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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8일 목요일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제1독서 : 창세 3,9-15.20
제2독서 : 에페 1,3-6.11-12
복 음 : 루카 1,26-38
그때에
26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27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28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29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30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31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32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33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35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36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 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
37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38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아이가 중요한 시험을 망쳤습니다. 좋은 결과가 아니라서 크게 실망했는데,
이 아이의 엄마도 크게 실망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버립니다.
이런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특히 수능이 끝나고 나면, 실망한 부모의 모습을 많이 봅니다.
분명히 더 큰 실망은 아이일 텐데,
부모가 더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는 그 부모가 심리적으로 아이에게 구속된 것입니다.
아이의 실패가 곧 자기의 실패이기 때문에, 아이의 마음을 돌보기보다
자기 슬픔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예도 있습니다.
“시험 망친 건 너야. 잘 봤어야지.”라면서 외면하는 부모입니다.
이때에는 부모나 아이 각자 고립된 삶을 살게 됩니다.
관계라는 것은 구속된 것도 아닌 또 고립된 것도 아니어야 합니다.
만약 위의 상황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매우 속상하지? 실망하는 걸 보니 엄마 아빠도 마음이 안 좋아.
그래도 속상하다는 건, 그만큼 열심히 했고 또 기대했다는 뜻이겠지.
마음 잘 추스르고, 어떤 점을 보완하면 좋을지 함께 살펴보자.
엄마 아빠가 도울 것이 있으면 뭐든 말하렴.”
이렇게 말하는 관계가 된다면,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남 탓하면서 주저앉지 않게 됩니다.
함께하기에 힘낼 수 있으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것이기에 기쁘게 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관계를 잘 정립했으면 합니다.
함께하면서도 자율적으로 자기 인생을 살게 하는 관계는
가족, 친구, 이웃…. 모든 사람과 이루어야 할 관계입니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님께서 만드신 관계 역시 이 차원에서 묵상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을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들었을 때,
거부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또 그 소식에 좌절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에 결혼하지 않은 여자가 아기를 갖게 되면 간음했다고 해서,
돌을 던져 공개 처형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십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하느님과 함께하지만, 자율적으로 본인의 선택을 내세우시며
자기 인생을 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변명’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담은 알몸인 것이 부끄러워 숨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묻었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 주더냐?”
아담은 자신의 잘못을 이렇게 합리화하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
하느님께 책임을 떠넘기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법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158명의 숭고한 생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변명하였습니다.
‘경찰이 있었어도, 안전조치를 했었어도 사고를 막기는 어려웠습니다.
그렇게 많은 인파가 한꺼번에 몰린 것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변명’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진심으로 뉘우치는 ‘회개’입니다.
국민이 원하는 것은 무고한 목숨을 잃어버린 사람과 그 유족들에 대한
솔직한 사과와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안전조치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카인에게도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였으면서도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동생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느님께서는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실 것 같습니다.
‘네 동생 아벨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의 욕심과 욕망 때문에 더불어 살아가는 많은 동물들이 멸종하였습니다.
원주민들은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고, 노예로 전락하였고,
숲은 파괴되었고, 물과 공기는 오염되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카인과 같은 대답을 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지키는 사람입니까?’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했던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소.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
나중에는 거짓이라면 천벌을 받겠다고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라고 이야기합니다.
평소에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위기의 순간이 오면
신앙을 저버리는 우리들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눈을 보았던 베드로 사도는, 닭이 우는 시간에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하였던 아버지처럼,
우리가 회개하고 뉘우친다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따뜻하게 품어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100세의 나이에 얻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 이사악입니다.
그런 이사악을 하느님께서는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아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 길을 떠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면 좋겠느냐?’
그러자 이사야 예언자는 주저 없이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는 구세주의 탄생을 알리는 예언을 하게 됩니다.
구세주가 오시면 일어날 일을 예언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다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서 고난의 잔을 마시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교회는 성모님에 대해서 믿을 교리를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원죄가 없었기에 죽음을 거치지 않고 승천하셨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시기에 예수님을 낳으신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성령으로 잉태하셨기에 평생 동정을 간직하고 있었다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가 선포한 성모님께 대한 믿을 교리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했던 성모님의 순명입니다.
변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순명은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만물을 당신의 결정과 뜻대로 이루시는 분의 의향에 따라
미리 정해진 우리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몫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한 밤중 일어나면 우선 강론 쓰기전 인터넷의 뉴스 기사들을 대략 찾아 봅니다.
