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정(松江亭)
무등산 원효계곡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환벽당과 식영정 사이의 자미탄을 지나 광주댐으로 모여들고, 댐에서 숨을 고른 물줄기는 북서쪽으로 흘러흘러 '송강정' 앞에서 영산강으로 합류된다. 담양 고서면의 죽녹천이 흐르는 약 50m 높이의 언덕에 우뚝 서있는 송강정(松江亭)은 정치가로 보다는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불멸의 명성을 누리는 정철이 동인과 서인의 싸움에서 패배해 대사헌에서 물러 난 후, 창평으로 하향하여 초막을 짓고 살던 곳이다.
앙정에서 네비를 따라 10여분 가다가 송강정 표시가 있고 바로 앞의 유산교에서 우회전하여 차를 세우니 도로변에 송강정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도로안내판이 있는 곳에는 죽록천이라는 이름의 개울이 흐르고 우측으로는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소리가 시골의 고요를 깨고 있다. 이 강의 다른 이름이 송강(松江)이며, 정철의 호 송강(松江)도 이 강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송강정(죽록정으로도 불린다)
당시에는 죽록정(竹綠亭)이라 불렀으며, 지금의 정자는 1649년(인조 27년)에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었다가, 영조46년인 1770년에 후손들이 무너져 내린 죽록정 언덕에 소나무 수천그루를 심고 다시 세운 것으로, 그때 이름을 송강정이라 하였다.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에 정면3칸과 측면3칸인 송강정의 앞면에는 '송강정'이라는 현판이, 옆면에는 '죽록정'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송강정 둘레에는 노송과 대나무가 무성하고, 앞에는 증암천 너머로 평야가 펼쳐져 있으며, 스카이라인이 수려한 멀리에 있는 무등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속세를 날려 보내며 송강이 이곳에서 지은 사미인곡(思美人曲)이 정자 옆의 시비(詩碑)에 새겨있다.
조선중엽 권력다툼의 와중에서 낙향한 선비들이 세운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과 소쇄원 등의 수많은 정자와 원림이 잘 보존되어있는 무등산자락인 담양군 남면 지곡리에 있는 식영정, 환벽당과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을 묶어 1972년 정송강유적(鄭松江遺蹟)이란 명칭으로 전남기념물 제1호로 지정하였으나, 2009년에 식영정 일원'이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57호)로 승격 ‘지정되고 '환벽당'(광주기념물 제1호)도 광주광역시에 이관(1986년)되어, 2010년 5월에 식영정 구역을 지정해제 한 뒤, 문화재명칭을 ‘담양 송강정'으로 변경하였다.
본관이 연일(延日)인 정철은 중종31년인 1536년 서울 종로에서 돈녕부 판관 정유침과 사간원대사간을 지낸 안팽수의 딸인 죽산 안씨 사이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인 귀인 정씨였고, 작은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군의 부인이었으므로 반가의 자제로서 부족함이 없는 나날을 보내며, 어린 시절부터 궁궐에 드나들며 또래의 경원대군(慶原大君: 명종)과 친숙해져, 명종이 즉위하자 그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명종이 즉위한 1545년 ‘문정왕후의 오라버니인 윤원형이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일파를 제거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자 정철의 매형 계림군은 윤임의 추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능지처참되었고,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지만 곧 문정왕후와 소윤을 비난하는 벽서사건으로 다시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다가 1551년 명종6년에 원자(元子)탄생으로 특별사면을 받은 아버지는 외가인 담양으로 낙향하였다. 이처럼 낙향지 에서 학문과 멀 어졌던 정철은 둘째형을 만나러 순천으로 가다가 성산에 있는 환 벽당(環碧堂)아 래의 냇가에서 스승 사촌(沙村) 김윤제(金允悌; 1501~1572)를 만났다.
환벽당 아래 자미천의 용소
13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에 환멸을 느껴 나주목사직을 사직 후 환벽당을 짓고 고경명과 김덕령, 김성원 등의 후학을 양성하고 있던 어느 여름, 오수(午睡)에 빠졌다. 낮잠에서 ‘용 한마리가 냇가에서 놀고 있는 장면’이 너무 생생하여 환벽당 아래를 지나 광주호로 흘러가는 앞 냇가인 용소(龍沼)에 내려가 보니, 더위에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는데, 이 소년이 바로 소년 정철이었다.
소년에게 물어 그의 출신과 자질을 알게 된 김윤제가 환벽당에 머물게 한 정철은 김성원과 함께 사촌의 문하생이 되었고 정철이 17 세가 되자 김윤제는 사위인 유강항의 딸과 정철을 결혼시키고 과거에 오를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후에 김윤제의 후원으로 대학자 기대승과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힌 정철은 임억령이 창평에 내려오자 그로부터 시를 배웠다. 25세 때 그는 동문수학한 김성원(金成遠)이 서하당(棲霞堂)에서 보낸 풍류생활을 대화형식으로 풀어간 가사 ‘성산별곡’을 지었다.
