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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편견을 허무심 4:1~4
1 예수께서 제자를 삼고 세례를 베푸시는 것이 요한보다 많다 하는 말을 바리새인들이 들은 줄을 주께서 아신지라 2 (예수께서 친히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요 제자들이 베푼 것이라)
3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남녀 차별의 벽을 허무심 4:5~14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8 이는 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갔음이러라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1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11 여자가 이르되 주여 물 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
12 우리 조상 야곱이 이 우물을 우리에게 주셨고 또 여기서 자기와 자기 아들들과 짐승이 다 마셨는데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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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사마리아의 수가에 이르십니다. 야곱의 우물 곁에서 예수님이 물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다. 유대인이 왜 사마리아인에게 물을 청하는지 묻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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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적 편견을 허무심 4:1~4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역사적으로 갈등의 골이 깊습니다. 주전 722년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 왕이 바벨론과 구다 등의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킨 결과 사마리아인이 혼혈족이 되었기 때문입니다(왕하 17:24). 유대와 갈릴리를 오갈 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사흘 정도 걸리는데, 유대인은 멀리 돌아서 7일이나 걸리는 요단 동편 베레아 쪽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사마리아를 통과하십니다. 인종적 편견을 깨뜨리시려는 강한 의지가 헬라어 성경에서 ‘데이’(반드시 ~해야 한다)라는 동사에 잘 나타납니다(4절). 화평이신 예수님은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무시고 서로 하나 되게 하십니다(엡 2:14).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공동체의 하나 됨을 위해 내가 버려야 하는 편견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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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 차별의 벽을 허무심 4:5~14
예수님이 야곱의 우물이 있는 수가라는 동네에 이르십니다. 그곳에서 물을 길으러 온 한 여자를 만나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당시에 큰 도전이었습니다. ‘여섯 시’는 정오로(6절) 당시 엄격한 랍비들은 낮에 길거리에서 여자와의 만남을 피했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는 상황에서(9절)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와 대화하신 것은 모든 차별을 넘어 그 여자를 하나님의 존귀한 자녀로 여기심을 보여 줍니다(갈 3:28). 예수님은 ‘물’이라는 매개로 대화를 이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선물과 생수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관심이 영혼 구원에 있음을 보여 줍니다(10절).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는 고단한 인생길에 위로와 소망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물과 생수를 매개로 대화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상대방의 마음을 열 수 있는 대화 소재를 주로 어디에서 찾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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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
‘허무’란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 겪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입니다. ‘허무’는 마음의 공허를 채울 수 없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이를 해결하는 비결은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는 것입니다.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으로 내 마음을 채우고, 하나님께 내 문제를 맡기면 하나님이 내 삶의 모든 문제에 개입해 주십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에 어떻게 하나님을 모실 수 있을까요? 호흡할 때 공기를 많이 들이마시려면 이미 들어와 있는 공기를 다 뱉어 폐를 비워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빈 공간으로 공기가 들어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방법은 먼저 내 속에서 하나님이 아닌 것을 다 빼내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죽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은 하나님으로 채워집니다. 무엇이 없어서, 어떤 상황 때문에 인생이 허무한 것이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는 채워지지 않는 공간이 있기 때문에 허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우리에게 당신을 주겠다고 절절하게 고백하십니다. 내 안으로 들어오셔서 영원히 사랑의 교제를 나누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마음을 완전히 채우실 수 있는 분입니다.
마음 바로 알기 / 황명환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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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4장 7절
예수님은 '물'이라는 소재로 여인과 대화의 문을 여십니다. 실제로 갈증을 느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여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신 예수님은 그것을 채워 주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생'입니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단순한 요구가 아닙니다. 그것은 은혜로의 초대입니다. 주님의 초대에 거절하지 않고 응할 때 진정한 만족과 해결을 경험하는 인생이 됩니다.
