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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12일 대림 제3주간 월요일
제1독서 : 민수 24,2-7.15-17
복 음 : 마태 21,23-27
23 예수님께서 성전에 가서 가르치고 계실 때,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25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그들은 저희끼리 의논하였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않았느냐?’하고 우리에게 말할 것이오.
26 그렇다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자니 군중이 두렵소.
그들이 모두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니 말이오.”
27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새벽에 묵상하다가 제게 기적 같은 일이 정말로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성직자로 살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한 제가 20년 넘게 사제로,
또 사람들로부터 “잘살고 있다”라는 평을 들으며 사는 것이 기적입니다.
형제들 간의 우애에 금이 가서 남보다 못하게 사는 가족도 많은데,
부모님께서 돌아가셨어도 형제간의 우애는 변함이 없는 것도 기적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많은 성지가 힘들다고 하는데,
제가 있는 갑곶성지는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발전하는 것 역시 기적입니다.
이 밖에도 기적 같은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문제는 기적에 감사의 기도를 바쳐야 하는데,
이를 마치 당연한 것으로 또 내가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앙드레 지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적었습니다.
“인간이란 항상 있는 기적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다.”
작은 것에 감탄하는 사람은 순간순간을 허투루 살지 않습니다.
작은 것도 주의 깊게 바라보며 자기에게 다가온 놀라운 기적을 체험합니다.
주님의 손길이 반드시 커다랗게만 다가올까요?
돈 많이 벌고, 승진에 성공하고, 앓던 병이 말끔하게 치유되어야만
주님의 손길을 받은 것이라고 할까요?
아닙니다. 길가에 핀 작은 꽃에서도 기적을 느낄 수 있는 사람만이
매 순간 주님과 함께함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근처에 기적에 있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가르치고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지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셨고,
그 실현을 위해 가르침과 놀라운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불신의 마음이 가득해서, 깜짝 놀라야 정상인 상황에서도
또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권한 타령만 하고 있습니다.
만약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예수님의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하느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기들이 예수님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권한에 관해 묻기만 할 뿐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 안의 기적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천천히 그리고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기적의 기쁨을 쉽게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있는 기적에 매 순간 놀라며 기뻐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참 좋은 은총의 선물
-분별력의 지혜-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소서.
저를 가르치시어 당신 진리로 이끄소서.
당신은 제 구원의 하느님이시옵니다.”(시편25,4-5ㄱㄴ)
한밤중 일어나 조심조심 하루를 시작하면서 문득 떠오른 말마디 둘입니다.
하나는 ‘조고각하(照顧脚下)’,
“자신의 다리 아래를 살펴보라”는 뜻으로,
지금 그 자리에서 자신을 잘 돌아다보고 살펴보라는 뜻입니다.
수행의 과정이나 신자의 길도 어두운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으므로,
끊임없이 자신을 살펴 수행자로 참답게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할 것입니다.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또 하나는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이다.”라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나 진실하고 주체적이며 창의적인 주인공으로 살아가면,
그 자리가 바로 행복의 자리, 진리의 자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역시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말씀이니,
이 또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마음에 담고 살아가고 싶은 말씀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영혼에게 선사되는 모든 덕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온갖 지식과 정보가 범람하는 시절에 분별력의 지혜는 갈수록 중요해집니다.
특히 공동체를 섬기는 자들에게 분별력의 지혜는 필수입니다.
베네딕도 역시 아빠스는 분별력을 지녀야 함을 특히 강조합니다.
“자기의 명령에 용의주도하고 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 명령이 하느님께 관계되는 일이든 세속에 관계되는 일이든
분별있고 절도있어야 할 것이니,
‘만일 내가 내 양의 무리를 심하게 몰아 지치게 하면
모두 하루에 죽어 버릴 것이다’하신 성조 야곱의 분별력을 생각할 것이다.
이 밖에도, 모든 덕행들의 어머니인 분별력의 다른 증언들을 거울 삼아,
모든 것을 절도있게 하여 강한 사람은 갈구하는 바를 행하게 하고,
약한 사람은 물러나지 않게 할 것이다.”(성규64,17-19)
어제 깊이 묵상한 한자 둘, “원圓”과 “덕德”자입니다.
성철 스님은 '자신은 모나게 살았지만, 제자들은 둥글게 살라'고
법명에 둥글 “원圓”자를 넣었다는데,
수행에 남달리 날카롭고 엄격했던 법정 스님은
제자들은 덕스럽게 살라고 법명에 “덕德”자를 넣어 주었다는 일화입니다.
둥글고 덕스런 “원圓과 덕德의 삶”, 역시 분별력의 지혜에 속합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의 발라암이나 복음의 예수님은
분별력의 지혜를 선사 받은 분임을 깨닫게 됩니다.
