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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심5:1~9
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 논쟁 5:10~18
10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11 대답하되 나를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더라 하니
12 그들이 묻되 너에게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13 고침을 받은 사람은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니 이는 거기 사람이 많으므로 예수께서 이미 피하셨음이라
14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
15 그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가서 자기를 고친 이는 예수라 하니라
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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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요약]
베데스다 못의 행각에 병을 고치기 위해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병자가 많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를 보시고 그에게 낫기를 원하는지 물으신 후, 그를 고쳐 주십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여기신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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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년 된 병자를 치유하심5:1~9
베데스다는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 못에 가십니다. 기둥과 지붕만 있고 사방이 뚫린 다섯 개 행각에 많은 병자가 모여 있습니다. 가끔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일 때 그 못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나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주목하십니다. 38년이라는 시간은 그 병의 치유 가능성이 희박함을 드러냅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라는 예수님 말씀에 그는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절망적인 상황만 말합니다. 예수님이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라고 하시자, 그는 치유의 주인공이 됩니다. 예수님은 병들어 소망 없는 자를 말씀으로 치료하십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38년 된 병자에게 물으신 것은 무엇인가요?
내 수준으로 한계를 긋지 말고 전능하신 주님께 간구할 일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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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논쟁 5:10~18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안식일 치유’를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아들이요 안식일의 주인이기에(마 12:8)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하실 권한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를 긍휼히 여기셨기에 미루지 않고 그 자리에서 치료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17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을 마치시고 안식하셨지만(창 2:2), 지금도 창조 세계를 유지하는 사역을 계속하고 계심을 의미합니다. 치유받은 병자를 만나신 예수님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14절). 이는 그의 병이 죄에서 비롯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9:3),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 가장 심각한 죄니 그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사랑의 권고입니다.
● 더 깊은 묵상
예수님이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나는 전통이나 관행 등을 앞세우며 주님 뜻을 헤아리지 못한 적이 없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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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
제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받은 충격 중 하나는 미국 같은 선진 사회에도 집 없이 떠도는 노숙인이 적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자리가 없어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돈이 조금만 생겨도 모두 술과 도박, 마약에 써 버리기 때문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래에 대한 기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절망이 익숙한 삶의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직장이 아닙니다. 돈도 아닙니다. 절망의 자리를 거부하는 본질적인 치유입니다.
예수님이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지금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의식, 곧 현상 유지를 거부하는 몸짓입니다. 진정한 치유는 익숙한 절망을 거부하는 선언에서 시작됩니다. “나 정말 낫고 싶어요! 나 정말 구원받고 싶어요! 나 정말 변화되고 싶어요!” 이런 의식의 깨어남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속적 해법에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해법을 포기하는 순간 그분만의 해법, 치유, 구원이 시작됩니다. 진정 예수님을 통한 치유를 갈망한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해법부터 거부해야 합니다. 먼저 성공의 못에 들어가고자 새치기하는 습관, 인맥과 권력을 동원해 사람들을 제치고 첫자리에 들어서는 습관, 돈으로 반칙하고 성공을 사려는 습관 등 모든 익숙한 해법을 포기할 때 비로소 참소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물으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요한의 복음 이야기 1 / 이동원_ 두란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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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절묵상:요한복음 5장 17절
죄는 이 세상에 비참한 질고와 죽음을 가져왔습니다. 38년 된 병자는 소망 없는 미신, 이길 수 없는 경쟁, 무정함, 가혹한 율법주의 등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병자의 비참한 현실을 뚫고 오셔서 은혜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는 말씀은 죄와 사망의 비참함에 놓인 죄인에게 큰 소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일은 하나님 아버지의 일입니다. 비참한 인생을 건지시는 주님의 은혜는 오늘 우리에게도 유효합니다.
주님의 은총을 누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심오한 이론이 아닌 단순한 순종이다. - 브루스 윌킨슨
오늘의 기도
주님, 해결할 수 없었던 오래된 인생의 문제를 들고 주님께 나아갑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실뿐 아니라 이를 통해 영혼을 치유하시고 회복시키시는 주님을 기대하며 찬양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어둠 가운데 있는 주변의 완고한 이들에게 참진리이신 주님을 나타내게 하소서.
