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 마리 가시나무 새
김 선 구
영화 ‘가시나무 새‘에서는 성직자로서의 사명감과 세속적인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는 장면이 묘사된다. 사랑하는 여인 매기의 구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랠프 신부는 성직의 길을 택하여 멀리 외국으로 떠난다. 그러나 숱 한 우여곡절을 겪은 후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영혼과 감정의 갈등을 넘어 사랑의 숭고함을 깨닫는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륜일지 모르지만 인간적으로는 축복받을 장면이었다.
여기 출가한 뒤 사랑에 빠진 한 스님 얘기가 있다. 미국 예일대의 종교학과 교수 Y스님이 걸어 온 길이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동양학과 종교학을 강의 하던 중 예일대로 부터 초빙을 받고,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예일대의 동아시아연구소장에 임명되었다. 책임이 막중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러나 스님이 오늘에 이르기 까지 걸어온 길에는 험난한 굴곡이 많았다. 특히 종교인으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범부 인간으로서 고뇌와 갈등이 점철되어 있었다.
스님의 출생지는 전남 장성이었다. 집안은 가난했고,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로 생활능력이 없었다. 사춘기에 이르러 그는 반항아였고, 중학교 1학년 때 과감히 가출을 감행 했다. 새벽 완행열차를 타고 서울로 가서 독서실에서 청소 등 허드레 일을 하면서 보냈다. 그래도 머리는 좋았던지 달동네에 살면서 학원을 다녔을 뿐이지만 2년 만에 중ㆍ고등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에게는 출가한 삼촌이 있었다. 조카의 사정을 잘 아는 삼촌은 그를 제주도에 있는 법화사로 보냈다. 그 곳 주지스님이 삼촌의 사숙(私淑)이 되는 분이었기에 의지처가 없는 조카의 거처를 부탁한 것이다. 낯선 생활이 시작되었다. 일주일 정도 머물렀더니 신도들이 “절에 살면서 왜 법복을 입지 않느냐“고 했다. 그래서 승복을 입었다. 좀 더 있으니 ”왜 머리를 기르느냐“고 해서 머리도 짧게 깎았다. 또 ”절에 살면서 왜 새벽 예불에 안 나오느냐“고 해서 예불에도 나갔다.
하루는 예불을 마치자 주지 스님이 방으로 불렀다. 스님 앞에 무릎 꿇고 있으니 한문으로 된 책을 펴놓고 가르침을 주셨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이라는 책이었다. 출가한 승려가 지켜야 할 덕목을 적은 기본규율서이다. 가르침을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절감했다. “아! 나한테 필요했던 분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이분에게 내 인생을 맡기고 제자로 살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그래서 출가를 결심했다.
주지스님은 아버지가 채워주지 못한 삶의 텃밭이 되어주었다. 스승이요 아버지였다. 삶에 대해 질문을 하면 지체 없이 나아 갈 방향을 제시해주셨다. 어느 날 스님이 다시 불러서 갔더니 “현대 승려는 시대에 맞게 학문을 해야 한다. 대학에 가서 체계적으로 공부를 해보아라.”고 했다. 그의 재능을 알아 본 스님이 그를 법제자로 키워 볼 요량이었다.
스님의 권유로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했다. 비로소 정규적인 대학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다. 불교를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접해 볼 수 있었다. 그것은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발할 토대가 되어주었다. 열심히 노력한 결과 일본 교토에 있는 류코쿠(龍谷) 대학에서 공부할 기회도 얻었다. 공부를 할수록 학문에 대한 열의와 욕구가 더 했다. 대학을 졸업 하자 큰 맘 먹고 미국으로 갔다. 뉴욕에 있는 한 선원에서 청소도 하고, 신도들을 태워 나르는 봉고차를 운전하며 공부에 대한 열망을 키워갔다. 물론 먼발치에서는 항상 은사스님이 지켜보고 있었다.
드디어 하버드대 대학원 종교학과에 합격했다. 그리고 석사과정에 이어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그 시절에 그는 장차 인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만났다. 유대계 미국인 여성 이었다. 그가 하버드대에 처음 갔을 때, 그녀는 산스크리트어 석사 과정에 있으면서 불교학생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승복 입은 스님이 들어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와서 학생회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출가자처럼 명상을 즐기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생활양식이나 감정이 비슷하여 마음속으로 동질감을 느꼈다. 가까이서 함께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동료 이상의 감정이 싹텄다. 그렇지만 한국의 불교발전을 위해 일하겠다는 다짐과 꿈이 있었기에 마음을 정할 수 없었다. 사명감과 감정이 교차 속에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렇게 4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박사 과정이 시작 되고나서 마음에 결심을 했다. 용기를 내어 은사 스님께 편지를 썼다. “스님, 제가 스님의 제자가 됐을 때는 평생을 비구로 살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습니다. 스님,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두어 달이 지나서 편지가 왔다. “너의 보살과 함께 한국에 와봐라. 직접 만나봐야겠다.” 두 사람은 떨리는 마음으로 제주도로 가서 스님 앞에 무릎 꿇었다. 스님은 먼 산만 바라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렇게 10여분이 흐른 후 떨어진 첫 마디는 “인연이 이렇게 됐으니, 이것도 부처님 뜻인가 보다. 네가 결혼한 승려로 보살과 함께 불교발전을 위해서 열심히 일을 하겠다면 허락하겠다.” 그 때 10분이 스님에게는 10년처럼 느껴졌다. 두 사람은 미국에 있는 한 명상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은사 스님도 참석했다.
출가에서 다시 가정으로 돌아 온 스님에게 이제는 가정이 수행처가 되었다. 그 속에서 학문과 사랑과 수행을 실천한다. 스님은 아내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나에게 정말 가까운 도반이다. 설령 제 아내가 아닌 사람으로 보더라도 참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훌륭한 수행자다.” 이상은 Y스님이 일시 귀국하였을 때 토해낸 소회들이다.
오랜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딸과 아들도 하나씩 두었다. 평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삶의 자세는 변함이 없다. 불자로서의 수행과 학자로서의 학문 그리고 가족 간의 사랑! 그 모든 것이 다 소중한 것임을 깨달았다.
일생에 단 한번 운다는 가시나무새! 둥지를 떠나 가시나무 숲을 헤매며 커다란 시련을 겪은 후 아름답게 운다고 했다. 가장 고상한 것은 처절한 고통을 통하여 얻게 된다는 뜻이다. 그날 대담에 임하는 Y스님의 모습이 또 한 마리 가시나무새가 아니었을까? 고뇌와 갈등의 숲을 거쳐 단련된 인간승리자의 모습이었다.
첫댓글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고 했는데 종교적 관념을 떠나 사랑도 하고 수행하고 참다운 삶을 구가 하는 것이 구도자의 길이 아닐까 생각 하면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비구와 신부는 독신으로 살고 있지만 목사와 일부 종파의 스님들도 가정을 꾸리면서 수행하고 있어서 논평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스님도 사람이라 사랑에는 어쩔수가 없는가 봅니다. 글제처럼 고뇌와 갈등이 많았겠습니다. 이색적인 글 신비하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