참으로 간절히 청할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하느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신탁을 선포하는 발라암입니다.
야곱의 천막이, 이스라엘의 거처가 그대로 먼 훗날 실현될 교회의 모습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지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이의 말이다.
야곱아, 너의 천막들이, 이스라엘아, 너의 거처가 어찌 그리 좋으냐!
골짜기처럼 뻗어 있고, 강가의 동산 같구나.
주님께서 심으신 침향나무 같고, 물가의 향백나무 같다.
그의 물통에서는 물이 넘치고, 그의 씨는 물을 흠뻑 먹으리라.”
흡사 풍요롭고 충만한 은총 가득한 교회를 상징하는 듯 합니다.
이어 구원자 예수님의 탄생을 내다보는 발라암의 천상 지혜입니다.
“발라암의 말이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지식을 아는 이의 말이다.
나는 한 모습을 본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나는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가깝지는 않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
별이, 왕홀이 상징하는바, 미구에 탄생하실 구원자 예수님입니다.
하느님의 현자, 발라암을 통해 계시되는 천상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서도 분별력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수석사제들의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묻는 불순한 질문 자체가 그대로 덫입니다.
어떻게 대답하던 덫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질문으로 대답하며 역공逆攻합니다.
복음 그대로 인용하는 것이 이해가 빠를 것입니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적대자들의 결정적인 덫에서 벗어난 물음, 예수님의 천상적 지혜, 분별력의 지혜입니다.
이젠 공수가 바뀌어 예수님의 역공의 질문으로 궁지에 몰린 적대자들입니다.
이들의 의논의 결론이 이미 답을 말해 주지만, 차마 말은 못 합니다.
하늘에서 왔다 하면 왜 그를 믿지 않느냐 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 하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이 두려우니 이래저래 참 진퇴양난입니다.
결국 “모르겠소” 대답함으로 자기들의 덫에 자기들이 걸린 꼴입니다.
예수님의 분별력의 천상 지혜가 요약된 다음 말씀이
결정적 한 방이 되어 적대자들을 침묵케 했음을 봅니다.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
너희가 스스로 헤아려 깨달으라는 말씀으로
이제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에게 부여된 과제입니다.
답은 나와 있지만 완고함에 눈먼 이들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받은
예수님의 권한을 인정하지 않을 것입니다.
참으로 발라암처럼 열린 눈을 지닌 겸손한 이들에게
위로부터 분별력의 지혜가 선사 됨을 깨닫습니다.
바로 주님의 거룩한 미사 은총이 우리 모두 분별력의 지혜를 발휘하며 살게 하십니다.
“오소서, 주님, 저희를 찾아오시어, 평화를 베푸소서.
저희가 주님 앞에서 온전한 마음으로 기뻐하게 하소서.”(시편106,4-5).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거꾸로 읽은 세계사’라는 책이 있습니다.
세계사는 권력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그래서 왕조를 중심으로 배우기도 했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구성되곤 합니다.
종교가 들어온 연도(年度), 전쟁이 일어난 연도를 배우기도 합니다.
세계사는 승자들의 관점에서 기록되곤 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읽는 세계사는 다른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봅니다.
가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사건들의 진실을 전하기도 합니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서 신대륙의 발견을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라보면 우리가 모르고 지나갔던 새로운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카이스트 이광형 총장은 텔레비전을 거꾸로 본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자막을 읽기도 어렵고, 어지러웠는데 지금은 거꾸로 보는 것이 익숙하다고 합니다.
바지를 입을 때도 오른쪽 다리부터 넣지 않고 왼쪽 다리부터 넣는다고 합니다.
대학의 조직표도 거꾸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총장이 맨 아래에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총장은 맨 아래에서 마치 장작에 불을 붙이듯이
학교와 학생들을 위해서 불쏘시개가 되는 것 같다고 합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를 거꾸로 바라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는 피라미드와 같은 조직이었습니다.
평신도, 수도자, 사제, 주교는 피라미드처럼 맨 아래에 평신도가 있었고,
중간에 성직자와 수도자가 있었고, 맨 위에 주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주교를 통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통해서
평신도에게 전해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2000년 동안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교회의 언어는 ‘라틴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전례는 라틴어로 진행되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이고, 세상의 것들이 교회로 들어오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교회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단죄하였고,
다른 종교와 화합하거나 일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성 요한 23세 교황은 기존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창문을 활짝 열도록 하였습니다.
교회는 위계 제도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공동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회는 조직이기 전에 성사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전례의 언어는 라틴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로 바꾸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되어야 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권한을 주었소?”