요한복음5:1-18절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베데스다 38년된 병자를 통해
인간의 절망과 한계를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왕의 신하의 죽어가는 아들을 말씀 말씀으로 고친후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살렘에 올라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란 못이 있고 옆에 행각이 있는데거기에 많은 병자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 전설이란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이 움직일때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는지 낫는다는
전설입니다 거기에 38년된 병자가 있었습니다 38년된 병자가 의미하는것은 아주 절망적인 것을 말합니다
아마도 베데스다 못에서 가장 불행하고 절망적인 사람이라 할수 있습니다
6절에 "예수께서 그 누운것을 보시고 병이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병자가 대답합니다 "물이 움질일때에 나를 못에 넣어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나보다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다"고 대답합니다 뱡자의 말은 절망적이다는 말입니다
반대로 넣아줄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이룰수 없는 소망을 말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고
놀랍게도 예수님의 말씀에 그 사람이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고통을 아시고 인간의 절망과 한계를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인간의 절망과 한계를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것이 그것을 즉 인간의 절망과 한계를 극복할수 있는
유일한 길이 예수님임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또 한가지 사건은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안식일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유대인들은 38년된 병자에게 안식일 네가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는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을 보면 38년된 병자가 나았다는 것에 관심이 없고 대신에 안식일,
율법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에 대한 관심만 있음을 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일하고 일하지 않고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지키지 않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사역으로 하나님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릴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38년 병자에게 안식은 고쳐지는것입니다
고쳐져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 안식입니다
유대인들이 누가 걸어가게 했냐라고 물었고 38년된 병자는 자신을 낫게 한 그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했다고 말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가 누구냐고 물었지만 38년된 병자는 그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후 예수께서 38년된 병자를 만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절 하반절입니다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히 육체적회복이 아니라
영혼을 살리는 데 목적이 있음을 말씀합니다
따라서 나음을 받은 이후 하나님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안식일의 주인으로 오셔서 하나님과 관계 맺게 하시고 현세에서 내세에서
안식을 주시고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것은 단지 전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병을 고친다 한들 진정한 구원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그것을 두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사람들이 베데스다에 있던 그들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세상에 있는 그 무엇에 행복이 있고, 구원이 있을 줄 알고 사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까?
그것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모든 것을 쏟지만 결국 참된 구원과 행복은 그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되지요. 예수님은 진정한 구원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셨습니다.
베데스다에 즐비한 병자들 사이로 38년 동안 소망 없던 인생이 걸어가는 것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신 자신이 참된 구원으로 오신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하십니다. 구원은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을 뿐입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믿음으로 따라 살아가는 길에만 복이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문제로 유대인들의 항의를 받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하나님이 자신의 친 아버지이심을 밝힙니다. 이는 곧 자신이 하나님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 근거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자신이 하는 일이 같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일하시는 것을 친히 본 분은 아들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일을 자신이 행하고 있으므로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말씀을 듣고는 유대인들에게 일어난 반응은 어떨까요? 그들은 분노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합니다(16-21절).
결국, 주님은 하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이 사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또한 알 것입니다. 그 일은 어떤 일일까요?
미리 약속하신 대로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영광을 받게 하는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보내시는 바로 그 일입니다.
그가 오셔서 하실 일, 십자가의 일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이 표적으로 행하신 일들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만약,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알지 못한 채 예수를 믿노라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1. 양문과 베데스다 못, 그리고 38년 된 병자를 각각 묵상하면서 예수님와 나와의 관계를 생각해봅시다.
2. 14절에서 예수님을 다시 만난 고침을 받은 사람이 한 행동을 묵상해봅시다.
나와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생각해보고 서로 나누어봅시다. 기도할 마음을 주시면 함께 기도합시다.
(요 5:1~15절)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전해지는 삶❞
❚ 헛된 소망에 붙잡혀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참 소망이 있음을 전해야 합니다.
✔ 구체적으로 어떤 실천이 있어야 합니까?
➲ 허황된 자리에 믿음이 선포되어야 합니다(1~4절).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서 두 번째 기적을 베푸신 후에,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올라가시는 길에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는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많은 병자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1~3절).
