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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거래혜] 8.의혹의 군웅대회(群雄大會)
"허허, 사파의 신진 고수 고독랑과 그 수하의 소년, 그리고 북해빙궁의 소궁주가 여길
...?"
"예, 대영반 나리."
서서히 은발(銀髮)로 물들어가고 있는 머리칼을 한, 장부다운 기개를 풍기고 있는 노
인(老人). 이가 바로 대명제국의 대영반, 이세혁이다.
"알겠네. 이 일은 내가 공주마마께 보고할 테니... 이만 물러가 보게나."
"존명!"
접수관이 비무장 귀빈석에서 빠져나가고... 이세혁의 얼굴이 심각하게 물든다.
'고독랑이라... 내 비록 무림인(武林人)은 아니지만, 그 이름이라면 표연공주(漂燕公
主)님께서 그렇게 이야기해 주시던 사람이 아닌가...'
표연공주는 만력제의 두 딸 중 막내딸로, 본명은 주은비(朱殷備)며, 선천적으로 몸이
약해 물 맑고 공기 맑은 항주(杭州)에서 요양 생활을 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8개월 전, 한 불명의 의원(醫員)으로부터 처방을 받은 후, 체력이 붙었을 뿐만
아니라, 10년 넘게 달고 다니던 병이란 병은 씻은 듯이 떨어진 것이다.
그 후로, 꿈에도 익히고 싶어했던 무학(武學)을 익히게 되어, 반년만에 1류 무사의 경
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본인의 노력이 열성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워낙 재능이 출중했던 탓에 반년이라는 짧
은 시간에, 불과 14세의 나이로 1류 무사 반열에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허허, 마침 적당히 상대해 볼만 한 인물이 없어 지루하던 터에, 공주마마께서 극찬하
시던 인물이 왔다니... 재밌겠군.'
허리에 메고 있는 검을 꽉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려 온다.
'이번 일만 끝나면, 북쪽 변경으로... 산해관(山海關)으로 올라가리라...
대명제국은, 여진 따위에게 무너지지 않는 다는 걸... 직접 놈들에게 깨우쳐주기 위해
서...!!'
"대영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
검을 꽉 쥐고 있던 이세혁의 손에서 힘이 풀리더니, 황급히 뒤에 있는 소녀에게 허리
숙여 인사한다.
"공주마마!!"
이세혁의 눈앞에 있는 소녀... 이 소녀가 만력제의 막내딸, 표연공주 주은비다.
일국의 공주라 불릴 수 있을 정도로 호화로운 장신구와, 분을 바른 듯, 뽀얗게 돋보이
는 피부가 화사한 외모를 돋보이게 해준다. 굳이 꽃으로 비유한다면, 겨울의 여왕 동
백(冬柏) 정도라 할까.
"공주마마께서 이곳엔 어인 일로...?"
"훗, 전 여기 오면 안 돼요?"
"그, 그건 아니옵니다만..."
근위대(近衛隊)에게는 호랑이로 통하지만, 만력제의 혈족들 앞에서는 더할 나위 없이
약해지는 인물이 이세혁이다.
"아까 보니, 접수관이 얼굴이 새파래져서 이리로 지나가던데... 설마, 벌써 여진이 움
직인 건 아니죠?"
빙긋 웃고 있던 주은비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워진 것도 그때였다. 하지만 이세
혁이의 말이 주은비의 근심을 덜어준다.
"아니옵니다. 공주마마께서 수없이 말씀하시던 그 고독랑이란 소년이..."
"여기 참가했나요?"
"예."
그러자 어제 걱정한 적이나 있었냐는 듯, 주은비가 활짝 웃으며 되묻는다.
"그게 정말이에요?"
"헛헛, 소인이 공주마마께 거짓 보고를 올릴 리가 있겠사옵니까?"
너털웃음을 날리며 비무장(比武裝)으로 시선을 돌리는 이세혁의 눈엔, 기쁨과 두려움
이 교차하고 있다.
'내 목숨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대명제국의 평화는 지키고 말리라...
이렇게나 곱고 착하신 분께... 슬픔을 안겨드릴 순 없다... 그건 죄악이야...!'
명대(明代) 최고의 명재상(名宰相) 장거정(張居正)이 죽고, 명은 급속도로 쇠퇴의 길
을 걷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세혁 같은 이가 있는 이상 제아무리 누르하치라도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건 너무도 뻔한 일. 그래서 누르하치는 중원(中原)으로 군
대를 보냈다. 그의 정예군, 팔기군(八旗軍)을 은밀히.
이들의 목적은 단 하나다. 이세혁을 제거하는 것이다. 누르하치는 명의 마지막 기둥이
라고 할 수 있는 그가 쓰러진다면, 명은 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팔기군이야 황군으로 상대하면 된다지만, 곤란한 건 그 팔기군을 이끌고 있는 자는 홍
무극(洪武戟)이란 자로, 누르하치의 4남(四男)이란 사실이다.
"대영반."
어느샌가, 이세혁과 같이 비무장을 바라보고 있던 주은비가 이세혁을 부른다.
"하명(下命)하시옵소서!"
"이번에, 무사히 북경까지 귀환한다면... 뭘 하실 건가요?"
주은비의 질문에, 이세혁이 난처한 표정으로 말을 잇는다.
"예... 가능하다면, 산해관으로 가서 국방을 지키고자 하옵니다."
"산해관으로요...?"
둘 다 북경까지 무사히 귀환한다는 건 현재로는 상당히 힘든 일이다.
적도 적이고, 육로(陸路)로 가든 수로(水路)로 가든 그들은 집요하게 이세혁을 노릴
것이기 때문이다.
황궁으로 보내는 서신들은 답장이 하나도 없다. 필시 여진의 홍무극이 사자들을 제거
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원군조차 바랄 수 없는 상황에서, 2천 리 길을 호위대 100
여명과 움직인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결국 군웅대회의 목적은, 뛰어난 무인(武人)을 찾아내고 함께 동행하여 무사히 북경으
로 귀환하기 위해서다.
"조금만 더 있으면 황궁으로 가실 수 있사옵니다. 그때까지, 공주마마께서는 옥체 보
존이나 신중히 하소서."
이세혁은 어디까지나 주은비의 안위만을 걱정한다. 주은비가 이런 이세혁을 신뢰하는
건 당연지사(當然之事).
"대영반, 너무 걱정 마세요. 전 대영반께서 다치지 않을까 염려되니까요."
주은비의 염려에, 이세혁은 황송하다는 듯, 부복한다.
"소장을 그리 걱정해 주시니, 백골난망(白骨難忘)이옵니다."
부복한 이세혁의 어깨를 짚으며, 주은비가 따뜻한 눈길로 이세혁의 은발을 바라본다.
"대영반... 절대 죽지 마요. 대영반이 쓰러지면, 우리 명(明)이 어떻게 될지 안 봐도
뻔하잖아요.
제가 황궁에 도착하면, 대영반을 수보(首輔)로 승진시켜 달라고 아바마마께 부탁해 볼
테니..."
