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왕건(王建)의 출생과 혈통
처음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있는 왕씨계보(王氏系譜)에 의하면, 왕씨(王氏)의 선조는
개마고려대족야(蓋馬高麗大族也)라고 했다.
여기서 개마고려(蓋馬高麗)라 하는 것은, 개마대산(蓋馬大山)에 있던 고구려(高句麗)라는 뜻이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의하면, 개마대산은 개마현(蓋馬縣)에 있다고 되어있다.
개마현은 현도군(玄菟郡)에 속하고, 개마대산이 있던 곳은 평양성(平壤城) 서쪽이며,
평양성은 즉 왕험성(王險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지도를 보면 섬서성(陝西省) 서안에서 서남쪽 태백산(太白山)이 있는 부풍현(扶風縣) 일대에
개마대산이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 왕씨의 선조들은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망하자 건현(建賢)이란 사람이
군장(君長:군신의 장)이 된 후로 이어져 내려오다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때,
권지국사(權知國事)로 후당 명종(明宗 AD.926~930년)으로부터 임명받아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된 후에 고려왕으로 오르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 고려도경에서 보면 건원도주도독충대의군사(建元菟州都督充大義軍使)가 고려왕(高麗王)으로
봉작을 받았다고 했다.
여기서 건원(建元 AD.343~344년)은 동진(東晋) 때 강제(康帝) 사마악(司馬岳)을 말한다.
※ 고려도경에서 보는바와 같이 왕씨의 가문은 본래 고구려의 큰 부족인 군신의 집안에서
파생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래의 성(姓)은 왕씨(王氏)가 아니라 고구려의 씨족(氏族)에서 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왕씨의 성은 본래 고씨(高氏)의 집안인 것을 고려도경에서는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고려도경에 의하면 북송(北宋)의 태조(太祖)였던
조광윤(趙匡胤 AD.960~963년)의 아버지는, 후한(後漢) 3代
건우(乾佑) 유승우(劉承佑 AD.948~950년)이며, 유승우의 조상은 동진(東晋)
7代 강제건원(康帝建元) 사마악(司馬岳 AD.343~344년)이다.
말하자면 사마악의 후손이 후한 3대 건우(乾佑)인 유승우(劉承佑)로 이어지고,
유승우의 아들은 북송(北宋) 때의 조광윤(趙匡胤)으로 성씨(姓氏)가 바뀌면서,
다른 나라로 혈통이 이어짐을 볼 수 있다
※ 성씨가 바뀌는 것은 어떤 나라에 등극할 때 그 나라 왕의 성(姓)을 따르는 것이 상식이다.
그리고 왕이 다른 성(姓)을 주는 경우도 같다.
예를 들자면 황제(黃帝 BC.2679년)의 아들이 25명이었는데, 성(姓)을 받은 아들은 고작
14명이라고 사기(史記)에는 기록되어 있다.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금천씨(小昊金天氏 BC.2578년)는 김씨(金氏)로서,
신라왕의 대부분은 김씨(金氏)로 이어져왔다.
그리고 고구려의 시조는 고신씨(高辛氏 BC.2482년)로 황제의 증손자이다.
본래 황제의 성(姓)은 공손씨(公孫氏)라고 했는데, 후일 희씨(姬氏)로 바뀌었고,
아들들은 희씨 성이 아니라 엉뚱하게 다른 성씨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본조군왕세계년대(本朝君王世系年代)에서는,
성골장군(聖骨將軍)에서 시조사찬(始祖沙粲)으로 이어지고, 후당(後唐) 때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인 이형지덕(李亨至德 AD.756~758년)의
왕비(王后)인 정화왕후(貞和王后)로 이어져 왔다.
그 후 경강대왕(景康大王)에서 마지막 당세조(唐世祖)인 장종(蔣宗) 이존욱(李存勖)
동광(同光 AD.923~926년)에 이어, 태조왕건(太祖王建)으로 혈통이 내려온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나타난 태조왕건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왕씨(王氏)는 성이며, 건(建)은 죽은 후의 휘호이다.
왕씨는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였던 아버지 융(隆)의 장자이며,
왕건의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이때의 금성(金城)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 난주(蘭州)임을, 후한서와 여러 정사(正史)에서
밝히고 있다.
당(唐)나라 희종(僖宗) 이현(李儇) 건부(乾符 AD.874~879년) 4년,
신라 49대 헌강왕(憲康王 AD.874~884년) 3년인,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정월 14일에
태조가 태어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 본문에서 한주송악군(漢州松嶽郡) 사람이라 했으므로, 한주(漢州)의 지명을 찾아보았다.
고조선 때부터 삼한(三韓)과 삼국 때까지 한반도에는 한주라는, 한자로 된 지명은 없었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03쪽에, 한주(漢州)의 지명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唐)나라 때 두었던 곳으로, 당나라 때 이름을 고쳐 덕양군(德陽郡)이라 했다.
송(宋)나라 때는 한주덕양군(漢州德陽郡)이라 했으며, 원(元)나라 때 와서 한주(漢州)라고 했다.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는 모두 지금의 사천성(四川省) 성도부(成都府)였으나,
중화민국 때 와서 이름을 고쳐 광한현(廣漢縣)이라고 적고 있다.
※ 한주(漢州)를 당나라 때 덕양군(德陽郡)이라 했으므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 1,161쪽에 있는
德陽郡을 찾아보았다.
