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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무등산 자락에는 조선 중엽 권력 다툼의 와중에 물러난 선비들이 세운 소쇄원, 송강정, 식영정, 면앙정 등 수많은 정자와 원림이 남아있다. 특히 ‘그림자가 쉬고 있는 정자’라는 뜻의 식영정은 기대승, 송순, 김덕령, 송익필, 김성원, 고경명 등 우리에게 익숙한 시인묵객이나 의병장들이 스쳐 지나간 장소이다. 오늘날 윤선도, 박인로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인으로 손꼽히는 송강 정철이 성산별곡을 지은 곳이기도 하다.
식영정
전라남도 담양군에 위치한 식영정
정철은 또 담양에 있는 송강정에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 청사에 남을 작품을 썼는데 호탕하고도 원숙한 시풍으로 가사문학의 최고봉을 일궈냈다. 〈구운몽〉의 저자 김만중은 《서포만필》에서 ‘예로부터 좌해(左海. 조선의 별칭)의 참된 문장은 오직 이 세 편(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뿐’이라고 칭송해 마지않았다.
이런 문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평생 정계에서 부침을 거듭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그는 할 말이 있으면 반드시 입 밖에 냈고, 사람의 허물을 보면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으며, 화를 산처럼 입더라도 앞장서 싸우기를 불사했던 인물이었다. 그 때문에 정적이었던 동인들은 그를 ‘동인백정·간철·독철’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반면 정치적 동반자였던 서인들은 그를 율곡이나 성혼에 버금가는 인물로 대접했다.
고서면 송강정
전남 담양군 고서면 원강리 송강전
그 동안 정철은 서인의 행동대장으로서 동인과의 불화를 조장했고, 정여립의 난으로 비롯된 기축옥사를 관장함으로써 선혈로 얼룩진 당쟁의 시대를 연 인물로 규정되어 왔다. 하지만 최근 기축옥사는 동인의 약진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술책으로 정철은 이용만 당했을 뿐이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으며, 그의 가사 작품은 임금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에서 급격하게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권력지향주의자라는 비판과 조선 최고의 시인이라는 추앙을 받으며 평생 조정과 유배지를 오갔던 정철, 오늘날에도 그의 위상은 한 줄기로 정립되지 못하고 오리무중에 싸여 있다.
행복과 불행이 교차되었던 어린 시절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정철은 한성부 종로방 장의동에서 1536년(중종 31년) 12월 6일 돈녕부 판관 정유침의 네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칩암거사(蟄菴居士)이다.
큰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고, 작은누이는 월산대군의 손자인 계림군의 부인이었으므로 어린 시절 궁궐에 수시로 드나들면서 훗날 명종이 된 경원대군과 친해졌다. 왕실과 가까운 반가의 자제로서 궁궐 안팎에서 사랑을 흠뻑 받았던 그로서는 실로 부족함이 없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사화의 정국이 그의 행복을 송두리째 앗아가 버렸다.
1545년(명종 즉위년) 문정왕후의 오빠인 윤원형 일파가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일파에게 모반 혐의를 뒤집어씌워 제거한 을사사화일어났다. 이때 정철의 매형 계림군이 윤임의 추대를 받았다는 이유로 수배되었는데, 함경도 안변으로 도망친 그를 찾기 위해 사온령이었던 아버지 정유침과 이조 정랑이었던 맏형 장자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얼마 후 계림군이 잡혀와 능지처사를 당했고, 정유침은 함경도 정평으로, 정자는 전남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얼마 후 정유침은 귀양에서 풀려났지만 1546년(명종 2년) 가을 문정왕후와 소윤을 비난하는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정유침은 경상도 영일로 유배되었고, 정자는 경원으로 이배되던 도중 장독이 도져 3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둘째 형 정소는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처가가 있는 순천으로 내려갔다. 당시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던 정철은 권력의 비정함을 체감하면서도 언젠가 반드시 권토중래하리라 다짐했다. 훗날 그의 권력에 대한 집착과 정적들에 대한 가혹한 처결은 이때의 고통스런 경험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꿈길의 인연, 스승 김윤제를 만나다
1551년(명종 6년) 순회세자가 태어나자 대사령으로 풀려난 정유침은 가족들과 함께 담양의 창평으로 이사했다. 이때 정철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던 둘째형 정소를 만나러 순천으로 가다가 성산 근처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근처에서 운명처럼 스승 김윤제를 만난다. 일찍이 출사한 이후 13개 고을의 수령을 지냈던 김윤제는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나주 목사직에서 물러난 다음 성산 맞은편 구릉에 환벽당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살고 있었다. 그의 제자로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고경명과 김덕령, 김성원 등이 손꼽힌다.
