶고 경쟁에서 이겨 한 번 멋드러지게 저 자신을 드러내고 싶습니다. 공동체의 이해와 격려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의 나눔이 주는 기쁨이 없다면 다시 부를 추구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된 나 자신에게서 만족하는 옛 사람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악에게 지는 것입니다.
그 악에 의해 (계속해서) 정복당하여 살지 말며
바울의 명령은 직설적입니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악에 의해 계속 정복당하고 있지 말라."입니다. 이 동사의 현재계속 명령 형태는 악에 의해 정복당하지 않으려면 지속적인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또한 의미심장한 것은 악에 대한 명사 앞에 '그'라는 뜻의 정관사가 붙어 있다는 점입니다. 악은 그저 막연한 모습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은 특정한 유혹, 특정한 시련, 특정한 어려움이나 사람이나 사물의 형태로 각자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악의 개별적 형태 중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복당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아주 그 반대로, 선 안에서 (선으로) 그 악을 정복하며 사십시오.
곧 이어 바울은 반대되는 명령을 우리에게 줍니다. 저는 바울의 그러한 면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단지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에서 멈춘다면 우리는 소극적인 사람들로 두려움에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언제나 우리에게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한 후에 곧바로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해줍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자유와 연결됩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의 상황에 맞는 창조적인 삶으로 초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기서도 '그러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들 가운데 의미가 더 강한 쪽을 사용해 그 다음 명령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주 그 반대로, 선 안에서 (선으로) 그 악을 정복하며 사십시오." 그 문장의 마지막 단어인 악은, 정사들의 구체적인 표현의 하나인 정부권력에 대한 문제로 우리를 이끕니다. 로마서 13장 1-7은 교회 역사 전체에 걸쳐,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그들의 통치자들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특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라는 1절 말씀은 정부는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것이므로 필연적으로 선하다는 의미로 해석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해석은 지상의 정부들은 정사와 권세들의 일부라는 성경의 전체적 메시지를 고려하지 않은 해석입니다. 성경의 전체적 메시지에 의하면 정사와 권세들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나(골1:16) 타락했으며(롬8:19-22),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당했으나(골2:15) 여전히 우리가 싸워 이겨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로마서 13장 1-7은 당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이 처해 있던 특정적 상황을 다루는 구절입니다. 아마도 과중하고 불공정한 세금 징수에 대한 문제에 대한 언급인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그 문제에 대한 충고를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로마서 13장 1-7은 규범적인 것이 아니라 교정적인 것으로 해석되어야 합니다. 즉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나 적용되어야 하는 보편적 원리가 아니라 기독교 역사 속에서 어떤 특정 문제에 대해 제시되었던 하나의 특정한 해결책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로마의 상황에 대한 특정한 명령 후에, 바울은 8절부터 연이어 그곳 그리스도인들에게 약한 자든 강한 자든 서로서로 돌보는 삶을 살라고 촉구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나머지 부분은 전체 공동체를 세워주는 구체적 행동을 장려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단수형 동사로 표현된 12:20-13:5 말씀은 이런 전체적 구조 속에서 해석되고 이해되어져야 합니다. 12장이 오늘의 본문에서 끝나고 있지만 13장 5절까지 이어져야 문맥상 타당한 것입니다. 성경의 장절이 나누어져 확정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의 장절은 1560년 판 제네바 성경의 장절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승리에 대한 확신
로마서 12장은 전체적으로 승리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장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하고 살아있는 제물로 드리기, 순응을 강요하는 주변문화를 거스르기, 생각을 새롭게 함으로써 변화되기,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알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자신의 고유한 은사를 청지기로서 사용하기,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악을 미워하고 선한 것을 꼭 붙들기, 온화한 애정을 기울이며 고귀한 일을 하기, 근면함으로 시들해지지 않기, 영혼의 끓어오르는 열정을 간직하기, 지속적으로 주님 안에서 섬기기, 기쁨과 더불어 소망하기, 공동체 외부 사람들을 환대하기, 우리를 핍박하는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기,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과 자신의 감정을 나누기,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기, 보복하지 않고 가능한 평화를 추구하기, 원수의 머리에 숯불과 사랑을 쌓기, 그리고 기쁨이 가진 이러한 속성들 때문에 악에 대해 계속해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이 존재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악에 굴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악을 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 '니카오'는 '극복하다', '정복하다'로 번역되어 신양성경에서 스물여덟 번 사용되었고, 그중 열일곱 번이 요한계시록에 사용되었습니다. 종말에는 마침내 악에 승리한다는 확신 가운데 우리는 참된 소망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분에 대항해 결집한 모든 악과 죽음의 세력들을 십자가에서 패배시키셨으며, 때가 되면 모든 악의 세력들이 궁극적으로 정복될 것임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종말론은 새 시대에 있을 하나님의 승리가 지금 이 시대에도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물론 악의 세력에 우리가 언제나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파괴적인 것으로 성경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까지 그러한 갈등의 상태는 유지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완결을 이루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궁극적 승리에 대한 확신은 우리가 이 싸움을 계속 싸워나갈 수 있도록 용기를 줍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기독교 공동체는 도저히 이길 수 없어 보이는 상황 속에서 힘겨운 씨름을 하는 와중에도 비범한 기쁨을 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쁨은 세상에 대한 절망과 맹목적 낙관주의, 그 둘 모두에 대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끈기 있게 견딜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신앙의 궁극적 결과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가난이 결국에는 부요해질 것이라는 사실 뿐만 아니라 가난을 통해 얻게 되는 영적 유익과 제게 일어나야 하는 참된 변화가 무엇인지를 알기에, 저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것이라는 사실과 그것이 단순히 나 자신의 유익뿐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정의를 이 땅위에 이루는 일에도 공헌하게 된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가난과의 싸움은 일종의 계속되는 투쟁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영적 성숙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속적으로 이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싸우고 우리 시대의 절망과 희망 없음에 대해 우리의 기쁨을 대안으로 제시해 나가야 합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돈이 모든 것을 판단하는 근거가 된 세상에서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가난이라는 것이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 그리고 오히려 모두가 회피하는 그 가난 속에 영적인 보화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러한 대안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것임을 점점 더 깊이 깨달아갑니다. 하나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나라입니다. 모두가 가난해지기로 기꺼이 마음먹을 때 아무도 가난하지 않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악의 상황 가운데에서도 선을 만들어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늘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결국 그것은 우리의 영적 성숙과 우리 존재의 변화로 이어져 마침내 우리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랑의 존재로 빚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진정으로 믿을 수 있다면 세상은 결코 우리를 흔들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우리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가장 강력한 복음전파의 도구가 될 것입니다.
