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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1부를 모두 읽고 정리한 후 단 한 가지 든 생각은, ‘왜 내가 이제야 이 책을 읽었을까‘이다. 이러한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책은 나에게 큰 흥미와 깨달음을 가져다주었다.
사실 도서관에 2주일에 한 번씩 가는 나는 책 빌릴 타이밍을 놓쳐서 오늘, 그러니까 이번 주 금요일에 책을 빌리고 읽었다. 늦게 빌린 탓에 사실 1부밖에 읽지 못했다. 밤을 새워 이 책의 흐름만 살피는 것보다 1부라도 꼼꼼히, 자세히 이해하자는 마음을 먹고 책을 폈다. 일단 목차부터 살피는데 각 제목부터 쉽지 않았다. 많이 들어보긴 했지만, 정말 들어만 본 루터와 종교개혁,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프롤로그를 읽는데 도저히 정리하지 않고는 이 흐름을 이해할 수 없겠다 싶어서 메모장을 키고 정리하며 읽기 시작했다. (참고로 정리한 1부의 내용은 밑에 함께 올려놓도록 하겠다) 종교개혁의 시작부터, 루터라는 사람에 대해서, 그 당시 교황의 문제점에 대해서, 그 사회의 배경을 살피며 이야기는 전개되었다. 나에게 역사라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학교 과목으로는 참 별로였던 과목이었는데, 시험을 위한 단순 암기가 아니라, 이 책을 정리하며 이해하다 보니 너무나 재밌고, 특별히 그 역사 속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서 감사했다.
1부만 봐도 참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만, 그 중 내 기억에 가장 남는 부분은 면벌부, 그리고 그것을 비판했던 루터다. 먼저 면벌부에 관해 설명하자면, 돈을 내고 죄 사함을 받는 것이다. 말 그대로 죄로 인해 받아야 할 벌을 면해주는 수단인 것이다. 나도 처음에 잘 몰라서 네이버 사전에 쳐 보니,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금전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라고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돈 내고 구원받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성경을 근거로 옳은 것일까? 절대 아니다. 이신칭의, 즉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른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구원받은 사실은 다른 어떠한 수단으로 대체될 수 없다. 그것이 돈이든, 사람이든, 무엇이든 간에. 이것은 성경을 근거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개신교 교회에서도 이것을 강조하고, 사람의 노력과 재능, 의지가 아닌 오직 전적인 은혜라는 사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궁금하다면 꼭 로마서를 읽어보길 추천한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아닌 가톨릭교회는 면벌부를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가톨릭교회는 면벌부를 제시했을까? 우리는 그 당시 시대를 살펴보면 면벌부를 제시한 이유에 대해 쉽게 알 수 있다. 면벌부는 교황청의 재정 문제의 해결법 중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교황청은 당시 지출이 너무 많아 자주 파산 위기에 처했고, 이러한 지출은 우리의 예상대로 옳고 선한 곳이 아니라, 교황의 사치, 화려한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되었다. 사람들의 돈을 걷어 교황의 만족, 교황의 업적을 쌓은 것이다. 이 외에도 성직자를 돈으로 매매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수입을 늘려갔다. 결국 이것들은 진리를 왜곡하게 되었다. 대체할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리를, 비교할 수 없는 돈과 바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고 정리하면서 사실 너무나 비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를 돌아보기도 했다. ‘나는 예수님과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나는 예수님의 자리에 무엇을 가져다 놓았는가?’ 또한 이 시대도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면, 그들의 고백과 삶은 일치하지 않는다. 여전히 돈, 명예, 권력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들을 자기도 모르게 열심히, 정말 쉬지 않고 쫓아가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예수님의 자리에 다른 것을 가져다 놓는 일은 우상숭배와 같다. 우상은 말 그대로 우상일 뿐이다. 그것이 우리를 죄에서 건진다거나,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없고, 그것들을 통해 구원을 얻을 리 없다. 이 글을 읽으며 나의 면벌부는 무엇인지 고민해 보길 바란다. 대체할 수 없는 예수님을 나는 무엇으로 대체하고 있는가?
