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오랜꿈
『타락천사』:절망의 끝에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영화『타락천사』는 원래 독립적으로 기획되었던 작품이 아니라 『중경삼림』의 세번째 이야기로 구상되었다. 『타락천사』의 탄생 배경에 대한 왕자웨이 감독의 설명을 들어보자.
"『타락천사』는『중경삼림』에서 좀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발전시킨 것이다. 임청하의 첫번째 이야기, 왕정문의 두번째 이야기를 찍고 난 후 마지막 살인자의 이야기를 담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해서 『중경삼림』의 속편은 아니다. 단지 그속에 담긴 정신이 같을 뿐이다. 『타락천사』는 『중경삼림』과 기술적으로도 구조적으로도 서로 다르다."
그의 말대로 『타락천사』와 『중경삼림』의 두드러지는 차이점이 한 가지 있다. 슈퍼-와이드 앵글 렌즈의 사용이 그것이다. 슈퍼-와이드 앵글 렌즈의 원근법에 의한 굴곡은 원래는 가까이 있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멀어보이게 한다. 왕자웨이 감독은 현대도시의 인간관계를, 아주 가까운 듯이 보이지만 미소 속의 거리는 오히려 멀기만 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가 사용한 와이드앵글 렌즈의 극단적으로 과장된 거리감과 인물의 왜곡은 이런 도시인의 심리와 감정을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① 사랑 하나-고독이 운명인 사람에게서 고독을 느끼지 않기 위해선 고독을 몰라야 한다
기억을 잃어버린 킬러 지명(여명)과 그의 파트너 과장(이가흔)은 동업을 시작한 지 155주가 되었지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다. 킬러가 과장의 지시를 받고 청부살인을 하러 나가면 과장은 그가 없는 방에 들어와 침대 시트를 갈고 쓰레기를 치우면서 그가 낮동안 무엇을 했는가를 알아낸다. 서로를 향한 마음은 깊어만 가고, 이런 감정을 애써 외면하는 두 사람.
타락천사 NO.1 : 나는 지금까지 고독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지명이 킬러라는 직업을 좋아하는 이유는 '결정을 내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죽어야 할 놈/시간/장소, 이 모든 게 과장에 의해 결정되어 진다. 그의 세계는 오직 그녀를 통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동업자 과장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떠나야 할 시간임을 느낀다.
"가끔 그녀에게 고의로 단서를 준다. 내가 원하는 곳에 나타나도록. 그동안 우리는 거리를 두었지만 그녀는 내 삶의 지울 수 없는 일부이다. 그러나 지금은 떠나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그는 쥬크박스에 노래를 남긴다. No.:1818, 곡명:'그 사람을 잊는다는 것'.①
① 忘記他 - 그를 잊는다는 것
"그를 잊는다는 건, 모든 걸 잃어버리는 것. 살아갈 의미를 잊은 채 내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지. 그를 잊는다는 건 내삶의 기쁨을 잃어버리는 것이고, 마음과 영혼을 가두어 고통의 심연으로 빠져드는 것. 그 사람이 있어 나를 사랑할 수 있었고, 그의 사랑이 있어 세상 모든 걸 아름답게 사랑할 수 있었지. 그를 잊는다는 것, 어찌 그를 잊을 수 있을까? 가슴 깊은 곳에 그를 새겨 영원히 기억할 거야. 영원히 아무 것도 그려 넣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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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타락천사』는 킬러 지명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그의 인상은 그리 강렬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불을 뿜는 총구조차 밋밋하게 느껴질 정도로. 세상에 킬러가 그렇게 연약한 모습-사랑하는 여인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못 하는-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를 잊을 수 없다. '사람은 안 하던 짓을 하면 안 된다'는 그의 죽음 앞에 차라리 눈물을 흘릴지언정...
타락천사 NO.2 : 나는 고독을 모른다. 아니 영원히 알고 싶지 않다.
"함께 일한 지 155주가 되었지만 우리는 처음으로 함께 앉아 본다. 사랑이란 감정이 두려워 우리는 늘 떨어져 있었다."