"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을! 소장은 지금 이 자리도 과분하옵니다. 승진이라니...!!"
"대영반 정도라면, 수보라야 어울리잖아요. 안 그래요?"
이세혁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려 주고, 주은비가 비무장을 빠져나간다.
이세혁은 주은비의 신뢰에, 그 믿음에 다 보답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한다. 설사 한 세
기를 더 산다 하더라도...
'표연공주님... 공주님의 믿음에 보답키 위해서라면... 이 늙은이의 목이라도 따서 갚
아드리겠나이다!'
명의 마지막 기둥, 이세혁... 그가 어떻게 될 지는 하늘만이 알 일이다.
『대회 방식
경기는 하루에 32경기씩, 64명의 인원의 승패가 결정된다.
참가지 256명에서, 32명이 남을 때까지를 예선이라 친다.
1차 예선은 4일간, 128명의 승자를 결정한다.
2차 예선은 2일간이며, 64명의 승자를 결정한다.
3차 예선은 하루, 32명의 본선 진출자를 결정한다.
8일이 지나면 본선이다. 무조건 이기면 다음 결전으로 통과한다.
패배 요건은 장외로 떨어졌을 때, 기권했을 때, 상대를 죽였을 때다. 장소가 군웅대회
니만큼, 고의성이 없는 살인이라면 죄로 성립되지 않는다.
도전자들의 무운(武運)을 빈다.
- 대회 운영 위원회 - 』
붙여져 있는 방을 모두 읽고, 사문도가 씩 웃으며 예선전 비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가자 천비, 화운.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예, 주군!"
비록 짧긴 하지만, 이 짧은 한 마디가 강천비에겐 깊은 감동을 일으킨다.
강천비는 결심한다. 사문도의 뒤라면, 설사 지옥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노라고.
예선전이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고 있는 향락의 도시, 항주. 그 숫
자가 가히 3천 명을 초월하고 있다. 참가자들의 명단이 예상보다 훨씬 화려하기 때문
이다.
정파를 들어 보자면, 무당파(武當派)의 장문인(掌門人), 청허진인(淸虛眞人) 양헌수의
대제자(大弟子) 조무환(趙武煥)과, 귀혼당의 차기당주, 천풍공자 장유승(長有勝)이
참가했다.
장유승은 그렇다손 치더라도, 무당파 소속의 조무환의 명성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
무정랑(無情郞)'이라 불리며, 이번 군웅대회의 강력한 우승후보로 손꼽히는 인물. 나
이는 21세로, 상당히 젊은 편이다.
그리고 사파엔 신진 고수 고독랑 사문도(謝文道)가 참가했다.
마지막으로, 북해빙궁의 소궁주, 재색과 미모를 겸비한 희대의 여장부(女丈夫), 사망
빙화 모용화운이 참가했다.
이 셋이 우승후보로 예상되는 가운데, 정파인들과 사파인들은 뚝 떨어져 자기들끼리
삼삼오오(三三五五) 얘기꽃을 피운다.
대체로 정파인들은 조무환을, 사파인들은 사문도를, 낭인무사들은 모용화운을 응원하
고 있는 색이 짙다.
하지만 그들은 알지 못했다. 전혀 새로운 인물들이 만들, 태풍 같은 분위기를...
모용화운의 첫 경기. 모용화운의 상대는 낭인무사 황보성(皇甫省)이다.
"힘내요, 모용 누님! 낭인무사 따위에겐 지지 마요!"
"그래, 어떻게든 준준결승까진 가 봐야지. 안 질게!!"
모용화운이 강천비의 말을 받아넘기며, 사문도를 흘낏 바라본다. 사문도는 그저 빙그
레 웃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돌아서서 걷기 시작하는 모용화운의 뒤로, 사문도의 목소리가 울린다.
"화운... 북해빙궁의 소궁주로서, 천마궁의 1인으로서... 최선을 다해 싸워 주시오."
잠시 멈칫하던 모용화운이, 뒤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을 향해 걷는다.
'북해빙궁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주군께 실망을 안 안겨드리기 위해서라도... 적어
도 준준결승까진 가고 말겠어!'
비무장 중앙에 서서 눈을 감고 깊이 심호흡한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눈을 뜬다. 비무
장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황보성이 입을 연다.
"과연... 듣던 대로 대단한 미인이구려."
"칭찬으로 해 두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모용화운의 쌍수(雙手)에서는 가공할 만한 냉기가 뿜어져 나온
다.
"그 곱디고운 얼굴에 흠집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런 델 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황보성(皇甫省)에게 모용화운이 톡 쏘아붙인다.
"말이 많군요."
모용화운이 손목까지 내려오는 백의를 걷어올린다. 동시에, 황보성이 얼굴을 굳히며
검을 뽑아든다.
"이제 보니, 상처 한두 개로 정신차릴 아가씨가 아니로군! 차앗!!"
옷소매를 다 걷은 모용화운의 팔은 군살 하나 없는, 그야말로 백설(白雪)같은 살결이
다. 모용화운은 곧장 자신을 향해 불나방처럼 날아드는 황보성을 항해, 우수(右手)를
뻗는다.
"황보 소협(小俠),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난 못 져요! 빙백신장(氷白神掌)!!"
황보성은 제법 빠른 몸놀림이긴 하지만, 모용화운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던 빙백신장의 결정체가 황보성의 복부(腹部) 쪽으로 떨어진다.
"아앗!!"
빙백신장에 맞는 자리는 얼어붙는 게 보통이지만, 지금은 어떤가. 맞은 부분에 거센
돌풍이 몰아치더니, 황보성을 그대로 장외 쪽으로 밀어붙인다.
그러기를 5초. 털썩 하는 소리와 함께, 비무장 잔디에 떨어진 황보성이 얼떨떨한 표정
을 짓는다. 믿기 힘들다는 것이다.
"황보성 장외패! 모용화운 승리!"
심판장(審判長)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북소리 두 번과 함께 우레 같은 관중들의
목소리가 비무장을 뒤덮는다.
유유자적한 발걸음으로 비무장을 걸어나가는 모용화운을, 두 쌍의 눈이 바라보고 있다
.
"과연... 북해빙궁의 소궁주라더니, 실력이 보통이 아니군요."
"그렇사옵니다. 황보성, 저 자라면 삼십 초는 될 거라 생각했사옵니다만..."
주은비와 이세혁, 그들이다.
"황궁에서도 서열이 높은 편인 황보성이 이렇게 10초도 못 버틸 줄은... 정말 뜻밖이
옵니다."
황보성, 그는 만력제 직속 친위대의 일원으로, 황궁 무인 중 서열 20위 내에 드는 일
급고수다. 그런 고수가 4초도 못 되어 나가떨어졌으니, 두 사람이 믿기 힘든 게 당연
한 일이다.
'이거, 정말 어쩌면 내가 우승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 정말 대단한 대회가 될 거
같으니...!!'
그때, 갑작스레 주은비가 말을 건다.
"대영반, 다섯 번째 경기가 대영반 경기죠?"