어느 날 한여름이라 그가 졸음에 겨워 환벽당에서 설핏 잠이 들었는데 꿈에 용소에서 한 마리 용이 놀고 있었다. 잠이 깨었는데도 꿈이 너무나 생생하여 냇가에 내려가 보니 한 소년이 멱을 감고 있었다. 그가 바로 정철이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끝에 정철의 출신과 자질을 알게 된 김윤제는 그의 순천행을 만류하고 환벽당에 머물게 했다.
환벽당
광주광역시 북구에 위치한 정자로, 김윤제가 낙향하여 육영에 힘쓴 곳이다.
사화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진 뒤 학문에서 멀어져 있던 정철은 그때부터 김윤제의 사촌조카 김성원과 함께 김윤제 문하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김윤제는 정철이 17세가 되자 김윤제의 사위인 유강항의 딸과 결혼시킨 다음 관계에 진출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이런 아름다운 인연을 담은 환벽당은 현재 정철의 셋째아들 정근병의 후손이 관리하고 있다.
얼마 후 김윤제의 후원으로 대학자 고봉 기대승의 문하에 들어간 정철은 근사록을 배웠고, 선비가 지녀야 할 심성과 도리를 익혔다. 이때 정철은 어떤 글이라도 세 번만 읽으면 바로 암송하여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기대승이 세상을 떠난 뒤 그는 김인후의 문하에 들어가 공부했고, 21세 때부터는 양응정을 스승으로 모셨다. 또 시인으로 유명했던 임억령이 창평에 내려오자 찾아가서 시를 배웠다. 그리하여 정철은 25세 때 김성원이 서하당에서 보낸 풍류생활을 그린 가사 〈성산별곡〉을 지었다. 당시 그는 성산 앞을 남북으로 흐르는 죽계천의 다른 이름 송강(松江)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가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을 사귀게 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명종의 청탁을 외면하다
26세 때인 1561년(명종 16년) 정철은 진사시에 일등 5위로 급제했고, 이듬해에는 별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이때 명종은 소꿉동무의 등과를 축하하며 성균관 전적 겸 지제교에 임명했고, 곧 사헌부 지평으로 승진시켰다.
당시 사촌형인 경양군이 처가의 재산을 탈취할 목적으로 처조카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자 명종은 정철에게 관대한 처분을 부탁했다. 하지만 정철은 법률에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면서 맹렬한 어조로 경양군 부자를 탄핵하여 사형에 이르게 했다. 그러자 분개한 명종은 그를 지방으로 좌천시켰다. 행형에 있어 임금의 부탁조차 냉정하게 외면했던 이 사건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훗날 권력지향주의자로 지탄받았던 정철의 허물을 희석시키는 주요 근거로 작용하게 된다.
정철은 그 후 정랑, 성균관 직강, 사간원 헌납을 거쳐 형조, 예조, 공조, 병조의 좌랑, 홍문관 수찬이 되었다가 동갑내기였던 율곡 이이와 함께 독서당에 들어갔다. 이는 사가독서라 하여 유능한 문신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 전념하게 하는 제도였다. 그가 당대의 준재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준다.
선조가 등극한 1568년(선조 1년)에 그는 이조 좌랑이 되었고, 홍문관 수찬, 교리 등을 지내면서 비교적 평탄한 관직 생활을 영위했다. 그 무렵 조선의 정계는 안동에서 후진을 양성하던 퇴계 이황과 조정에 있던 율곡 이이를 추종하는 신료들로 분열되고 있었다. 이때 정철은 선비를 적대시하던 대사헌 김개와 홍담을 조정에서 축출했다. 당시 그가 얼마나 다혈질적이고 직선적이었던지 선조로부터 다음과 같은 평가를 받았다.
