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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1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제1독서 : 이사 35,1-6ㄴ.10
제2독서 : 야고 5,7-10
복 음 : 마태 11,2-11
그때에
2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3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5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6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7 그들이 떠나가자 예수님께서 요한을 두고 군중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구경하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8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고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 고운 옷을 걸친 자들은 왕궁에 있다.
9 아니라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10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 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그가 네 앞에서 너의 길을 닦아 놓으리라.’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을 읽다가 사람 몸에 0.2mg(70kg 사람 기준)의 금이 들어 있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대부분 혈액 속에 함유되어 있다는데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몸에 금만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탄소, 산소, 수소, 구리, 아연 등이 몸 안에 함유되어 있었습니다.
혹시 자기 몸에 금이 있다는 사실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요?
구리나 아연은 느끼십니까? 단 한 명도 이를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있다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몸 안에 이런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 삶에 어떤 긍정적 요소가 없다면서 절망하고 좌절합니다.
그런데 앞서 금, 구리, 아연 등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부정적 요소나 긍정적 요소는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까요?
그냥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잘못된 마음에서는 나오는 것뿐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성분이 자기 몸 안에 있는 것처럼,
자기에게 없다고 생각했던 긍정적 요소도 차고 넘칩니다.
기쁨, 희망, 사랑, 행복 등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주 적은 긍정적 요소라도 발견하게 되면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되어, 올바른 길로 자신을 인도해 줄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던 요한이 제자를 보내서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3)라고 묻게 합니다.
사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세례를 직접 주었으며, 세례받으실 때의 사건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질문은 어떤 의미일까요?
확신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약간의 의심이 생긴 것이 아닐까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의 거짓 증언으로 세례자 요한도 혼란을 겪게 된 것입니다.
마귀 두목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서 사람을 고쳐 준다는 이야기,
안식일 법을 비롯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다는 이야기 등등….
세례자 요한의 감옥 생활이 절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인권이 보장되어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햇빛도 비추지 않는 캄캄한 감옥에서
이런 부정적인 말까지 더해지니 의심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당신이 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그래서 의심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의심이 들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상태가 아닌, 어렵고 힘들 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의심을 지우고 굳게 믿는 사람은 행복하게 됩니다.
희망의 천사, 닉 부이치치
류해욱 요셉 신부
제가 오래전 천진에 갔을 때, 동영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그 동영상을 보고 느낀 것에 대해 아이들에게 묻고,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이 동영상이 아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습니다.
저는 성찰의 하나로 삶에서 때로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이미 알고 있고, 그의 다른 동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그날 왜 그렇게 그 동영상이 감동으로 다가왔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이 동영상을 대림의 의미를 다시 새겨보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오시기를 기다리는 그분, 그분의 오심 안에 진정한 우리의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닉 부이치치의 동영상을 아직 보지 않으신 분은
꼭 보시기 바라며, 닉 부이치치를 소개합니다.
닉 부이치치는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는 중증 장애인이었습니다.
그는 학교에 가기 전까지는 부모의 사랑 안에서 행복한 아이였지요.
그가 자신의 장애에 대해 알게 된 건 학교에 입학한 여섯 살 무렵이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 집 밖에 나갈 일이 없었고, 다른 아이들을 만나지 않아서
자기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신의 모습에 대해 비관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가 다르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러나 자신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는 아주 다르다는 사실,
그리고 그 다름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듯이 학교의 다른 아이들은
그를 보고 ‘괴물’이나 ‘외계인’이라고 놀렸지요.
그가 어린 나이에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는지는
세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놀랍도록 밝고 유머가 풍부한 닉 부이치치는 천성으로 타고난 것도,
고통의 과정 없이 단순한 기적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닙니다.
동영상에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금 28세의 청년 닉 부이치치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서핑을 하며,
너무나 신나게 드럼을 치고, 심지어는 골프 퍼팅까지 합니다.
그는 전 세계 30여 개국을 다니며
지금까지 300만 명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했다고 합니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니, 우리나라에도 다녀갔다고 하네요.