"예, 공주마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주은비가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내가 열한 번째 경기고, 무당파의 무정랑이 여섯 번째, 고독랑의 일행이 여덟 번째,
마지막으로 고독랑이 열다섯 번째...'
주은비와 이세혁이 비밀리에 명을 내려, 이들은 서로 떨어지도록 배정해 놓았다. 보다
흥미진진한 군웅대회를 위해서다.
'나... 준결승까진 갈 수나 있을까...?'
이번 군웅대회 주최자(主催者)인 주은비가 참가한 까닭은, 수개월 간 자신이 갈고 닦
은 무예를 시험해 보기 위함이다. 애초의 목적은 준결승.
그런데 어찌 소문을 들었는지, 명문 정파의 후기지수와 사파의 신진 고수마저도 꼬여
든 것이다. 이 군웅대회는 이제 걷잡을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디론가 흘러간다. 그 어디론가로...
세 시진이나 지났다. 이제, 1차 예선전은 모두 끝이다.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강천비와 이세혁, 주은비의 이야기가 부근 홍등가와 주막의 이
야깃거리였다. 누구든지 모이기만 하면 예선전 결과 이야기였다.
군웅대회는 대성황을 이루는 채, 첫날밤이 자나가고 있었다... 보다 시끄러운, 왁자지
껄한 밤이...
"천풍공자(天風公子)... 그 개망나니가 여기 왔을 줄은..."
사문도가 근처 주막 한구석에서 강천비, 모용화운과 담화를 나누던 중 통과자 이름을
듣고 뱉은 말이다.
"하하, 그래봐야 주군께 걸리면 반죽음 아닙니까?"
대소(大笑)를 터트리며 사문도가 따라주는 술을 냉큼 받아 마시는 강천비. 사문도가
코웃음을 친다.
"흥, 내 원수 놈의 아들이긴 하지만, 그 녀석은 천마궁 습격에 낀 녀석은 아니니까,
죽이고 싶진 않아."
"원수의... 아들...?"
곁에서 둘의 얘기를 듣고만 있던 모용화운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다.
"참, 모용 누님은 모르시죠? 제가 상세히 설명해 드릴 테니, 잘 들으세요."
잠시 뜸을 들이던 강천비가 잔을 다시 비우며 차근차근 입을 연다.
"음... 천마궁을 친 세력이 다섯 개란 건 잘 아시죠?"
"당연하지."
"원래 천마궁의 주력부대 흑사대(黑死隊)의 4천 중에서 3천이 저기 천풍공자란 망나니
의 부친, 귀혼당의 당주인 귀객 장백경(長白鏡)을 치러 갔었대요.
그런데, 그 장백경이란 작자가 중원무성에 붙어서 도리어 그 군대로 3천의 흑사대를
멸해버린 거예요.
그 뒤로, 사파의 주도권을 장백경이 움켜쥐고, 제 멋대로 예전의 천마궁에 들어앉아
흥청망청 지내고 있으니... 주군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원수인 셈이죠."
"... 그렇구나..."
사문도는 시종일관 같은 분위기로 술잔을 비우기만 할 뿐, 말이 없다.
"이제 알겠죠? 그러니, 장유승이란 망나니와 만나게 되면..."
"절대 죽이지는 말고, 기권이란 소리가 나올 때까지 패 줘."
강천비가 하려던 말을 사문도가 이어 다 해 버린다. 그러자 머쓱해진 강천비가 머리만
긁적인다.
'그나저나, 장유승 그 망나니가 7전 무패로 올라오다니... 나한테 깨지고, 나름대로
발전을 한 건가...?'
사문도가 자신의 1초지적도 안 되던 3년 전의 장유승을 떠올리며, 알게 모르게 차가운
미소를 떠올린다.
"여기, 매실주(梅實酒) 한 병 추가!"
흑의(黑衣)로 입가를 문지르며 그대로 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사문도. 이들의 술자리는
계속될 듯, 깊은 밤 가득히 파고든다.
"휴... 생각보다 무척이나 어렵군요."
"그래도 잘 하셨사옵니다, 공주마마."
군웅대회 예선 1차전을 끝마치고, 비무장 맞은 편의 별장으로 돌아온 주은비와 이세혁
.
"그래도... 대영반(大領班)은 역시 실력이 대단했어요. 대적할 만한 자들이 없었잖아
요."
"공주마마, 소장이 보기엔 짧은 기간에 엄청난 발전을 하신 것이옵니다.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언제나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보다 높은 곳을 향해 달리기만 하는 주은비가, 이세
혁이 보기엔 언제나 안쓰럽게만 보인다.
"대영반..."
"예, 공주마마."
"황금 천 냥... 누가 거머쥐게 될까요?"
경거망동(輕擧妄動)하지 않고, 이세혁이 가만히 생각을 해 본다.
"아무래도, 절 제외하고... 3명 정도...?"
"누구누군지 말씀해 주세요."
눈을 밝히며 이세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주은비. 이세혁이 입에 고인 침을 삼키고,
바로 입을 뗀다.
"정파의 조무환(趙武煥), 사파의 사문도(謝文道), 그리고 북해빙궁의 모용화운(慕容花
芸)... 당연하겠지만, 일단은 이 셋이 가장 유력하옵니다."
이들은 모두 예선 1차전에서 상대를 5초 내로 끝냈으며, 무림(武林)에서는 모르는 사
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들이니 말이다.
"게다가, 조무환은 정파의 9파1방에서도 서열이 꽤나 높은 무당파(武當派)의 차기 장
문인이기 때문에..."
"고독랑(孤獨郞), 질풍귀(疾風鬼)와 만나면... 크게 벌어진다, 이 말씀이죠?"
"그렇사옵니다."
주은비가 신비한 눈으로, 별장 난관에 기대서서 하늘 위 푸른 초승달을 직시하고 있다
.
'무정랑... 그리고 고독랑과 질풍귀. 정사(正邪)의 자존심을 건 대결이라, 재밌을 것
같은데.'
난간에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이 주은비의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준다. 주은비는
그 바람에 몸을 맡기고 가만히 눈을 감아 여름밤의 신선함을 한껏 즐긴다.
모든 걸 잊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여진에 대한 걱정도, 군웅대회 결과에 대한 걱정도..
. 모든 것을 말이다.
"공주마마, 그럼 소장은 이만..."
"아... 편히 쉬어요, 대영반."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서는 이세혁의 발걸음 소리가 주은비의 귀에 유난히도 크게 박힌
다. 그러자 고개를 돌려 이세혁의 등을 주시하는 주은비.
아주 젊었을 때부터, 명(明)을 위해 몸바쳐 투신해 온 이세혁. 금의위(錦衣衛)에 입대
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실력을 인정받고, 당대의 수보(首輔) 장거정(張居正)에게 도
지휘사(道指揮使)로 발탁됐다.
하지만 10년도 지나지 않아 장거정이 쓰러지고, 간신들과 환관들에게 시달리는 만력제
(萬曆帝)를 보다못한 이세혁은 결국 정치에 뜻을 잃고 금의위의 통솔을 맡았다.