주님이 모든 관계와 우정의 근원이시기에 주님이 빠진 우정은 관계의 핵심 요소를 빠트린 것과 같다. - 스티브 윈필드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다에서 갈릴리로 이동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요단강을 따라 돌아다녔는데 그것은 북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될 때 이스라엘 유민들은 앗수르의 여러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하고 타지역 사람들이 그곳에 들어와 살게 됨으로 혈통이나 신앙이 혼합되어 바벨론 포로기간 여호와 신앙을 지킨 유대인들은 상종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그 길을 통과하여 갈릴리로 가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늘 보좌를 버리고 마굿간 같이 더러운 세상에 내려 오셨다.
예수님은 야곱의 우물 곁에서 사람들의 눈을 피하려고 한낮에 물을 길러 나온 사마리아 동네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신다.
유대인 남자가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으나 예수님은 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신학적, 문화적 장벽을 넘어 이방인처럼 여기는 사람에게 접근하셨다.
우리도 자신의 기준이나 성향을 넘어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이 우물의 두레박을 가지고 있기에 목말라하는 예수님께 물을 드릴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영혼의 갈증을 치유하는 물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인간의 근본 문제는 영혼의 목마름인데 그것을 해소할 물을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인간이 만드는 웅덩이는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이기 때문에 말씀의 시내, 성령의 냇가에 뿌리를 내려야 계절에 관계없이 푸르름을 유지하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사마리아 여인과 같이 영혼의 목마름으로 고통 받던 사람들일 수 있다.
그런데 주님이 주시는 생수를 마시고 갈증을 해결했으므로
아직도 세상에서 헤매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리라 소망합니다.
요한복음4:1-14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은 사마리아에 들어가셨는데
이유는 사마리아여자를 만나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은 유대를 떠나 다시 갈릴리로 가시는데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를 통과하셨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기위해 사마리아가 있지만 사마리아를 돌아서 갑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3일 돌아서 가면 7일이 걸린다고 합니다
4일이 더 걸립니다 유대인들은 4일이 더 걸리는 데도 불구하고 돌아서 갔습니다
왜냐하면 시대적 아픔 때문입니다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정복할때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에 살게 했습니다
이로인해 앗수르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 사이에 자녀들이 생겼고 자녀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이스라엘로 인정하지 않았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로 취급하기 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라는 동네 야곱의 우물에 그것도 가장 뜨거운 정오에 계십니다.
바로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정오가 되자 한 여인은 물을 길러 우물에 왔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7절에 자기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합니다
당연히 사마리아 여자는 물을 달라고 하는 한 유대인(예수님)에게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상종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보기에 이상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1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을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이상한 대화가 이어집니다
여자는 내가 보니 물 길을 그릇도 없는것 같은데 어디서 물을 길어 생수를 얻게 하겠느냐? 묻습니다
그 말을 들은 예수님은 13절과 14절에 "이 물을 마시는 자 마다 다시 목마르려닌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이 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님과 대화를
정리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처음으로 한 말은 물을 달라고 했습니다
물을 달라고 하신 것은 사마리아 여자가 영적으로 갈증이 있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을 달라고 하신것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영생이라는 물을 주고자 하셨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영생이라는 생수를 먹게 (믿게) 되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다고 말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을 달라고 하시는 말씀은 은혜로 초대임을 알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인간의 갈증을 아시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초대에 응해야 합니다
초대에 응하기만 하면 생수를 통해 진정으로 만족한 삶을 살게 됩니다
4장의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은 하나님께서 찾아오심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감격스러운지를 설명해 줍니다.
그녀는 구원을 받을 자격도, 능력도 없는 여인입니다. 그녀는 예수께 도움을 구하지도 알아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을 먼저 찾아가 만나 주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사건이 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 만남입니다.
이 장면은 니고데모와의 만남과 대조 시키면서 ‘예수님의 찾아오심’이 갖는 의미를 정확히 보여줍니다.
우리는 사마리아 여인의 사건을 보면서 방관자 또는 삼자의 자세를 가집니다.