선과 악의 치열한 전쟁터 같습니다. 국내 상황이 더 그러합니다.
무지의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고한지 때로는 선의 세력이 참 미약해 보입니다.
너무나 극단적인 사회요 분열과 갈등의 사회요
흡사 내전 상태를 연상케 하는 현실입니다.
주변 곳곳에서 참 힘들게 사는 이들의 사연도 끝이 없습니다.
많이 아프고 병들고 불안과 두려움 중에 하루하루 희망없이 살아갑니다.
참으로 찾아보기 힘든 평화입니다.
정말 평화와 정의가 실현되어가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갑자기 우리 요셉 수도원의 최 빠코미오 원장의
부친인 최재목 야고보 형제님이 81세를 일기로 선종하셨습니다.
충격이었습니다.
그동안 수도원에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인생 노년에 치매의 병고로 잠시 고생하시다가
마침내 선종의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참 선량하고 진실한 분으로 기억합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고인의 빈소는 대구 파티마 병원 장례식장 403호이고,
장례미사는 12월9일 금요일, 대구 만촌3동 성당에서 오전 10시에 거행됩니다.
너무 진실과 사랑을 잊고, 삶의 중심과 의미를 잊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참으로 살아가는 법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끝없는 두려움과 불안 중에 자기를 잃고 뿌리 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는
영혼 없는 유령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1. “깨어 있어라”, 2. “회개하여라”,
대림1,2주일의 주제에 이어 다음 대림3주일의 3. “기뻐하여라”
세 주제가 우리 삶의 지표가 됩니다.
정말 이렇게 깨어 회개하여 기쁘게 참으로 살아야 할 절박한 시절입니다.
이런저런 어지럽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라는 물음이 저절로 절박하게 대두됩니다.
예나 이제나 여전히 현실성을 띠는 중요한 주제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어떻게 하면 사랑과 진실, 정의와 평화, 온유와 겸손의 삶을
한결같이 인내하며 참답게 살다가 선종의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런지요?
바로 오늘 대축일을 지내는 마리아 성모님이 그 답을 줍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바로 성모님이 답을 줍니다. 성모님처럼 살면 됩니다.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너무 경사스런 날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잉태되신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는 믿음은 초대교회 때부터 시작됩니다.
마침내 1854년 12월8일 교황 비오 9세는 교황 무류성에 따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에 의해
다음과 같이 가톨릭 교회의 믿을 교리로 선포합니다.
“복된 동정 마리아는 자기의 잉태 첫 순간에
전능하신 하느님의 특별 은총과 특권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원죄의 아무런 흔적도 받지 않도록 보호되셨다.”
오늘 성모님 대축일 미사 감사송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지요!
성모님 아름다운 영적 삶을 요약합니다.
참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원죄에 물들지 않게 지켜 주시고,
은총으로 가득 차게 하시어,
성자의 맞갖은 어머니가 되게 하셨나이다.
또한 성모님을 통하여 티 없고 흠 없이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배필인 교회의 시작을 알려 주셨나이다.
지극히 깨끗하신 동정 마리아에게서,
저희 죄를 없애시는,
죄 없으신 어린양 성자께서 나셨으니,
주님께서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피조물 위에 들어 올리시고,
주님의 백성을 위하여,
은총의 전구자요, 거룩한 삶의 모범으로 미리 정하셨나이다.”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내용인지요!
한 분의, 한 어머니의 힘이 얼마나 큰지 상상을 초월합니다.
우리 삶에 대한 부단한 자극이 됩니다.
성모님처럼 살고 싶다는 거룩한 욕망도 샘솟습니다.
성모님처럼 사는 것이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요, 이렇게 살아야 참 나의 참된 삶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다음 셋으로 요약됩니다.
첫째, “은총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삶이 은총임을 깨달을 때
저절로 회개와 겸손, 찬미와 감사, 기쁨과 평화의 삶입니다.
은총의 빛 앞에 흔적없이 사라지는 무지와 무의미, 허무주의의 어둠입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신다.”
고백성사 처방전 말씀으로 가장 많이 써드리는 성구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하나하나가 은총이 가득한 이들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은총에 이어 총애가 역시 우리의 신원입니다.
성모님처럼 은총이 가득한 이요, 하느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우리임을 철석같이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우리가 은총으로 충만한 존재임을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온갖 영적인 복을 우리에게 내리셨습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고귀한 신원입니다.
얼마나 은총 가득한 사랑스런 인간 존재인지, 은총 덩어리 삶인지 깨닫습니다.