지금의 닉 부이치치가 오늘날 전 세계에 희망을 전하는 천사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절망을 뛰어넘어야 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는지는
우리가 상상조차 하기 힘들 것입니다.
절망을 희망으로 바꾼 그의 삶, 아니 그의 존재 자체가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가 처음 화면에 비치는 모습만을 본 사람들은
모두 너무 불쌍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평화로운 얼굴, 웃음, 유머를 대하면서 처음 지녔던 불쌍하다는 느낌은
점점 감동과 놀라움으로 변하며 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지니게 됩니다.
그는 팔다리를 가지고도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는 많은 일을 합니다.
그는 불과 17세의 나이에 비영리단체 ‘사지 없는 삶’을 조직했다고 하며,
19세 때 대중 앞에서 첫 연설을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거의 십 년 동안
수많은 학생과 교사, 청년, 사업가, 여성 등
다양한 청중을 대상으로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왔습니다.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이제껏 그가 만난 사람은 300만 명이 넘는다고 하니, 놀랍지요.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불가능처럼 느껴지는 것을 가능으로 만드는 그의 놀라운 힘은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는 희망을 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며 은총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체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하며, 열정을 지니며 활동하는 것은
그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며 희망을 얻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가 말합니다.
“언젠가 강연을 하다 저처럼 팔과 다리가 없이 태어난 19개월 된 아이를 본 적이 있어요.
아이의 어머니는 매일 기도했답니다. 아이에게 희망의 증거를 보여달라고요.
그 아이 어머니는 저를 보자마자 끌어안고 울면서 말하더군요.
‘당신은 기적 그 자체예요!’ 사람들은 저를 보고 희망을 얻는다고 말하죠.
저 역시 그런 사람들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오늘 대림 제3주일은 기쁨의 주일이며 자선 주일이기도 했습니다.
자선이란 지닌 것을 나눔인데, 저는 대림 제3주는
무엇보다 기쁨을 나누는 주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이 바로 희망을 나누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로 희망을 나누는 닉 부이치치. 그의 얼굴의 표정은 그야말로 천사입니다.
환하게 미소를 띠고, 수많은 청중 앞에서 자기 삶의 희망을 나누는 그를 보며
저는 신체적 장애도 처절한 고통의 과정을 거치면 축복이 될 수 있다는 사실,
고통의 과정을 통해 어두움 너머 빛으로 이끄시는
그분의 은총에 절로 머리 숙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를 절망을 이기고 희망으로 나아가도록
단순히 연민의 마음으로 보호해 주려고 하지 않고
고통을 통해 혼자 일어설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전을 던진 그의 부모에 대해서도
깊은 존경심을 지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00번을 넘어져도 101번째 혼자 스스로 일어나도록 기다려 주는 것이
부모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모는 닉에게 다만, 그는 몸의 일부가 없는 아이일 뿐이지,
다른 아이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심어주었습니다.
그가 다른 사람들 모두 팔과 다리 없이는 불가능할 거라 말했던 일들을
하나씩 이루어 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를 일반 보통 아이들과 함께 중고등학교를 다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에 놀리던 아이들과 진정한 친구가 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 친구들이 닉을 받아들이며, 닉은 진정한 우정을 통해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
그래서 몇 배의 노력을 해야 했지만,
친구들의 도움으로 함께 학교를 다닐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닉 부이치치는 놀랍게도 팔다리 없는 몸으로
일반 대학에 진학해 회계와 경영학을 전공할 수 있었습니다.
동영상에서 그가 머리와 몸만으로 골프를 하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퍼팅이지요. 수 없는 실패를 거듭하지만 결국 공은 홀로 빨려 들어갑니다.
그의 몸에 붙은 작은 손의 역할을 하는 살붙이.
그 살붙이로 신나게 드럼을 치는 그는 진정 행복한 사나이입니다.
그를 그토록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는 말합니다.
“일시적인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둔다면 그 행복 역시 일시적인 것이 됩니다.
사람의 외모는 변하게 마련이고 돈은 있다가도 없을 수 있어요.
자신의 겉모습이나 통장 잔고가 아닌 내면에 가치를 두세요.