마치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사건을 대하면서 돌을 놓은 군중 같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러나 우리는 바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바로 우리가 사마리아 여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한치도 나갈 수 없는 어둠(죽음)에 속한 지라는 것을 인정해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게 됩니다.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인의 공통점은 은혜 없이는 어떠한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유능하고 능력이 있어도, 그가 아무리 약하고 죄인이더라도 은혜가 없으면 그들의 끝은 심판밖에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최소한의 조건이 있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을 당당하게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정반대의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확인한 자들입니다. 우리가 압니다.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마리아 여인에게 오신 것처럼 이미 여러분에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가 여러분을 불러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여러분을 살리시길 원하십니다. 오늘 하루도 이 사실로 인해 기뻐하시고 감사가 넘치는 하루가 되길 소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또는 여러분이 알고 계신 분 중에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분이 있다면 우리와 같이 기도하길 소원합니다. 최소의 조건이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역사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사용하시길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만나십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처럼 여러분으로 인해 이웃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달되기를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유익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살았던 우리에게 찾아와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함을 깨닫게 하시고 오직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게 만드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소유한 자들이 영생의 생수를 마시는 자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의 터전이 우물가가 되어야 합니다.
이 우물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믿지 않는 자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전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오늘 하루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기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에 들르셨습니다 유대인은 사마리아 사람을 더럽게 여겨 상종하지 않음으로 베뢰아로 우회해서 가는데, 누군가를 찾으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거기에 가신 것입니다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요4:4)
그렇다면 누굴 찾으신 걸까요? 사마리아 수가는 야곱이 요셉에게 준 세겜에서 가깝고 야곱의 우물도 있는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수가는 헬라어로는 "Συχάρ"(쉬카르)로 마지막을 뜻하고, 히브리어로는 "שכר"(셰카르)로 독주를 뜻합니다 즉, 수가는 유서 깊은 이름은 가졌으나, 마지막 때에 세상 미혹의 독주에 취해 길을 잃고 잠든 자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세대가 음행의 독주에 취했습니다 "그 음행의 포도주에 취하였다"(계17:2) 그러나 주님은 길 잃고 잠든 이름뿐인 자기 백성을 깨우치시기 위해 찾아 가신 것입니다 그때 주께서 피곤하셔서 우물 곁에 앉아 계셨는데, 한 여인이 물을 길으러 나왔습니다 이때 주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그 여인이 반문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요4:9)
이에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4:10) 다시 반문했습니다 이 우물은 깊고 당신을 물 길을 그릇도 없는데 어떻게 생수를 주신다는 겁니까? 당신이 야곱보다 큽니까?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허울좋은 이름 뿐인 전통과 연조라는 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고 길을 잃게 하고 잠들게 합니다 오직 이 샘물을 마셔야 살고 길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마실 그 샘물은 성령입니다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참으로 우리 주께서 우리를 항상 이 샘물로 인도하시고 목마르지 않게 하시고 잠들지 않게 하시고 길을 잃지 않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임이라"(사49:10)
요한복음 4: 1~14 저 낮은 곳을 향하여
얼마전에 밤중에 찾아온 지성인 니고데모에게는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다고
굉장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을 하셨는데
(실제로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유대인의 관원이였던 니고데모도
모태에 들어 갔다가 나올수 있냐고 헛다리를 짚었는데...)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하는
지역감정의 골이 깊고, 편견이 심하긴 하지만
의도적으로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기위해
사마리아 지역의 수가성이란 동네에 이르러
정오에 물뜨러오는 오는 한 여인을 만나셔서
누구나 이해 할수 있는 물을 좀 달라고 하신다.
세상에서 사람은 끼리끼리 논다고 하는데
수준에 맞는 사람과 교제하고 싶어하고
같이 식사도 하고 싶지만, 수준이나 조건(?)이
월등히 낮다고 판단하면 피하고 싶고 알고 싶지도 않는데....
예수님은 최고의 지성 층과도
최하의 상처 많고 누구도 인정하지 않는
무명의 여인 하고도 친구처럼, 선생처럼, 멘토처럼
따뜻하게 편견 없이 대하신다.