그러니 인간의 본질은 은총입니다.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아
은총의 삶에 한결같이 충실하도록 합시다.
둘째, “찬미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은총의 깨달음에서 저절로 찬미의 기쁨, 찬미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의 삶이 하느님을 닮은 참 나의 삶입니다.
찬미, 찬양은 영혼의 본능입니다.
찬미, 찬양의 맛으로, 기쁨으로 살아가는 믿는 이들입니다.
허무와 무지의 병에 대한 궁극의 치유제도 찬미와 찬양뿐입니다.
성모 마리아뿐 아니라 성인 모두가 한결같이 찬미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제2독서 에페소서 찬미가는 바로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저녁성무일도 때마다 노래하는 찬미가입니다.
바로 이 찬미가 중 두 대목이 주목됩니다.
우리가 왜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은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랑하시는 아드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은총의 영광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 역시 우리의 영예로운 신원임을 깨닫습니다.
은총의 존재이자 찬미, 찬양의 존재인 우리들입니다.
은총의 존재임을 깨달을 때 감사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 하느님 찬양입니다.
셋째,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평생 순종의 삶을 사셨던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었습니다.
삶은 순종입니다. 사랑의 순종입니다.
일상의 크고 작은 순종에 충실할 때, 마지막 순종의, 선종의 죽음입니다.
성모님의 순종이 다음 고백에서 결정적으로 입증됩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순종의 응답 후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홀가분하게 떠납니다.
전능하신 하느님도 일방적으로 일을 못 하십니다.
상대방인 인간의 자발적 사랑의 협조가 있어야합니다.
마리아의 순종의 응답으로 하느님의 구원역사는 순조로워졌으니
하느님은 마리아가 너무 고맙고 믿음직스럽고 사랑스러웠을 것입니다.
아마도 성모님의 전구는 예수님도, 하느님도 거절하기 힘들 것입니다.
참 자랑스럽게도 창세기에서 비겁했던 아담-하와 부부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마리아의 통쾌한 순종입니다.
이로부터 마리아의 출현까지
그 장구한 세월을 견뎌내신 하느님의, 사랑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실낙원이 마리아의 순종으로 복락원이 되게 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음을 봅니다.
모전 자전, 그 어머니 성모 마리아에 그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죽기까지 성모 마리아를 닮아
순종과 섬김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은총의 삶, 찬미의 삶, 순종의 삶에 충실함으로
날로 성모님은 물론 예수님과 일치를 깊이 해 주십니다. 아멘.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이날을 한국교회의 수호자 대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엄청 기쁜 날입니다.
우리는 입당송에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라고 노래하였습니다.
화답송에서도
“주님께 환성 올려라, 온 세상아.
즐거워하며 환호 하여라, 찬미노래 불러라.”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 환호송에서도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하고 기쁨을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전례의 의미는 본기도에서 잘 요약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동정녀를 원죄 없이 잉태되게 하시어,
성자의 합당한 거처를 마련하셨으며,
성자의 죽음을 미리 보시고 동정 마리아를 어떤 죄에도 물들지 않게 하셨다.’
1854년 12월 8일, 교종 비오 9세께서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교의를 다음과 같이 선언하셨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는 잉태된 첫 순간부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전능하신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은총의 특전으로 말미암아 원죄에 물들지 않고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 선언은 세 가지 사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원죄로부터의 면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마리아께서 지니신 특전의 성격을 말해줍니다.
둘째는 이는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느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이유를 말해줍니다.
셋째는 마리아께서 원죄에서 보호된 것은
예수님께서 갈바리아에서 얻은 구원의 '선행된' 효과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특전의 방법을 말해줍니다.
이 교의의 선포는 성모님께서 예수님의 보편적인 구원으로부터
예외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원을 미리 입으셨다는 뜻을 말합니다.
그래서 '인류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예견된 공로에 비추어'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교의는 선포된 지 4년 후인 1858년의 루르드의 성모님 발현으로 확증되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발현하시어 자신을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밝히셨습니다.
'성모님의 원죄 없으신 잉태'는 우리에게 두 가지를 사실을 깊이 일깨워 줍니다.
하나는 성모님께서는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루가 1,28)이라는 사실이요,
또 하나는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성 안셀모는 성모님께서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당신이 받으신 축복으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은 창조주로부터 축복을 받고,
창조주께서는 그들로부터 찬미를 받으신다.”