그 가치를 지켜나가는 건 자신의 몫입니다.”
인생의 참가치를 발견한 닉 부이치치.
그가 쓴 책의 제목의 하나가 ‘허그’입니다. 허그는 껴안는다는 말이지요.
그는 인생을 껴안았고, 많은 사람을 껴안습니다.
그를 본 사람들은 그에게 다가가서 그를 껴안습니다.
동영상에서 그를 껴안으며 눈물을 흘리는 여학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 장애를 가지고 어떻게 그리 긍정적일 수 있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그는 답합니다.
“바로 저의 가치를 알고 제가 바라봐야 하는 곳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폭풍의 한가운데 있다고 해서 그 안에 함께 있는 다른 사람을 돕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자기 존재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는 존재 자체가 장애를 지닌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믿고
그 하나만으로도 자기가 열정으로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삶이 고통스럽다고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마세요.
살아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와 비슷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에게
저보다 더 큰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이 코로나 시기에 닉 부이치치는 저에게 희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팔다리가 없는, 겨우 1m가 조금 넘는 그의 모습이,
아니, 환하게 웃는 그의 미소가 얼마 동안 제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저에게도 희망의 위대한 천사로 날아오를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산보를 하면서 가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합니다.
‘머리, 허리, 다리’는 우리의 몸을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앞의 말은 다른데 끝에 말은 모두 ‘리’로 같습니다.
앞의 말은 우리 몸의 특정 부위를 뜻하는 것 같고 뒤의 말은 그냥 붙이는 접미사 같습니다.
비슷한 말로 예수님, 선생님, 임금님, 사장님의 ‘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와 미나의 비유에서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도 10배, 2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며 접미사를 사용하셨습니다.
사제는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접미사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 또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포도나무의 비유’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맺지만,
가지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마르고 버려질 것이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가 되어야 합니다.
또 하나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을씨년스럽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불고, 우산이 없는데 비까지 내리는 경우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합니다.
문득 그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구글에 물어보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에 위임한다는 내용의 을사늑약이 강압적으로 체결됐던 날입니다.
당시 온 나라가 비통함과 울분으로 가득 찼었다고 합니다.
그날은 날씨도 흐리고 추웠다고 합니다.
몹시 쓸쓸하고 어수선한 날을 맞으면
그 분위기가 마치 을사년과 같다고 해서 '을사년스럽다' 라는 표현을 쓰게 됐습니다.
그 말이 변형되어서 1957년 국어사전에 ‘을씨년스럽다.’라고 표기했다고 합니다.
한국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습니다.
신유박해, 기해박해, 병오박해, 병인박해입니다.
70년에 걸쳐서 4번의 큰 박해가 있었고 만 명 이상이 순교하였습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고 교회는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습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 것처럼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찾았습니다.
순교자들이 묻힌 무덤은 신앙을 증거했던 ‘성지’가 되었습니다.
서울에는 절두산, 새남터, 서소문, 삼성산 성지가 있습니다.
경기도에는 미리내 성지가 있습니다.
충청도에는 해미, 갈매못, 줄 무덤 성지가 있습니다.
전라도에는 치명자산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도에는 베론 성지가 있습니다. 경상도에는 한티성지가 있습니다.
그 밖에도 많은 성지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선조들이 목숨을 바쳤던 곳에,
우리 신앙선조들이 신앙을 지켜온 곳들이 성지가 되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신앙의 못자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여의도에서 103위 성인의 시성식을 집전하였습니다.
30년 후인 2014년에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광화문에서 124위의 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렸습니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의 여파로 교회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었지만
비가 온 뒤에 땅이 더 단단해지듯이
교회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새로운 활력을 찾을 것입니다.
2000년 교회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 3주일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절망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그 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주님께서 해방시키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주님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시나, 악인의 길은 꺾어 버리시네.”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올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은 제자들을 보내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께서 을씨년스러운 날을 광명의 날로 바꾸시는 바로 그분이십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복음이 이사야 예언자의 꿈이 현실이 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 복음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우리의 삶에도 을씨년스러운 날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건강하던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잘 나가던 사업이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선의를 가지고 했던 말들이 오해를 받기도 합니다.
