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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남편을 언급하심4:15~18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16 이르시되 가서 네 남편을 불러오라
17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18 너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예배에 관한 교훈4:19~26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25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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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여자는 자신의 상황을 모두 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며, 예배 장소에 대해 말합니다. 예수님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를 교훈하십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안다는 여자의 말에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라 밝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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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남편을 언급하심4:15~18
영혼의 생수와 일반적인 물은 차원이 다릅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영혼의 생수를 육신의 갈증을 채우는 물로 이해합니다. 그녀의 삶이 그만큼 절박했다는 뜻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섯 남자를 거쳐 지금 또 다른 남자와 살고 있습니다. 이는 부도덕해서라기보다 남자를 통해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려 한 몸부림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곤고함 가운데서 그녀는 남편 문제를 감추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삶의 문제를 드러내심은 정죄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회복과 진정한 삶을 선물하시기 위함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남편 이야기를 꺼내신 의도는 무엇일까요?
주님이 내 마음속 깊은 상처를 드러내실 때 나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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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관한 교훈4:19~26
사마리아 여자가 예배 장소에 대해 언급하자 예수님은 참된 예배에 대해 교훈하십니다.
첫째, 예배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심산(사마리아)이나 예루살렘(유대) 같은 장소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온전히 드리는 그때, 그 시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순결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예배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23절).
둘째, 예배하는 자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합니다(24절). ‘영으로’는 하나님 주권을 인정하는 마음, ‘진리로’는 진실하고 정직한 마음과 관련 있습니다. 실상 이 둘은 같은 의미입니다.
셋째, 예배의 대상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 오경만 정경으로 인정하는 사마리아인은 신명기 18장에 예언된 선지자를 ‘타헵’(Taheb, ‘회복자’라는 뜻)이라 부르며 그를 기다렸습니다(신 18:15, 18). 그러나 참된 메시아는 구약성경 전체가 예언한 ‘예수님’이십니다(25~26절).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은 예배에 대해 어떤 가르침을 주셨나요?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가 되기 위해 내가 숙고하며 실천할 일은 무엇인가요?
오늘의 기도
주님, 참사랑을 찾아 헤매던 사마리아 여인 같은 저에게 주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성경에 계시된 구원의 하나님을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게 하소서. 거짓 사랑을 좇으며 헛된 것을 예배하는 이들에게 영혼의 생수 되신 주님의 사랑을 알리게 하소서.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5-18절 사람이 겪는 목마름과 괴로움을 헤아리십니다. 여인은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줄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런 물이 있다면 다시는 물 길으러 나올 일이 없도록 그 물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해소해 주려고 하신 것은 몸의 목마름이 아니라, 물 뜨러 나오는 일을 지긋지긋하게 여기게 된 내면의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으로 여인의 근원적인 목마름을 다루기 시작하셨습니다. 여인은 “남편이 없나이다” 하고 대답하여 자신의 기구한 삶을 감추려 했지만, 예수님은 그 처지를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래, 네 말이 맞아. 네겐 남편이 없지” 하며 여인의 말과 존재를 긍정해 주셨습니다. 내게 있는 목마름과 메마름을 예수님은 다 아십니다. 그리고 힘들어하는 나를 이해하십니다.
15~18절 성령인 생수(14절)를 먹는 물로 오해한 여인에게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 단지 여인의 과거를 들추기 위함이 아닙니다. 여인의 근본적인 아픔을 일깨우시고 진정한 목마름과 대면하도록 이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아니면 거듭날 수 없듯이, 성령이 아니면 해갈할 수 없음을 알려주려고 하십니다. 내가 주를 잘 모르고 말씀에 미욱해도 주는 나를 아시고 말씀은 나를 정확히 읽어냅니다. 그리고 온전한 회복의 길로 나를 이끄실 것입니다.
20~24절 예배 ‘장소’에 대한 여인의 질문에 ‘때’로 대답하십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어디서’ 예배하는지 논쟁하다가 ‘누구에게’ 예배하는지를 잊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장소가 아니라 ‘예배의 대상과 방법’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대치할 ‘새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제사와 제물이 아니라 진리(예수님) 안에서 성령으로 예배하는 때가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고, 진리이신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데서 진정한 예배는 시작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도, 임재도, 뜻도 구하지 않은 채 예배당만 부지런히 드나들고 있는 건 아닙니까?
