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여덟 번째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정촌이 소개한 타이타닉호 침몰 사건이 남긴 글 가운데 눈길을 사로잡는 대목들이 있었습니다. 생존자 모임에서 스미스 부인은 자신에게 자리를 양보한 여성을 회고합니다. “당시 제 두 아이가 구명보트에 오르자, 만석이 돼서 제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때 한 여성분이 일어나서 저를 구명보트로 끌어당기면서 말했습니다. 올라오세요.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그 대단한 여성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위해 “이름 없는 어머니”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엄마’가 아니면 흉내 내기조차 힘든 희생정신입니다. 이름을 남기는 일보다 더 거룩한 ‘엄마’의 말 “아이들은 엄마가 필요합니다!” 이보다 더 숭고한 사랑이 있을까요? 이 여인은 세상의 모든 아이의 엄마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 희생자 중에는 억만장자, 저명 언론인, 육군 소령, 저명 엔지니어 등 사회의 저명인사가 많았지만, 이들 모두 곁에 있던 가난한 농촌 부녀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답니다. ‘Unsinkable’의 저자 다니엘 알란 버틀러는 약자를 살리기 위해 희생한 사람들을 기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태어나서부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라는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가치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로 사회의 고위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칭하는 말이지만, 이를 실천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교육을 받았다는 겁니다. 본디 학문이란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라 했습니다. 진정한 가치를 배우고 실천하도록 교육받았다는 말입니다. 오늘날의 교육은 돈을 벌고 권력을 얻기 위한 수단을 가르칩니다. 이런 교육을 받아온 우리네 지도층은 그럴 겁니다. ‘내가 살아야 남을 돕지!’ 누굴 탓하려는 게 아닙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 그러고 살지 않나요? 오랜 세월이 지나서 공개된 얘기라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습니다. 이런 상상을 할 수 있고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