내 마음에 시기와 질투의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이웃의 비난과 비판이 도를 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습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면, 항상 기도한다면, 언제나 기뻐한다면
그리고 이웃의 아픔을 같이 아파하고, 이웃의 슬픔을 같이 슬퍼할 수 있다면
을씨년스러운 날들은 지나가고 광명의 날들이 찾아올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우리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기다려라, 만나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우리는 방금 화답송 후렴을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했습니다.
“주여, 오소서. 오사 우리를 구원하소서.”
주님 오실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대림 촛불 셋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며 주님께서 가까이 오심을 알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대림 제3주일입니다.
일명 ‘라우다테Laudate’ ‘기뻐하여라’ 주일이자
기쁨의 장미 색깔 제의를 입기에 장미주일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오늘은 제39차 자선주일이기도 합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신앙 실천 행위입니다.
막연히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힘닿는 대로 자선을 실천하며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도 클 것입니다.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참으로 언제나 영원히 기다릴 대상인 주님이 계시다는 것은 참 기쁘고 행복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기다릴 것도 사라지고 이제 믿는 이들에게는
기다릴 대상은 주님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광야 인생, 기다릴 궁극의 희망이신 주님이 없다면 삶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이런 주님을 기다림이 없이 무슨 희망으로 기쁨으로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으로 산다면 정말 순수하고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시기를 살고 있습니다.
도대체 희망의 주님을 기다리지 않으면 누구를 기다리겠습니까?
주님을 참으로 기다릴 때 기다림의 기쁨입니다.
필립비서 말씀이 반갑게 떠오릅니다.
그대로 주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에 맞는 말씀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너그러운 마음을 모든 사람이 알 수 있게 하십시오.
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습니다.”(필리4,4)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 서두 말씀도 온통 기뻐하라는 말씀으로 가득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이, 사막이 상징하는바 우리들입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
레바논의 영광과, 카르멜과 사론의 영화가 그곳에 내려,
그들이 주님의 영광을, 우리 하느님의 영화를 보리라.”
얼마나 고무적인 말씀입니까?
주님을 기다리는 순수하고 간절한 마음에서 샘솟는 기쁨이요,
주님의 영화와 영광이 빛나는 기쁨입니다.
그러니 기뻐하십시오. 이런 기쁨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기뻐하라.에 이어지는 두 번째 권고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대로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 말씀입니다.
“너희는 맥 풀린 손에 힘을 불어넣고, 꺾인 무릎에 힘을 돋우어라.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기쁨은 힘이자 빛입니다.
기쁨의 빛 앞에 사라지는 두려움의 어둠입니다.
이런 주님을 기다리는 기쁨이 끝없는 인내의 기다림을 가능하게 합니다.
기뻐하라, 두려워하지 마라, 다음에 “기다려라.”입니다.
야고보서 말씀이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에 고맙게도 잘 맞습니다.
재림이란 말마디를 적당히 바꿔 전문을 읽어봅니다.
아마도 기다림의 달인은 충실한 농부일 것입니다.
“형제 여러분,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땅의 귀한 소출을 기다리는 농부를 보십시오.
그는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맞아 곡식이 익을 때까지 참고 기다립니다.
여러분도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가지십시오.
주님 오실 날이 가까웠습니다.
서로 원망하지 마십시오. 그래야 심판받지 않습니다. 심판자께서 문 앞에 서 계십니다.”
기쁨의 기다림 앞에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원망, 절망, 실망이 사라진 희망과 기쁨 가득한 마음으로 주님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때가 있는 법, 인내의 기다림 없이 이뤄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기다림에 이어 만남입니다.
“주님을 만나라.”입니다.
대림시기 주님 성탄에 앞서 우리는 날마다
이 미사전례를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을 만납니다.
주님 만남의 은총이 참으로 큽니다.
가톨릭교회 전례도 살아 계신 주님과의 만남을 목표로 합니다.
