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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2679 2/22 - ♣복음말씀의 향기♣ No2679
2월22일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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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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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 오늘 미사**
https://m.youtube.com/watch?v=3crF2RdM6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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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함께 사는 형제가 제 성격에 딱 맞다며 별명을 하나 지어줬는데 ‘조급’ 양신부랍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천하태평같고 여유만만해 보이지만, 같이 살아보니 엄청 급하답니다.
미사 입 퇴장 할 때도 광속이라 따라잡기가 너무 힘들답니다. 바깥 일도 천천히 같이 하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않고 그냥 혼자서 다 해버린답니다. 따지고 보니 그런 구석이 없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수긍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 사도도 비슷하신 것 같습니다. 수제자답게 진중하게 생각도 해보고, 여유있게 움직이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스승님께서 질문을 던질 때면 다른 제자들에게 기회를 줘도 좋을텐데, 제일 먼저 나서서 대답하다가 늘 점수 왕창 깎아 먹기 일쑤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성격은 공으로 표현하자면 럭비공이었습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은 바닥에 튀면 대충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지 예측이 됩니다. 그러나 타원형인 럭비공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좌충우돌, 우왕좌왕, 천방지축, 티격 태격의 명수 베드로 사도였습니다.
수난 직전 적대자들과 대치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순순히 병사들에게 붙잡히십니다. 아버지의 때가 왔으니 가만히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 사도는 칼을 뽑아 대사제 종의 귀를 내리쳐 잘라버립니다.
피가 뚝뚝 흐르는 잘라진 귀 한 조각을 손에 들고 아프다고 울부짖는 대사제의 종의 모습을 상상해보셨습니까? 귀를 잘랐기 망정이지 목이라도 쳤으면 살인자가 될 뻔 했습니다.
이렇게 베드로 사도는 예측 불가능한 돌출행동으로 예수님을 비롯한 제자공동체 멤버들을 당혹스럽게 하는데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허물 이 너무 많아 부적격자로 보이는 베드로를 수제자요 반석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쉼 없이 흔들리던 그를 교회의 반석이 될 것이라고 명하셨습니다.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인간 존재, 그래서 언제나 좌충우돌, 흔들리던 시몬 베드로에게 수위권을 맡기시고, 천국의 열쇠까지 맡겨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하면서, 얼마나 큰마음의 위로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치 오늘 우리들처럼 지상 생활 내내 쉼없이 흔들렸던 시몬 베드로였습니다. 그는 언제나 스승님으로부터 잦은 질타를 받던 ‘관심 사병’이었습니다.
그러나 시몬 베드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이 정확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나약함, 죄, 인간적인 한계를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흔들렸지만 흔들릴 때 마다 겸손하게 외쳤습니다.
“주님 보시다시피 저는 보잘 것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저는 당신 제자로서 부당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 아시다시피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시몬 베드로는 정확한 자기 인식의 기반 위에 각고의 노력을 더해, 마침내 그 어떤 세찬 비바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교회의 반석으로 거듭났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존재 자체로 오늘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녀야할 가장 기본적인 덕목은 자신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겸손함입니다. 그러한 겸손의 덕 위에 부단히 자신의 결핍, 나약함,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아가려는 솔직한 자기 인식을 위한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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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OQJ3OoKGT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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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는 사람의 것을 양도받을 수 없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베드로에게 하늘나라 열쇠를 맡긴 일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무엇보다 베드로 교회에 우리가 머물 수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이상 베드로도 그 교회 밑에 항상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베드로가 교회라는 건물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해 있는 교회 공동체의 기반이 진정 베드로인가?’는 확인해야 합니다. 베드로 교회라면 분명 베드로가 받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사용하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입니다. 죄 때문에 하늘 나라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그 권한만 있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권한을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주시는 분이 그것을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만약 자신에게 그 권한을 주시는 분을 보통 인간으로 보았다면 그런 권한을 주셔도 믿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개신교는 사람이 어떻게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포기했습니다. 스스로 교회가 하느님 자녀들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람들 모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 아들로 알아보는 베드로에게 당신의 죄 용서의 권한을 양도했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인간이 원숭이를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양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도 원숭이가 인간을 보듯 했다면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같은 수준끼리만 권한의 양도가 가능합니다.
1973년 11월, 오클라호마의 연구소에서 새끼 침팬지가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은 님 침스키. 님은 허버트 박사의 프로젝트를 위해 강제로 어미와 이별한 후 스테파니의 집에 맡겨져 ‘인간의 아이’처럼 길러집니다. 당시 언어가 인간이란 종족만이 가진 권한이라는 이론에 반박하기 위한 실험이었습니다.
스테파니의 딸 제니와 함께 성장한 님은 언어 교육을 위해 허버트 박사 연구팀의 로라에게 맡겨지고, 수화를 통해 기본적인 단어들을 배우며 놀라운 능력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사춘기가 되자 거센 힘을 종종 휘두르며 침팬지의 야성을 드러냅니다. 사람을 공격하여 볼이 뚫릴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히기도 합니다.
실험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한 허버트 박사는 프로젝트를 중단합니다. 님이 수화를 통해 단어를 배웠지만, 그 단어를 조합할 능력은 없었습니다.
이제부터 더 큰 님의 비극이 시작됩니다. 허버트 박사는 님을 오클라호마 침팬지 연구소로 돌려보냅니다. 님은 그곳에서 다른 침팬지들과 어울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단독 우리에 갇혀 살게 됩니다.