하지만, 그 간신들 가운데 바보만 있었던 것은 아닌지, 누군가가 동창(東廠)의 대영반
(大領班)으로 이세혁을 추천했다. 만력제 역시 이세혁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는지라,
흔쾌히 승낙했던 것이다.
이세혁이 동창의 대영반을 맡은 지도 어언 5년. 그간 별 탈 없이, 그리고 조용히 명이
지내 올 수 있었던 것은 이세혁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명 제국의 마지막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세혁. 그러기에 이 명을 사랑하는 주은비
의 입장에선 이세혁이 누구보다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대영반... 대명제국(大明帝國)의 평화와 안녕을 위해선 절대적으로 대영반의 힘이 필
요합니다...
건주여진(建州女眞)의 힘을 막기 위해서는... 산해관을 지킬 만한 장수가 있어야만 합
니다. 지금 현재는, 대영반 말고 인재가 없어요...!!'
벌써 여진의 군대가 명 깊숙한 곳에서 유혈(流血)활동을 할 정도로 여진이 활개를 치
고 있었다. 아직까지 그리 위험하진 않지만, 이대로 사태를 수수방관(袖手傍觀) 하다
가는, 언제 뒤통수를 맞을지 모를 일이 아닌가.
명(明)... 250여 년 존속해 온 이 나라도, 이제 서서히 역사의 뒤로 사라지고 있다는
걸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누르하치... 어째서 하늘은, 그런 자를 여진으로 보내시는지...'
그렇게 한탄도 해 보건만, 그런다고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순 없다. 시대의 흐름은, 인
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니까.
뻐꾹... 뻐꾹...
벌써 해시(亥時)도 넘겼다. 그런 와중에도 아직 창문을 열어놓고 밤공기를 마시며 울
부짖는 뻐꾸기소리를 듣고 있는 소녀가 있다. 가히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美)를 지
닌 소녀가...
"... 휴우..."
모두들 자는 늦은 시간이지만, 이 소녀는 잠이라고는 없는 듯하다.
"바보 같은 사람..."
허리까지 출렁이는 흑발을 단정히 가다듬고, 약간 젖은 듯한 눈길로 멀리 남쪽을 주시
하는 소녀의 눈에는, 그리움이란 감정이 가득하다.
'사 공자(公子)... 당신이랑 난, 결코 이뤄질 수 없는 사이란 거예요...?
내가 정파 제일의 세력인 중원무성(中原武城)의 소성주의 약혼녀라... 단지, 그것 때
문이에요...?
사파인(邪派人)인 당신이 보기엔, 한때나마 정파인을 좋아한 내가... 그렇게도 불쾌해
요...?'
경국지색의 소녀, 한화경(漢華景)의 눈에 고인 눈물. 얼마 안 가 기침 탓에 그 눈물이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뒤이어, 기침소리가 밤공기를 뒤흔든다.
"콜록... 콜록... 헉..."
겨우 기침을 진정시키고 떨리는 눈길로 양손을 바라보는 한화경. 그 눈 위로 또다시
눈물이 고인다.
"... 사 공자..."
양손에 묻어 있는, 선명한 선혈(鮮血)... 얼마간 잠잠하다고 생각했던 각혈( 血)이
재발한 것이다. 상태가 상당히 악화됐다는 걸 알려주는 결정적인 증거다.
'이젠 2년도 안 남았어요... 당신과 함께 이 땅에 있을 수 있는 날도...
왜 그렇게 힘든 길을 택한 거예요... 왜 한때나마 따뜻한 눈길을 한 거예요...
나, 지금 미칠 것만 같은데... 당신의 솔직한 미소가 보고싶은데...'
독고명응(獨孤明應)과의 재회. 하지만, 두 사람의 재회는 씁쓸하기만 했다.
'독고 공자... 날... 포기해 줄 순 없나요...?'
한화경이 눈물을 삼키며 제일 먼저 뱉은 말이었다. 물론, 독고명응은 단호히 그 말을
거절했다.
'아니 되오. 한 소저(小姐), 당신이 그를 사랑하는 만큼... 나도 당신을 사랑하니까..
.
언제까지나 기다리겠소. 당신이 예전처럼 돌아올 날을...'
"흐흑... 흑... 흐흑..."
결국, 언제나처럼 이불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낸다. 그 마음을 알아주는지, 몰라
주는지... 뻐꾸기는 더더욱 서럽게 울어만 댄다.
"한화경... 안 돼... 안 돼!!"
거의 비명을 지르며, 사문도가 벌떡 일어난다.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은 게, 악몽(惡
夢)을 꾼 것이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언제 깼는지, 강천비가 염려되는 얼굴로 사문도에게 물을 한 잔 건넨다. 사문도가 그
물을 벌컥 마시곤, 이마의 땀을 닦아낸다.
'왜 갑자기 내 꿈에 네가 나타난 거냐... 그리고 왜, 내 앞에서...!!'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사문도가 몸을 한차례 부르르 떨더니 신경질적으로 방문을 박
차고 밖으로 나간다.
'젠장... 꿈치곤 너무 생생해... 빌어먹을!!'
주먹을 꽉 움켜쥐며 멀리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사문도. 한화경이 자신의 앞에서,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져 버린 꿈을 꾼 것이다.
'한화경... 설마, 목숨이 위태롭거나 하는 건 아닐 테지...?
내 행복까지 가져가 살아야 할 너다... 제발... 허무하게 죽진 마라...!!'
사문도는 이미 한화경이 독고명응의 청혼을 거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항주로
오던 도중 어느 주막에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한편으로 한화경이 염려스러웠지만
, 다른 한편으로는 왜 그리도 속이 시원하던지...
'한 번 꼬인 운명의 실은, 다시 풀어낼 수 없다... 너와 나, 그런 관계란 걸 왜 모르
는 거냐...!!'
"주군..."
언제부턴가, 모용화운이 바로 뒤에서 무거운 얼굴로 사문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화운... 무슨 일로..."
"몰라서 묻는 건가요?"
모용화운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 별 거 아니고, 악몽을... 꿨을 뿐이오."
"악몽... 을요...?"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사문도가 고개를 끄덕이며 평상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뗀다.
"죽지 마라... 살 때까지는 살다 가라고...!!"
제법 낮은 목소리였지만, 청력(聽力)이 심후한 모용화운에게 그 소리가 안 들렸을 리
가 없다.
'한화경... 주군이 이토록 초조해하며 걱정해 주는 사람이, 그 분들 말고 있었다니...
대체 누굴까...?'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갑자기 그 이름이 모용화운에게 강하게 인식된다. 묘한 감정이
뇌리를 뒤흔들고 있다.
'이름으로 봐서 남자가 아냐... 필시...'
여인의 본능이랄까. 알 수 있었던 것이다. 필시, 여인일 것이란 걸.
'그럼 저 분에겐 이미... 마음에 둔 사람이...'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쓸쓸해진다. 어느샌가 자신도 모르게 사문도에게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모용화운의 그런 애틋한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문도는 한탄만 하고 있을 뿐이다.
"진시(辰時) 정각! 그럼, 군웅대회 예선 2차전을 시작합니다!!"