아주 섹시한 '천사' 과장. 그녀의 직업은 킬러에게 '일거리'를 가져다 주는 것. 그속에서 킬러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그의 망설임을 이해하고 떨어져서 바라보기만 한다. 대신 그의 방을 치우고 그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그의 체취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러나 그가 떠나려 하자 그녀는 살인(!)을 사주한다. 사랑 따위에 슬퍼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보다 그를 영원히 잃어버리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리기 위해.
그러나 기억을 지운다고 상처까지 사라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녀는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한다.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물이 나오게끔 만드는, 슬픈 얼굴로.
② 사랑 '둘'-고독을 이기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의 차이
과장이 묵고 있는 중경 호텔 지배인 아들이자 죄수번호 223인 하지무(금성무)는 5살 때 기한 지난 통조림을 먹은 후 말을 잃어버렸다. 그는 밤마다 주인없는 상점에 무단 침입하여 장사를 한다. 어느 날 떠나버린 남자 때문에 전화통에 매달려 있는 체리(양채니)를 만나고, 애인을 뺏어간 戀敵을 찾아 혼내주겠다는 그녀를 도와 밤거리를 헤맨다.
하지무는 체리에게서 첫사랑을 느끼고, 언젠가는 그녀가 떠나간 사랑을 잊게 되는 날이 올 거라고 기대하지만 약속장소에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잊혀진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던 것. 이 짧은 사랑은 그를 성숙시켰고, 그는 이제 일본 음식점에 취직해서 일을 한다. 그러나 그에겐 아직 잃어야 할 게 남아 있으니….
타락천사 NO.3 : 나는 고독이 뭔지 잘 몰랐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다.
"남들은 십대에 사랑을 경험하지만 난 늦은 편이다. 눈이 높아서일 거다. 1995년 5월 30일 난 첫사랑에 빠졌다."
입가에 스미는 장난기와 얼핏 느껴지는 도시 청년의 고독의 이미지 하지무. 밤마다 남의 상점에서 손님을 만들어 장사를 하는 이 철없는(?) 청년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그는『타락천사』에서 가장 많은 걸 잃어버리는 인물이다. 말을 잃어버렸고, 아주 뒤늦게 찾아온 첫사랑이 그를 떠났고, 그의 머리를 감겨 주고 요리도 해주던 아버지도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그의 천진난만한 웃음-『타락천사』에서 관객이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그러나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행동은 차라리 처절함 그 자체이다.-뒤에는 아릿한 슬픔이 배어 있는 것 같다.
더이상 잃어버릴 게 남아 있지 않은 사람에게 슬픔은 무의미한 것이다. 거부할 수 없다면 받아들일 수밖에…
석달 뒤 상점에서 우연히 첫사랑의 그녀를 만난다. 그녀는 이미 그의 존재를 잊어버린 듯하다. 그래도 그는 웃을 수 있다. 낙천적이니까!②
② 어쩌면 금성무의 (삶의) 모습에서 왕자웨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1997 그날' 홍콩의 상징을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1995년의 홍콩, 떠나갈 사람은 이미 떠나갔거나 준비를 마친 상태. 그러나 남아서 살아야 할 사람들은? '차, 포 떼인 장기판'에서 이제 또 잃어버릴 그 무엇이 남았으랴! 운명의 그날, 1997년을 조용히 기다릴 수밖에.
또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의 이 화려한 홍콩이 아니라 그저 중국 대륙의 한 귀퉁이로, 오늘 홍콩의 그 화려한 네온사인이 아니라 뒷골목 까페의 어두운 모습으로 전락되어 버린다한들 그게 또 뭐 그리 대수겠는가. 그래도 나는 존재하고 있고, 또 살아가야 할테니까. 어차피 현실이 이러할 바엔 절망의 끝, 고독의 끝에서 헤어나오는 연습이라도 해 두는 게 어떠하냐, 는 '메타포'(metaphor)는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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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천사 NO 4 : 나는 고독을 견디지 못한다. 항상 곁에 누군가 있어야 한다.