어느날 유년 시절 자신을 키워주었던 스테파니가 찾아옵니다. 농장주의 만류에도 스테파니는 님을 만나겠다고 우리 안으로 들어갔고 죽기 직전까지 님은 보복을 가합니다. 오히려 버려진 자신과 놀아주었던 사육장의 밥이 찾아오자 그는 반겼습니다.
님에게 사람의 말을 배우는 것은 지옥과 같은 고통이었고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 자신과 놀아준 밥은 천국이었습니다. 아무리 인간에게 좋은 것이라고 하여 동물에게 이양할 수 없습니다. 무언가를 이양하는 것은 그 가치를 아는 대상에게만 가능한데 하느님 나라의 열쇠도 인간이 아닌 하느님 아들의 수준에만 이양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하느님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래야 그 권한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아들로 볼 수 있는 눈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어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고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받은 특별한 분으로 여기기는 하지만 그분을 하느님 자신으로 볼 시력을 지닌 사람들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십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사람의 아들’로 당신을 소개하셔도 베드로는 ‘하느님의 아들’로 볼 줄 압니다.
베드로의 이 시각은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났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은총과 가르침을 받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화 ‘블랙’(2005)에서 자신이 짐승인 줄로만 알았던 한 소녀가 한 스승을 만나 인간의 부모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이후로 모든 것을 새로 보게 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라면 자신도 인간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풀과 나무, 꽃과 물이 모두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존에만 집착했던 때와는 다르게 각 물체가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됩니다. 이렇듯 나의 정체성이 나의 시각을 좌우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아들로 새로 태어난 베드로에게 당신의 권한을 이양하십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아들들의 공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분의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이양받고 그것을 행사합니다. 그 권한은 “하늘 나라의 열쇠”입니다. 본인이 아직 인간의 자녀라고 믿는 사람에게만 이 열쇠를 맡길 수 있으십니다. 반대로 이 권한을 거부한다는 말은 하느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믿는 것이나 혹은 하느님께서 당신 권한을 당신 아드님께 주실 수 없다고 믿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줄 수 없겠습니까?
인간이 원숭이에게 어떠한 권한을 받겠습니까? 혹은 원숭이가 인간에게 어떠한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겠습니까? 인간만이 인간의 권한을 이양받을 수 있듯이, 그리스도의 권한을 이양받았다면 그리스도가 된 것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이 베드로에게 거룩한 것을 주셨다면 교회가 개들은 아니란 뜻입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행사한다면 그 교회는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이들의 공동체입니다. 또한, 스스로 그럴 자격이 있다고 믿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만약 그 권한을 거부한다면 스스로 거룩한 것에 합당하지 않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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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6,13-19: 너는 베드로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준다
오늘 축일은 예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셔서 모든 교회에 봉사할 권한을 주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념한다. 베드로 사도좌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 위에 세워진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데리고 필립보의 카이사리아 지방으로 가셨다. 그곳은 갈릴래아 바다 동북쪽 40킬로 떨어진 곳으로 요르단강의 상류이며 이곳 주민들은 유대인들이 아니었다. 이 한적한 곳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조용히 대화하실 수 있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곳에서 유대인들이 그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이다.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13절) 물으신다. 제자들의 대답은 여러 가지가 나왔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14절) 이렇게 물으신 것은 유대인들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을 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의 생각을 먼저 묻지 않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15절) 물으신다. 그동안 주님과 함께 있었고, 기적을 보았으며 주님과 함께 기적을 행한 제자들의 답은 무엇이었을까? 베드로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16절) 대답하였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 부름으로써,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생명 자체이시므로 죽음은 그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음을 나타낸다. 그 육신은 나약하여 죽었지만, 곧 다시 살아났다. 그 안에 거하시는 말씀을 죽음은 가두어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18절) 이 반석은 베드로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위해 주어진 신앙이다. 주님께서는 이 반석이라는 신앙 위에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하셨다. 가장 먼저 이 신앙을 고백한 사람을 이 이름으로 부르시며, 장차 그의 것이 될 권한에 대해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고백은 바로 우리의 고백이며, 우리의 공통적인 이 고백을 베드로가 가장 중요시할 것이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갖는 열쇠는 바로 교회가 갖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원이 되는 사람은 하늘나라에 참여하는 사람이고 그 상속자이다. 여기에 들지 못한 사람은 거룩한 것들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그리스도는 결코 흔들리지도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바위이시다. 그래서 베드로는 흔들리지 않는 교회의 확고한 믿음을 나타내는 이 이름을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이다.