면벌부와 같은 말도 안 되는 일들이 그 당시에도,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많은 종교 개혁가가 나섰다. 그중 하나가 바로 루터이다. 루터만 종교개혁을 위해 힘쓴 사람이 아닌, 역사 속에서는 꾸준히 잘못된 문제를 이야기하고 비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루터는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면벌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고, 면벌부 구매자에게 벌을 용서해 주는 행동이 복음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또한 면벌부를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도 안 되는 일로, 신자들이 자신의 모든 재산을 바치고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렇게 1517년 10월 31일 이후, 루터의 96개 조 논제가 여러 도시에 전파되며, 루터는 사람들의 큰 반응과 지지를 얻게 된다. 루터의 96개 조 논제에 관해 설명하자면, 주제와 핵심은 성경적 참회의 의미이고, 이 논제를 통해 고해성사가 아닌 신자들이 참회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논제를 통해 또한 알 수 있는 것은, 루터는 행위가 아니라 전 생애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참회(회개)‘라고 보았고, 면벌부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 논제가 종교개혁의 시작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논제에 대해 교황청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교황청은 이 상황에 교회 스스로 면벌부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하길 바랐던 루터의 기대와는 달리, 스스로 성찰하기보다 우선 루터를 단속하고 막아서 사람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줄이는데 조급했다. 가톨릭교회의 위협이 갈수록 거세졌다. 루터는 사실상 그것들을 혼자 견뎌야 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위협을 피해 도피하기보다, 글을 쓰고 설교와 강의를 계속하며 적극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며 돌파해 갔다.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 후에 잉골슈타트 대학의 유명한 학자이자 루터와 친분도 있던 에크라는 사람이 루터를 이단이라고 고소하며. 교황청으로부터 그의 모든 글과 설교는 나아갈 길이 막히게 되었다. 그의 저서, 그의 글, 모두 불태워지고 말았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에게 얼마나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에, 얼마나 큰 확신이 있었기에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일까? 또 왜 사람들은 루터의 신호에 더욱 크게 반응할 수 있었던 것일까? 사실 책에서는 당시 독일 사회의 종교적 모순,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루터의 신학적 발견과 통찰, 또한 그것을 지지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 이루게 할 동력, 즉, 인문주의자들과 시민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 그 당시 인쇄술의 효율적인 활용, 작센 선제후(루터를 보호하며 종교개혁을 지원한 독일의 군주) 의 보호와 같은 요소들이 가능하게 했다고 말하고 있다. 즉 책에서 말하는 결론은, 루터를 종교개혁을 위한 핵심 인물로 이끈 것이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읽으며 그 순간마다 ‘하나님의 일하심’이 끊임없이 지속되었고, 이를 통해 종교개혁 또한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싶다. 루터는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한 걸음 나아갈 때마다 도우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또한 그 하나님께서 이 상황 가운데서 멈추지 않고 꾸준히 일하고 계심을 믿었다. 계속해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경고하고, 위협하는 상황에서 그 누가 두렵지 않을 수 있을까? 눈앞에서 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는데, 어떻게 도망치고 싶지 않을 수 있을까? 루터도 인간이기에, 두려움이 가득했을 것이고, 더 이상 싸우지 않고 싶었을 것이고, 포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내용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종교개혁은 루터 한 사람의 위대함이 이루어낸 결과가 아닌, 여러 앞선 사람들의 큰 희생과, 그와 함께한 개혁가들과, 지지했던 시민들과 마지막으로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결과이다.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었던 루터는 용기를 내어 문제점을 제기하고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 이로써 종교개혁의 첫 촛불이 붙여지게 되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교황청과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은 편한 현실에 안주했다. 돈이면 다 되니까, 돈이 해결해 주니까, 그저 돈을 바라보고, 자신의 권력을 통해 편하게 살아갔다. 어쩌면 루터도 그 길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잘못된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그리고 그것과 맞서 싸웠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마 7:13-14)
대다수가 선택하는 크고 넓은 문이 더 편하고 어쩌면 안전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셨던 그 십자가의 길과 같이 좁고 협착하다. 심지어 찾는 사람도 많이 없다. 우리는 두 가지 문 앞에 서 있다. 당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저 편하고 안전해 보이는 길을 걸어가며,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고, 잘못된 현실에 침묵할 것인가? 결국 좁고 협착한 이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원한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길을 선택한 나 또한 너무나 두렵고 무섭다. 어쩌면 가끔 너무나 포기하고 싶고, 어떨 때는 나의 시선이 크고 넓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을 향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것을 이겨낼 힘은, 나를 끝까지 인도하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나온다. 그분이 나를 붙드시고, 그분이 변함없이, 쉬지 않고 나를 위해 일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아갈 수 있다. 가장 큰 것은, 그 십자가를 바라볼 때, 예수님께서 묵묵히 걸어가신 순종의 길을 기억할 때다. 예수님께서 죽음이라는 것을 감당하시면서까지 나를 구원하셨으니, 예수님의 제자인 나도 예수님을 따라 이 길을 걸어가야 함을 기억할 때. 그때 비로소 다시 힘을 내어 걸어갈 수 있다. 불편한 진실에 마주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해 소리를 외쳤던 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이 시대에 그 한 사람이 되길 간절히 기도한다. 이 글을 읽게 되는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마주하고, 함께 소리치길 간절히 소망한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나를 위해, 당신을 위해,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니, 용기로 반응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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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정리(혼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한 거라서 흐름이 안 맞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
: 루터 한 사람의 위대함이 이루어낸 결과가 아닌, 여러 앞선 사람들의 커다란 희생이 있었고, 루터와 함께 협력한 동료 개혁가들과 그 당시 그들의 의견에 공감하고 동의했던 평민들 또한 함께했다. 즉, 여러 시대에 걸쳐 많은 사람들이 함께 힘을 합쳐 성취한 결실이었다. 그 안에서 항상 조화롭지 않았다. 때로는 작지 않은 갈등을 드러내며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방향이 조정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역사가는 그 빛과 그늘을 낱낱이 기록하고 평가할 뿐 아니라, 루터 광장에서 볼 수 없는 수많은 익명의 개혁가들까지 조명해야 할 책무를 지녔다고 본다. 역사는 보고 싶은 것만을 드러내 자부심을 갖게 하기보다는 성찰을 위한 거울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신앙의 본질을 회복했으며, 말씀 중심의 신앙이었다. 또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가르침을 선명하게 드러내었다. “오직 성경”, “이신칭의”
가장 큰 일 : 성경을 번역해 일반 국민에게 쥐어줌.