‘베데스다’는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행각’은 벽이 없고 지붕과 기둥만 있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그곳에 많은 병자들이 모여 있었던 이유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휘저어 놓는데, 물이 움직인 뒤에 맨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에 걸렸든지 나았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4절)이었습니다. 많은 병자들에게는 그 자비의 연못이 마지막 기대와 희망을 걸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미신을 믿거나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자 하는 것이 인간 실존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간절한 마음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헛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정작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베데스다 못을 찾아왔지만, 그러나 미신과 요행에 근거한 잘못된 믿음으로 기약 없는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세상은 헛된 미신에 빠져 인생을 낭비하며 보내는 이들이 많습니다. 성도는 헛된 소망 안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믿음을 소개해 주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먼저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바른 믿음의 삶을 세상에 보여줌으로 믿음으로 인하여 참 생명을 얻는 길을 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 절박한 상황에 소망이 선포되어야 합니다(5~9절).
그곳에는 서른여덟 해 된 병자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그 사람을 찾아 가셔서 오랜 세월 그렇게 누워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예수님은 그 병자가 무엇 때문에 그리고 어떤 상황 가운데 누워있는지, 또한 지금 누워있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정확하게 느끼고,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그는 마치 길 가던 사람 누구에게라도 지금 자신이 처한 답답한 현실을 넋두리라도 하듯이 말했습니다. 자신의 병이 낫지 못한 이유가 자신을 도와줄 사람이 없어서 물이 움직일 때,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 때문(7절)이라고 말합니다. 이 병자의 마음속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과 피해의식 그리고 절망의 마음이 담겨있었습니다. 그런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8절) 말씀하십니다. 그 사람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사도 요한은 그날이 안식일임을 언급합니다.
병자의 깊은 한숨 속에는 서로를 짓밟고 이겨야만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오늘날 무한 경쟁사회 속에서 언제 낙오될지 모르는 불안감으로 서로를 견제하며 외롭게 살아가는 우리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인생의 외로움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리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고, 아무런 소망과 기대도 가질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살아가는 사람에게 찾아오십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단순히 병 고침을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서 보다 적극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명령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병 고침을 받고, 회복되어 건강하게 오래 산다고 할지라도 영원히 살 수 있는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진정한 의미의 치유와 회복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질적인 삶의 문제와 간절히 바라던 것들이 은혜의 예수님을 만날 때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과 경쟁으로 얻는 구원의 소망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의 소망을 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에서 헛된 소망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참소망이 있음을 부지런히 전하는 삶이어야 하겠습니다.
➲ 죄인을 향하여 사랑이 선포되어야 합니다(10~15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유대인들에게 비판을 받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10절). 유대인들은 오랫동안 고통받던 병자가 회복된 일로 기뻐하기보다는 그가 안식일 규정을 어긴 일에 대하여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은 생명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자신들의 전통인 안식일 규정을 지키는 것에 집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후에 성전에서 다시 만난 그를 향하여 예수님은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절)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병을 고쳐주신 분이 누구인지 몰랐던(13절) 그는 이제야 자신을 낫게 하여 주신 분이 예수님이심을 알고, 유대인들에게 가서 말해주었습니다(15절).
구원은 율법으로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거하는 나를 예수님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셨습니다. 구원을 얻어 살아가는 내 자신은 그래서 생명을 얻는 기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죽어 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정해놓은 신앙의 전통과 관습을 지키는 것보다 타인의 생명을 살리고 소중히 여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아울러 값없이 주어진 은혜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었다면 이제는 죄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하며 그래서 함부로 인생을 살아가서는 안 됩니다. 귀중하게 경험한 사랑과 은혜를 값싼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구원받고, 변화된 삶을 통해서 여전히 죄인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므로 영생의 삶으로 나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죄인을 향하여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선포하여 영원한 행복이 있는 하늘 영광을 소망하도록 하여야 하겠습니다.
➲ 생명을 위하여 일하신 분으로 믿습니다(16~18절).