이제 우리의 자세는 어떤가? 나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할 수 있는가? 나에게 있어 그분은 무엇인가? 어떤 존재인가? 이 질문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야 하며, 그 답을 각자의 생활과 믿음에서 각자가 발견하고 고백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알려준 지식으로서가 아니라 나 자신 안에서 우러나오는 답이어야 한다.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답을 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나에게 그분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베드로 사도좌 축일을 지내는 의미는 바로 당신 자신을 “종들의 종”이라고 부르면서 교회를 위하여 봉사하시는 교황을 중심으로 온 교회가 더욱 일치하고 그분이 더욱 많은 봉사를 잘하실 수 있도록 기도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베드로 사도가 당신의 신앙고백으로 이러한 직책을 가지셨고 하느님과 교회를 위하여 일생을 바치셨다면, 이제 우리도 올바른 신앙고백과 함께 삶을 이어가고, 언제나 하나인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으뜸, 교황님께서 하느님의 대리자로 교회를 올바르게 인도하도록 기도하며 주님의 도우심을 청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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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먹고사는 문제로 고민하며 살아가는 우리와 오늘 기념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와는 제법 큰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우리 삶의 자리와 베드로 사도좌와의 거리는 물리적인 거리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과도 그렇게 가깝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인 교황님이나, 교회를 책임지고 있는 주교님들과 성직자들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지 몰라도, 스스로 주일만 간신히 지킨다고 생각하는 신자들에게는 이 축일이 큰 의미로 와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심은 교황님과 주교님들을 비롯한 성직자, 수도자들의 신앙심에 한참 못 미치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온전히 삶을 투신하면서 살기에는 생각할 것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의 일상다반사가 예수님보다 더 크고 중요하게 다가올 때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부족한 신앙인이라고 자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런 신앙인이기에, 부족해 보이는 신앙인이기에 오늘의 축일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자신을 단 한 번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한 적 없으셨던 예수님 앞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을 반석 삼아 예수님께서는 그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그럼 베드로 사도는 위대한 인물이었을까요? 우리는 그가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어부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지닌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한결같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물 위를 걷다가도 풍랑을 바라보고 두려워서 물에 빠지고, 두려움 앞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고백합니다. 그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인공이십니다. 우리의 신앙심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을 체험한 예수님의 첫 제자가 베드로이기에, 오늘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은 우리와 깊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임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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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5-19)
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너희는 왜 나의 제자가 되었느냐?”, “왜 나를 따라다니느냐?”,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 같은 질문이 모두 합해져 있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제자들의 생각을 물어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을 물어보는, 즉 제자들이 스스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도록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시는 분이기 때문에 제자들의 믿음을 몰라서 물으신 것은 아닙니다.)
2)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저희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신앙고백입니다. 이 대답은, “저희는 구세주이신 스승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얻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자가 되었습니다.(스승님을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저희가 스승님에게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라고 물으신다면, 또는 “너희는 왜 신앙생활을 하느냐?” 라고 물으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리는 이미 베드로 사도가 말한 정답을 알고 있기 때문에 머리로는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대답은(예수님에게 바라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어려움을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바람이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는 있지만, 그 단계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끝까지 그런 것만 바라면서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인의 희망은 ‘세속의 복’이 아니라 ‘영혼 구원’과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당면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희망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그 단계에서 멈추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베드로 사도의 신앙고백을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언제든지 망설임 없이 그렇게 ‘진심으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3) “너는 행복하다!”라는 말씀은, “너는 복된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복된 사람’이 된 것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그를 뽑으셨기 때문입니다. “살과 피가 아니라” 라는 말씀은, 그의 신앙고백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셔서 그에게 계시를 내려 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그가 깨닫고 믿고 고백하는 과정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작용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의 신앙고백은 그 자신이 자유의지로 그 은총에 응답한 일입니다.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어떻든 그가 사도들을 대표해서 신앙고백을 하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4)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당신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은, 그의 ‘신앙고백’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고, 동시에 ‘베드로 사도’ 라는 한 사람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바로 그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 사도”를 반석으로 삼으셨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일에서 ‘신앙고백’과 ‘베드로 사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만일에 베드로 사도가 신앙에서 멀어진다면, 그것은 반석 자격을 잃는 일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더라도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라는 특정 개인을 반석으로 삼으신 일이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바로 뒤에 베드로 사도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 라고 혼나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마태 16,23), 또 그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일이 생겼을 때에도(마태 26,69-74), 예수님께서는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삼으신 일을 취소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일들은 신앙고백과는 상관없는 일들, 즉 베드로 사도가 판단을 잘못했거나 용기가 부족해서 생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5)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교회를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저승의 세력’이라는 말을, ‘죽음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악의 세력’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죽음의 세력’이라면 예수님 말씀은 ‘교회의 영원성’에 대한 약속이고, ‘악의 세력’이라면 적대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두 가지 뜻이 모두 들어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교회 전체를 향한 약속이기도 하고, 교회의 반석인 베드로 사도를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처럼 체질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 주어라."(루카 22,31-32)
그리고 이 약속은 신앙인 각 개인을 향한 약속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보호를 받으려면 예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전체 교회든지 개인이든지 간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스르면서 마음대로 막 산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보호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신다는 말씀은, 당신의 권한을 ‘위임’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위임’이기 때문에 그 권한 행사는 전적으로 주님 뜻에 합당하게 행사되어야 합니다. (그 권한 행사는 ‘하늘의 뜻’을 지상에서 대행하는 일입니다. 하늘이 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땅이 하늘에 종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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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교회를 맡기셨고, 천국의 열쇠를 주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온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같은 마음과 정성 그리고 힘을 다하여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갈랠래아 호숫가에서 베드로 사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 양들을 돌보아라.”