19-26절 근원적인 목마름을 해소할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여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해서 예배에 관해 물었습니다. 아마도 자신의 목마름을 예배와 종교를 통해 해소할 수 있다고 믿고 노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자, ‘그리심산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던 것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여인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참된 예배로 초대하셨습니다. 그 예배는 틀린 사마리아인의 예배나 옳지만 불완전한 유대인의 예배와 다르며, 장소에 구애받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것만이 여인이 찾던 예배, 영이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입니다. 온전한 예배의 길을 여신 분이 바로 성전의 실체(2:21)이자 성령을 부어 주시는(1:33)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참된 예배를 통해 참된 해갈을 얻도록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25,26절 여인의 관심이 드디어 ‘그리스도라 하는 이’에게까지 이릅니다. 땅의 일에서 하늘의 일로 관심이 바뀝니다. 유대 남성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그리스도로, 예수님에 대한 여인의 이해가 확장됩니다. 그러면서 점점 영생의 길로 가까이 들어서고 참 예배와 증인의 삶으로 나아갑니다. 신앙 햇수가 늘어날수록 예수님에 대한 내 이해와 고백도 더 분명해지고 더 깊어집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17절 남편을 불러오라는 요구에 당황한 여인은 ‘남편이 없다’고 둘러댑니다. 모호한 대답으로 대면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떳떳하지 못한 현실을 회피합니다. 불현듯 다가오는 불편한 말씀 앞에서 달갑지 않은 나와 마주하지 않으면 회개와 회복은 없고, 참 예배자(23절)로 설 수도 없습니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에 혼자 몸서리치지 말고 주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23,24절 공동체가 모여서 함께 드리는 예배도 물론 소중하고 중요하지만, 그것이 예배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너무 큰 손실입니다. 말씀을 마음에 품고 성령과 동행하는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매 순간을 예배로 드려 우리 삶을 촉촉하게 적시는 하루하루를 삽시다.
기도
사람의 감정과 기분에 맞추는 예배가 사라지고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게 하소서.
공동체-목마르고 메마른 저를 불러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요 4:15~26절)
❝주님이 찾으신 예배자로 사는 삶❞
❚ 생수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예배함으로 인생의 목마름을 해결해야 합니다.
✔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는 길은 무엇입니까?
➲ 자신의 영적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15~18절).
사마리아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도록 하는 그런 물을 자신에게 주셔서, 자신이 목마르지도 않고, 또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도록 해 달라(15절)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여인은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갑자기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16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남편이 없다고 말하는 여인의 마음을 꿰뚫어 보신 예수님께서는 다섯 번 결혼하여 다섯 명의 남편이 있었으나 현재 같이 사는 남자 또한 법적인 남편이 아니기에 여인의 말이 참되다(17~18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여인과의 대화를 통하여 진정한 회개 없이는 영생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삶을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내어놓고 벌거벗은 영혼으로 설 때에야 비로소 영생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의 현재 영적인 상태를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는 첫 단계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참으로 많은 풍요와 삶의 혜택을 누리고 살아가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정신적, 영적으로는 더 극심한 빈곤함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이다 보니 성적인 타락과 비윤리적인 행동 그리고 사회적,경제적 정의와 윤리 의식등이 무너지는 현상을 접하게 됩니다. 세상의 문화에 너무나 깊숙이 빠져있다 보니 예배의 자리에서도 별다른 감동과 은혜를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써 그리고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숨기거나 꾸미지 말고, 말씀을 거울삼아 매일매일 내 스스로를 점검해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 8:22).. 죄에 대한 고백이 없이는 하나님의 긍휼도 없습니다. 내 자신의 영적 상태를 잘 파악하여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예배에 대해 바르게 진단해야 합니다(19~20절).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에 놀란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부릅니다(19절). 예수님 앞에서 솔직하게 자신의 부끄러운 삶을 고백한 여인은 점점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그저 ‘유대인’으로 대하였지만 이제는 예수님을 선지자로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이어서 여인은 죄의 문제에서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오래된 논쟁거리였던 예배의 문제로 바꿉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의 장소가 그리심 산인지 아니면 유대인들이 예배드리는 장소인 예루살렘 성인지를 알고자 했습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 용서함을 받은 자에게 나타나는 현상은 예배하는 태도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죄 문제, 영적인 문제를 해결 받기 위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필요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신앙의 활력은 예배에 대하여 내가 사모하는 것만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배가 습관적인 주중 행사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하며, 예배에 대한 기대감 없이 습관적으로 드리지 않아야 합니다.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예배를 위해 지금 내 자신의 신앙의 상태와 예배드리는 태도를 바르게 진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된 예배를 사모하며, 예배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함으로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진리의 영을 간절히 사모해야 합니다(21~26절).
예배의 장소를 묻는 여인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21절)말씀하십니다. 즉, 예배하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 예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아버지께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마리아인들은 모세 오경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예배의 대상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으며 성경에 의해 지정된 장소에서 예배를 드렸다(22절)는 것입니다.