선으로 악을 정복하며 살 때
마틴 루터는 본문을 주해하면서, 그러한 승리의 능력에 대한 심오하고 이 시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몇 가지 통찰을 우리에게 제시해줍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이것이다. 당신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은 당신을 자신과 같은 사람 즉 악한 사람으로 만들지 못하며, 그의 악함은 당신의 선함을 이기지 못한다. 자신은 변화되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을 자신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사람이 승리자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신은 선을 행함으로써 그가 당신을 닮은 사람이 되도록 변화시켜야 한다. 그런 식으로 당신의 선함은 그의 악함을 이길 것이고, 그는 당신과 같은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상대방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사람을 승리자라고 여기지만, 사실 그렇게 마지막 해를 가한 쪽의 형편이 더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그것으로 끝장난 것이지만 해를 가한 쪽에게는 악이 계속 남아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우매한 말에 우매함으로 대답한다면, 당신은 결코 그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 그대로를 보도록 만들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의 친절한 대답은 그의 어리석음을 더욱 드러내 줄 것이다.
왜냐하면 우매함은 자신과 같은 무언가를 보고 있을 동안에는 자신에 대해 볼만을 갖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무언가를 보게 될 때에는 자신에 대해 비로소 불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문화의 많은 사람들이 참 만족을 주지 못하는 거짓 가치들, 점증하는 폭력, 짓누르는 허무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는 소망과 기쁨의 대안들을 제공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주는 피상적이고 마약과 같은 행복과는 전혀 다른 진정한 값어치 있는 실질적인 대안들을 제공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본문의 동사들이 모두 단수형이라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 개별적인 삶의 환경 속에서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한 공동체 안에서 그러한 씨름을 위한 능력, 결정을 위한 지원과 충고, 방법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본문을 직업, 가족, 이웃, 21세기 세계의 구체적 상황 속에 적용하는 일은 우리 각자의 몫이지만, 우리는 우리를 품어주는 공동체의 기쁨 안에서 악을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지속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원문으로 보면 로마서 12장의 마지막 단어는 '그 악'이라는 구절입니다. 이것은 우리 앞에 놓인 도전입니다. 싸움에 대한 우리의 근거지는 우리가 처음 로마서 12장을 살펴볼 때 묵상했던 '그러므로'입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하며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을 바라볼 때, 우리를 둘러싼 이 세계의 악한 세력의 도전 가운데서도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분의 사랑이 주는 기쁨으로 그 모든 악에 대해 지속적으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8장 37절에서 바울은 '정복하다'라는 동사 앞에 '그 이상'이란 의미의 헬라어 전치사를 결합시켰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어떠한 것에 대해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온전히 넉넉한 승리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삶 속에서 직면하는 그 어떤 악에 대해서도 넉넉히 승리하게 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러한 역경을 통해 우리를 더욱 강하고 더욱 아름답게 성숙시켜주시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오직 한 번 등장하는 그 복합동사는 본문의 계속해서 악에 승리하라는 도전에 대한 배경이 됩니다. 사실 이것은 로마서 12장에서 살펴본 모든 권고의 토대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승리한다는 사실을 미리 알고 싸움에 임하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이유를 이미 로마서 8장에서 제시한 바 있습니다.
➤“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정사들이나 권능들이나 현재 있는 것들이나 장래 있을 것들이나 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창조물이라도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지 못하리라.”(롬8:38-39)
게임은 끝났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는 확신, 그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악을 이기게 해주시는 하나님 약속의 그 깊은 기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공동체로서 우리의 모든 존재 행위와 토대인 '그러므로'의 일부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로마서 12장을 묵상하면서 누구보다 저 자신이 먼저 많은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부족한 저의 모습을 더 자세히 그리고 깊이 보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부족합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럴 것입니다. 복음을 향해 한 걸음 내디딜수록 거기에 숨겨져 있는 기쁨을 발견할 것이지만 자신의 부족함 역시 거기에 비례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영적 성숙이 교만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이유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부족함을 알기에 자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를 부인하여야 하기에 경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될 때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창조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아 숨쉬기 때문입니다. 또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끈으로 묶여 하나님 백성 공동체를 이루고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와 기쁨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처럼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 나라의 여명은 세상의 빛이 될 것이며, 고립되어 죽어가는 이 시대 사람들에게 진정한 희망이 있음과 그것의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게 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그 길임을 믿으면서,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기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기쁨의 공동체라 부를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