사랑없이는 한순간도 견디지 못 하는 철없는 첫사랑 체리, 그녀는 실연의 상처를 이기기 위해 있지도 않은 연적을 찾아 밤거리를 휘젓고 다닌다. 그녀 곁에서 외로움을 지켜주는 한 남자의 사랑은 모르는 척 하며. 그녀의 미소는 너무나 예쁘다. 그 미소에는 세상의 고민도, 고독의 슬픔도 없이 해맑다. 그 미소년 같은 맑은 얼굴로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걸 보고 있노라면 말없이 다가서서 어깨라도 빌려주고 싶은 심정이다.
"내가 이곳에 온 이유는 기적을 바래서야. 그가 TV에서 날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
사랑했던 사람과 자주 갔던 곳에 가게 되면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정말 기적이 생겨 떠났던 그가 후회하며 다시 돌아오기를 희망도 해보고, 이 모든 게 부질없다고 생각되면 멍하니 바깥 풍경만 바라보고… 어쩌면 그녀는 사랑을 잃고 힘들어 할 우리의 모습을 영화 속에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하다.
③ 사랑 '셋'-고독보다 더 두려운 것, 그것은 잊혀지는 것!
마침내 킬러는 과장에게 헤어지자는 메시지의 노래를 남긴 채 떠나가고 우연히 만난 펑키(막문위)와 이별이 예정된 사랑을 한다. 펑키는 킬러에게 잊혀진 여자였다. 펑키는 킬러와 과장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둘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러나 이 만남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타락천사 NO.5 : 나는 고독이 두렵다. 그러나, 홀로 남겨지는 것보다 더 두려운 건 잊혀지는 것!
"비는 계속 내렸다. 이 폭우 속을 어떻게 가야 하나. 비옷이 절실할 때 그가 다시 돌아왔다."
킬러에게 잊혀진 여자 펑키. 그후 그녀는 아무도 그녀를 잊지 못하게 하기 위해 머리를 염색하고, 소리내어 웃고, 떠들고, 과장된 행동을 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아비정전』의 유가령, 『중경삼림』의 왕정문, 『타락천사』의 막문위. 이 세 사람의 이미지는 비슷하다. 사랑에 대해 욕심이 많고 이를 소유하고 싶어하지만, 고독에 빠진 남자 때문에 힘들고 외롭다. 그러나 절대 그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그녀들은 여린 듯하면서도 강한 사랑을 한다.
톡톡 튀는 탁구공 같은 느낌이 드는 여자 펑키. 어쩌면 그녀는 네온이 휘황찬란한 도시의 한 귀퉁이에서 우연히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소유자이다. 네온에 휘청거리는 밤거리를 홀로 걸어도 외롭지 않은 건 이런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들은 도시를 이야기하면서도 번쩍이는 번화가보다는 뒷골목을, 깔끔하고 현대적인 음식점보다는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식당을 지목하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화려한 도시의 한복판보다, 뒷골목의 오래된 까페가 더 어울리는 왕자웨이 감독의 도시 천사들은 사는 게 그리 간단치 않기에 벅차고 고독하지만 견디며 살아간다. 저마다 행복한 모습으로...
고독을 질겅질겅 씹고 있는 이 '천사'들은 마치 이런 게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아마도 왕자웨이 감독이 『타락천사』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도 바로 이런 게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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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영화 정말 인상 깊게 봤었죠,.. 어렸을때 봤는데도 (6년 넘었나?)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영화.. 내용은 잘 생각이 안나고 장면장면과 화면색채 들이 생각나요~^^; 아무튼 너무 좋았어요~
너무상업성틱하다
상업적으로 흥행을 위해 만들었다고 해도 이영화정도면 아주 잘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흥행은 별로 였던듯한데. 하긴 왕가위 영화가 대부분 그렇죠. 하지만 개인적인생각에 영화 아주 잘 만들어요.
저도 영화본지가 오래되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화면(왕가위 특유의 것이라고 하는) 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