이웃사랑은 실천적이며, 구체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웃이 빠진 사랑은 감성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입니다. 이웃사랑은 하느님 나라를 이 땅 위에 건설하는 기초적인 수단이지만, 이웃사랑에서 ‘사랑’만 강조하면 공정과 정의는 설 자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웃 사랑은 정의와 공정의 실현이라는 백신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자선과 나눔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합니다. 자선과 나눔은 지금 굶주린 사람에게 빵을 주는 것이고 필요한 애덕의 실천입니다. 정의와 공정은 굶주린 사람이 빵을 만들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고, 굶주렸던 사람이 정의와 공정을 실현할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빵을 주는 자선과 나눔도 실현해야 하지만, 빵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도록 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일식집에서 스시를 만들었던 분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예전에 TV 프로그램에서 스시를 만드는 사람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번에 스시를 만드는데 정확하게 쌀의 숫자가 일치했습니다. 매번 스시를 만들 때마다 밥알의 숫자가 변동이 없었습니다. 대단한 내공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랬더니 형제님이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밥알의 숫자를 매번 같게 하는 것은 기술입니다. 진정한 스시는 만들기 전에 손님을 보는 것입니다. 손님이 체격이 좋고, 잘 먹을 것 같으면 밥을 더 많이 담고, 큰 스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손님이 마르고, 적게 먹을 것 같으면 밥을 조금 담고 작은 스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스시를 만들기 전에 꼭 손님의 얼굴을 보아야 합니다. 스시는 기술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형제님의 말에는 스시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습니다.
동양의학과 서양의학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서양의학은 증상을 없애는 방향으로 치료를 합니다. 효과가 빠르고, 신속한 치료가 가능합니다. 증상을 없애기 위해서 약을 쓰고, 수술을 하고, 방사선을 사용하고, 제거하기도 합니다. 동양의학은 증상의 원인을 없애는 방향으로 치료합니다. 환자가 기력을 회복하여 증상이 완화되도록 합니다. 기력을 회복하기 위해서 침을 놓고, 보약을 쓰고, 부황을 뜨고, 뜸을 뜨기도 합니다. 서양의학도, 동양의학도 사람의 건강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인류의 유산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의 증상을 없애는 것도 필요한 치료방법입니다. 지금 아픈 사람이 그 원인을 알아서 스스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중요한 치료방법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는 교우들의 아픔을 들어주어야 합니다. 아울러 교우들이 주님께 나갈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 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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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하늘과 땅 사이에 나>
마태오 16,13-19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다)
예수님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 다다르시자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시몬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시몬 바르요나,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하늘과 땅 사이에 나>
하늘은 땅으로
땅은 하늘로
그 사이에
내가 있으니
땅이 척박해도
하늘을 우러르며
희망하고
하늘이 드맑도록
땅을 정갈하게
보듬고
하늘을 두려워하며
땅의 모든 것을
삼가야지요
땅으로 향하는 하늘과
하늘로 향하는 땅을
가르는 내가 아니라
잇는 내가 되라고
하늘과 땅 사이에
그분께서 나를
놓으셨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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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신통한 베드로>
시몬은 베드로의 지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시몬의 천상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그 위에 주님의 교회가 세워질 것이랍니다. 게다가 그에게 천국의 열쇠를 맡기겠답니다.
그의 무엇이 그럴 만한 것이었나요? 그의 지식, 그의 능력, 그의 가문, 그의 업적, 그의 이력, 그의 그 어느 것도 교회의 반석이 되고 천국의 열쇠지기가 될 만한 것 못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저의 외할머니는 말하자면 신이 내린 무당이셨습니다. 그러나 굿이나 푸닥거리를 하지는 않으셨고 단골이 중요한 때 찾아 와 뭘 물으면 꿈으로 대답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神通하게 잘 맞았나봅니다. 꿈속에서 관운장 신이 알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神이 내리고 神이 알려주면 神通하니 잘 맞출 것입니다.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살과 피의 시몬 바르요나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려주시는 베드로가 하느님 덕분에 교회의 반석과 천국의 열쇠지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살과 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하고 실행한다면 그의 교회는 무너지고 천국의 문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부산의 본당에 있을 때 주역으로 점을 쳐주는 분이 세례를 받기 위해 찾아와 교리를 배우셨습니다. 그분은 절에서 고시공부를 하다가 주역을 배우게 되었고 고시에 실패하자 배운 주역을 가지고 점쳐주며 먹고 살았는데, 이 분 말씀이 정신수양을 하지 않고 그래서 욕심이 끼면 점을 잘 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주역을 아무리 잘 알아도 살과 피가 작용을 하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로 말하자면 기도에 해당되는 정신수련을 철저히 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어떤 결정을 내리고 무엇을 할 때 종종 인간의 머리로 판단하고 인간적인 능력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랬을 경우 그것은 아무리 교회의 일이어도 인간의 일일 뿐입니다. 교회의 일이 다 하느님의 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을 하는 사람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저와 같이 일을 많이 벌이는 사람은 너무도 조심해야 합니다. 지금 하려는 것이 하느님 일인지 사람의 일인지 잘 식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를 잘 해야 합니다. 청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神通하기 위해서입니다.