정철이 27세 때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명종은 소꿉동무의 등과를 축하하며 따로 주찬(酒饌)을 내리어 축하연을 베풀어주고 성균관전적 겸 지제교에 임명했고, 곧 사헌부지평으로 승진시켰다. 그 뒤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32세 때인 명종 32년 이이와 함께 호당(湖堂)에 선발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면서 이이의 박식함에 감탄하여 친밀하게 지내게 된다.
이후 그는 정랑, 성균관직강, 사간원헌납을 거쳐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 홍문관수찬을 거쳐 선조1년에는 이조좌랑이 되었고, 홍문관수찬, 교리 등을 지내면서 비교적 평탄한 관직생활을 영위했다. 선조8년인 1575년 아버지에 이은 어머니의 시묘살이를 마치고 복직하여 직제학, 성균관사성, 사간원사간 등을 역임했다. 그 무렵 조정에서 이조정랑임명문제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다투면서 동서 분당이 가속화되었고 그때 정철은 중앙의 정치에 회의를 느껴 벼슬을 내던진 다음, 담양으로 돌아갔다.
선조12년에 형조참의, 승정원우부승지를 거쳐 8월에 다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지만 출사하지 않고, 그 동안 머물러 있던 서울 및 고양군 음죽을 떠나 다시 창평으로 낙향하였다. 당시 정철의 과음은 관료사회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임금이 불러도 술이 깨지 않아 등청하지 못한 적도 있어,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명하자 술잔을 사발만큼 크게 늘려서 마시기도 했다.
이듬해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된 그는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여행하며 ‘관동별곡’을 썼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어 가사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다. 현지에 부임한 뒤에는 해묵은 폐단을 혁파하고 방치되어 있던 단종의 묘를 수축하고 지방관을 독려하는 선정을 베풀었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일처리가 공평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후 정철은 도승지, 예조참 판, 함경도감사를 거쳐 48세에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선조18년 에 ‘파당을 만들어 정사를 그르 쳤다.’는 혐의로 양사의 탄핵을 받아 고양을 중심으로 한 근기 지방에서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 자 했으나, 동인들의 비난이 계속되자 결국 고향에 돌아가 1589년 10월 초까지 약 4년여 동안 은거하며 한국문학의 한 획을 그은 ‘사미인곡(思美人曲)’ 과 ‘속미인곡(續美人曲)’을 지었다.
선조22년 10월 정여립모반사건이 일어나자 왕명에 입궐을 서둘렀다. 선조는 이산해과 정언신을 위관으로 삼았다가 정철이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므로 수사를 맡길 수 없다.’는 상소를 올리자 그해 11월 정언신 대신 정철을 위관으로 삼았다. 그때부터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맹렬하게 추궁하면서 정여립과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언신에게 유배형을 내리는 등 3년여에 걸쳐 역모사건취조를 주관했다. 이 사건이 기축년부터 시작되었기에 기축옥사(己丑獄事)라 한다.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의 영수 이발을 비롯하여 1천여 명에 달하는 동인계열인사들이 희생되었지만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모반계획이나 증거에 모호한 점이 많아 선조와 서인들의 조작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기축옥사로 정적들을 일소한 정철은 1590년(선조23년) 2월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인성부원군에 봉작되었고, 정여립의 난을 바로잡은 공으로 2등 평난공신에 녹훈되었다. 그 같은 약진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특유의 거센 성정 탓에 고난을 자초하게 된다.
1591년(선조24년) 선조의 병이 잦은데다가 나이가 40을 넘었으므로 후사를 빨리 정해야 된다는 세자책봉문제가 논의에 오르자, 정철은 홀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주청했으나 신성군을 염두에 두고 있던 선조가 그를 힐난하자, 정철에 대해 공세를 펼친 동인은 상소를 올려 ‘주색에 빠져 국정을 그르친 그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공격했고, 선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정철에 대한 파직요구를 수용하여 평안북도 강계로 귀양 보내고 위리안치에 처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망 길에 오른 선조는, 그해 5월 현지유생들이 정철을 추천하자 유배지에 사람을 보내 ‘충효대절이 지극한 경이여, 되도록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라며 그를 불렀다. 이에 이미 평양에 머물고 있던 선조를 찾아간 정철은 의주까지 파천(播遷)한 임금을 호종했고, 9월에는 양호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했다.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조정에서는 당쟁이 다시 고개를 쳐들었고, 동인의 공격이 재개되자 지친 정철은 벼슬을 내놓고 강화 송정촌에 칩거했다. 평생 불같은 거친 성정으로 정적들과 이전투구를 벌였지만 청렴결백했던 그는 만년에 가난에 시달리다가 1593년(선조26년) 12월 18일, 5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자, 사헌부에서는 선조에게 정철의 삭탈관직을 청했고 선조는 이듬해 6월 정철의 관작을 회수했다.