이는 성모님께서는 원죄조차 없는, 티 없이 아름답고 거룩한 대성전이셨음을 말해줍니다.
바로 여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을 품으신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무한하신 사랑으로 성모님을
원죄로부터 보호받는 축복을 가득 부어주신 까닭입니다.
이는 비록 인간이 죄의 굴레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하느님의 축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말해줍니다.
또 성모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가리켜 이렇게 찬양하였습니다.
“모든 피조물이 당신의 충만함의 흘러넘침을 입어 새싹이 트듯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성모님으로 하여 우리도 이제 ‘은총에 은총을 입게 되었고’(요한 1,16),
축복에 축복을 입게 되었습니다.
우리 역시 성모님처럼,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대성전’이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 성모님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셨습니다.
그리하여 비록 우리가 원죄에 물들어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하지 못하지만,
이제는 저희 안에 주님을 모심으로써 저희 죄가 씻기게 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저희 또한 당신을 건네줄 수 있는 ‘복을 주는 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우리도 성모님을 말미암아 이토록 큰 축복을 받았으니,
우리도 역시 ‘복을 주는 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이미 은총을 가득히 입었고, 주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까닭입니다(1,28 참조).
성모님처럼 우리 역시 사랑의 감실이요, 거룩한 성전이 된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이토록 한없는 기쁨으로 성모님과 함께 찬미의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나의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입당송)
<오늘의 말 · 샘 기도>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루카 1,28)
주님!
참으로 큰 기쁨입니다.
제 안에 사랑이 있다는 이 사실, 참으로 놀랍고 아찔한 감미로움입니다.
하오니 이제는 그 사랑에 승복하게 하소서.
항상 저를 향하여 있는 당신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하소서.
아멘.
지금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의 구원 은총을 미리 입게 하시어
마리아를 원죄에서 보호하셨음을 기리는 날이다.
교황 비오 9세는 이미 1854년 12월 8일에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셨고,
이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는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다.
성모님께 관한 이 믿을 교리는
루르드의 벨라뎃다 성녀에게 나타나신 성모님께서 확인해 주셨다.
마리아께서 처음으로 구원의 은총을 입으셨듯이
우리도 그 신비에 동참하리라는 희망을 품게 해 준다.
오늘 복음의 내용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간의 협력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마치 처음의 인간이 하느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세상에 은총과 구원이 오지 못하고 죄와 죽음이 왔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구원이 오게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아께서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구세주는 태어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이르기까지의
아버지의 뜻에 대한 순명이 아니었더라면
또한 구원의 업적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아버지께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고
그 잔을 치워주시도록 기도하면서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맡기셨던 아드님과 같이
오늘 복음의 마리아께서도 당신의 신앙을
용감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고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한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루카 1,38)
이 고백은 주님의 탄생 신비를 구체적으로 느끼게 하는 마리아의 고백이다.
우리도 이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삶이 필요하다.
삶과 유리된 신앙은 무의미하다.
마리아의 고백이 자신의 전 존재를 건 고백이었다면,
우리도 구체적인 삶을 통해 신비를 체험하고 하느님을 체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우리의 생을 모두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마리아의 구체적인 신앙고백이다.
예수님의 탄생, 삶, 죽음, 부활이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면서
신앙으로 그 신비를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신앙은 역시 구체적이어야 한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죽어야 한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그분께 맡겨드렸다는 것과
그리고 이웃 앞에 자신을 봉사하기 위하여 내어놓는 자세가
주님을 이 세상에 낳아주실 수 있었다.
지금 나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그것을 이루려 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 학교에서 그리고 형제들 사이에서.
지금, 이 순간, 우리도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하고 고백하며,
주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가 생각해 보자.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구체적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탄생 신비를 살 수 있으며, 체험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마리아의 고백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의 고백이 되어야 한다.
이 고백을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죽지 않으면 안 되며,
그만한 아픔이 있게 마련이기에 고통의 신비를 더 깊이 알고,
더 깊은 사랑을 우리 이웃에 전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을 성화시켜 나갈 수 있다.
그 고통을 통해 우리는 즉시 부활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으니,
바로 이것이 성탄의 신비가 12월 25일 성탄에만 갖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 순간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인의 삶은 휴가가 없다. 연중무휴이다.
큰 것을 찾기보다,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기쁘게 그것을 실천하며 나아가도록 하자.
신앙은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아야 하고, 또 살아가며 확실히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마리아와 같이 우리의 모든 순간이
주님 앞에 그대로 고백 되는 삶으로 이어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하여야 하겠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들 안에는 죄와 구원, 절망과 희망이 교차합니다.