주님을 만날 때 치유와 위로를 받습니다.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가 정화 은총이고 성화은총입니다.
영육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집니다.
주님을 만날 때 참 좋은 기쁨과 평화, 희망과 행복을 선물로 받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아니곤 어디서 이런 선물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 지녔어도 기쁨이 없다면, 평화가 없다면,
희망이 없다면 결코 행복하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거금을 주고도 살 수 없고 억지로 뺏어 올 수 있는 기쁨이, 평화가, 희망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때, 은총의 선물인 것입니다.
바로 참으로 믿는 이들은 주님과 만남의 기쁨으로 살아갑니다.
한두 번 만남이 아니라 결정적인 성탄의 만남에 앞서
대림시기 날마다 앞당겨 찾아오시는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참 고마운 것이 날마다 끊임없이 우리를 만나러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야 할 자리는 언제나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가 힐링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을 만난 예수님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듣는 것을 전하라 이르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기적들입니다.
그대로 제1독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서 말씀이
주님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즐거움, 온전한 치유를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그 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그들은 환호하며 시온에 들어서리니, 끝없는 즐거움이 그들 머리 위에 넘치고,
기쁨과 즐거움이 그들과 함께하여,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라.”
주님을 만날 때 전 존재의 치유요 기쁨임을 보여줍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할 때 이런저런 것들에 매여
참 자유로움도 행복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전인적 치유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성탄에 앞서 이 은총의 대림 시기,
날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을 앞당겨 만나 새롭게 거듭나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1. 주님 안에서 기뻐하십시오.
2.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3. 주님을 기다리십시오.
4. 주님을 만나십시오.
은총의 대림시기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실천해야 할 구체적 과제입니다. 아멘.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해가 뜨기 전 먼동이 터오듯,
참 빛이신 아기 예수의 탄생이 가까워지면서 세상에 희망의 동이 터옵니다.
이토록 보랏빛 동녘 하늘 타오르는, 오늘은 기쁨 주일입니다.
이 기쁨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기뻐하여라.
거듭 말하니,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여라.
주님이 가까이 오셨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도 기쁨을 선포합니다.
“광야와 메마른 땅은 기뻐하여라.
사막은 즐거워하며 꽃을 피워라.
수선화처럼 활짝 피고 즐거워 뛰며 환성을 올려라.”(이사 35,1-2)
오늘 우리는 이 기쁨 주일에 핑크빛 옷을 입고서
설레이는 기다림과 고대하는 기쁨으로 벅차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광야에 머물러 있습니다.
아직도 감옥이라는 광야에 갇혀 있습니다.
감옥이라는 광야는 목을 내밀고 메시아를 애타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소입니다.
기다림만으로 온전히 꽉 찬 공간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지금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께서 과연 오시기로 되어 있는 분인지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마태 11,3)
요한의 이 의구심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신 일들이
자신이 선포했던 메시아 상과는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타작마당에서 곡식을 가려 쭉정이를 불태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나쁜 나무를 찍는 도끼의 심판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과 함께 고통당하는 사랑을 말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불의를 징벌하고 정의를 세우는 심판자인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죄인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인을 구하기 위해 용서하였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요한이 알고 기다리고 있었던 메시아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 다급한 물음에,
‘나는 메시아다’라고 분명한 대답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들을 통하여,
신앙고백에 이르러야 했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이는 예수님께 대한 믿음으로 혼란에 빠지지 않는 사람에게
들려주는 행복선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활동 모습이 자신이 생각했던 메시아의 표상과 일치하지 않더라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는 복되다는 진복선언입니다.
동시에 이는 의심을 품지 말라는 아주 냉혹한 경고의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기존 표상과 관념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에게
내리는 질책과 경고의 말씀입니다.
아니 자신 안에서 먼저 자기 관념을 깨부수라는 철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마태 11,4) 이르시면서,
‘보고 들었던’ 내용을 이사야를 인용하여 표현하셨습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마태 11,5)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참된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고 보여주셨습니다.
실로 인간 삶의 길과 하느님 생명의 길은 사뭇 다릅니다.