권한은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의 몫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신들의 권한과 지위를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권한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사람들을 다스리는 힘이었습니다.
권한은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습니다.
그래서 권한이 없는 예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은 어디에서 왔는지 물으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에게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은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권한이 하느님께로부터 왔다고 하면 세례자 요한의 권한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권한이 사람에게서 왔다면 자신들의 권한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권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권한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권한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섬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겸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권한은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지금 내가 추구하는 권한은 어떤 권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성탄이 곧 다가옵니다.
이제 열흘 남짓 남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발라암은 신탁을 통해 선포합니다.
“야곱에게서 별 하나가 솟고, 이스라엘에게서 왕홀이 일어난다.”(민수 24,17)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권한에 대한 논쟁을 전해줍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을합니다.
곧 예수님의 성전정화에 대한 권한을 따집니다.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요?
그리고 누가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소?”(마태 21,23)
원래 ‘권한’ 혹은 ‘권위’를 말할 때, '권'은 저울을 말한다고 합니다.
저울의 눈금은 어느 것이 딱 들어맞고 어느 것이 딱 들어맞지 않는 것인지를 판가름해 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저울은 ‘하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저울은 사람의 저울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저울은 물건의 경중을 가려서 판가름해 내지만,
하늘의 저울은 '하늘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를 판가름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수석사제들과 원로들이 주님을 두고 저울질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반문하십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 (마태 21,25)
그들은 자신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였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모르겠소.” 하고 대답합니다.
“모르겠소.”라는 이 말마디가 가슴을 쿵 내리칩니다.
이는 진실하지도 솔직하지도 못하고, 비겁하고 위선적이고,
눈치 보며 회피하는 계산적인 평소의 나의 말마디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둠에 가린 제 마음을 질책하십니다.
가려진 거짓을 들추시고, 제 오만함을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십니다.
그리고 죄를 일깨워주십니다.
제가 저 자신의 저울로 예수님을 저울질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이는 오늘도 제자신의 저울로 다른 이들을 저울질하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보게 합니다.
사실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제 자신이 저울질 당하게 됩니다.
은밀히 감추어진 속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속셈이 들통나게 됩니다.
결국 타인을 저울질하다가 자신이 저울질당하게 됩니다.
사실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뿐일 것입니다.
그러니 오만함과 자신의 속셈과 거짓과 위선으로 치장하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보고,
이제는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자기 자신을 올려놓아야 할 일입니다.
이제는 남을 저울질하기보다 자신이 주님의 저울인 '아버지의 뜻'에
합당하게 처신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나의 사랑을 따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그에게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 볼 수 있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이오?”(마태 21,23)
주님!
타인의 권한을 따지기보다 그에 대한 내 사랑의 무게를 따지게 하소서!
시시비비를 가리기보다 나의 사랑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가리게 하소서.
저울질하는 바로 그 순간 막상 저울에 올려진 이는
타인의 눈치를 보느라 가려진 제 자신의 위선의 무게임을 알게 하소서.
저울 위에 타인을 올려놓기보다 저 자신을 올려놓고
오만함으로 쌓여 있는 제 속셈과 거짓과 위선을 들여다보게 하소서!
아멘.
요한은 누구에게서 권한을 받아 세례를 베풀었느냐?
조욱현 토마스 신부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따진다.
그들은 예수님께 누구의 권한으로 이런 기적을 하느냐고 묻는다.
그들은 아마 그 기적들의 결과가 미래에 어떠한 결과로 나타날지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위치가 흔들릴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
구제 불능의 사악함을 아시는 주님께서는 질문을 던지신다.
그들이 더는 당신께 질문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나도 너희에게 한 가지 묻겠다. 너희가 나에게 대답하면,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해 주겠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에서 온 것이냐? 하늘에서냐, 아니면 사람에게서냐?”(24-25절)
그들은 이제 자기들의 대답이 가져올 위험을 생각하며 망설인다.
요한이 하늘에서 왔다고 하면,
그 답은 하늘이 보낸 증인을 믿지 않은 결과를 인정하는 것이 될 것이고,
사람에게서 왔다고 하면 군중에게 돌을 맞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답에 발목을 잡힐까 봐 두려워 “모르겠소.”(27절) 하고 대답한다.
그들에게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두워진 마음은 빛에서 나온 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눈이 멀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영적으로 눈이 멀면 신앙의 신비를 이해하지 못한다.
소리 없이 사냥하는 사냥꾼은 함정을 파면서
동시에 함정 옆에 결코 도망칠 수 없도록 그물을 쳐 놓는다고 한다.
사냥감이 도망을 못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도 덫을 치시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나도 모른다.”라고 답하지 않으시고,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27절) 하신다.