‘정철은 그 마음이 바르고 그 행실이 모나지만 그 혀가 곧기 때문에 시속에 용납되지 못하고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그 직책을 맡아 충직하며 맑고 절개 있으며 떳떳하게 몸이 닳도록 행하니 초목도 그 이름을 알 것이다. 진실로 이른바 봉황의 대열에 드는 한 마리 수리요, 전당 위의 사나운 범이다.’
정철은 그렇듯 청렴하고 용맹스러웠지만 지독한 음주습관 때문에 관료사회에서 내내 손가락질을 받았다. 대낮에도 만취한 탓에 사모가 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고, 임금이 불러도 술이 깨지 않아 등청하지 못한 적도 있었다. 그 때문에 선조가 은잔을 하사하며 ‘하루에 이 잔으로 한 잔씩만 마시라.’고 명하자 술잔을 사발만큼 크게 늘려서 마시기도 했다. 그가 남긴 장진주사’는 이백의 ‘장진주(將進酒)'에 비견될 정도로 멋드러진 작품이지만 현실 속에서는 결코 취선(醉仙)이 될 수 없었다.
거침없는 성정으로 세상을 노래하다
송강문집
송강 정철의 시문집
정철은 1571년(선조 4년)에 부친상, 3년 뒤인 1574년(선조 7년) 모친상을 당하여 조정을 떠나 경기도 고양군 신원리에서 시묘살이를 했다. 1575년(선조 8년) 다시 조정으로 돌아온 뒤 내자시정, 사인, 직제학으로 일했다.
송강정철시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에 있는 송강 정철의 시비
그 무렵 조정에서 이조 정랑 임명 문제로 심의겸과 김효원이 다투면서 동서 분당이 가속화되었다. 그때 정철은 심의겸 편에 서면서 서인으로 인정되었는데 정사의 분열을 중재하려던 율곡 이이에게 불만을 품고 벼슬을 내던진 다음 담양으로 돌아갔다. 1578년(선조 11년) 정월, 조정에 복귀한 정철은 장악원정을 거쳐 동부승지와 춘추관 수찬관 등을 지냈다. 그 무렵 서인과 동인의 분쟁은 더욱 격렬해져서 율곡이 조정에 나섰지만 소용이 없었다.
1580년(선조 13년) 1월 강원도 관찰사에 제수된 정철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을 두루 여행하며 관동별곡을 썼고, 백성들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가 16수를 지어 가사문학에 큰 자취를 남긴다. 현지에 부임한 뒤에는 해묵은 폐단을 혁파하고 방치되어 있던 단종의 묘를 수축했으며 지방관을 독려하기 위해 〈고을의 관리들을 깨우쳐 인도하는 글〉을 짓는 등 선정을 베풀었지만, 실제로는 백성들을 가혹하게 다루었고 일처리가 공평하지 못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1년 뒤 그가 전라 감사로 부임하자 그의 나쁜 평판 때문에 전라 도사였던 조헌이 병을 핑계로 사직을 청했다. 정철이 만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율곡과 성혼에게 중재를 청하여 간신히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다. 조헌 역시 정철과 마찬가지로 성정이 과격한 인물이라 마음이 통했던지 곧 친해졌다. 이때 정철은 도내의 세액과 부역의 실상을 조사하고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정철(鄭澈)
조선 전기 문신 겸 시인
그 후 정철은 도승지, 예조참판, 함경도 감사를 거쳐 48세에 예조 판서가 되었다. 1584년(선조 17년) 평생 지기였던 율곡 이이가 세상을 떠나자 친히 제문을 짓고 영구를 호송하며 애통해 했다. 그해 대사헌으로 복무하면서 임금으로부터 총마(寵馬)를 하사받아 타고 다녔으므로 총마어사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585년(선조 18년) 4월 파당을 만들어 정사를 그르쳤다는 혐의로 양사의 탄핵을 받은 그는 담양으로 내려가 4년여를 머물면서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지었다. 이 가사 작품에서 그는 임금에 대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산천에 대한 경이로움, 은둔생황에 대한 동경을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함으로써 한국 문학의 한 획을 그었다.