지금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23절)임을 강조하십니다. 이는 곧, 메시아를 통하여 예배의 개혁을 가져올 때임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가 아니라 진리의 영을 마음속에 모시고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그러한 예배자를 하나님은 찾으십니다.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24절). 예배의 핵심을 알게 된 여인은 그 핵심을 실현하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말하자 예수님은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25~26절)고 말씀하십니다.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예배의 대상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내용이 중요합니다. 자비와 인애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자복하고 회개하는 심령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인자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고자 하기 때문이요, 내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고, 위에 있는 것들을 구해야 하고(골 3:2),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갈 2:16)을 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의 능력으로 예배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예배여야 하겠습니다. 진리의 영을 간절히 사모하여 영과 진리로 온전한 예배로 나아가 주님이 찾으시는 참된 예배자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오늘도 영적 성장을 위해 날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전확하게 파악하며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온전한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은총을 더 깊이 경험할 수 있도록 영과 진리를 사모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4:15~26절)...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말씀하시자,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요4:15)
그때, 가서 네 남편을 불러 오라 말씀하시자,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대답했습니다 이에 주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요4:17) 여기서 어떤 이들은 이 여인의 직업이 창녀였다느니, 남편을 거듭 잃은 과부였다느니, 본질에서 벗어나는 주장을 합니다
그렇다면 본질이 무엇입니까? 이 여인은 역사와 전통에서 자기 정당성을 찾는 모든 종교인을 대표한다는 것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가 전통적으로 자기들이 정통이라며 서로 혐오했던 것처럼 모든 종교와 종파가 그렇게 서로 자기가 정당하다며 상대를 혐오합니다 그러나 사실 그들 모든 종교와 종파는 생명 없는 다섯 남편과 여섯 번째 지금 남편에 불과합니다 히브리어로 남편은 "בעל"(바알)입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이 임하시고 모든 안개가 걷히면 더 이상 그것들을 내 바알이라 하지 않고 남편이 없다고 참되게 말할 것입니다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요4:18)
그리고 오직 영생의 샘물을 주시는 주만 내 남편이라 일컫게 될 것입니다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그의 입에서 제거하여 다시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여 부르는 일이 없게 하리라"(호2:16~17)
그러자 그 여인이 예수님께서 선지자인 줄 알고 예배에 대해 물었습니다 사람이 선지자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무엇을 물을까요? 대부분 자기의 앞날이나 성공 비법을 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예배에 대해서 물었습니다
생명 얻는 유일한 길이 예배라고 믿었고, 참된 예배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말씀하셨습니다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22) 누가 영생을 얻을까요? 주의 증언하신 말씀을 믿고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서 영과 진리로 참되게 예배하는 자입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4:23~24)
예수님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을 달라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당신이 메시아임을 밝히신다.
성경 전체 핵심인 요한복음 3:16을 이야기체로 풀어간 것은 누가복음 15장 탕자 이야기이고 대화체로 푼 것이 본문의 사마리아 여인 이야기이다.
예수님은 여인과 대화를 계속하면서 영적인 눈을 뜨도록 도와주신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한 채 물을 길러 오지 않게 해달라는 여인에게 남편을 불러오라는 말씀으로 자신의 실체를 보게 하신다.
여섯 남편으로도 채워지지 않던 사마리아 여인처럼 우리도 세상 헛된 것을 구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하겠다.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을 선지자로 생각하고 어디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은지 질문하고 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한다고 하고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장소가 문제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 충만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온전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를 통해 그녀의 관심이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로 향하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메시아임을 밝히셨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여인은 많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아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을 향해 고백하고 있다.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신비는 보여주시고 알려주시는 것만큼만 알 수 있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예수님에 관한 진리는 그분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시라는 사실이다.
이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다.
그런 삶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시길 소망합니다.
-15. 여자가 이르되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
야곱의 우물에서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를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바로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주실 분, 그리스도이심을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여전히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자신의 육신의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런 기가 막힌 물이 있다면 나도 주세요!’ 그래서 자기를 외면하는 사람들과 부딪혀야 하는 이 우물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15절). 우리는 늘 사마리아 여자처럼 땅의 문제, 육신의 문제에 눈을 떼지 못하고 삽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들어 영원한 생명의 길을 보게 합니다. 예수와의 만남은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입니다.
19.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의도를 빗나간 여자의 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계속 여자를 깨우고자 하십니다.