"우왓!"
"기다리다 미치는 줄 알았다! 야호!"
구성원이 화려했기 때문이랄까. 소문들 듣고 사람들이 갑절은 더 모여든 듯 하다. 아
직 본선 경기도 아닌데 말이다.
예선 2차전 첫경기는, 고독랑 사문도의 경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욱 폭발적으로
몰린 건지도 모른다.
경기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비무장(比武裝)에 있는 두 사람 다 움직일 생각을 않고 있
다.
'저 녀석... 중원인이 아니다...?'
사문도의 눈앞에 있는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중원의 옷이다. 그러나 풍기는 분위기와
외모 등을 고려해서 짐작해 보건데, 분명 중원인(中原人)이 아니다.
십중팔구(十中八九) 여진인이란 느낌이 들자, 사문도가 묻는다.
"너, 여진인(女眞人)이냐?"
낮은 목소리지만, 상대에게 들리기엔 부족함이 없다. 침착하고도 강한 목소리에, 그
자의 안색이 미미하게 질린다.
"예상 대로군."
"내가 여진인이란 걸 어떻게 알았지?"
그 회의인(灰依人)허리에 메고 있는 연검(軟劍)을 뽑으며 대답한다. 연검에서 풍기는
예기가 심상찮다.
"네 녀석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예전 자영오살(紫影五殺)이란 녀석들과 비슷하거든.
"
사문도는 검(劍)은 뽑을 생각도 않으며, 할 말만 하고 있다. 그러다 회의인의 연검에
서 피어오르는 살기가 더욱 강해진 걸 느끼고, 조소(嘲笑)를 날린다.
"네놈의 태도를 보니, 자영오살과는 친밀한 사이인 것 같군. 누르하치와 어떤 관계지?
"
"자영오살을 죽였나?"
"먼저 질문한 사람은 나다."
"먼저 대답하지 않는 한, 난 대답하지 않는다."
서로의 고집을 부리며 대답하지 않는 두 사람. 사문도의 뇌리에서 슬슬 분노가 치밀어
올라온다.
"뼈 몇 개 날아가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 사문도가 주먹을 꽉 움켜쥔다.
"중원에서 네놈의 명성이 꽤나 높더군, 고독랑 사문도. 네놈의 그 꼴불견도 오늘까지
다."
회의인의 신형(身形)이 흔들리다 싶더니, 어느새 사문도의 미간으로 연검을 들이긋고
있는 게 아닌가?
"앗?!"
"시, 신기다!!"
그리고, 그 연검이 그대로 사문도의 머리를 양단하려 달려든다. 그때,
"느리다."
하며, 사문도가 그 연검을 냉큼 막는다. 그것도 손가락 두 개로, 간단히!
"이... 이익...!!"
얼굴이 새빨갛게 될 정도로 힘을 쓰고 있지만, 사문도는 미동도 없다.
"다시 묻겠다. 누르하치와는 어떤 관계냐?"
아까와는 목소리가 차원이 다르다. 무정무심(無情無心)의 최고경지에나 이른 자만이
낼 수 있는 그런 목소리에, 회의인의 얼굴색이 다시 변한다.
"그딴 건, 저승에서 염라대왕(閻羅大王)에게 물어 봐랏!"
회의인의 옷소매에서 별안간 섬전(閃電)같은 빠르기로 날아오는 암기(暗器). 회의인이
암기를 날리며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흐흐, 고독랑... 네깟 애송이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 봐야...'
착각은 자유라던가. 미소가 번지던 그의 얼굴에 어느새 경악으로 물들고 있다.
"어 어떻게... 그 거리에서 날린 걸...?!"
다섯 개의 비수(匕首)가, 사문도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꽂혀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 경고다. 내가 더러운 꿈을 꿔서 기분이 좀 안 좋은데 말야...
누르하치와는 어떤 관계냐?"
마지막 경고. 그 말에 회의인의 양팔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린다.
'으으... 대체 뭐냐, 이 녀석은... 이런 애송이가 어떻게 날 이렇게까지 떨 수 있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챙강' 하고 암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정신을 차린 회의인. 곧바로 연검을 집
어던지고 몇 장 뒤로 물러선다.
"아직도 말할 생각이 없다 이건가...?"
"자, 잠깐...!!"
회의인이 손을 휘저으며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눈앞에서 사문도가 사라진다.
"대, 대체 어디에... 커헉!"
이건 웬일인가. 어느새 뒤로 빠진 사문도가, 회의인의 목을 부여잡고 상상도 못할 힘
으로 누르고 있다.
"애초에 경고했다. 나 오늘 꿈을 잘 못 꿔서 기분 상당히 더럽다고..."
"끄... 끄윽...!!"
숨이 막히는지, 비명도 제대로 못 지르고 버둥거리는 회의인을 보며, 사문도가 조소를
날린다.
"네놈을 죽일 생각은 없지만, 무사히 돌아가기는 힘들 거다."
교살(絞殺)당하기 직전, 사문도의 흰 손이 회의인 목에서 떨어진다.
"헉... 헉... 헉..."
목이 자유로워지자 한껏 숨을 들이켜 보지만, 그 짧은 행복도 잠깐이다.
"크윽...!!"
퍽... 회의인의 멱살이 잡히는 순간, 그대로 사문도의 주먹이 왼쪽 뺨에 꽂힌다. 그렇
게 삼 장(丈)을 떠다니다, 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사문도의 왼발이 회의인의 허리를
내려찍는다.
"선풍각(旋風脚)!"
콰쾅!! 마치 포탄이 떨어졌을 때나 나는, 그런 굉음(轟音)이 비무장 중앙에서 울려 퍼
진다.
"우와앗!!"
"최고다, 고독랑!!"
연이어 사문도의 공격이 이어지자, 관중들이 환호성을 내지른다. 사문도는 환호성이
들리든 말든, 바닥에 꽂혀있는 회의인의 옷을 끌어당겨 빼낸다.
"아, 미안. 공력 일 성만 주입한다는 게, 모르고 이 성을 주입했구나."
회의인이 처참하게 널브러져 있다. 코피가 터지고, 입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는 탓에
얼굴이 피로 시뻘겋다.
"정말 마지막이다. 이게 안 먹혔다면, 네 녀석을 죽이고 말겠어."
"마, 말하겠소... 크흑...!!"
입가에 선혈을 물고 황급히 대답하려는 그자의 모습이 눈물겹게 비친다. 비위 약한 관
중들은 눈을 돌리고 외면하지만, 대다수가 흥분한 듯 비명을 지른다.
"난... 누르하치 전하의 직속 군대, 팔기군(八旗軍)의... 부제독(副提督)..."
"그런 작자가, 중원엔 무슨 일이냐?"
"누, 누르하치 전하의 명을 받고.. 자영오살을 찾아오는 것... 커헉...!!"
피를 많이 토해내 답답한 듯, 가슴을 부여 짜 보지만, 그런다고 답답한 게 해결될 리
가 없다.
"그것뿐이냐?"
"그... 그렇소..."
