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초석: 교회신문 > 제 1264호 예수님은 영·혼·육의 구원자시다, 자유를 찾자! (갈5:1)
저는 제가 번제물로 드려질지라도 우리 성도들이 잘 살고,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가난한 걸 못 보겠습니다. 병든 걸 못 보겠습니다. 이것이 어디 제 소원뿐이겠습니까? 우리 주님의 소원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1:2).
예수님은 이 소원을 이루시려고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난을 청산하시려고 스스로 가난하게 되셨고, 우리를 병에서 해방하시려고 채찍에 맞으셨으며,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려고 징계를 받으시고, 죄악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시려고 찔리고 상함을 받고 죽기까지 하셨습니다(사53:5). 그래서 예수님만 믿으면 우리는 죄와 가난과 병과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이 모든 것을 청산하셨고, 대속(代贖)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福音)입니다. 이보다 기쁜 소식은 세상에 없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은 가난에서 해방되어 부유케 된다는 것이고, 병든 자에게 복음은 병에서 해방된다는 것이고, 죄인에게 복음은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된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것을 우리 예수님이 다 해결해주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우리가 죄와 병과 가난과 저주에서 해방되는 것을 방해하는 놈이 있습니다. 그놈은 우리가 잘 살고 건강하고 죄에서 해방되어 자유케 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기에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막으려고 난리를 칩니다. 그놈이란 바로 마귀와 그의 추종자 귀신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것들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하나님께 순종하사 십자가를 지셨기에 하나님이 그 이름 앞에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을 무릎 꿇게 하셨습니다(빌2:7~11). 예수의 이름이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 되신 것입니다. 이 이름 앞에 마귀와 귀신들도 쫓겨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당신의 이름으로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예수의 이름을 소유하는 것이니, 그 이름을 힘입어 귀신을 쫓으면 복과 건강과 행복과 자유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기도원 아랫마을에 저와 동갑인 장로님이 계십니다. 그분은 사과 농사를 비롯해서 여러 가지 농사를 짓고 계십니다. 우연히 그분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분이 그럽디다. 농사는 잡초와 해충과의 싸움이라고요. 잠시라도 방심하면 잡초가 무성하고, 해충이 다 먹어 치운다고요. 저는 그 장로님 말을 듣고 무릎을 ‘탁’ 쳤습니다. 농부는 잡초와 해충과 싸움의 연속이라면, 우리 믿는 자들은 지속적인 귀신과의 싸움이거든요. 농부가 잡초 뽑는 일과 해충 잡는 일에 나태하면 논밭이 온통 잡초로 무성하고, 해충들이 열매며 입이며 다 갉아먹어 성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됩니다.
동일합니다. 귀신은 잡초와 해충과 같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것들을 매일 쫓지 않으면 우리 영·혼·육이 온통 잡초, 곧 악하고 더러운 것으로 가득할 것이고, 귀신들로 가득해서 온전한 것이 하나도 없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귀신을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 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눅13:32)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누군가는 그럽디다. 왜 이 교회는 늘 귀신 얘기만 하냐고요. 왜 귀신을 매일 쫓아야 하냐고요? 그건 농부에게 왜 매일 잡초를 뽑냐, 왜 매일 소독하냐고 묻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농부가 매일 잡초를 뽑고 소독을 해야 실한 열매를 거두듯, 우리도 매일 귀신을 내쫓아야 우리 삶에 실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와 가난과 병과 저주로부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의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신종 율법주의가 율법을 들이대며 죄의식을 갖게 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것이 가족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고, 더러는 주의 종일 수도 있습니다.
맞습니다. 율법으로는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 그러나 지금은 율법 시대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율법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으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심은 다 지불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요구하는 모든 저주를 내가 다 지불했으니 자유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셨다는 것입니다 (마5:17). 그래서 예수 이후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저주나 정죄가 적용될 수 없습니다.
상사가 먼저 나가면서 내 밥값을 이미 계산했는데, 그것을 못 믿고 식당 앞을 서성거려서야 되겠습니까? 식민지에서 해방되었는데 아직 지하땅굴에서 숨어지내면 말이 됩니까? 남편이 죽었는데 아직도 그 남편에게 구속되어 자유하지 못하면 어리석다 하지 않겠습니까(롬7:1~4)? 종의 멍에를 벗겨놓았는데, 스스로 다시 착고를 차는 바보가 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우리 주님이 다 계산하셨고, 다 대속하셨습니다. 그러니 자유해도 됩니다. 그것을 믿어야 복이 내 것이 됩니다.
원숭이가 망고를 쥔 손을 놓으면 호리병에서 손을 빼어 자유할 수 있는데, 그것을 쥐고 있음으로 결국 사냥꾼에 잡히는 것 아닙니까? 손을 펴면 자유를 얻게 됩니다. 죄의식을 놓으면 자유하게 됩니다. 그러나 죄의식을 놓지 않으면 결국 귀신의 밥이 되고 맙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귀신은 어떻게든 우리를 올무에 씌우려고 하거든요. 그래서 과거의 죄를 들춰내며 죄의식을 갖게 합니다. ‘너 간음했잖아.’, ‘너 예전에 도적질했지?’. ‘너 거짓말한 것 다 알아.’ 이럽니다. 여러분, 귀신이 ‘너는 죄인이야.’ 하걸랑, ‘맞아, 나 죄인이야. 그런데 예수님이 내 죄를 다 청산하셨어. 까불지 마. 당장 꺼져.’라고 하면 됩니다. 당당하게 그것들을 예수 이름으로 쫓아버리면 됩니다. 예수 이름 앞에 쫓겨나가게 되어 있다니까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하십니다. 죄를 사함으로 귀신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병에서 자유하지요. 그걸 서기관들이 믿을 리가 없지요. 죄사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예수님은 더 눈에 보이는 일, 즉 중풍병자가 일어나 걸어가는 일을 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당신의 독생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여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9:12~13). 죄인인 우리, 병든 우리, 가난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오셨고, 예수님은 가난과 저주와 병을 가져다주는 마귀의 일을 제어하시려고 공생애 기간 중 귀신을 쫓아내시며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이름으로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소원을 이뤄드립시다. 농부가 잡초와 해충을 제거하듯, 예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우리 영·혼·육이 풍성하고 자유케 합시다. 할렐루야!
잡초 뽑듯 귀신 쫓아 우리 천국생활하자
율법시대는 가고 지금은 복음시대이다
♣ 은혜로운 찬양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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