여자에게 느닷없이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십니다(16절). 어떻게 보면 무례하기 짝이 없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께서 작정하시고 부른 한 영혼을 향한 열심을 보게 합니다. 여전히 자신의 문제 깨닫지 못하는 영혼을 깨우려 하는 예수님의 열심. 그에게 참 생명을 주고자 하시는 열심입니다.
순간적으로 여자는 남편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여자의 속 사정을 이미 다 알고 계십니다. 그녀에게 이미 전 남편 다섯이 있었고, 지금도 남편이라고 있지만, 그에게 의지할 수도 없는 입장인 것을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없다는 여자의 말은 어떤 의미로는 의지할 데 없는 자신을 무의식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신의 상황을 정확하게 아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깜짝 놀라 선지자라고 지칭합니다(17-19절).
처음에는 그저 낯선 유대인 남자요, 생수를 주겠다는 황당한 말을 하시는 사람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자신 속에 꽁꽁 감추어둔 아픔을 정확하게 아시는 그는 그저 낯설고 황당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아는 순간 예수님이 바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게 된 여자는 갑자기 예배 장소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20절).
어디서 드리는 예배가 좋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은 이 여자가 예수님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죄를 깨달은 까닭입니다.
그 죄를 씻기 위해 예루살렘이 아닌 사마리아의 그리심 산에서 드려도 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과 진정한 구원이 어디서 오는지를 가르치십니다. 예배는 형식적으로 드려지는 예배를 위한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오직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을 예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결국 하나님께서 보내신 독생자 예수를 아는 자입니다.
참된 유대인으로서 구원을 가지고 오신 예수를 아는 것이 예배의 시작입니다.
그것을 곧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진리로 오신 예수를 알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알고서 드리는 예배만 받으십니다(21-24절).
우리의 예배는 예수가 누구인지 알고, 그를 인정함으로 그 앞에 나를 온전히 드릴 때만 진정한 예배입니다.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
여자는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예배를 받으실 분이 메시아이신 것을 압니다.
그리스도이신 그분이 오셔야만 참 진리를 알게 해주실 것을 고백합니다.
예수는 그녀가 고대하는 바로 그 메시아가 자신인 것을 밝힙니다(25-26절).
적용과 결단 (요4:15-26)
언제 예수를 만나셨나요?
화려한 옷을 입은 채 예수를 만난 사람, 혹시라도 있나요? 아마 그때 만난 이는 예수가 아닐지 모릅니다.
예수는 언제나 나의 인생이 비루하고, 처참한 것을 깨달을 때 만나게 됩니다.
절망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는 나를 깨달을 때 만나게 됩니다.
그제야 주님이 보입니다. 얼굴을 가리고 홀로 나온 부끄러운 나를 기다리시는 예수를 보게 됩니다.
뜨거운 정오의 햇살을 마다하지 않고 앉아 기다리시는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쭈뼛거리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거시는 그 주님을 비로소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화려한 깃을 잔뜩 세운 공작과 같은 내가 아니라, 밑도 모를 절망의 끝에 가서야 만나게 되는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만 따르게 됩니다.
1. 우물가에서 예수님을 만난 여자는 어떤 사람인지 묵상해봅시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인지 생각하고 말해봅시다.
2.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하신 말씀을 통해 예배란 무엇인지 묵상해봅시다. 나는 그런 예배 속에 있는지 스스로 돌아봅시다. 기도할 일이 있다면 함께 기도합시다.
자기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간청하는 여인에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지적합니다. 왜 그녀가 이 뜨거운 한낮에 물을 길으러 와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녀는 자기의 죄에 대해 피하고 싶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위해서(영생의 물을 마시기 위해서는) 우리의 모습을 직시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스스로 고백해야 합니다. 자기의 죄를 보고 자기의 한계를 인정하고 난 후에 하나님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시작됩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부르는 호칭의 변화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유대인이라 칭하다가 “야곱보다 더 크니이까”에서 “선지자”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당신은 그리스도”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나 주실 때, 이러한 고백을 기필코 받아내십니다.
우리는 쉽게 생각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답하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은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입니다. 우리는 장소에 관심이 있는데 예수님은 때에 관심을 두고 계십니다. 우리는 외형에 관심이 많습니다.