See-Judge-act / 보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요즘 무슨 일을 기획하고 실행할 때의 방법론인데 우리의 경우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고 하느님의 정신으로 판단하고 하느님의 열정으로 행동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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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적은 수의 사람들과 미사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많지 않아 강론 대신에 각자 나눔을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날 복음 말씀은 ‘밭 속에 묻힌 보물’의 비유(마태 13,33 참조)였습니다. 저는 이 복음 말씀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러분에게 보물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아내라고 하였고, 어떤 사람은 가족이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음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의 보물이 ‘예수님’이라고 말한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날 미사에 초대받은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신학생 때 선배 신부들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예전에 비하여 본당 주일 학교가 활성화되지 않아, 어떻게 하면 아이들을 끌어모을 수 있을지 젊은 신부들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고민 끝에 아이들의 문화를 성당에 도입하였습니다. 노래방 기계도 가져다 놓고, 댄스 교실도 운영하고, 운동도 마음껏 할 수 있게 하면 아이들이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1년, 2년은 뜨거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추풍낙엽처럼 아이들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그러한 경험을 한 선배 신부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주일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다. 그것이 기초가 되지 않는 한, 그 어떤 화려하고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도입하여도 잠깐은 반짝할 수는 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한다.”
바오로 사도는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입니다.”(필리 1,21)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무엇을 모퉁잇돌로 삼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은 모래 위에 지은 집과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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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베드로. ‘반석’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저승의 세력도 이길 수 없도록 교회를 이끌어 주실 성령을 약속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까지 맡기신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풀어 보면 이렇습니다.
“나는 내가 믿고 희망한 하느님께서 내가 죄인이고 나약하지만 언젠가는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 믿어 왔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내 눈앞에 생생하게 그 하느님의 능력과 자비를 보여 주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과연 이 고백은 인간적인 약점 투성이였던 베드로가 이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자신의 확신에서 온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가르쳐 주신 은사임을 깨닫게 됩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선한 의지로 산다 해도, 악의 유혹과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는, 인간의 재주와 능력이 아니라 성령의 자비와 은사로 세워진 하느님 백성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는 내가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교만과 위선으로 남들에게 잘난 체하는 사람, 수시로 말을 바꾸며 변명만 하는 사람, 가정은 돌보지 않고 교회 봉사만 하는 사람,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교회에서 인맥만 쌓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섬기기보다 섬김을 받으려는 사제들과 수도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회심한 베드로는 말합니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라는 시편 저자의 기도가 우리 삶을 이끌 때, 교회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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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6년 여름밤, 여덟 살 소년이 자전거를 타고 길을 건너다가 트럭에 치였습니다. 트럭은 소년을 9m 정도 끌고 간 뒤에야 멈췄습니다. 아이는 트럭 밑에 끼어 있는 상태였지요.
그런데 이 사고를 본 한 중년의 노동자가 달려와서 트럭 프레임을 움켜쥐고서 차 앞쪽을 들어 올렸습니다. 그것도 차 아래의 소년을 끌어낼 수 있도록 45초간 잡고 있었답니다.
사실 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데드리프트 세계 기록은 500k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트럭의 무게는 1,500~1,800kg이었습니다. 더군다나 그는 역도선수도 아니었습니다. 그때 어떤 생각을 했느냐고 기자가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렇게 고통받는 사람을 위해 도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인간도 아닐 것입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습니다. 저 애가 내 아들이라면? 당장 달려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도움을 줘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이 기적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인간의 길은 사랑을 실천하며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이 길을 포기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느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먼저 사람들의 생각을 물어보셨습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 질문은 가르침을 시작하셨을 때가 아니라,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위로와 힘이 되는 말씀을 전해주신 다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성장을 보고 싶으셨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생각은 아예 물어보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알고 있으며, 많은 사람이 그들을 따르고 있기에, 예수님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으려면 그들의 생각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견해는 아예 무시해버립니다. 나쁜 동기로만 가득 찬 종교지도자들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데 있어서 나쁜 동기로만 가득하다면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질문도 던지지 않으실 것입니다. 일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마음이 필요하고, 또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과 사랑이 있어야만 주님의 질문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사람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 모습을 취할 때가 많습니다. 자기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는 이기적인 위선자의 모습 말이지요. 철저하게 사랑을 따르는 사람의 길을 가야 합니다. 그래야 베드로와 같은 정답도 말할 수가 있으며, 하느님 나라에서 큰 영광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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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계점>
버너 위에 물이 가득 담긴 물 주전자를 올려놓았습니다. 아직 끓지 않고 있을 때 물의 온도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린 뒤에 물이 펄펄 끓습니다.
이 순간의 온도를 우리는 확실하게 압니다. 맞습니다. 100도입니다. 100도가 되어야 물이 끓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끓으면서 액체 상태의 물을 기체 상태의 수증기로 바꿔놓습니다.
바로 1도의 차이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상태가 다른 상태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임계점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열심히 노력했다고는 하지만, 혹시 그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해서 실패를 맞이했던 것이 아닐까요?
임계점이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임계점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노력 안에서 얻게 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보다는 분명히 많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지레 겁을 먹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노력해보고 힘차게 실천하는 삶이 우리가 원하는 성공에 가깝게 만들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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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으뜸 중의 으뜸>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 사도를 선택하여 지상의 대리자로 삼으신 것을 기리는 축일입니다. 사도들과 그 후계자들과 소통할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권위와 책임의 무게를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해 사순절, ‘코로나19’가 창궐하는 가운데 비가 쏟아지는 텅 빈 베드로 광장에서 기도하시던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의 아들을 누구라고들 하더냐?”(마태16,13)하고 물으시자 제자들이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레미야나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16,15)하고 물으셨습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남들이 이렇다 저렇다 하는 것에도 귀 기울여야 하지만 나의 소신과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 이십니다”(마태16,16) 라고 한 신앙고백이 베드로의 고백이기도 하지만 오늘 나의 고백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그리스어로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메시아는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받은 사람’이라는 말이 구세주란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락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하여 약 50년간 바빌론 유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유배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주변 강대국의 속박을 받으며 겨우 명맥을 이어갑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님인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원자를 보내어 선민인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에 대해 상상을 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사제와 같은 인물로, 또 다른 이들은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과 사제, 예언자는 모두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아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것은 예수님은 여러 예언자처럼 역사의 인물이기는 하지만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물임을 인정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라 으뜸 중의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으뜸 중의 으뜸이기에 권위가 있고, 그에 걸맞은 책임도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만큼 주님께서 이루고자 하시는 소명에 귀 기울이고 복음적인 삶에 결코 소홀함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텔레비전 시청 시간을 10분만 줄여 성경을 봉독한다면 하루의 삶이 달라질 것입니다.