먼저 첫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너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저질렀느냐?"(창세 3,13)
제1독서는 우리를 원죄의 현장으로 데려갑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어긴 인류의 조상과 하느님의 가슴 아픈 대면의 현장입니다.
"어찌하여..." 하시는 하느님 마음은
왜 그랬는지를 꼭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추궁의 심정이 아니라 오히려 탄식에 가까울 겁니다.
오직 그들의 행복을 위해 공들인 모든 게 무너지는 아픔과
그들이 짊어져야 할 결과를 예견하는, 안타까움 가득한 한탄처럼 들립니다.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에페 1,4).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먼 옛날 하느님 앞에서 고개 숙인 채
슬픈 선고를 듣던 "첫 사람"의 처지를 반전시키는 놀라운 사실을 전합니다.
원죄에 물든 우리가 다시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오늘의 이 길지 않은 제2독서 내용 안에 거의 모든 절마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불리웁니다.
첫 사람의 죄는 새 아담인 "그리스도"를 통해 사해지고,
우리는 그 덕분에 거룩하고 흠 없는 본성을 되찾았습니다.
다음은 하와의 이야기입니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창세 3,12).
죄의 책임을 전가하면서 하와의 불순종이 드러납니다. 그녀 역시 뱀의 꾐에 넘어갔지요.
이 구차하고 누추한 발뺌의 행태는 누가 먼저냐의 문제라기보다
신뢰와 결속이 무너지는 죄의 결과를 보여 줍니다.
아마도 하느님께는 이 모습이 더 아프셨을 것 같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마리아께서 천사를 통해 하느님께 드렸던 응답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르심 앞에서 내린 어린 소녀의 이 순수한 결단은
원죄의 결과로 죄악에 물든 세상에 새 희망을 던집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잉태되는 순간부터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마리아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아드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미리 예비하신 존재이십니다.
그녀는 거룩하고 흠 없는 태 안에 자신을 만드신 창조주를 모시도록 준비된 새 하와이십니다.
마리아는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어머니"(창세 3,20)를 넘어 모든 존재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아담의 불순종과 새 아담인 그리스도의 순종, 화와의 불순종과 새 하와인 마리아의 순종.
얼핏 대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신비로운 인과관계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로마 5,20)는 사도 바오로의 단언처럼,
스스로 범한 죄 때문에 시들어가는 인류를 두고 보실 수 없는
하느님께서 이 모두를 회복할 특단의 조치를 감행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극단의 현실은 우리 안에 고스란히 들어 있고 또 매 순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같은 몸, 같은 존재 안에 아담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을 동시에 지니고 살아가지요.
또 하와의 불순종과 마리아의 순종 또한 나날이 체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저마다 죄와 은총, 어둠과 빛,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순례자에 비길 수 있습니다.
가망 없는 죄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전한 의인도 못 되는
가련한 실존을 입고 살아가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 말입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루카 1,37).
그래서 천사의 이 단언은 그날 마리아에게는 물론 오늘의 우리에게도 커다란 희망이 됩니다.
죄인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룬다는 자체가,
엘리사벳의 늙은 나이의 잉태나 동정녀의 잉태 못지않게 우리 힘만으로는 불가능의 영역이지만,
하느님께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제도가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거룩하고 흠 없다"고 해 주시니,
우리는 부정하고 불결하고 부족한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잉태하고 품고 출산해 키우는 소명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와 함께 기뻐해도 좋습니다. 아니 기뻐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한껏 기뻐하십시오.
“나는 하자 없는 잉태로다.”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우선 오늘 대축일에 ‘한국 교회의 수호자’가 붙은 이유를 살펴보자.
1784년 조선에 천주교가 전래 된 이후 1831년 조선교구의 설정을 인가하고
수호성인으로 성 요셉을 지정한 교황 그레고리오 16세(1831-1846)는
조선선교를 자원한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브뤼기에르 주교를
초대 주교를 초대 주교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브뤼기에르 주교는 입국하지 못하고, 북경에서 병사하였고,
제2대 교구장으로 엥베르 주교(1796-1839)가 임명되었다.
1837년 북경에서 주교성품을 받고 조선으로 입국한 엥베르 주교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조선 교구의 공동 수호자로 모실 수 있기를 교황청에 청원한다.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 청을 받아들여 엥베르 주교가 순교한 후
1841년 8월 22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를
성 요셉과 함께 조선 교회의 공동 수호성인(Compatroni)으로 선포하였다.