계속해서 피를 토해내는 회의인이 보기 답답한지, 사문도가 혀를 차며 다시 멱살을 움
켜쥔다.
"똑똑히 말해라. 자영오살 정도를 찾는 거라면, 너말고도 다른 녀석으로도 충분했을
거다. 왜 누르하치가 굳이 널 보내 자영오살을 찾으려 하겠느냐!"
"그... 그거야...!!"
말을 잇지 못하고 회의인이 그대로 다시 굳어버린다. 사문도의 얼어 있는 눈동자를 보
자, 고통이고 뭐고 아예 떠오르지도 않는다.
'약관(弱冠)도 되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어린 소년에게 이 정도의 살기가... 이
런 죽은 눈동자가...!!'
"네놈 꼴을 보니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가 오늘 진정한 고통이 뭐지... 똑똑히
가르쳐 주마."
하고 사문도의 섬섬옥수(纖纖玉手)가 다시 회의인의 얼굴을 가격하려는 순간,
"마, 말하겠소! 말하겠소!!"
"진작 그럴 것이지. 계속 말해 봐!"
뚜벅뚜벅... 사문도가 걸어간다. 비무장 외곽, 장외 쪽으로.
"명(明)의 대영반 이세혁을... 제... 거..."
"...!!"
사문도의 두 눈에서 불똥이 튄 게 그때였다. 곧바로 멱살을 쥐고 있는 손에 힘이 풀린
다. '털썩'하는 소리와 함께, 회의인이 비무장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다.
"미친 놈! 여진 따위가 감히, 대명제국의 기둥을 제거하겠다고?"
하지만 이미 회의인은 혼절하기 직전인 듯, 숨만 거칠게 몰아쉬며 다시 피를 뱉어낸다
.
"... 그건 됐고, 네가 물어봤던 거... 가르쳐 주지."
얼음보다 싸늘한 얼굴로, 회의인의 멱살을 다시 움켜쥐고... 사문도가 나지막하게 속
삭인다.
"북망산(北邙山)이라고... 낙양(洛陽)에 있거든. 그 산 어딘가... 아마 그 다섯의 시
체가 뒹굴고 있을 거다. 아니, 그곳에 사는 까마귀가 다 먹어 치웠겠지."
"여, 역시... 죽인 건가...?"
"중원의 평화를 해치려고 하는 족속 따위, 내 손으로 말살시키겠다... 누르하치에게
똑똑히 전해라!!"
"큭... 큭큭..."
뭐가 그리 좋은지, 피를 쏟아내면서도 회의인이 웃음을 터트린다. 그 웃음에 사문도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한 가닥 불안감이 피어오르고...
"잘 가라. 넌 내게 진 거다."
사문도가 발끝으로 툭 차, 회의인을 장외로 떨어트린다.
"장외패! 고독랑 사문도의 승리!"
"우와앗!"
"최고였다, 고독랑!!"
관중들이 뭐라 하든, 사문도는 싸늘한 얼굴로 비무장 밖으로 걸어나간다.
'건주여진(建州女眞)... 내가 있는 한은 네놈들의 일이, 그리 호락호락하게 되진 않으
리라. 만일 그리 되리라 생각했다면, 그건 엄청난 오산이다!!
중원 정복은 꿈도 꾸지 마라. 대명제국은 영원히 지속되어야 한다... 여진 따위에게
줄 땅은, 단 한 뼘도 없어!'
그러나 내심 깊숙이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은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아
랫입술을 꽉 깨물고 비무장 바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사문도는 마음이 납덩이를 맨
것 마냥 무겁게만 느껴진다.
'이 군웅대회(群雄大會)... 아니나 다를까, 심상찮은 냄새가 난다...
어쩌면, 어제 나처럼 5초 내로 상대를 처리한 사람 중 하나의 이세혁(李洗奕)... 그
분이 대영반(大領班)이실지도 모를 일이다.'
사문도는 비무장을 빠져나오기가 무섭게, 느티나무 아래에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여진이 대영반 나리를 죽이려 한다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눈을 감아 평상심을 유지하려 힘쓰는 사문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를 힐끗힐끗 바라보며 지나간다.
"..."
얼마나 지났을까?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사문도가 눈을 뜬다.
"주군(主君)."
조심스레 자신에게 다가오는 강천비를 보며, 사문도는 한숨만 내쉴 뿐 말이 없다.
"방금 전, 왜 그리 잔혹하게..."
"네가 보기엔, 내가 잔혹했던 것 같나 보군. 그러냐?"
"... 부인(否認)하지 않겠습니다."
강직하다고 해야 할지, 고지식하다고 해야 할지... 사문도는, 이런 강천비를 보면 언
제나 고민이 된다.
"명심해라, 천비. 하나 가르쳐 주지."
"예!"
느티나무에 편히 기대 눈을 감고 사문도가 조용히 입을 연다.
"너도 알고 있겠지, 무림이란 곳을. 약육강식(弱肉强食)... 무림이란 곳에서는, 힘이
없으면 먹힌다."
아무 말 없이 사문도의 말을 경청하는 강천비의 얼굴 위로, 짙은 쓸쓸함이 흘러간다.
"당금(當今)의 무림에서는, 이상이란 힘있는 자의 꿈에 불과하다. 그래서 힘이 필요한
거다."
사문도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강천비가 눈을 말똥말똥 뜨고 사문도의 말을 기다
린다.
"무림이란 곳에선, 때론 비정해질 수 있고, 때론 부드러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
어야 한다."
눈을 뜨며 자신의 말을 되새기고 있는 강천비의 어깨를 몇 번 툭 친다. 어느샌가 사문
도의 눈엔 신뢰감이 충만하게 들어찬다.
"지금 이 말을 이해하기 힘들지? 허나, 너도 곧 알게 된다.
내 말을 듣고, 너무 무림에 대해 비관적으로 생각하진 마라. 무림이 아무리 이상세계
가 아니라 하더라도, 의인협사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리고 또 하나. 무림엔 안 될 거란 걸 알면서도... 불가능하단 걸 알면서도... 좌절
하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꿈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겐, 자신의 목숨보
다 더 중요한 것이... 자신의 꿈... 즉, 이상(理想)이지."
"?!"
사문도의 말에, 강천비의 눈썹이 잠깐 꿈틀대다가 제자리로 돌아간다.
'이상을 위해서, 목숨까지...?'
이상과 목숨. 모든 인간들에게 소중한 존재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사람이 이상을 좋
아하되, 목숨마저 버리면서 지키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이상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비웃는다.
하지만 이상을 위해 살아가는 이들은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언제나 행복하게 살아간
다. 그들에겐, 목숨 이상으로 이상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천비, 내 말 명심하고, 오늘도 열심히 해라. 지지말고. 본선까지는 가야할 거 아니냐
?"
"아, 예!"
비록 강천비는 자신의 수하지만, 언제나 동생처럼 느껴지는... 자신과는 달리, 언제나
웃음을 잃지 않는다.
'천비... 해맑은 웃음을 간직하고 있는 네가 부럽구나.