일반 신문이나 잡지를 보는 시간 5분을 교회 서적을 읽는 시간에 할애하거나 묵주기도 1단을 한다면 기도의 맛을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육신을 위하는 시간에 못지않게 영적인 몫을 챙겨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오늘을 변화와 쇄신의 날로 삼고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의 삶의 모습이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요? 미루지 않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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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그리스도 중심의 삶>
-순수한 마음과 사랑, 기도가 답이다-
오늘은 성 베드로 사도를 최고의 목자로 공경하는 성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가 얼마나 살아있는 깊은 전통의 종교인지 보여 주는 참 자랑스런 축일입니다. 이미 1600년전 4세기경부터 로마에서 지켜진 축일입니다. 가톨릭 교회의 으뜸 교구는 로마요, 교황은 로마의 주교입니다. 로마의 특별한 지위는 성 베드로와 관련됩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처럼 사도 베드로의 반석위에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하여 교회 일치는 로마는 물론 타교구의 연대에 의해 표현되며 교황님이 통상적으로 말할 때 그분이 선포한 것은 그에 대한 자신의 이해가 아니라 전교회의 믿음이 됩니다. 제1대 교황 사도 베드로의 후예가 현재의 제266대 성 프란치스코 교황님이며 교회일치의 중심적 역할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수도원을 한결같이 사랑하는 분들의 공통적 특징은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에 기도하는 분들입니다. 사랑과 기도는 함께 갑니다. 사랑의 기도와 더불어 마음의 순수와 깊이입니다. 누구나 좋아하는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입니다. 기도를 잘하는 비결도 사랑뿐입니다.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고 기도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오늘도 어제 있었던 여러 일화와 깨달음으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1.오랫만에 피정온 요셉피나 수녀와의 만남이 참 각별했습니다. 23년전 태백에 있을 때 찍어 준 사진을 지금도 보관하어 있었습니다. 나이에 상관없이 순수한 사랑을 만나면 저절로 활짝 열리는 마음입니다. 음성이 좋아 ‘행복기도’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시에 이어 오늘부터 틈틈이 부르기 시작한 ‘동무생각’, ‘봄이오면’ 가곡을 부탁했더니 정말 아름다운 목소리로 불러줬습니다. 아름다운 가곡은 때로 기도처럼, 사랑의 고백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즉시 “오늘은 요셉피나 수녀 방문 축일로 해야겠습니다.” 덕담을 드리며 크게 웃었습니다. 참 기분좋은 훈훈한 여훈餘薰의 향기가 지금도 은은합니다.
2.어제 주일은 점심 식탁은 삼겹살이 중심이었고, 저녁은 게장이 중심이었습니다. 잘먹으면 공동체가 평화롭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합니다. 수도원의 성당과 식당 두곳은 공동체 일치에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저녁식사후 삼겹살, 게장을 봉헌한 천효리 자매에 대한 찬사의 덕담에 모두 공감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천효리로 시작해서 천효리로 끝났네요. 참 순수한 분입니다. 하느님으로 시작해서 하느님으로 끝나는 우리의 삶인데 천효리도 함께 했으니 하늘 나라 구원은 보장됐습니다.”
3.어제는 난데없이 예전 제 강론에 대한 평을 듣고 크게 격려받으며 각오를 새로이 했던 추억이 생각났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은 깊이가 남다르며 쉽고, 감동이 있고 아름답습니다.”
너무 고마운 김근수 평신도 신학자님의 언급에 제 삶의 좌표로 삼고 싶은 네 요소, 깊이, 쉬움, 감동, 아름다움입니다. 또 아주 오래 전, 2004년 3-5월 사이에 로마에서 있었던 40여명의 수도승 양성 프로그램에 참석했던 세계 각국의 사제들과 수도자들중 호주 수녀로부터 제 미사중 영문 강론에 대한 평이 생각났습니다.
“단순하고simple 다채롭고colorfull 실용적이고practical 좋은 메시지good message를 준다”.
또 여러분이 저를 ‘영적사제spiritual priest’라 평했다는 말도 좋은 격려가 되었습니다. 이런 격려가 더욱 좋은 영적 삶을 위해 분투하려는 의욕을 갖게 합니다. 바로 이에 대한 근원적 비결은 주님 향한 순수와 사랑, 기도뿐임을 깨닫습니다.