우리 회사 주변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많이 보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촌놈(?)이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아 있었는데....
그들을 바라보는 내 눈은
왜 하나님의 눈과 마음을 갖지 못하는 걸까?
미국이나 일본 비지니스맨을 보는 내 눈과
동남아나 제3세계 노동자들을 보는
내 안경의 색깔은 왜 다를까?
수가성 여인과의 대화 가운데
물 길으러 온 여인에게
밥을 달라, 아이스크림을 달라가 아니라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하셨고
또하나 묵상 하고픈 것은
하나님의 선물을 이야기 하신다.
하나님의 선물도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단어다.
아무리 작은 것도 선물은 기분 좋은 것이니까.
구원이나 거듭남 이런 단어를 썼으면 어려울 텐데...
더구나 상처 많고 거절감이 많은 여인에게
상황과 수준에 맞는 말이
한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하는
문을 여는 키와 같은 말씀인것 같다.
하늘영광 보좌 다 버리고
낮고 낮은 나의 수준으로 찾아 오시는
그분께 경배와 찬양을 드린다.
(요4:1-14)
세상 어디에도 마음 붙일 곳 없는 인생입니다.
누구 하나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사람 없는 인생이지요.
그 인생을 누가 그 지독한 어둠과 절망에서 건져낼 수 있을까요?
발버둥 치면 칠수록 더 깊은 고통의 심연에 빠져들기만 합니다.
포기도 사치가 되어버린 손댈 수 없는 그 인생을 누가 구원할 수 있을까요?
그가 찾아오셨습니다.
그가 그런 인생을 구하시고자 하십니다.
1.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역으로 들어가신 과정을 살펴보고, 또 그 이유를 묵상해봅시다.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말해봅시다.
2. 우물 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자를 보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인지 말해봅시다.
만약 내 주변에 그런 이가 있다면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봅시다.
(요 4:1~14절)
❝주의 사랑 안에서 영적 해갈을 누리는 삶❞
❚ 육체의 필요를 넘어 영적 만족을 주시는 주님 안에서 영생의 삶을 누려야 합니다.
✔ 주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무엇입니까?
➲ 영혼을 찾아서 다가오신 사랑입니다(1~8절).
사도 요한은 세례를 베푼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세례 베푸는 사역을 허락하시고, 제자들은 그분의 권위하에 세례를 베풀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종교적인 세력을 확장하려는 것으로 보일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1~2절).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과의 헛된 논쟁과 핍박을 피하기 위해 유대를 떠나 갈릴리로 가셨고, 갈릴리로 가시기 위해서는 사마리아를 통과해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의도를 가지시고, 당시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다니던 길이 아닌 사마리아를 지나시게 되었습니다. 수가라는 마을에 이르러서 여정 가운데 피곤하고 목마르셨던 예수님은 정오쯤 우물곁에 쉬셨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눈을 피해 물을 길으러 온 사마리아 여인에게 ‘...마실 물을 좀 달라...’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영생을 얻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 유대인이 상종하지 않는 사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일부러 사마리아를 통과하셨습니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만난 그 여인은 가난하고, 부정한 자였고, 천대받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런 비천한 여인을 예수님은 찾아가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으로 외면받는 지역의, 그것도 낮은 신분의 여인을 만나러 가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여인에게도 복음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외로움과 괴로움을 겪는 인생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영적 갈증에 허덕이는 영혼들을 그리고 인생의 공허함과 육신의 고통으로 인해 절망에 빠져 있는 영혼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질 때로 더럽혀진 죄인 중에 괴수와도 같은 내 인생에 찾아오셨습니다. 왜냐하면 나와 같은 인생도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친히 내 영혼을 찾아서 다가와 주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영적 해갈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는 사랑입니다(9~10절).
‘물을 좀 달라...’ 말씀 하시는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절)...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전 722년경 앗수르에 의해 사마리아가 멸망 당한 후 그곳으로 이방인들이 이주해 오면서 사마리아는 이방인의 피가 섞인 혼혈 민족이 되었습니다. '
그러한 이유로 성전 재건에서 소외를 당하게 되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자기들의 성전을 세웠고, 그 후로 이스라엘과 사마리아의 대립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자신들이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고 있던 때에 물을 달라고 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오히려 자신에게 생수를 요구하였을 것이라고 말씀(10절)하십니다.