난 죄 많은 놈이다. 제대로 웃을 수도 없지. 모친을 눈앞에서 잃고, 부친은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불효자(不孝子)가 나다...
난 웃을 자격이 없어. 행복하게 살 자격도 없고. 부모님의 원수도 제대로 못 갚고, 지
금 사랑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내가... 어떻게 범인(凡人)들처럼 살아갈 수 있겠느냐..
.'
여태 상대를 가볍게 장외패로만 처리하던 사문도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러자 다음 경
기에 사문도와 붙는 이가 바로 기권을 했다. 피떡이 되기 싫어서였다.
덕택에 사문도는 가장 먼저 본선 진출이 확정됐다. 사파인들이 두고두고 자랑할 말이
생긴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유시(酉時)엔 모든 본선 진출자들이 확정됐다. 강천비, 장유승, 주은
비, 이세혁, 모용화운 이들은 모두 질풍처럼 본선으로 합류했다.
바야흐로 본선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무림은 새 바람을 원하고 있다는 걸... 훗날 무림 역사상 최고의 고수로 불릴 자가 이
군웅대회에서 탄생될 거란 걸... 무림지존(武林至尊)을 사파에서 원하고 있을 거란
걸 알고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때는 만력(萬曆) 31년 여름, 중원에 서서히 여름이 찾아오는 6월이었다.
본선 진출 확정자 32명이 확정되고, 예선 2차전도 종결을 맺었다. 그에 따라, 군웅대
회의 인기도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예상외로 참가자들이 고수인데다가, 신인 고수들
이 무더기로 윤곽을 드러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예가 질풍귀 강천비. 여태 예선 경기 모두 사문도와 마찬가지로 5초 내로 끝
냈다.
강천비는 사문도에 비해 부족한 점이 월등히 많지만, 화려한 초식과 단정한 용모 등으
로 무림인들의 입씨름할 좋은 소재였다. 그 증거로, 여기 2명이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
"질풍귀라... 허허, 소장은 확실히 처음 듣는 별호입니다."
"저도 그래요. 전혀 듣지도 못한 별호인데... 이번 군웅대회에서 태풍의 눈이라 불리
더군요."
흥미로운 표정으로, 본선 진출자들 명단을 훑어보며 얘기를 나누는 주은비와 이세혁의
담화가 계속 이어진다.
"공주마마 말씀대로, 일단 사문도와 조무환이 16강에서 만나도록 해뒀사옵니다."
"네... 대영반, 나머지 실력자들도 알아서 짜셨죠?"
"예. 16강부터 격돌이옵니다. 16강 첫 경기가 사문도와 조무환, 다음 경기가 질풍귀
강천비와 장유승이옵니다."
"저는요?"
"예, 준준결승(準準決勝)에서 강천비나 장유승과 자웅(雌雄)을 겨루게 되실 것이옵니
다."
질풍귀와 천풍공자... 나이, 경력 등으로 봐서는 천풍공자 장유승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대영반 생각으론, 강천비와 장유승이 자웅을 겨룰 때 누가 이길 것 같으세요?"
주은비의 질문에 이세혁이 너털웃음을 날리더니,
"헛헛, 경력으로 보나 나이로 보나 장유승이 압도적이옵니다.
천풍공자 장유승은 올해 25세로 한창 때지만, 그에 비해 질풍귀 강천비는 이제 15세라
..."
"강천비가, 15세라고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묻는 주은비에게 이세혁이 상세히 설명한다.
"모르셨사옵니까? 참가신청서를 보니, 정확히 15세라 적혀있었다고..."
하지만 주은비에게는 이 이상 이세혁의 말이 들어오지 않는다. 생각에 빠졌기 때문이
다.
'최소 18, 19세 정도는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것보다 어리다니... 천풍공자보다 열 살이
나 어리잖아.
피이... 그럼 보나마나 장유승이 준준결승까지 올라오겠네. 나보다 겨우 한 살 많은
사람이,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그것도 자신이랑 실력이 위인 사람을 이길 수 있을
리가...'
"하지만, 제 생각으론, 천풍공자가 질 것이옵니다."
"그야 당연히 그렇게... 예?!"
주은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세혁의 눈망울을 바라본다.
"제 말 그대로 될 것이옵니다, 공주마마(公主 ). 두고 보소서."
이세혁이 강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다. 주은비는 도저히 믿기 힘든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라도..."
"물론 있사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그 둘의 무공 수위는 엇비슷하지 않나요?"
주은비의 질문에 이세혁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정확히 따져 보자면, 장유승의 무공 수위가 약간 더 높사옵니다."
"그런데 어떻게 대영반은 그렇게 확신하고 대답하시는 거예요?"
"두 사람의 정신력 차이옵니다."
주은비에게는 '정신력'이란 말이 약간이나마 생소하게 들린다.
"정신력이 두 사람 무공 수위 차를 반전시킬 수 있단 말씀이에요?"
"예."
"못 믿겠어요... 천풍공자 장유승은, 동정호(洞定湖)에서 한 소년에게 비참하게 깨진
후로 뼈를 깎는 수련을 했다고 들었어요. 그런 사람이 열 살이나 어린, 제 또래의 소
년에게 질 리가..."
그러나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는 이세혁의 모습에, 주은비가 할 말을 잃는다.
"너무 속 태우지 마시옵소서, 공주마마. 시간이 답을 말해 줄 것 아니옵니까?"
"... 대영반께서 그렇게까지 확신하실 줄은... 뭐, 일단 정전하는 거죠?"
"예. 전... 강천비란 소년을 믿습니다."
이세혁에게 질렸다는 듯, 주은비가 고개를 휘휘 내저으며 한숨을 내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천풍공자 장유승이 압도적인데... 이유를 모르겠어...'
비무 때문에 질끈 묶었던 머리칼의 끈에 주은비가 손을 대자, 툭 하는 소리와 함께 한
줄로 땋은 긴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참, 대영반. 질풍귀 강천비는 고독랑 사문도와 비교하면... 좀 어떤가요?"
"고독랑 사문도에 비한다...? 허허, 조족지혈(鳥足之血)이옵니다."
"사 소협(小俠),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요?"
"아마 중원 온 천지를 다 뒤져봐도, 그만한 소년은 찾기 힘들 것이옵니다."
말로만 듣던 사문도. 무림에 가지각색의 풍문을 만들어놓고 잠적했다가, 별안간 다시
나타난 사파의 고수.
누가 뭐라 하기도 전에, 중원무성에선 사문도를 사파로 찍었다. 무사들을 죽인 일이
고의성이 없었다손 치더라도, 이제 사문도가 빠져나갈 구멍은 없는 것이다.
"사파 치고는, 지니고 있는 기도가 무척이나 놀라웠사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
다면, 죽음의 빛을 띠고 있는 것 마냥... 살기를 띠고 있는 눈동자라고 할까요..."
"흠... 그럼, 질풍귀는요?"
"사문도에게 주군(主君)이라 부르는 걸로 봐선, 그의 수하로 추측되옵니다.