38년 된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 하셨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안식일에 참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은 참된 안식과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날이 아니라, 생명을 위해서 일하는 날임을 예수님이 친히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 된 자로 살아가기 위하여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의 일을 내 자신의 일로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과 상식으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예수님이 내 자신을 위해 하신 일들을 묵상하여 삶으로 실천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내 자신의 작은 실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진정 예수님을 위한 일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하여 일하시는 예수님으로 믿고 살아가는 것이 실패 없는 인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도 세상에서 헛된 소망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님 안에 참소망이 있음을 전하는 삶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하여 긍휼의 마음을 가져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실천되는 복음의 메신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요 5:1~15절)...
절망 속에 있는 38년 된 혈기 마른 자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그의 대답은 “나를 넣어 줄 사람이 없다" 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다른 사람과 비교합니다. 나보다 먼저 가는 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낫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노력하여 못에 들어갈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아직도 자신의 능력으로 병 고침을 얻고자 하는 모습입니다. 은혜의 못에서 은혜를 소원하지 않는 그에게 예수님께서 일어나 걸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것이 은혜입니다. 바라지 않는데, 능력이 없는데, 주어지는 것이 은혜입니다. 성경은 은혜와 행위를 구별합니다. 행위는 결과에 대하여 자신의 노력 근거나 조건을 제시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자신이 얻은 결과에 대하여 자기의 노력이나 근거나 조건을 갖고 있지 않고 제시할 필요도 없습니다.
베데스다 못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지만, 행위의 원리가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병 고침의 은혜를 베푸심으로 자신이 진정한 은혜의 집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38년 된 혈기 마른 자와 같습니다. 우리의 능력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은혜의 집이 되었습니다. 은혜를 아는 자는 내가 어디에서 구원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아는 자입니다. 절망과 좌절, 무능력에서 구원받았기에 우리의 능력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누림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의 자랑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안식일은 그냥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심을 보여주는 것이 안실일 입니다.. 이처럼 출애굽으로부터 구원받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안식일은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이루신 구원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멍에가 아니라 기쁨과 감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선포하십니다. 이유는 하나님이 일하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안식으로 가지 못했던 인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의 백성을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있는 이 세상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 그는 어린양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시는 것입니다. 은혜가 없었던 베데스다 못에서 진정한 은혜를 보여 주셨던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병든 자를 고치셨고 그에게 자리를 들고 걸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안식일의 주인이시고. 그가 인간의 구원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더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킵니다. 주일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주일을 구별하여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인되심을 선포하는 것이 주일 예배입니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되심을 누리는 것이 성도의 교제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의 왕 되심을 전하는 여러분이 되길 소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명절이 되어 예루살렘에 가셨는데, 양문 곁 베데스다라 하는 연못 행각을 찾으셨습니다 거기에 많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데스다는 히브리어로 "בית חסדא"(베이트 하스다)로 "긍휼의 집"이란 뜻입니다 환자들이 그렇게 많이 모여 있었던 이유는 미신 때문입니다
즉, 천사가 가끔 내려와 물에 파동을 일으킬 때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무슨 병이든 낫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긍휼이 없으면 언제 올지 알려주지도 않고, 얼마나 긍휼이 없으면 일등만 고쳐줍니까? 그러나 누가 봐도 미신에 불과한데도 많은 환자들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무런 약속도 없는 이름뿐인 긍휼을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38년이나 투병생활하던 한 사람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요5:6) 그러자 그는 자신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있고, 물에 파동이 일때에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서, 자신이 일등이 아니라서 병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현실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긍휼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 그때 그가 즉시 병고침을 받고 일어나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걸어다니느냐며 긍휼 대신 법을 들먹이며 불법이라며, 그의 치유를 축하하기는커녕 추궁하며 정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병이 없음으로 성전에 출입하게 된 그를 성전에서 만나자 또 긍휼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5:14)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서 긍휼을 얻지 못한채, 도움이 없는 탓, 일등이 아닌 탓을 하며 세상을 원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언제나 누구든 경외함으로 주께 나아가는 자는 긍휼을 입을 수 있습니다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눅1:50) 그러므로 우리는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의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벧전2:10) 또한 더 큰 긍휼을 입기 위해 언제든지 주께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6)
또한 영원한 긍휼을 입기 위해 주 앞에 깨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유1:20~21)
예루살렘 양문 곁에 있는 베데스다 연못은 이름은 '은혜의 집'이지만 결코 은혜스럽지 않은 장소이다.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면 무슨 병이든지 낫는다는 소문 때문에 각종 병든 사람들이 모여서 물이 움직일 때를 기다리다 움직이는 기미만 보이면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경쟁하기 때문에 이름과 달리 전혀 자비롭지 않고 은혜는 찾아볼 수 없는 장소가 되었다.