반대로, 루터에 대한 극단적인 평가?
16세기 연구자 하인츠 쉴링 - “루터는 초월적인 영웅이 아니라, 자기 시대의 문제를 지적했으나 극복하지는 못한 역사적 인물.”
프랑스의 위대한 역사가 루시앵 페브르 - “루터의 개혁은 성공하지 못했으며, 후반기에 루터는 자기 세계 속에 틀어박혔다.”
특히 세속사에서는 더욱 부정적인 평가로 기울고 있음. 왜? 루터가 문명사의 발전 방향을 거슬러 행동했다고 보기 때문.
종교개혁 추진 과정에서 루터는 세속 권력의 결정적인 도움을 받음.
물론 루터의 개인 신앙과 의지가 기초가 되었지만, 교황과 황제에게까지 맞서 저항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기반은 세속 권력의 지지였다.
1517년 10월 31일의 95개조 논제 게시 사건이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흐름을 촉발시킨 결정적인 계기. (그러나 중세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모순을 고발하고 개혁을 이루기 위한 움직임은 14세기 전역에서 전개되어옴.) 또한 이는 가톨릭교회에 대한 루터의 첫 번째 저항이었음.
*그렇다면, 진짜 루터는 96개조 논제를 제시했는가? (1950년대 이후 에르빈 이절로의 논제 게시의 가능성을 부정함으로 긴 논쟁을 촉발시킴. / 에르빈 이절로 - 종교개혁의 상징에 결정적인 흠집을 낸 인물. 가톨릭 교회 사학자.)
: 루터는 정확한 언급을 하지 않았음. 그러나, 1517년에 면벌부 설교자들이 부당한 호객행위를 하기에, 루터가 직접 나서서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말라고 설득했으며, 교황이 오류를 바로잡아줄 것이라 기대하며 두 통의 서신을 작성해 루터가 속한 교구의 책임자에게 보냈다. 그렇지만 루터의 간청은 무시되었고, 그 후 95개조 논제를 출판했다.
-> 결론은 논제 게시의 유일한 증인인 루터의 기록들과 논제를 확산시키는 데 관여했던 쇼이를의 증언을 신뢰한다면, 10월 31일에 논제가 게시 되었으리라고 추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루터가 만성절 전나라, 혹은 그 이후에 논제를 게시하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1517년 10월 31일은 루터가 과감하게 논제를 마인츠 대주교 알프레히트에게 발송하여 면벌부 문제에 대한 개선을 요청한 날이기에 종교개혁 기념일에 걸맞은 역사적 의미가 충분하다.
루터의 글이 독일 사회에서 예상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키며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
: 그만큼 종교적 모순을 절실하게 겪고 있었기 때문. (중세 말에 교회 부패를 유발한 중요 원인은 교황청의 재정 문제였다. 지출이 너무 많아 빈번하게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교황은 성직 매매를 비롯하여 여러 돈벌이를 고안하여 꾸준히 수입을 올렸다. 또한 독일의 각 주교구에 분할된 부담은 귀족부터 일반 평민들에게 전가되었고, 이로 인해 사람들은 억압적인 세금과 권력 남용 등 약탈적 관행에 대해 불평이 많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면벌부를 들 수 있다. 독일인들 사이에는 그들이 구매한 면벌부나 지불한 교회세가 교황의 사치, 혹은 화려한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된다는 사실이 부각되면서 큰 파장을 낳았다.)