키는 5척 정도에, 사문도와 달리 웃음을 달고 다니는 소년으로 꽤나 유명한 편이고,
얼굴도 그런 대로 준수한 편입니다. 사문도의 곁에 내내 붙어 다니기에, 용모가 가려
진 것뿐이옵니다."
평소엔 칭찬을 자제하는 이세혁이지만, 이들에게는 도저히 단점이라고는 찾기 힘들었
던 것이었을까.
"호호, 대영반께서 그렇게 칭찬하시는 인물들이 정말 궁금해지는군요."
"내일이라도 한 번 만나 보소서, 공주마마."
"그래야겠어요. 먼발치에서 만이라도 한 번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거든요."
빙긋 웃으며 여차 저차 이야기를 이어가는 주은비. 이를 이세혁이 이어받으며, 이들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32강전은 천마궁 일행, 황실 일행, 정파 일행들에겐 어려운 대결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난히 32강을 독파하고 다음 관문, 16강으로 넘어왔다.
32강전에서는 기록적인 속도로 끝난 경기가 세 경기가 나왔다.
고독랑 사문도는 상대를 단 2초만에, 사망빙화 모용화운은 3초, 질풍귀 강천비는 4초
만에 장외로 날려버렸다. 상대가 움직이기도 전에, 상대하기 귀찮다는 듯 경기시작 북
이 울리기가 무섭게 일격으로 날려버린 것이다.
일부 관중들은 너무 시시하게 끝났다고 비난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관중들은 이들의
뇌전같은 속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특히 사문도... 사문도는 신비의 대상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검을 갖고 있으면서도 검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 소년. 무림인들 절대다수가 병장기를
사용하지만, 사문도는 갖고 있으면서도 사용하지 않고 있다. 이것이 무림인들의 관심
을 끌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다.
"고독랑의 무기는 검(劍)이 맞는 건가?"
"십중팔구는 그렇겠지. 누가 검을 장난으로 갖고 다닌다던가?"
"그럼, 왜 검을 안 쓰는 걸까?"
"거야 아무도 모르지!"
"다음 경기가 이번 군웅대회 최고의 접전이라고들 하던데... 생각만 해도 재밌을 것
같으이!!"
"큭큭,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 어쩌면 고독랑이 검을 쓰게 될지도 모를 일 아닌가?"
주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한 잔 술을 마시는 재미로 살아가는 사파인들.
정파의 간섭이 아무리 거세어도,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살아도... 이들이 살아갈 수 있
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파양호(播陽湖) 부근. 형형(炯炯)한 눈빛을 한, 예사롭지 않은 기운을 풍기고 있는 무
리들이 좍 서 있다.
"종인황(宗人凰)... 네가 어째서 이렇게 됐단 말이냐...?"
우두머리인 듯한 청의인(靑衣人)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며, 면목 없사옵니다, 주공... 크으윽...!"
"그... 그 고독랑이란 애송이한테, 자영오살(紫影五殺)이 몰살당하고... 사망빙화는
구원받아 살아남아...?"
"제 눈으로 똑똑히 봤으며... 똑똑히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우두머리란 자 앞에 부복해 있는 자는 다름 아닌, 사문도에게 얻어터진 여
진인이 아닌가.
다른 동료에게 부축되어 왔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다. 옆에 있던 의원이, 바닥에 널브
러져 있는 회의인(灰依人), 종인황의 몸을 여기저기 짚어 보다가 얼굴을 찌푸린다.
"좀 어떻소?"
퉁명스런 목소리로 우두머리가 말을 내던진다.
"에잉... 뼈가 한두 개 나간 게 아니로구만! 갈비뼈가 5개, 골반 뼈는 으개졌고, 척추
도 어긋났고, 재수 없는 건 부러진 갈비뼈가 내장을 갈기갈기 찢고 있다는 거요."
"빌어먹을!!"
청의인이 욕을 내뱉으며 의원더러 돌아가라고 손짓한다.
"아니, 이런 환자를 그대로 방치했다가는 분명..."
"누가 당신더러 이 자를 걱정하랬나?"
아... 이게 웬일인가. 어느새 청의인의 허리에 매어져 있던 흑도(黑刀)가, 의원의 목
에 겨누어져 있다. 살이 약간 찢어졌는지, 흑도에 피가 조금씩 묻어 나온다.
"으... 으으..."
공포에 찬 신음을 흘리며 오들오들 떠는 의원을 바라보는 한 쌍의 눈길. 마치 잘 버무
려진 한 자루 칼을 연상케 한다.
"진료비는 내 알아서 드리지. 하지만, 치료는 됐단 말이오."
의원의 목에서 흑도를 거두고, 이리저리 휙 털고는 그대로 원위치로 도를 집어넣는다.
"흑령(黑靈)! 은자 다섯 냥을 지불하라."
"예, 주공(主公)."
이 흑령이란 자의 목소리는, 가히 인간의 목소리가 아니다.
무억양. 일정한 속도로 말을 잇는 이 흑령이란 자는, 오로지 전투를 위해서 길러진 무
사인 듯, 두 눈에서는 죽음의 기운이 흘러 넘친다.
능히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정도로 살벌한 인물, 흑령. 풍기는 살기만큼은 사문도
를 능가할 법하다.
흑령이 은자 다섯 냥을 의원에게 넘겨주기 무섭게, 의원이 혼비백산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 그 청의인이 비릿한 살기를 띤 미소를 지으며 널브러져 있는 종인황의 목을 오
른손으로 지그시 눌러 잡는다.
"큭큭, 종인황. 중요한 정보를 가져다 줘서 고맙구나."
"끄... 주, 주군... 끄윽...!!"
종인황의 목에 시퍼런 핏줄이 서기 시작하고... 흑령은 여전히 무정한 눈길로 이 광경
을 바라본다.
"고생 많았다. 내 보답으로, 네게 영원한 휴식의 길로 안내하마!"
종인황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살려고... 살아 보려고 발버둥쳐 보지만, 얼마
못 가 눈이 까뒤집힌 채, 그대로 절명해 버린다.
"널 살리자니 여기서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너 하나쯤은 버리고, 우리 여진을 꿈
을 이룰 수만 있다면... 난 백 번이라도 이 길을 택했을 것이다. 너 같은 실력자는 우
리 여진에도 많으니까 말이지... 큭큭.
난 장차 여진의 칸[汗]이 될, 누르하치의 아들인 홍무극(洪武戟)이니까!!"
여진의 영웅, 누르하치에겐 자식이 많다. 그 중 가장 재능이 돋보이는 자식이라면, 4
남 홍무극이다. 통솔력과 지휘력, 무력을 지니고 있는 3박자 군주감이기 때문이다. 나
이도 23세로 젊은 편이며, 실력도 수준급이다.
이번 일은 맡긴 것만 하더라도, 누르하치가 홍무극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다.
"다음에 저승에서 만나자, 종인황. 큭큭큭..."
'첨벙' 하는 소리와 함께, 종인황은 파양호 푸른 물 속으로 잠수해 버린다. 부릅뜬 눈
으로, 자신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다는 눈으로... 언제까지나 그렇게 있을 것이다.
적어도, 시체가 다 썩는 날까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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