예수님은 구원의 선물인 영생을 소개하고 전하시기 위해 당시 사회적 통념과 모든 편견을 깨뜨리시고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시선과 발걸음 그리고 모든 대화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으로 집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과 삶의 가치 또한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복음 없이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 내 인생에 최고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구조선에 탄 구조원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구조해 내야 하는 것이 가장 큰 임무이고 책임입니다. 세상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 영혼의 필요보다는 눈에 보이는 세상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시대와 장소에 상관없이 영혼의 갈증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생수는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사회적 통념에 개의치 않고,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사회적 통념을 뛰어넘어 나와 같은 존재에게도 찾아와 주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서 영적 해갈을 누리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영혼의 갈증을 채우시는 사랑입니다(11~14절).
사마리아 여인은 생수를 주신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육체의 갈증을 해결하는 일반적인 물 정도로만 이해하였습니다(11절). 마치 니고데모가 거듭난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한 것처럼 생수의 참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우물을 파서 가족과 가축에게 물을 제공했던 야곱과 같은 능력도 없어 보이는데(12절), 어떻게 물을 준다는 것인지 예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3~14절)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물을 다 퍼서 마신다 할지라도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속한 것으로는 인간의 근본적인 영적 갈증을 영원히 해소해 주지 못합니다. 순간의 만족과 짜릿함은 있을 수 있겠지만, 또다시 목마름에 괴로운 인생을 보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갈증과 목마름은 생명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함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영생을 소유하게 됩니다. 영원한 생명이야말로 내 자신의 영적 갈증을 완전히 해소 시키시고 죄에서 해방과 자유를 얻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영원한 삶과 영적 만족을 주시는 하나님의 이 선물은 세상이 주는 만족과 선물과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그러므로 생수의 강이 되시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지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내 영혼의 갈증을 채워 주시는 사랑 안에서 영적 해갈을 누리를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복음에 시선이 집중되고, 발걸음은 복음이 필요한 곳으로 그리고 입술은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모든 편견을 내려놓고, 날마다 영적 필요를 채워 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영적 풍요로움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요 4:1~14절)...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4~6절 유대를 떠나 사마리아로 들어가십니다. 다들 피해가는 길이지만, 예수님은 비난과 위협을 무릅쓰고 유대와 사마리아 사이의 오랜 반목과 증오의 장벽을 넘어가십니다. 자신이 이 세상에 온 목적(3장 16절)에 충실하여 갈 길을 정하신 것입니다. 세상은 더 높은 곳, 중심을 욕망하지만 복음은 더 낮은 곳, 주변을 향해 흐릅니다. 세상을 향한 우리의 시선과 걸음은 어떻습니까? 오만과 편견에 갇혀 살지 말고 사랑과 사명에 따라 사십시오.
7~14절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상대해주신 예수님은 한낮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우물을 찾은 사마리아 여인도 만나주십니다. 그리고 그 여인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 여인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그 여인의 반응에 맞추어 상대해주십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마름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도 모르는 여인에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성령)를 약속하십니다. 유대인이 자랑하던 율법이나 성전도, 사마리아인이 자랑하던 야곱의 우물도 인간의 근본적인 갈증을 해갈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영적 갈증이 있지 않습니까? 목마름을 인정하고 어서 주 앞에 나아가십시오.
1-7a절 인생의 목마름이 있는 사람에게 다시는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주시러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를 통과하지 않고, 요단강을 따라 갈릴리 지방으로 가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리쬐는 한낮의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피로와 갈증을 감내하시면서, 구태여 사마리아 쪽으로 가셨습니다. 수가의 우물곁에서, 삶의 외로움과 괴로움으로 허덕이는 한 여인을 만나야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을 찾아가신 걸음은 나를 찾아오신 걸음이었습니다. 인생의 갈증을 풀지 못한 여인을 마음에 품고 작열하는
태양 아래 험한 길을 걸어오셨듯이, 예수님은 근원적인 공허함에 허청거리는 나를 마음에 품은 채 시간을 뚫고 공간을 뛰어넘어 내게 오셨습니다. 그 걸음이 나를 구원하였습니다.