이후 1609년 광해군이 즉위하 자 정철은 신원되었고, 1624년 에는 관작이 복구되어 1685년 (숙종11년)에는 ‘문청(文淸)’이 란 시호가 내려졌지만 1691년 (숙종17년)에 다시 관작이 삭 탈되었다가, 1694년(숙종20년) 에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렇듯 평생 서인의 호랑이였던 정철 의 운명은 죽은 뒤에도 당쟁의 풍랑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다.
그의 유해는 1594년 2월 경기도 고양군 신원(新院)에 장사지 냈다가 전라남도 창평(昌平)의 송강서원에 제향되고 영일군 연 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 등에 배향(配享)되었다. 1665년(효종6년)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지장산(地藏山)으로 이장되어 1996년 충청북도기념물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양사(兩司)의 논척을 받고 사직 후인 1585년 50세에 제2의 고향이 된 성산으로 낙향한 정철은 송강정에 머문 4년 동안 왕을 향한 신하의 충절을 지아비에 대한 아녀자의 사랑으로 바꾸어 표현한 작품인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의 주옥같은 작품을 지었다.
이 몸 생겨날 때 님을 따라 생겨나니
한생 연분이며 하늘 모를 일이런가
나 하나 젊어 있고 임하나 날 사랑하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 다시 없네
평생에 원하기를 함께 살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홀로 두고 그리는가
……
편작이 열이 온들 이 병을 어찌하리
어와 내 병이여 이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범나비 되오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간 데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기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내 님을 따르려 하노라
송강은 그의 다대한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평생 당쟁으로 점철된 정계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할 말을 입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심성과 피아를 가리지 않고 허물을 보면 추상같은 징벌이 마땅하다는 엄격함으로 반대파인 동인들로부터 ‘동인백정’으로 불렀으나, 서인들은 그의 저돌적인 품성에도 불구하고 그를 율곡에 버금가는 큰 인물로 떠받들었다.
이처럼 평생을 조정과 유배지를 오갔던 그는 권력지향주의자라는 비판과 조선최고의 시인이라는 양극의 비난과 추앙을 동시에 받고 있다. 정여립의 난으로 비롯된 기축옥사에 심문책임자인 위관(委官)으로 있으면서 심문 중에 가한 혹형(酷刑)으로 귀양길에 올라 당쟁시대를 연 인물로 매도되었고. 그의 가사도 ‘군주를 향한 맹목적인 충성을 노래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 가치가 재검토되어야 한다는 일부 의견도 있지만, 그의 주옥같은 작품이 가진 문학성은 정치적이 이유로 비하되기에는 너무 빼어나다는 데에 머리를 꺼덕인다.
이처럼 조선의 요직을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걷다가 당쟁과 귀 얇은 선조의 변덕에 따라 수차례 사직과 파직과 복직을 거듭한 정철이 담양으로 낙향하여 지은 곳이 장송(長松)과 대나무가 지키고 있는 송강정이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올라가니 장대석기단에 초석을 놓아 기둥을 세운 송강정중앙에는 온돌방이 있고 방 좌우의 띠살문을 두어 여름철의 더위가 날라 가게 하였다.
아무도 없는 정자주변의 숲을 둘러보고 판독이 쉽지 않은 사미인곡 시비를 본 뒤 정자에 앉아 잠시 송강을 생각한다. 정치가로서는 서인의 행동대장으로 기축옥사에서의 심문책임자인 위관으로서 혐의자에 사정을 두지 않는 야차(夜叉) 같은 무자비한 취조를 펼쳐 정적인 동인들로부터는 백정이란 별칭으로 불렸던 수모를 겪어야했고, 항상 문제가 된 과음으로 인한 업무해태(懈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벼슬살이의 목적 중 하나가 재물 축적으로 삼는 당시의 세태에 반하여 너무 청렴했던 송강은 말년에 강화에서 은거할 때에는 친한 벗에게 자신의 구차한 경제사정을 호소하며 구걸까지 하였다하며, 비록 사미인곡 같은 가사들은 임금을 향한 단심가라며 폄훼하는 소리도 들리지만, 관동별곡이나 성산별곡 같은 불후의 명작도 남긴 시인으로서의 송강을 찾아 한잔 술을 올리는 것이 무의미한 것인지는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