기축옥사, 피바람의 중심에 서다
1589년(선조 22년) 8월 정철은 장남 정기의 죽음으로 인해 선산이 있는 고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해 10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그는 송익필의 권유에 따라 입궐을 서둘렀다. 이때 친구 한 명이 극구 만류했지만 그는 이렇게 말하며 길을 떠났다.
“역적이 군부를 모해하려 하는데, 소위 중신이라는 자가 가까운 궐문 밖에 있으면서 망설이고만 앉아 있을 수는 없다.” 당시 선조는 좌의정 이산해, 우의정 정언신 등을 위관으로 삼았다가 정철이 정언신이 정여립의 일가이므로 수사를 맡길 수 없다는 차자(箚子. 임금에게 올리는 간단한 상소문)를 올리자 그해 11월 정언신의 벼슬을 빼앗아 정철에게 제수하고 위관으로 삼았다. 그때부터 정철은 동인들의 죄상을 맹렬하게 추궁하면서 정여립과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던 정언신에게 유배형을 내리는 등 3년여에 걸쳐 역모 사건을 주관했다. 이 사건이 기축년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기축옥사라 한다.
당시 정철은 선홍복의 집에서 발견했다는 정여립과 이발의 편지를 근거로 동인의 영수인 이발의 가문을 멸문시켰다. 하지만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 증거들은 정철과 송익필이 선홍복을 회유하면서 꾸며낸 것이라고 한다. 그는 또 깊은 학문으로 이름 높았던 유학자 정개청을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고 절의를 배척했다는 혐의로 체포하여 고문한 뒤 평안도로 귀양 보냈다. 당시 정개청은 퇴계와 버금가는 학자로 칭송이 자자했던 인물이었다.
한편, 정여립의 난에 연루된 사람들은 국문을 받을 때마다 길삼봉이 상장(上將)이요, 정여립은 차장(次將)이라고 진술했다. 길삼봉은 가공의 인물로 홍길동의 길 자와 정도전의 호인 삼봉을 합쳐 만들어낸 이름이었다. 한데 얼마 후 조식 문하의 명유 최영경이 길삼봉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고, 국문을 당한 끝에 옥사하고 만다.
그렇듯 기축옥사로 인해 동인의 영수 이발을 비롯하여 정언신, 최영경, 정개청 등 1천여 명에 달하는 동인 계열 인사들이 희생되었다. 하지만 이 사건은 현재까지도 모반의 계획이나 증거에 모호한 점이 많아 선조와 서인들의 조작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 당시 정철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동인들은 이조판서로 조정에 복귀한 성혼과 그를 한데 묶어 ‘흉혼독철(凶渾毒澈)’이라 불렀다.
기축옥사를 통해 정적들을 일소한 정철은 1590년(선조 23년) 2월 좌의정에 제수되었고 인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 이어서 종계변무를 해결하면서 3등 광국공신, 정여립의 난을 바로잡은 공으로 2등 평난공신에 녹훈되었다. 그와 같은 약진에도 불구하고 정철은 특유의 거센 성정 탓에 고난을 자초하게 된다.
기축옥사 직후 정철은 호남의 유생 정암수를 사주하여 이산해와 유성룡을 제거하려 했다. 그러자 선조는 오히려 이산해와 유성룡을 불러 위로한 다음 정암수를 비롯한 10여 명을 엄벌에 처한 다음, 옥사를 처결하고 있던 정철을 강계로 귀양 보냈다가 풀어주었다. 1591년(선조 24년) 조정에서 세자 책봉 문제가 논의에 오르자 정철은 이산해, 유성룡과 함께 후사를 의논했다. 한데 이산해가 약속 시간에 나오지 않자 그는 유성룡과 함께 선조를 알현했다. 그때 유성룡이 주청을 망설이자 홀로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주청했다. 그런데 신성군을 마음에 두고 있던 선조는 자신이 마흔이 채 되지 않았는데 세자를 책봉하자는 것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며 그를 힐난했다.