다음으로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축일에 대하여 살펴보자.
우선 이 축일에 대한 생각이 마리아의 ‘탄신축일’에서 거꾸로 계산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신을 기념하는 축일은 동방교회에서 먼저 9월 8일로 지냈다.
이는 마리아가 탄생한 곳으로 여겨지는 예루살렘에 5세기 말경
마리아 성당을 지어 봉헌 한데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서방교회에서는 제84대 교황 세르지우스가 재임기간(687-701) 중에
‘성모영보축일’, ‘성모승천축일’, ‘성모성탄축일’, ‘마리아 빛의 축일’ 등,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4대 축일을 정하고 우선 로마교회를 중심으로 이를 경축하였다고 한다.
이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초대교회의 敎義와 신심에 근거한 것이었다.
마리아의 탄생 장소와 일시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탄생은 분명히 있었고, 탄생이 있으면 잉태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마리아의 탄생 축일인 9월 8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12월 8일이
곧 성녀 안나가 마리아를 잉태한 날이 되는 것이다.
12월 25일 주님 성탄 대축일에서 9개월을 거꾸로 계산한 3월 25일이 주님탄생 예고,
즉 주님의 잉태축일이 아닌가?
동방교회가 10세기경부터 12월 8일을 지정하여
‘거룩한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의 잉태 축일’로 지냈고,
서방교회에서는 1100년 캔터베리의 안셀모 주교가 자기 교구에 이 축일을 도입하였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이를 로마 전례력에 도입하였고,
1708년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잉태’를 대축일로 전 세계 교회에 선포하였고,
교황 비오 9세는 1854년 12월 8일에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믿을 교리로 선포하였다.
따라서 1855년부터 12월 8일은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 된 셈이다.
그러나 개신교회와 동방교회는 동정 마리아의 ‘원죄 없이 잉태되심’을 교리상의 문제로 삼고 있다.
325년 니체아공의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Christotokos)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어머니’(Theotokos)란 칭호를 드린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시므로 마리아는 당연,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시는 것이다.
후일 하느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잉태의 순간에 원죄의 보호를 받았다는 것은
신자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다.
1854년 12월 8일 위풍이 당당한 교황 비오 11세가 대미사를 마치고
선언문을 낭독하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올 때 베드로 대성전 안에는 경외의 침묵이 흘렀다.
“나는 동정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잉태되신 첫 순간부터
원죄에 물듦이 없으심을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敎義로 확실히 선언하는 바이며,
이에 따라 모든 신자들이 이를 확실히 믿을 것을 선포한다.”
낭독을 마친 교황의 눈에서 기쁨과 경외의 눈물이 흘러내렸으며,
4만 명의 목소리가 感謝歌 ‘테데움(Te Deum)’을 노래했고,
로마의 모든 성당에서 종이 울렸으며, 그날 밤 로마는 불야성을 이루었다고 한다.
바깥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성모무염시태’ 교의를 두고 좀 지나쳤다고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이 교의를 성모님 스스로가 追認하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1858년 2월 11일 루르드의 작은 동굴에서 일어난 성모님의 발현에서 시작된다.
성모님은 7월 16일까지 걸쳐 당시 14세의 소녀 베르나뎃타에게 발현하셨다.
3월 25일 성모영보 축일, 12번째 발현한 성모님께
베르나뎃타가 “부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침묵을 지키던 성모님은 소녀의 세 번째 물음에
“나는 하자瑕疵 없는 잉태로다.”하고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성모님 스스로가 4년 전에 선포된 ‘무염시태無染始胎’교의를 추인해 주신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다.
성모님의 그 한마디 속에는 原罪의 교리와
그리스도를 통한 강생구속 교리가 한꺼번에 내포 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원죄를 지니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성모님께서 원죄 없이 잉태되셨다는 교의는
결코 마리아를 인간으로부터 분리시키고자 하는 시도가 아니다.
마리아 또한 분명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그녀가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녀의 믿음이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모두가 불가능하게 여기는
엄청난 ‘성령으로 말미암은 하느님의 잉태’를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주님의 종이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몸에 품어 하느님께 인간의 생명을 선사한 마리아는
그래서 원죄 없이 잉태되신 것이다.
다행히 우리는 세례성사를 통하여 마리아의 이 엄청난 은총에 동참한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품위를 높여주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 되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신
하느님 스스로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성모 마리아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하고 눈물 나도록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