인간 삶의 길은 먼저 살고 나중에 죽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생명의 길은 먼저 죽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 항상 살기 위해서 애를 쓰며 모든 힘을 다 쏟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힘을 다 탕진하고 애를 쓸 힘이 더 이상 없으면 죽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살려고 옥신각신하다가 하는 수 없이 죽게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길은 먼저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잃은 사람은 살릴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하느님 생명의 길을 따라 자신을 버리면, 진정 행복한 삶일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고 다음에 살아간다면,
진정 하느님의 생명, 참된 생명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된 기쁨을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기쁨 주일인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행복선언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 11,6)
주님!
먼저 죽고 나중에 사는 생명의 길을 가게 하소서.
먼저 떨어져 죽고, 나중에 열매 맺게 하소서.
살다가 죽는 것이 아니라 먼저 죽으면서 살아가게 하소서.
살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죽지 않고,
죽기 위해서 모든 힘을 다 쏟고 난 후에서야 살게 하소서.
아멘.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차 있다.
이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그 기쁨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가 주는 기쁨이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 환희와 기쁨을 준다고 한다.
이사야는 기쁨을 드러내는 구원의 개념을
“그 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 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트리리라.”(35,6) 표현한다.
구원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다. 병은 인간의 신체적인 관계의 불균형이다.
이 불균형을 균형으로 맞게 해주신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다.
이것이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예언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된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낸다.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버리실”(마태 3,12) 분,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보이는 분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5-6절).
여기서,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로서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한센인, 청각장애인,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지만,
그보다도 특히 병들고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동참과 구원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는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7-11절).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의 탈출기(23,20)와
말라키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사람이라도 요한 세례자보다 크다고 하신다(11절).
요한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 표징의 의미가 약화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흔들리지 않고 인내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의 때는 바로 은총의 때, 구원의 때이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협력하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이루어주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큰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서공석 요한 세례자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을 각각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말합니다.
요한은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며, 예수님의 길을 닦아 놓기 위해 파견된 인물입니다.
그리고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에 대한 극찬의 말씀 끝에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고도 말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 나라의 질서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요한의 차이를 분명하게 하려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가 보입니다.
오늘 복음은 요한이 감옥에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에게 오실 그 메시아인가를 물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메시아가 오시면 일어날 일이라고
구약성서의 이사야서(29,18-19; 35,5-6; 61,1)가 말한 내용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도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행적을 회상하면서 찾아낸 이사야서의 구절들입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행복하고
그분은 우리의 불행과 악을 퇴치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초능력으로 기적을 행하는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은 초능력을 얻어 우리의 소원을 성취하는 수단이 됩니다.
그것이 신앙이라면, 신앙은 童話에 나오는 “열려라 참깨!”의 위력을 얻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 동화는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는 데 도움이 될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되지는 않습니다.
신앙인은 초능력을 찾아 나선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연 질서 안에 세상을 창조해 놓고, 몇 사람에게 초능력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의 제자 되는 길입니다.
인간의 불행과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벌이라고 믿던 유다인들에게
예수님은 그런 벌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양 한 마리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어울려 먹고 마신다고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자주 불평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과는 달리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라고 믿으셨습니다.
죄인들과 세리들에게도 하느님은 아버지로 계신다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예수님이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등을 고쳤다는 말은
아버지라 부르던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베푼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생명이 하는 일을 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일을 배워 실천합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실천되는 곳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여러분 가운데 있다.”(루카 17,21)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 안에 사람들은 불행과 악을 퇴치하는 노력을 해 왔습니다.
사심 없이 인류의 복지를 위해 일생을 바쳐 노력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일한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관대하지만,
우리와 특별한 인연이 없는 이들에게는 인색합니다.
우리는 모든 일에 먼저 代價를 생각합니다.
하느님이 無償으로 베푸신 우리의 생명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은총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이 대가 없이 베푸셨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우리가 지키고 바쳐서 그 대가로 우리가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因果應報의 질서에 익숙한 우리는 하느님도 그 질서 안에 계신다고 상상합니다.
프랑스에 신부이면서 샹송가수로 유명했던 분이 있었습니다.