이를 계기로 와해 직전에 있던 동인들이 정철에 대하여 일대 공세를 펼쳤다. 유생 안덕인 등 5명이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주색에 빠져 국정을 그르친 그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공격했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도 정철이 붕당을 지어 조정을 멋대로 움직이고 반노로 지목된 송익필·송한필 형제와 어울리며 주색에 빠져 명분과 체통을 잃었다며 파직을 청했다. 그러자 선조는 기다렸다는 듯 그를 파직하고 명천으로 귀양 보냈다가 사흘 만에 경상남도 진주로 이배했다. 사흘 뒤 그는 평안북도 강계로 이배되었다. 당시 정철을 극도로 미워했던 선조는 그를 위리안치 형에 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철은 성질이 교활하고 간독하여 배소에 가서 잡인과 서로 통하여 또 어떤 큰 죄를 저지를지 알 수 없으니 위리를 엄하게 해야 할 것이다.”
위리안치란 배소에서 죄수가 하늘도 보지 못하고 새나 짐승조차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 울타리를 치고 창 하나만 내어 가두는 중형이었다. 그때부터 정철은 앞날을 기약할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가난과 고독 속에 세상을 뜨다
1년 뒤인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궁궐을 버리고 다급하게 개성으로 도망친 선조는 그해 5월 현지의 유생들이 정철을 추천하자 유배지에 사람을 보내 “충효대절이 지극한 경이여, 되도록 빨리 내가 있는 곳으로 달려오라.”라고 부르짖었다. 불과 1년 전 정철을 간신의 전형으로 규정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천재일우의 기회를 얻은 정철은 재빨리 강계를 출발하여 그 무렵 평양에 머물고 있던 선조를 찾아갔다. 그때부터 정철은 박천, 가산, 의주까지 임금을 호종했고, 9월에는 양호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 의병을 모집했다. 이듬해 5월에는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11월에 귀국했다. 이윽고 왜군이 남쪽에 웅거하면서 전란이 소강상태에 접어들자 조정에서는 다시 당쟁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때부터 재차 동인의 공격이 재개되자 지친 정철은 벼슬을 내놓고 강화 송정촌에 칩거했다.
평생 거친 성정을 발휘하면서 정적들과 이전투구를 벌였지만 청렴결백했던 그는 만년에 가난에 시달렸다. 끼니조차 잇기 힘들게 되자 교분이 두터웠던 이희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결국 1593년(선조 26년) 12월 18일, 정철은 58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접었다.
외로운 나그네 신세 해조차 저무는데,
남녘에서는 아직도 왜적 물리치지 못했네.
천 리 밖 서신은 어느 날에나 오려는지,
오경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힌 건가.
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기 어렵고
시름은 실오라기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원님께서 보낸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
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를 끼고 마시네.
정철이 생애 마지막으로 쓴 시 〈섣달 초엿새 날 밤에 앉아서〉에서는 궁핍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늙은 대신의 충심이 절절히 배어있다. 하지만 사헌부에서는 선조에게 정철의 죽음을 알리며 삭탈관직을 청했다.
“정철은 성질이 걍팍하고 시기심이 많아 질투를 일삼았고, 사소한 사감에도 반드시 모함으로 보복하였으며, 사갈 같은 성질로 귀역 같은 음모를 품었으니, 독기가 모여서 태어난 것이며, 이에 오직 사람을 상하게 하고 해치는 것을 일삼았다. 또한 정철은 최영경에게 색성소인(索性小人. 진짜 소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음을 분하게 여겨 그를 길삼봉으로 자작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고, 저의 당이 아닌 사람은 사소한 감정에도 쳐서 없애려고 했으므로 그 해가 얼마나 많은지 알 수 없다.”
이에 따라 선조는 1594년(선조 27년) 6월 정철의 관작을 회수했다. 이후 1609년(광해군 1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아들 정종명이 부친의 원통함을 상소하여 신원되었고, 1624년(인조 2년)에 관작이 복구되었다. 1685년(숙종 11년)에는 ‘문청(文淸)’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하지만 1691년(숙종 17년)에 다시 관작이 삭탈되었다가, 1694년(숙종 20년)에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다. 그렇듯 평생 서인의 호랑이였던 정철의 운명은 죽은 뒤에도 당쟁의 거센 풍랑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