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살고싶은 곳 - 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 꽃이 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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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1.04. 20:57조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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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 꽃이 피고
담양군 고서면 선덕리에 자리 잡은 명옥헌(鳴玉軒)을 조성한 사람은 오명중(吳明仲)이다. 광해군 때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외가가 있는 이곳에 내려와 망재(忘齋)라는 조촐한 서재를 짓고 살았던 아버지 오희도(吳希道)의 뜻을 이어받고자 1652년 명옥헌을 지었다. 연못을 판 뒤 배롱나무를 심었는데 여름 한철이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이 핀다. 명옥헌이라는 이름은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이 부딪치는 소리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명옥헌 원림
명옥헌이라는 이름은 정자 곁을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가 옥이 부딪히는 소리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 한철이면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배롱나무 꽃이 핀다.
담양군 남면 연천리에 있는 독수정(獨守亭)은 “백이숙제는 누구인가 / 홀로 서산에서 절개를 지키다 굶어 죽었네”라는 이백의 시 구절에서 따온 이름으로, 고려 공민왕 때 병부상서를 지낸 전신민(全新民)이 처음 세웠다.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에 있는 송강정은 정철이 1584년 동인들의 탄핵을 받아 대사헌을 그만두고 돌아와 초막을 지어 살던 곳이다. 그는 이곳에서 우의정이 되어 조정에 나가기까지 4년 동안을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비롯한 여러 작품들을 남겼다. 정철은 가사문학에 뛰어난 업적을 남겨 그의 「관동별곡」, 「성산별곡」, 「사미인곡」은 오늘날까지도 한국문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당쟁 속에서 서인 편에 섰던 정철은 동인의 영수 이발(李潑)과 불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고 정여립 사건 당시 위관(委官)을 맡으면서 조선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악역을 담당하게 된다. 4대사화보다 더 많은 천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된 기축옥사 이후 정철은 정적들로부터 ‘동인백정(東人白丁)’, ‘간철(姦澈)ㆍ독철(毒澈)’ 등의 칭호를 얻었고 어떤 사람들은 “정철과 함께 압록강 동쪽에 태어난 것이 부끄럽다”라고까지 비난하였다.
송강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사계 김장생(金長生)이 어느 날 그의 제자에게 “군은 정송강을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하고 묻자, 제자는 “제 부형이 일찍이 그는 청백ㆍ강직하고 속이 좁은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김장생은 “옳다. 그분이 청백하고 티가 없음을 스스로 믿고 안하무인이어서 마침내 온 세상이 미워하는 바 되었으니, 정자가 말씀하기를 ‘식견이 높으면 양(量)이 크다’고 하였는데 이분은 양이 작고 식견이 높지 못한 소치이다”라고 하였다. 이율곡 선생 역시 “정철은 충성스럽고 청렴하며 굳세고 개결(介潔)했으나, 술을 좋아하여 취하면 반드시 실수를 하니, 식자들이 부족하게 생각하였다”라고 평한 바 있다.
숨어 살 계획 이미 정해져
세모엔 장차 내 떠나가리라.
항상 원하기는 물고기 되어
깊은 물 밑에 잠기고 싶다.
이렇게 노래한 송강 정철의 참모습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내앞마을 © 이종원
이중환은 예안과 안동, 순흥, 예천 등 태백산과 소백산 아래의 지역을 ‘신이 가르쳐 준 복지’라 하여 전국 제일의 거주지로 꼽았다. 위는 안동 내앞마을 의성 김씨 종택.
[네이버 지식백과] 명옥헌에는 눈부신 배롱나무 꽃이 피고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1 : 살고 싶은 곳,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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