예배당의 분위기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 어떤 악기를 사용하면 더 영적일 수 있을까? 예배의 순서를 어떻게 하면 좀 더 경건한 예배가 될 수 있을까? 우리들은 장소, 분위기, 형식에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때에 관심을 두십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예루살렘에서 드리는 예배나 벧엘에서 드리는 예배 모두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부족한 것은 영과 진리입니다. 여기서 영이란 성령을 말합니다. 성령님께서 오실 때 우리는 진리로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진리의 예수님을 증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중심은 오직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내 열심으로 거룩함을 만들지 않습니다. 성령님께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거룩함으로 나아갑니다. 내 능력으로 예배를 참여하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능력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도를 의지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찬양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녀는 좀 더 좋은 재물을 구해서 벧엘이 부족하면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녀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는데 바로 이때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은 메시야가 오시면 모든 것을 알려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그것을 가르쳐 줄 자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26절에 “내가 그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더 정확한 번역은 “나는 나이다”입니다. 모세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을 가르쳐 주신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제 사마리아 여인은 벧엘이나 예루살렘이 갈 필요가 없습니다. 영과 진리로 온전히 예배드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메시야가 그녀 앞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가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만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는 때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령님과 진리이신 예수님이 우리의 예배의 중심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얼마나 축복입니까? 우리의 가정이, 사업체가, 우리의 가정이 예배하는 곳이 된다는 것이….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만남을 통해서 기쁨과 감사가 넘쳐나길 소원합니다. 마치 사마리아 여인이 물동이를 버려두고 기쁨에 넘쳐 동네에 들어가 그리스도를 전했듯이, 우리도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능력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제게 그 물을 주십시오(15절)”
사마리아 여인은 물을 길으러 나왔다가, 생수를 한없이 내는 샘물을 주신다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는 그 결핍을 영원히 채워줄 그 마르지 않는 샘물을 간구합니다. 하지만, 어둠 가운데 주님의 말씀으로 마무리될 수밖에 없었던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었던 니고데모의 대화와는 달리, 따가운 태양 아래 가난하고 목마른 심령으로 구함으로 그녀는 주님 앞에 한 계단 더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한 자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긴 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큰 간격이 발견되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가 어디에 서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겸손히 뒤돌아보고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는 복 있는 가난한 심령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남편을 불러오너라(16절)”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운데 양날 선 검과 같이 영적 찌꺼기를 도려낼 수 없게 되었다면, 우리는 심각한 타락과 교만 가운데 허덕이고 사마리아와 같은 상태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남편, 그토록 우상처럼 붙들고 있었던 세상의 정욕들과 자랑들을 주님 앞에 내어 드러내고, 하나님의 수술대 위에 고침을 받고 새 생명을 얻는 거룩한 자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유대 사람(9절), 예언자(19절), 메시아(25절)”
진정으로 해결되어야 할 인생의 문제가 과연 지금 붙들고 있는 것을 통해 길을 찾아갈 수 있는 것인지 돌아봅니다. 오히려 움켜진 그 손의 힘을 빼고, 시선을 주님께로 향하여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일, 그 진리 안에 거하는 결단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임을 기억하는 하루의 삶이 되길 간절히 구하며 나아갑니다.
“참되게 예배하는 자…영과 진리로(23절)”
이미 그녀의 갈증을 채우시기 위해 몇십 킬로 유대 땅에서부터가 아니라, 하늘 보좌를 떠나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지금도 우리의 심령을 향해 날마다 눈물로 다가오십니다. 그토록 세상을, 또한 인생을 사랑하시고, 우리 가운데 해결되지 못하는 그 수많은 의문과 갈증을 온전해 채우실 샘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한 분으로 말미암아 위로와 회복이 있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 요한일서 1:5-7
감사함으로 그의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시 100:4)
너 하늘아 이 일로 말미암아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2:12)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19~20)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 2:46~47)
끝으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엡 6:10~1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살전 2:13)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20)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4:12~13)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세상의 빛과 비교할 수 없이 환하게 우리의 죄를 도말하시고,
어둠을 몰아내시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명과 평안을 얻게 하시니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그 빛 가운데 거하고, 오직 여호와로 말미암아
모든 슬픔과 아픔이 기쁨과 영광으로 변화되는 참 예배자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과 진리로, 오직 신령과 진정으로 나아가며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을 향하여 마음을 모으고
시선을 집중하는 성령 충만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곳곳마다 주님의 뜻을 전하며, 승리의 깃발을 세우시는
선교사님들의 가정과 사역과 모든 발걸음 가운데 동행하여 주시고,
그 작은 간구의 소리마다 선하고 풍성하게 응답하여 주시옵소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고통과 질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이들의
기도에 하나님의 선하신 응답이 있게 하시고,
위로와 회복과 치유의 광선을 구석구석 비춰 주시옵소서.
다툼과 분열, 분노와 어둠 가운데 허덕이는 이 나라와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아버지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거룩한 제사장의 사명 감당하도록
말씀과 성령으로 새롭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양을 아버지께 올려드리며,
우리의 길과 진리와 생명 되신 예수님의 거룩하신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