그곳은 서로를 짓밟으며 1등 하려고 아귀다툼하는 비정한 세상의 축소판이었다.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낫는다는 전설 같은 말에 병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하염없이 기다리며 연못가에 누워있었다.
그때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다가가서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당연한 질문 같지만 병자는 낫고 싶다는 말보다 낫지 못하는 이유를 열거하며 불평을 늘어놓는데 그럼에도 주님은 그를 고쳐주셨다.
예수님은 연못가의 수많은 사람 중 38년된 병자 한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듯이 오늘날 70억 인구보다 나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신데 나의 관심은 누구에게 집중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38년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말씀하시고 병자는 그 말씀에 순종하여 일어나 걸어 나간다. 어쩌면 38년된 병자는 내 모습이기 때문이다.
좋지 않는 성품과 습관, 남탓하며 불평하는 마음, 환경과 문제의 자리에 매어 있지 말고 관리하고 자신을 다스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죄를 다스리라고 하셨다
절제하지 못하는 감정과 사탄이 늘어놓고 유혹하는 죄도 다스리고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세상을 이기는 삶이 되어야 하겠다. 베데스다 연못 같이 사랑을 말하지만 사랑이 없는 세상에서 몸과 마음이 병든 모습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인간적이고 헛된 방법을 버리고 오직 살아계신 주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도 재창조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이후에 예수님이 병자를 고쳐주시자 유대 지도자들은 안식일을 범했다고 적대시한다.
요한복음 5장부터는 예수님이 이적을 베푸실 때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자그마치 38년 동안 병상에 누워있던 사람이 치료를 받아 침상을 들고 걸어갔음에도 바리새인들은 전혀 공감하지 못하고 축하해주기는 커녕 오로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비난하고 있다.
종교가 생명력을 상실한 채 의식과 법칙에 붙잡혀 있으면 복음의 본질은 잃어버리게 된다.
그래서 유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나타나자 알아보지 못하고 죽이려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얻거나 높임받기를 원치 않으셨다.
예수님은 환자를 치유하고 생색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사람의 회복에만 관심을 가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한 이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일을 하고 일을 시킨다고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다.
생명에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를 보면 진짜인지 가짜 종교인지 구분할 수 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일했다고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서 안식일에 일하시는 이유를 설명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행한 치유의 정당성을 하나님과 자신의 동등성에서 찾으신다.
하나님이 창조의 일을 하신 것처럼 예수님도 치유를 통해 재창조의 행위를 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나 교회의 존재 이유도 생명을 살리는 데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참 신앙은 세상의 소망이 된다.
교회도 복음의 진리를 회복하여 소금과 빛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종교적 악습을 버리고 말씀으로 매일 새로워지는 신앙으로 자라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8절 자비와 치유의 주님입니다. 자비가 필요한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역설적으로 자비가 없는 ‘베데스다’(자비의 집)로 가셔서 38년 된 병자를 고치십니다. 그 병자는 베데스다에 가장 오래 머물러 있으면서 가장 많은 실패를 경험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물이 동할 때 베데스다에 먼저 들어가지 못했고 앞으로도 들어갈 소망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예수님이 먼저 다가오셔서 그를 치유해 주셨습니다. 자비의 주님 때문에 베데스다가 비로소 자비의 집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먼저 다가오시고 손 내밀어 우리를 살리신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잊지 맙시다.
2~5절 가장 낮고 천한 곳, 병들고 소외된 이들에게 뜨거운 연민을 품으십니다. 예수님은 성전으로 먼저 가셔도 됐지만, 그에 앞서 신음 소리와 퀴퀴한 냄새가 가득한 병자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이며(사 61장 1절), 우리가 따라야 할 지표입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찾아가서 돌봐야 할 사람은 누구입니까?
