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나 하천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새 중 하나가 백로다.
백로는 철새라기 보다는 이제는 텃새로 아예 자리 잡고 있다.
중랑천에도 많은 새가 모여들고 있다.
청둥오리와 비오리, 백로와 왜가리, 까치와 가마우지 등등.
중랑천에서는 유독 백로가 눈에 많이 뜨인다.
청둥오리는 화려하고, 비오리는 세련된 멋이 없다.
까치는 날렵하고 가마우지는 조금 혐오스럽기까지 보인다.
백로는 왜가리와 비슷하지만, 잿빛이 아니라 온몸이 백설처럼 하얗다.
그래서 사람들은 왜가리보다는 백색의 백로를 더 좋아하는가 보다.
왜가리
가마우지
비오리
청둥오리
까치
하얀색은 어떤 의미일까?
여러 물감을 합치면 검은색이 되지만,
여러 가지 빛을 합치면 흰색이 된다.
종교에서는 검은색은 물질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고,
흰색은 정신을 상징한다고 한다.
다시 말해 흰색의 빛이란 불교에서는 광명(光明)을 상징하고,
그 광명은 곧 지혜를 상징한다.
이 지혜의 원천을 불교에서는
법신불로 불리는 비로자나불로 상징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원에서 이 비로자나불을 봉안하고 있는 전각을
대적광전(大寂光殿) 또는 대광명전(大光明殿)이라고 부른다.
삶에 빛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빛이 지혜 광명이라면 어둠은 무명(無明)이다.
무명(無明)은 곧 번뇌가 된다.
탐진치(貪瞋痴)의 무명에 빠져 살아가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삼계화택(三界火宅)으로 비유한다.
「삼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의 불타는 번뇌는
마치 불난 집 같은데, 어찌 그대로 참고 오래 머물러
오랜 고통을 감수(甘受)하는가.
그 윤회를 면하는 길은 붓다의 깨달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만약 붓다를 찾으려면 이 마음이 곧 붓다이니,
마음을 어찌 이 몸 떠나 멀리서 찾을 것인가.」
이 삼계화택을 벗어나는 길은 선정을 통한 깨달음이다.
지식이 아니라 참선을 통한 지혜 즉 보리심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 참선을 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경(經)을 보면 이런 이야기 있다.
부처님의 제자 중 다문제일(多聞第一)로 꼽히는 아난존자는
부처님 열반 뒤 경전 결집 시 존자 가섭으로부터
아라한이 아니라서 결집에 참여하지도 못하고 쫓겨난다.
다문박식(多聞博識)하지만
깨달은 사람 축(아라한)에 들지 못한다는 것이다.
쫓겨난 아난은 교저공부(翹佇工夫)란
참선 방법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나서
가섭존자가 머무는 돌문이 굳게 닫힌 석실을
신통력으로 뚫고 들어가
가섭존자로부터 인가를 받아 결집에 참선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교저공부(翹佇工夫)란 한쪽 발을 들고 합장하고
절벽에 서서 참선 공부하는 것으로
만약 졸게 되면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는 참선 공부를 말한다.
한쪽 다리로 서 있는 백로의 모습은
아난존자의 저 교저공부를 수행하고 있는 걸까?
대승불교에서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을 한도인(閑道人)이라 부른다.
자유인(自由人)이라는 의미다.
세간의 법과 출세간의 법에도 구애됨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갖가지 복의 과보(果報)를 받아서
재물이 풍부하고 지위가 귀하고
또 대중들이 우러러보는 인물이 되어
어느 누구도 부러울 필요가 없는 경지를 자유인으로 여기고
그 삶을 자재한 그것으로 느끼지만,
마지막 돌아갈 곳도, 가지고 갈 것도 없다.
공(空)이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다.
유행가에 이런 가사가 있다. 가수 나훈아의 <공>이던가?
「살다 보면 알게 돼
일러주지 않아도
너나 나나 모두 다 어리석다는 것을
~중략(中略)~
잠시 왔다가는 인생
잠시 머물다가 갈 세상
백 년도 힘든 것을
천년을 살 것처럼
살다 보면 알게 돼
버린다는 의미를
내가 가진 것들이 모두 부질없다는 것을」
‘법학(法學)’이란 법을 배우는 것이다.
공에 대해 아는 것≺解空≻, 염원이 없어진 것≺不願≻,
생각이 없어진 것≺無想≻,적정(寂定)한 것을 일러
‘법의 뜻을 얻은 것≺得法意≻’이라고 한다.
번뇌가 모두 없어지고 맺힌 것이 풀어져서
도(道)를 얻은 것을 ‘증(證)’이라고 하는데,
증(證)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자리≺本無≻로 돌아온 것을 말한다.
교저공부란 이를 위한 참선을 의미한다.
중랑천 강변을 온통 내 집으로 삼고
유희(遊戲)하면서 노니는 백로를 바라보니
나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정녕 나의 삶이 저 백로만이라도 했는지를.
유희(遊戲)는 환희의 즐거움이다.
중국에서는 유희(遊戲)란 말은 게임으로 여기지만
삶의 유희는 게임이 아니다.
게임은 승자(勝者)가 있지만 유희는 승자가 없다.
나와 너도 없다. 취할 것도 버릴 것도 없다.
공(空)이다. 평등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저 노닐다 가는 저 백로처럼.
첫댓글 요즘
백로보기가
쉽지않습니다
보기어려운
모습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