덕양군은 후한 때 사천성(四川省) 자동현(梓潼縣) 북쪽에 두었다가, 그후 지명을 옮겼다.
그곳은 사천성 수녕현(遂寧縣) 東南이다.
앞에서 보는바와 같이 한주 송악군(漢州松嶽郡)은 중국대륙에 있는 사천성 성도(成都)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기에 태조 왕건은 한주 송악군에서 태어났으므로, 묘 역시 사천성 성도에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 고려사(高麗史)를 살펴보기로 한다.
唐나라 세조의 장자(長子) 어머니는 당나라 원덕대왕(元德大王)이었던
숙종(肅宗 AD.756~758년)인 이형(李亨) 지덕(至德)의 왕후인 정화왕후(貞和王后)
한씨(韓氏)라고 되어있다.
여기서 당나라 세조는 당무후(唐武后)인 무종(武宗 AD.841~860년) 이전(李瀍)인
회창(會昌)이다.
그러니까 당나라 세조였던 무종(武宗)의 아들인 태조 왕건은 희종(僖宗 AD.874~877년)인
이현(李儇) 건부(乾符) 3년에 태어났다.
고로 AD.877년 정유년(丁酉年) 음력 正月 十四日에, 왕건은 당나라 혈통으로 한주 송악군에서
출생한 것으로 되어있다.
※ 고려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혈손(血孫)으로 고려(高麗)를 지금의 사천성 성도(成都)인
한주(漢州)였던 송악군(松嶽郡)에서 건국하게 되었다.
최초에는 전촉(前蜀) 나라를 세웠으나, 후당(後唐)에게 망한 후 궁예(弓裔)의 부하로 들어가
활약하였다.
태조왕건이 전촉(前蜀)을 건국한 연대는 AD.918년으로,
거란(契丹) 태조(太祖) 신책(神冊 AD.916년)이다.
그러므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는 태조왕건의 건국연대를 전촉(前蜀)을 세운
AD.918년으로 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 이상에서 보는바와 같이 고려는 고구려의 혈통을 이어 동진(東晋)에 이르고,
따라서 당나라 숙종인 원덕대왕의 장남으로 금성태수 융이었던 세조 무종으로부터
태어나게 되었다.
왕건의 아버지는 금성태수로 있다가 후당(後唐)의 왕으로 등극한 셈이다.
※ 한무제(漢武帝 BC.140~135년)는 우거(右渠)로서, 조선을 멸한 후 고려현(高麗縣)에
원도군(元菟郡)을 속하게 했다.
그 후 왕망(王莽 AD.9~13년)은 군사를 일으켜 흉노(匈奴)를 주살하고 전한(前漢)을
격파한 후 신(新), 즉 고구려(高句麗)를 세웠다.
그리고 후한(後漢)인 동한(東漢)이 실질적인 고구려로 내려왔다.
고려태조 왕건의 선조는 동진(東晋)을 거쳐 당나라의 혈통으로 이어지는 동안 나당(羅唐)에
의해 AD.660년에 백제가 망하고, 8년 후 고구려가 망한 후 당 숙종인 원덕대왕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사람이 무종(武宗)인 이전(李瀍) 회창(會昌)이다.
또한 무종의 장남으로 태어난 왕건은 후당(後唐) 장흥(長興 AD.930~933년) 2년에 고려왕으로
등극하여 26년간 재위하다 67세에 죽은 것으로, 고려도경(高麗圖經)과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삼국사기(三國史記),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 기록되어 있다.
※ 태조왕건의 계보와 건국은 이상과 같이 이루어졌다.
전술한 바와 같이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 성도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는 송악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고려는 옛 서경(西京)인 서안(西安)에서 천자국(天子國)으로서서 위업을 떨치게 되었다.
고로 한국의 국제 칭호는 고려인 코리아로 현재까지 불리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고려의 왕릉이 한반도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다.
첫댓글 왕건(王建)
<동음이의(同音異義)>
1. 왕건(王建, ?~238년)은 중국(中國) 삼국시대(三國時代) 공손연(公孫淵, ?~238년 8월 23일)의 책사(策士)이다.
2. 왕건(王建, 877년~943년)은 고려(高麗, 918년~1392년)의 시조(始祖)이다.
3. 왕건(王建, 847년~918년)은 5대(代) 10국(國) 중(中) 하나인 전촉(前蜀, 907년~925년)의 시조(始祖)이다.
[출처=위키백과(한국어)]
몽골의 명궁수인 "이숭게"(Yisungge, 也松格) vs 조선의 "이성계"(李成桂)
전촉의 "왕건" vs 고려의 "왕건"
이것은 매우 흥미로운 역사 연구 아이템입니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전촉(前蜀) 나라 때 사천성(四川省) 성도(成都)에서 도읍했다가,
후당(後唐)에 의해 망한 후 궁예(弓裔)의 장수로 활약하다가,
기원후 935년 고려(高麗)는 송악(松嶽)인 개성(開城)을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으로 도읍지를 정하고,
남송(南宋)과 북송(北宋) 그리고 거란(契丹)을 차례차례 멸망시킨 후,
삼한(三韓)의 대통일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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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목은 결론 부분인데, 여기서 "삼한"(三韓)의 정체가 궁금합니다.
이른바 5대(代) 10국(國)과 삼한(三韓)의 관계를 앞으로 더 깊게 연구하여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