뒤발이라는 이름의 신부입니다.
그는 바쁜 연주 일정과 심한 불면증 때문에 술을 가까이했다가 알코올중독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우여곡절 끝에 신부로서 또 인기 가수로서
자존심을 접고 중독자 모임에 참석하여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중독에서 헤어나자 자기도 다른 중독자를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중독자 한 사람을 자기 방에 데려다 사흘 동안 함께 머물면서
자기의 경험을 그에게 들려주며 회유하였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이 결실을 맺어 그 중독자가 모임에 나가기로 마음을 정하자,
그는 그 중독자를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혼자 말합니다.
“나는 보잘것없은 인간입니다. 인류가 범하는 죄에 내던져진 인간입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나, 이 인간은, 귀머거리를 듣게 하고, 소경을 보게 하고,
절름발이를 걷게 하고, 나병환자를 깨끗이 낫게 하는 그 인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입니다.
“이 말은 물론 제일 먼저 예수님에게 적용되는 말이지만,
술을 끊은 알코올 중독자에게도 조금은 적용되는 말입니다.”(뒤발 ‘달과 졸던 아이’, 141쪽)
알코올 중독이라는 불행을 퇴치하는 자기의 노력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고백입니다.
이웃의 불행을 퇴치하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노력들 안에 하느님이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고치고, 살리면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하느님의 자녀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고치고 살리는 그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인내를 갖고 기다려라.
염철호 요한 신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대제국을 형성한 아시리아는
기원전 722년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뒤 남왕국 유다로 진군해 들어옵니다.
그러자 유다 임금 히즈키야는 이집트에 원군을 청합니다.(이사 36,6)
이런 분위기에서 이사야는 이집트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며,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시온은 구원받고 아시리아는 멸망하리라고 예언합니다.(이사 31,1-9)
이스라엘은 어려운 상황이 될 때마다 하느님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스라엘이 특히 자주 의지하던 곳이 이집트입니다.
이사야 때뿐만 아니라 예레미야 시대에 바빌론이 쳐들어왔을 때마다
유다 임금은 이집트에 의지하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땅에서 빼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이집트에서 먹고 즐기던 고기를 잊을 수 없었나 봅니다.
히즈키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이사야가 예언했던 것처럼, 이집트에 기댄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히즈키야는 모든 땅을 빼앗긴 뒤 예루살렘 도성에 갇히게 되는 수모를 겪습니다.
모든것이 다 무너지고 끝장난 듯 보이는 분위기 속에서
이사야는 다시금 하느님께 의지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러면 하느미께서는 모두에게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위해 복수해 주실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가 전하는 바도 바로 이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오직 하느님께만 의지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갇혀 있던 히즈키야에게
이사야의 예언은 실현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히즈키야는 이사야의 예언을 받아들여 하느님께 의탁합니다. (이사 37,14-20)
그러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기적이 일어납니다.
주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이야기하신 것처럼
아시리야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물러납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전합니다. (이사 37,36-38)
오늘 1독서가 이야기하듯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복수해 주셨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사야의 예언은
기원전 8세기에 벌어지던 시대 상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곧, 이사야가 살아가던 시대에 대한 예언입니다.
하지만 이사야의 예언 안에는 시대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계획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사야 자신도 알지 못히단 새로운 시대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지게 될 참된 하늘나라,
곧 하느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통해
비로소 이사야가 예언하던 하느님 정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밝히십니다.
세례자 요한도 이 점을 정확히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아이시며,
그분에게서 새로운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당신이 다시 오실 날
모든 것이 완성되리라고 믿고 기다리는 이들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 말씀은 다시금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니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고 말입니다.
대림 시기 동안 우리는 계속해서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라는 가르침을 듣고 있습니다.
그만큼 언제 오실지 모르는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이 어렵기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그 말씀으로 교회가 주님을 기다린 지도 200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래서 기다림에 다소 지친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에, 시작이 있으면 마침이 있습니다.
그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믿는 바는 분명합니다.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며 인내로이 그때를 참고 기다리는 이들은
반드시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