6~9절 말씀의 능력으로 일어날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삼십팔 년 동안 지속된 병으로 무력하게 누워있던 병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낫기를 원하는지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간절히 원했지만 이룰 수 없었던 일을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가장 깊고 간절한 소망을 아실 뿐 아니라 그 소망을 이루실 능력 있는 분입니다. 나의 간절한 소망을 예수님께 솔직히 아뢰십시오.
6-8,14절 우리를 낫게 하실 뿐 아니라 더 나아지게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고 물으심으로 그의 질병뿐 아니라 마음과 의지까지 함께 고치셨습니다. 또 그가 38년간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를 일어서게 하고 새로운 자리로 나아갈 수 있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내 삶과 꿈은 새로워지고 나아지고 있습니까?
내게주시는교훈은무엇입니까?
2-9절 안식은 경쟁이 아닌 예수님을 통해 누릴 수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은 ‘치유의 성지’로 여겨졌지만, 실상은 1등만 고침받는 치열하고 살벌한 전쟁터였습니다. 38년 된 병자조차 고침받지 못하는 이유가 이 경쟁에서 패배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이 지속적으로 긴장하고 불안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입니다. 이 경쟁 만능과 승자 독식의 잔인한 시스템 속에서 절망하는 주변 사람들을 어떻게 자비로우신 주님께 이끌 수 있을까요?
3~7절 진짜 문제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믿음입니다. 삼십팔 년 된 병자는 베데스다 연못이 자기를 고칠 수 있을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병이 낫지 못한 이유가 다른 사람이 먼저 연못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믿음은 자신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뿐더러 타인에 대한 원망과 피해의식을 갖게 만듭니다. 지금 내가 처한 문제는 무엇이며, 어떤 방법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까?
9-15절 유대인들은 38년 만에 고침받아 일어난 사람이 ‘자리를 들고 가는’ 일을 했다며, 안식일을 위반했다고 비난합니다. 그의 오랜 고통이나 회복의 기쁨에는 조금도 공감하지 않고 오로지 안식일의 규정을 어긴 것만 문제 삼은 것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문제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우리 신앙도 이웃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드는 비정한 틀로 변질될 것입니다.
10~13, 15, 16절 작은 것 때문에 크고 중요한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삼십팔 년이나 병으로 고통받는 이를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것보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셨다는 것을 문제 삼았습니다. 혹시 축하하고 기뻐해주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속으로 못마땅해하거나 괜한 트집을 잡고 있는 일은 없습니까? 나는 혹시 더 크고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작은 것을 문제 삼지는 않습니까?
기도
주님, 낮은 곳으로 임하신 당신의 삶을 본받아 살아가도록 도와주소서.
자비와 은혜로 만나 주시고 안식과 소망을 주셔서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이르시되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3:10~12)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영 중에서 멸하신 고로 마침내는 다 멸망되었느니라.(신 2:14~15)
그 날 밤에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나타나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주랴 너는 구하라 하시니
솔로몬이 하나님께 말하되 주께서 전에 큰 은혜를 내 아버지 다윗에게 베푸시고 내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니여호와 하나님이여 원하건대 주는 내 아버지 다윗에게 허락하신 것을 이제 굳게 하옵소서 주께서 나를 땅의 티끌 같이 많은 백성의 왕으로 삼으셨사오니 주는 이제 내게 지혜와 지식을 주사 이 백성 앞에서 출입하게 하옵소서 이렇게 많은 주의 백성을 누가 능히 재판하리이까 하니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이르시되 이런 마음이 네게 있어서 부나 재물이나 영광이나 원수의 생명 멸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장수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네게 다스리게 한 내 백성을 재판하기 위하여 지혜와 지식을 구하였으니
그러므로 내가 네게 지혜와 지식을 주고 부와 재물과 영광도 주리니 네 전의 왕들도 이런 일이 없었거니와 네 후에도 이런 일이 없으리라 하시니라이에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 회막 앞에서부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대하1:7-13)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139: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7)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엡 3: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