사랑할 때 알고 알 때 보입니다. ‘사랑-앎-보임’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그대로 순수한 사랑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 대한 깊고 순수한 사랑이 예수님을 알게 했기에 물음에 대한 제자들을 대표한 베드로의 즉각적 정답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물음이기도 합니다.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참으로 깊고 순수한 사랑과 기도로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았던 베드로임이 분명합니다. 이에 감격, 감동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축복 선언입니다. 아마 평생 주님의 이 말씀은 베드로의 신원 확립에 반석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바로 오늘 베드로 사도좌 축일의 근거가 되는 참 고맙고 감동적인 그리스도 예수님의 베드로 사도에 대한 격찬의 고백입니다. 참으로 순수한 사랑과 기도의 사도, 베드로에게 주어진 천상은총의 축복선물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말씀도 베드로다운 충고입니다. 요한복음(21,15-19)에서 주님과 베드로의 세 번씩이나 주고 받은 물음과 답이 생각납니다.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역시 베드로뿐 아니라 우리 모두를 향한 그리스도 예수님의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명쾌하게 우리의 사랑을 대변합니다.
“예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에 계속되는 주님의 간곡한 당부와 명령도 잊지 못합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
“나를 따라라.”
정말 주님이 나를 순수한 사랑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인 내 양들을 잘 돌보고 챙기며 주님인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신신당부 말씀입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말씀안에 주님께 대한 사랑과 양떼에 대한 순수하고도 깊은 사랑이 잘 드러납니다. 교회지도자들은 물론 교사, 부모 및 다양한 분야의 공동체 봉사에 책임을 진 모든 분들에게 해당된 말씀입니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성으로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
바로 봉사직인 서비스업의 본질적 사항을 적시합니다. 무엇보다 한결같이 순수한 사랑, 기도, 겸손의 섬김에 모범이 되라는 것입니다. 어제 한 자매님이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모범이 뭐냐는 질문에 ‘기도하는 어머니’라 답해 줬던 일이 생생히 떠오릅니다. 마지막 베드로를 통한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용기백배하게 합니다.
“그러면 으뜸 목자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은 시들지 않는 영광의 화관을 받을 것입니다.”
묵주기도 영광의 신비 5단에 덧붙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의 화관을 씌우심을 묵상합시다.’기도로 바치니 참 흡족한 기분입니다. 참으로 한결같이 순수와 사랑, 기도와 겸손한 섬김의 모범을 살았던 이들에 대한 주님의 축복약속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살도록 도와 주십니다.
“주님의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시편2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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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교회 직분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명확히 하십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마태 16,17)
예수님께서 당신을 누구라 여기는지 제자들에게 묻자 베드로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의 신원이 정확히 드러난 이 대답에 예수님께서 매우 흡족해 하시면서 베드로를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베드로가 발설한 정답이 그 자신의 지식이나 생각에 기인하지 않고 하느님에게서 온 것이기 때문에 그는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불어넣어 주신 영께서 그를 채우고 있기 에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느님에게서 오는 생각을 따르는 일이 늘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하느님의 성령께 마음을 열고 있지 않으면 얕은 상식이나 꾀로 주님에게서 오는 영의 움직임에 귀를 막고 제 것을 하느님 생각인 양 고집할 수도 있지요. 안타깝지만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성경을 통해 드러난 베드로의 약함을 모르지 않으나, 이 순간 하느님께서 심어 주신 말씀을 있는 그대로 고백한 베드로의 단순한 신앙에 마음이 끌립니다. 아마 주님께서도 그런 그의 투박하지만 충실한 기질을 보시고 그를 선택하신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18-19)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에는 베드로의 직분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직분을 주시는 주체는 철저히 예수님이시지요.
"내가 ... 세울 터인즉." 교회를 세우는 이는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님이십니다. "내 교회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을 머리로 하는 몸이지요. "나는 ... 주겠다." 하늘 나라의 열쇠를 맡기시는 분도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에게 문지기의 소임이 맡겨졌을 뿐, 하늘 나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시지요.
"너는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워 주어라."(입당송)
그런데 성 베드로 사도좌를 기념하는 오늘의 말씀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부인하고 그분 곁을 떠났던 슬픈 사건의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인간 베드로는 비겁하고 나약했지만, 그를 부르시어 직분을 맡기시고 그 자리에 세워주신 분은 모든 것을 떠안으실 만큼 크고 충실하신 분이시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제1독서는 우리가 아는 그 베드로 사도가 목자의 직분을 수행하는 다른 원로들에게 간곡히 권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고난의 증인이며 앞으로 나타날 영광에 동참할 사람으로서 권고합니다."(1베드 5,1)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죽음까지 수락하여 십자가의 영광을 바라보기에 이처럼 말할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 자신의 인간적 배경이나 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제 것으로 수락했기에 주어지는 권한입니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1베드 5,2)
목자의 첫째 직무는 "으뜸 목자"이신 예수님처럼 사랑을 다해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렇게 합니다. 목자는 늘 자기 안위나 이익에 앞서 양 떼를 떠올리고 그들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존재입니다. 베드로는 약한 자신을 택하시어 당신 뜻을 불어넣어주신 은총의 체험으로 죄스럽고 부족하나마 맡겨진 직무를 충실히 채워가며 주님의 교회를 지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오늘은 인간적 약함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양들을 위해 봉사하는 모든 목자들과, 저마다의 자리에서 충실히 소명을 채워가는 우리 모두를 기억하며 응원하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베드로 사도를 이어 주님의 교회를 돌보고 이끄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면 좋겠지요. 교황님부터 세상 끝 이름 모를 형제까지 온 세상의 목자와 양들이 함께 기쁘고 흡족하고 행복한 오늘이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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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홍언 요한보스코 신부님]
♡김홍언 신부님의 영성의 샘물♡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앞으로 사순절 동안 묵상)
형제들이여, 믿음을 견고히 세워 주고 신심을 변함없이 유지해 주며 덕행을 지속시켜 주는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기도와 단식과 자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도는 문을 두드리고 단식은 청하며 자선은 받습니다. 기도, 단식, 그리고 자선, 이 세 가지는 한 묶음이고 서로서로 의지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기도의 영혼이고 자선은 단식의 생명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서는 제대로 작용할 수 없으므로 분리되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세 가지 중에 한 가지만 있고 다른 두 가지는 갖고 있지 않다면 한 가지도 갖고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강론」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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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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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베드로 사도좌 축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의 신비’와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곧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신비’를, 베드로에게 부여되는 권한을 통해서는 ‘교회의 신비’를 잘 드러내줍니다.