7b-9절 사람들이 그어 놓은 차별과 배제의 경계를 지우십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는 뿌리 깊은 적개심이 있었고, 특히 유대인은 사마리아인을 낮잡아 보았기에 그들과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통념에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유대인 남자였지만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며 다가가셨습니다. 그 여인의 숨기고 싶은 과거(18절)까지 다 아셨지만, 거리를 두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인종, 성별, 나이, 종교를 따지지 않으시고 그분이 필요한 사람에게 주저 없이 다가가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사람을 가리셨다면 나를 찾아오셨을까요? 차별과 편견 없이, 넉넉함으로 나를 찾아오신 주님을 기억한다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예수님과 사람 사이에 단절의 담을 세울 순 없을 것입니다.
10-14절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십니다. 여인은 생수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수는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의미했습니다(7:37-39). 성령을 받으면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렘 2:13),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를 받으며 메마른 대지가 생명의 강물로 살아나는 것 같은 풍성한 삶(겔 47:1-8)을 얻게 됩니다. 그 삶에는 목마름이, 공허와 허무가 없습니다. ‘존재의 영원한 해갈’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예수님이 주신 생수 말고 다른 물을 찾고 마시기 때문은 아닐까요?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3절 예수님은 성공한 자가 남고 실패한 자가 떠나는 세상의 질서를 뒤집으십니다. 사역의 많은 열매와 사람들의 인정을 뒤로하고 갈릴리로 돌아가십니다. 제자들은 아쉬웠을지 모르지만, 그들 역시 주님의 뒤를 따라 환대와 환호의 자리를 떠납니다. 익숙하고 안정된 자리를 고집한 채 주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주의 길을 따르기 위해 내가 떠나야 하는 ‘유대’는 어디입니까?
7~9절 여인은 물을 달라 하는 예수님의 요청에 당황합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더구나 유대인 남자와 사마리아 여자가 상종하는 일은 불가하다는 편견이 메시아를 인식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인종, 성, 종교, 민족적 편견이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작은 자의 모습으로 다가오시는(마태복음 25장 45절) 예수님을 내가 가진 편견과 선입견으로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기도
사회적 관습과 편견으로 높게 쌓아 올린 담들이 복음으로 무너지게 하소서.
공동체-다른 물에 기웃거리지 않고 주께서 주신 생수를 마시며 진정한 해갈을 누리게 하소서.
여호와의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네 재물이 약탈되어 네 가운데에서 나누이리라
내가 이방 나라들을 모아 예루살렘과 싸우게 하리니 성읍이 함락되며 가옥이 약탈되며 부녀가 욕을 당하며 성읍 백성이 절반이나 사로잡혀 가려니와 남은 백성은 성읍에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나가사 그 이방 나라들을 치시되 이왕의 전쟁 날에 싸운 것 같이 하시리라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 산에 서실 것이요 감람 산은 그 한 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 산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남으로 옮기고
그 산 골짜기는 아셀까지 이를지라 너희가 그 산 골짜기로 도망하되 유다 왕 웃시야 때에 지진을 피하여 도망하던 것 같이 하리라 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임하실 것이요 모든 거룩한 자들이 주와 함께 하리라.(스 14:1-5)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제물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의 서원제와 낙헌 예물과 너희 소와 양의 처음 난 것들을 너희는 그리로 가져다가 드리고
거기 곧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먹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으로 말미암아 너희와 너희의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신 12:6~7)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내가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뜻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뜻대로 하려 하므로 내 심판은 의로우니라.(요 5:30)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한마음으로 그가 하는 말을 따르더라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못 걷는 사람이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행 8:4-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