그들은 자격이 없으므로 말씀하시지 않겠다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당신의 신비를 드러내지 않으시면서도
당신을 신문하는 자들을 가르치시고,
합리적인 논증으로 상대의 교묘한 비난을 논박하고 계시다.
신앙을 가진 우리는 필요하다면 하늘이 무너져도
알고 있는 진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알려고 하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를 따르며 그분을 닮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불신자에게 유보된 예수의 정체
박상대 마르코 신부
대림시기에 봉독 되는 복음의 주요 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된다고 했다.
첫째는 메시아의 도래와 현종이 가져오는 징표들에 관한 내용으로서
예수께서 메시아로서 병자와 소경을 치유하고, 죄인의 죄를 사하며,
억눌린 백성들을 배려하고 위로하는 내용이다.
둘째는 메시아적 징표들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요구하는 내용으로서
그 태도는 믿음과 불신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선택할 경우, 하느님 나라의 보장을 받는다.
셋째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대조하는 내용이다.
둘 다 구약성서에 계시 된 자들로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위한 특사요 선구자로,
예수는 야훼의 고난받는 종이요 메시아로 예언되었다.
이들 주요 내용을 잘 이해하는 방법으로 그날의 독서로 대부분 봉독 되는
이사야 예언서와의 연결을 도모하도록 권유하였다.
이제 대림 제3주간의 복음(12월 16일까지)은 모두가 세례자 요한과 관련된 것이다.
복음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한 선구자로 세례자 요한을 등장시키고
그의 정체성을 밝히면서 광야와 요르단강에서 회개의 설교와 세례를 베풀게 한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띠라서 복음은 선구자의 중요한 역할을 부각시키면서,
그 이상으로 메시아의 정체와 권위가 출중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복음이 우선 메시아를 준비하는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을 보도하고, 그다음에 메시아의 역사적 도래,
그리고 메시아의 활동을 단순히 시간상의 순서로
열거하려는 목적만 가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복음은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나 영향력을 가진다는 말이다.
그래서 메시아 예수의 ‘이미 오심’을 준비하는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人子의 ‘다시 오심’에로 연장될 수 있는 것이다.
좀 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해 보자.
역사적 사건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자 요한의 선구자적 역할은
메시아 예수의 공생활로 말미암은 신약의 시작으로 끝나며,
신약은 그리스도 예수의 메시아적 역할, 즉 공생활, 수난, 죽음, 부활로 끝난다.
그러나 구세사적 측면에서 볼 때,
요한과 예수의 역할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지속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공을 초월할 수 있는 두 분의 역할은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 경륜 속에 하느님 스스로가
세례자 요한과 아들 예수에게 부여한 사명과 권한 때문이다.
이 사명과 권한이 이 두 분의 역할과 활동을
인간 구원과 관련하여 정당화 시키고 있는것이다.
오늘 복음이 바로 그 권위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예수의 권위에 대한 예수와 백성의 지도자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의 정확한 시점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후 이틀째 되는 날이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사흘째 되는 날로 편집되었다.(마르 11,1-33)
논쟁의 원인이 되는 ‘이런 일’이란 예수께서 입성 직후 행하신 성전 정화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지금까지 행하신 예수님의 전체 행적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예수님의 권한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하느님으로부터의 권한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직접적인 답변을 회피하시고,
그들이 알아듣기 훨씬 쉬운 방법을 택하신다.
그것은 바로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한 반문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을 믿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지만,
백성의 지도자들과 대사제들은 세례자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예수님의 반문이 그들을 진퇴양난에 빠트려 ‘모르겠다’는 대답을 얻어냈지만,
사실상 그들은 속으로 세례자 요한을 불신함으로써 예수까지도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르겠다.’는 대답은 사실상 직무유기에 해당 한다.
대사제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무엇이 하느님의 일이고 아닌지를 분별하여
백성들에게 제시해야 하는 임무를 가진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세례자 요한의 권한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른다고 함으로써
자신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함은 물론,
예수가 누구이며, 어떤 권한으로 지금까지 놀라운 행적을 해왔는지에 대하여
알 수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이렇듯 불신자에게 예수님의 참된 정체성은 유보된다.
예수님의 대답은 적어도 말씀을 들으려 하고 받아들이려 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
이에 선행되어야 할 일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신뢰이다.
세례자 요한을 통하여 일어나는 하느님의 사건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께 대한 믿음을 얻기란 힘들다.
우리 중에 세례자 요한에 대하여 모른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
오늘날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의 선구자적 역할과 활동을 신뢰한다는 것은
곧 메시아의 탄생을 준비하는 회개와 쇄신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