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8yHWY7dXh6s
격한 감동실화 ‘모정의 뱃길’ 40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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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일요일 아침,
KBS의 황금연못(2022.1.8. 방송분)이란
시니어 프로그램에
여수 '모정의 뱃길'
실제 주인공인 정숙현 씨가
출연한 적이 있었다.
격한 감동실화
♤ ‘모정의 뱃길 3만4천리’ 40년후 ♤
육영수 여사는 남부지방으로 시찰을 떠나는
남편에게 전남 여수에 가시거든 한 어머니를 만나 전달해 달라며 한통의 편지를 건네었습니다.
여수(전남 여천군) 앞바다 외딴섬(가장도, 加長島)에 사는 한 소녀의 어머니였습니다.
외딴섬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을
나룻배에 딸을 태워 통학을 시킨 어머니였습니다.
노 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소녀
노 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소녀.
눈비가 오고 풍랑이 와도 모녀의 나룻배는 6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습니다.
졸업식날, 학교에서는 6년 개근상을 탄 소녀의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드렸습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영부인
친구와 아우들과 선생님과 정든 교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마지막날은 나룻배 모녀의 사연으로 더욱 숙연했습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졸업식의 노래’ 첫구절처럼 소녀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지극 정성과 그것도 학교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없는 외딴섬에서 처음 생긴
남다름에 있었습니다.
섬에 집이라곤 세 가구에 스무명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습니다.
작은 통통배조차 오지 않는 곳이라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나룻배로 육지를 건너다니곤 해서 아이들이 커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 했습니다.
중수(仲樹 ) 박정희 대통령
그러나 이 어머니는 비록 딸자식이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했습니다.
딸을 학교에 넣어본들 20리나 되는 바닷길을 무슨 수로 왕래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모진 결심으로 딸을 입학시키고야 말았습니다.
전기도 시계도 없는 섬마을에서 새벽
어둠에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나룻배를 저어 학교에 보내고, 공부가 끝날 때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습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으며,
아버지가 병든 몸이라서 농사를 도맡아 했고 농번기에는 소를 빌려 논밭일을 하고,
장이 서는 날에는 채소를 팔아
생필품을 사고 아버지의 약도 사왔으며
그래도 어머니는 공부하는 딸이 대견스럽기만 해서
육신의 고달픔을 모르고 6년 세월을 훌쩍 넘겼고, 그 세월 동안 모정의 뱃길을 손꼽아 보니
3만4천리를 헤아렸습니다.
육영수 영부인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그렇지 않아도 눈물나는 졸업식에
소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모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습니다.
1962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목포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은 신문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한국일보 2월14일).
육영수 여사는 이 신문기사를 읽고
그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수에 가서 이 가난한 섬의 모녀(어머니 박승이, 딸 정숙현)를 만났습니다.
육 여사의 편지를 전하고, 그 어머니의 굳은살 배긴 손을 잡아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일보는 딸 정숙현씨의 글을 게재하면서 모녀의 뒷소식을 전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습니다.
다음은 2004년 7월 8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정숙현씨의 글입니다.
‘모정의 뱃길’ 주인공 정숙현씨
나는 모른다, 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 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 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 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
아, 나의 어머니 모정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시(詩)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중수(仲樹 ) 박정희 대통령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1956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습니다.
그것도 스무명이 채 못 사는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을 포함 해 겨우 세 가구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를 위해 약간의 채소와 나물을
육지에 팔러 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 척만이 외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 달빛에 의지해 혼자 노젓는 방법을 익히셨고
병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랜 세월 동안 배우지 못 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하셨습니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간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 가정도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습니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호로 산산 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습니다.
말로는 표현 못 할 6년의 세월. 마침내
졸업식 날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사연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만4천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1962년 2월 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합니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에서 하루 200여 통 이상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필자 주: 이미자의 ‘꽃피는 여수바다’)도 불려졌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cTWfJvUyro&t=1s
라디오 연속극까지 만들어졌으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성균관대 국문학과)을
나왔습니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습니다.
딸 가족을 위해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롭습니다.
내가 한석봉이나 이율곡이나 맹자처럼 훌륭하지 못 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합니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을 닮으려 합니다.
이제 57세가 된 정숙현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 특별시립 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과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육영수 여사의 편지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사를 전하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을 것이며, 어머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정세월 4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네번 굽이쳐 흘렀어도
주인공 정숙현 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지도자의 이런 보살핌으로 이 땅의 고난 을 다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외딴 섬의 고립과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지 않고 바다를 건넌 그 어머니의 결연한 ‘도전’에 뜨겁게 악수하는 것이 고난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최빈국의 신세를 면치못하던 60년 대초, 어떻게든 궁핍을 딛고 몸부림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절박했던 그
시기였음에 이 땅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내로라 하고들 있지만 거의 서민의 삶과 무관한 ‘나으리’들뿐, 서민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애환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꾼
지도자가 박정희 외에 누가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 설명이 필요치 않은 말입니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고라도 그가 존경 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거수 일투족 꾸밀래도 꾸밀 수 없는 그의 서민 기질 에 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갈데없는 한국의 전형적인 평민이었습니다.
이 땅의 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로, 그를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또 누가
있었던가?
[옮겨온 글]
어제를 돌아보는 것은, 어제가 내일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며, 어제의
고난과 꿈은 내일도 새롭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올 한해 마무리 잘 하시고 희망찬 새해
갑진년에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3alH0o5uYY&t=90s
대사9회 재구 동기
미취(未翠: 서예) 김용석 교장이
카톡으로 보내준 글 편집
첫댓글 어머니! 어무이! 엄마!
떠오르기만 해도 그 은덕에 눈물이 쏟아지네요.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그럼요
개인적으로 박정희 각하만이 대통령으로서 기억합니다.
이승만대통령. 박정희 대통령만 기억하고 있습니다.ㅎ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국부입니다. 국제적으로 국토, 국민, 주권이 있어야 국가로 인정받습니다.
건국을 임시정부로 소급하지만, 외교권이 없으니 국가로 인정받지 못 하여 이준 열사가 헤이그 회의에 참석하지 못 하고 스트레스로 병사했습니다.
중수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보다 국민소득이 적고, 기아선상에 있던 국민을 구출하고 경제개발정책으로 한국을 중공업국가로 만들어
오늘날 세계 10위권 강국에 오를 수 있는 기초를 확립한 위대한 대통령입니다. 그 업적을 폄훼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