우선,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성부 하느님에 대한 고백이요, 성자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고백입니다.
곧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성부와 절대적이고 유일한 관계를 지니신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밝혀주신 이 계시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곧 교회는 바로 “하느님 아드님”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세워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 16,18)
또한, 베드로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열쇠”는 권한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매고 푸는” 특별한 권한을 베드로에게 부여하셨습니다. 이제 “매고 푸는” 권한을 하늘에서 보증하고 인정해주는 이 어마어마한 사실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늘이 땅에서 열린 것입니다.
곧 우리는 하늘을 땅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매인 것’을 푸는 일은 하늘에 가서 하는 일이 아니라, 땅에서 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곧 우리가 땅에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할 때 하늘을 만나게 됩니다. 그것은 하늘이 이미 땅에 와 있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사랑의 행위 안에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는 땅에서 하늘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형제를 용서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거든, 바로 지금 용서해야 할입니다. 바로 오늘이 용서의 축제일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
교회의 신비는 바로 여기에서 유래됩니다. 곧 교회 안에는 하늘로부터 오는 “계시”가 활동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권한”이 활동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오직 하늘에서 오는 그 “매고 푸는” 능력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믿음을 굳게 해 주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베드로와 그의 후계자들과 신앙으로 일치하여 나아가게 됩니다.
하오니, 주님!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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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19)
주님!
당신께서는 하늘나라의 열쇠를 하늘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땅에 있는 저희에게 주시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 풀리게 하셨습니다.
형제를 받아들임이 당신을 받아들임이라 하시고, 제 형제를 당신 나라를 여는 열쇠로 주셨습니다.
하오니, 묶인 것, 막힌 것을 풀게 하소서!
오늘, 이 땅에서 당신의 나라를 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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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마태16,18)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우리가 믿어야 할 교회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전합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그렇습니다. 가톨릭교회는 하나인 교회이며, 거룩한 교회이며, 보편된 교회이고, 사도로부터 이어 오는 교회입니다.
오늘은 베드로 사도가 제1대 교황으로 선택된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나?" 라는 예수님의 신원에 관한 물음에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16,16) 라는 완벽한 신앙고백을 예수님께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에게 다음의 말씀으로 교회의 수위권을 맡기고, '당신의 지상 대리자'로 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16,19)
교황은 '이 지상 그리스도의 대리자'입니다. 그리고 현재 교황인 제266대 프란치스코 교황은 제1대 교황인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입니다.
오늘 독서는 교회의 원로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하는 베드로 사도의 권고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있는 하느님의 양떼를 잘 치십시오. 그들을 돌보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자진해서 하십시오. 부정한 이익을 탐내서 하지 말고 열정을 다하여 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맡겨진 이들을 위에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떼의 모범이 되십시오."(1베드5,2-3)
교회 안에 이런 목자들, 이런 성직자들이 많아질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도 베드로처럼 멋지고 완벽한 신앙고백을 예수님께 드리고, 이 신앙고백의 힘으로 다시 일어나고 다시 부활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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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YUZUgWT-CIQ&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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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마태 16, 19)
복음의 진리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많은
사도좌들을
기억한다.
사도좌는
힘겨운
직분이다.
하느님 백성을
위한 봉사자가
바로 사도좌라는
직분이다.
하느님의
교회 안에서
사도좌는
사도좌의
무거운
역할이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봉사자의
선두에 서서
앞장서 나가시는
분이 바로
사도좌이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직접 찾아가신다.
사랑과 지혜가
필요한 삶이다.
교황님의
삶이란
그리스도의
사명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기도와 실천의
삶이다.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선포하신다.
신앙의 기쁨은
함께하는
기쁨이다.
복음을
바탕으로 하는
개혁과 변화는
열정과 참여를
통한 신앙의
선물이다.
다시금 신앙이
무엇인지를
묻게 된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본질이다.
하느님의
힘으로
교회는
사랑으로
일치할 것임을
믿는다.
이 사순시기는
각자의
직분으로
돌아가
기도하고
사랑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시기이다.
은총이 큰 만큼
감당해야 할
십자가의
무게도 크다.
교황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듯
우리들은
교황님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하느님의 백성은
심장과 머리
손과 발의
기능처럼
하나의 몸이며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생명의
교회이다.
그 교회안에
은총과 성장
회개와 변화가
있다.
주님,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은총과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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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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