-> 결론은 루터 뿐만 아니라 앞선 개혁가들 또한 면벌부에 대해 비판했기에, 교회와 교황에게 억눌려 있던 독일 민중의 축적된 불만과 폐해가 루터의 신호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하여 종교개혁이라는 거대한 물결을 일으켰던 것.
*면벌부?
: 중세에 로마 가톨릭교회가 금전이나 재물을 바친 사람에게 그 죄를 면한다는 뜻으로 발행하던 증서. 종교개혁 당시 부패한 교회의 상징. 면벌부의 구매를 통해 죄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인식을 낳았고, 참회(회개)조차도 필수적이지 않았기에 신자들은 죄를 짓는 것을 가볍게 생각하게 됨. -> 이는 결국 예수의 죽음을 통한 죄 사함이라는 핵심 교리를 망각하게 만들었고, 예수님의 자리를 면벌부가 대신하게 된 것.
루터는 이러한 면벌부를 비판했다.
-> 여러 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면벌부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고, 면벌부 구매자에게 벌를 사면해주는 관행이 복음의 본질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터무니없는 일로 신자들이 생계 수단을 바쳐 궁핍해지는 것에 대해서도 분노함.
95개조 논제의 내용
주제와 핵심 : 성경적 참회의 의미. (신자들이 참회의 삶을 사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함.)
루터는 행위가 아니라 전 생애 동안 이루어지는 것이 ’참회(회개)‘라고 보았고, 면벌부가 죄를 사해주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러나, 논제의 내용에서 종교개혁과 관련된 의지를 드러내는 부분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루터의 논제는 출판 중심지에서 라틴어판 95개조 논제가 인쇄물로 확산되면서 타 도시에서 루터의 논제를 일찍 접하고 공감했던 인문주의자들과 인쇄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그 내용을 전파하는 데 동참했다.
*물론 루터의 신학적 발견과 통찰은 종교개혁을 가능하게 만든 중요한 토대였지만, 한 시대를 뒤흔들만한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을 지지하고 끝까지 밀고 나가 끝내 이룰 동력, 즉, 인문주의자들과 만중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 인쇄술의 효율적인 활용, 작센 선제후(루터를 보호하며 종교개혁을 지원한 독일의 군주)의 보호 등은 루터로서는 미리 예상할 수 없던 요소들이었다.
-> 즉 결론은, 루터를 종교개혁을 위한 핵심 인물로 이끌어 낸 것은 결론적으로 그 시대의 요청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황청의 대응은?
: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루터를 잠잠케 하라고 전달했고, 교회 스스로 면벌부의 문제를 인식하고 조속히 필요한 조치를 취하길 바랐던 루터의 기대와는 달리, 스스로 성찰하기보다 우선 루터를 단속하고 막아서 파장을 최소화하는 데 급급했다.
-> 교회의 위협이 갈수록 거세졌고, 루터는 사실상 그것들을 혼자 견뎌야 했지만 그 상황에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거나 도피처를 찾기보다는, 글을 쓰고, 설교와 강의를 계속하며 적극적으로 상황을 돌파해갔다.
라이프치히 논쟁
: 라이프치히에서 전개된 공개 논쟁, 가톨릭교회와 루터가 벌인 신학 논쟁의 절정이었다.
-> 잉골슈타트 대학의 유명한 학자이자 루터와 친분도 있던 에크가 1518년 3월, 루터의 95개조 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한 이후, 루터의 동료였던 비텐베르크의 신학부 학장 칼슈타트가 루터를 대신하여 반박했고, 에크는 8월 다시 칼슈타드를 재판박했으며, 결국 공개 토론까지 가게 되었다.
*토론 내용
: 자유의지, 교황의 수위권(즉 교황이 가진 권한), 고해, 연옥, 면벌부, 사제의 사면권 등에 대해 토론함.
에크 - 자유의지 옹호, 교황의 가장 큰 권리와 교황이 신앙과 도덕에 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선언할 때 오류가 없음을 주장, 루터에게 이단 혐의를 공개적으로 제기함.
칼슈타트 - 자유의지 부정.
루터 -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임을 부정, 성경의 권위가 다른 무엇보다 앞선다는 것 주장.
라이프치히 논쟁 이후 에크는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에게 루터의 이단 혐의를 고소하는 서신을 썼고, 루터를 이단으로 꾸준히 정죄함. 에크로 인해 교황청은 루터에게 설교는 물론 글을 쓰는 것도 허용하지 않았고, 누구든 루터의 서적을 읽거나 출판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음.
여러 도시 내에서 루터의 서적을 불태웠음. 그런데 루터 또한 자신의 서적이 전국에서 불태워지고 있는 것과 동일하게 비텐베르크의 교수들과 학생들,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교황의 파문 교서, 교회 법령, 에크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의 책을 불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