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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초희(許楚姬)
허난설헌(1563-1589) 은
1563년 강릉 초당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름은 楚姬(초희)이고, 호는 蘭雪軒(난설헌), 별호는 景樊(경번)이다.
오늘날 초당두부로 유명한 「초당」지명은
마을 사람들이 허엽(허난설헌 아버지 호)을 존경해서 붙인 이름이다.
그녀의 아버지 초당(호) 허엽(1517-1580)은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으로 동인의 영수로서 선비중의 석학이었다.
원래 이 세 자리는 당대의 석학이 맡는 자리였다.
큰오빠 허성(1548-1612)은
이복 오빠(허엽은 아내를 일찍 사별하고 재혼함)로
천성이 강직하고 대사성. 대사간. 예조. 병조. 이조 판서를 지냈다.
동복인 작은 오빠 허봉(1551-1588, 김효원과 함께 동인의 선봉)은
열여덟에 생원시에 장원하였고 창원부사로 있을 때
병조 판서인 율곡 이이(1536-1584, 서인)를 탄핵하다가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워낙 술을 가까이 하여 38세로 금강산 가는 길목인 김화에서 죽었다.
작은 오빠와의 우애는 무척 도타웠으며 12살이 연상이지만,
난설헌에게는 스승이자 친구였다.
허봉의 문장은 간결하고, 무게가 있으며, 호방했다.
참으로 혜성처럼 나타난 일세의 천재였다.
형인 허성 보다 3살이 적은 허봉은 형님 보다 10년 일찍 과거에 급제했건만,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그 타고난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27살에 유배 길에 올라 그 후에는 한양 땅에 들어오지 못하고,
38살 나이로 타관객지에서 사라져갔다.
조선 문학, 문장계로선 크나큰 손실이었다.
서애 유성룡은 말하기를
“내 친구 허봉은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주를 가지고 있는데
불행히도 일찍 죽었다.
나는 그 遺文(유문: 죽은이가 남긴 글)을 보고 무릎을 치면서 탄복하였다.“
또 난설헌의 한시를 보고서는
“훌륭하구나 부인의 글이 아니로다.
어떻게 허씨 집안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이 이렇게 많단 말인가“ 라고 했다.
성호 이익(1681-1763)은
「성호사설」에서 허봉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첫째. 성격이 활달하여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을 굽히지 않았다.
둘째. 임금 앞에서 일을 논할지라도 조금도 굽힘없이 자기의 옳은 바를 내세웠다.
셋째. 관의 일을 돌보는데도 명쾌하고 논리 정연하였다.
넷째. 냉철한 이성으로 대간으로, 암행어사로 기강을 바로잡는데 흔들리지 않았다.
다섯째. 문장은 고고하고 온화하며 시에 재주가 뛰어나며 호방하였다.
아우인 허균은
난설헌 보다 6살이 아래인데 기억력이 특히 뛰어나고,
성격은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하였다.
허균과 동시대인인 김시양(1581-1643)은
「하담파적록」에서 다음과 같이 허균을 평하였다.
“허균은 초당 허엽의 아들인데
그의 문장은 한 세상에 견줄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행동이 신중하지 못하고 조심이 없어, 선비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
그 당시 조선과 중국 명나라는 군신관계에 있었으며,
조명간(조선과 명나라 간)에 외교문제가 있을시,
또는 경축, 조의 문제 등이 발생하면 명나라 사신이 한양을 방문하였다.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는 행사는 조선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경우에 조선측 상대역으로 허균이 나설 때가 많았다 한다.
허균의 박학다식함과 수려한 문장력(한문), 한시는 당대 제1인자였다고
자료는 전하고 있다.
허균은 문과에 장원을 한 뒤에도,
여러 차례 장원을 거듭하여, 형조판서, 우참찬을 지냈다.
천대받던 서얼 출신의 동지들과 뜻을 모아서
역성혁명을 모의하다가 50살에 그만 처형되고 말았다.
허균은 세상에 순응하며 살았으면,
세속의 영화를 한껏 누리며 귀족처럼 살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여의 정욕은 본능이고, 예법에 따라 행동하는 것은 성인이다.
나는 본능을 따를 뿐이지 감히 성인을 따르지 아니하리라.“
라고 말하면서,
상중에도 기생들을 가까이 하였다.
이러한 거침없는 행동은 당파싸움이 극심한 당시
꼬투리를 잡히기 십상이고, 사대부의 미움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조선 말 풍운아 이자 대문호인 매천 황현(1855-1910)은
허봉, 허난설헌, 허균 세 남매를 특히 사랑하여
“초당 집안의 세 그루 보배로운 나무” 라 했거니와
난설헌의 남매들은 당시 문단에 있어서나,
정계에 있어서나 으뜸가는 최고 문벌이었다.
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은 화담 서경덕(1489-1546)의 문하생이었다.
이토록 잘나가고 빼어난 집안인데도
가풍은 매우 개방적이고 자유분방하였다.
난설헌과 아우 허균은 손곡 이달에게서 詩를 배웠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집안이었다면,
서얼 출신의 미천한 신분인 손곡에게 사사하기 만무했을 것이다.
난설헌의 시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작은 오빠 허봉과 손곡 이달이었다.
난설헌은 규중에서 곱게 자란 규수였지만,
손곡은 아버지는 잘나가는 선비였지만 어머니는 기첩이었다.
이러다 보니
손곡은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불만을 갖고,
일생을 떠돌아다닌 천재 시인이었다.
그런데 기이한 것은 스승과 제자들이 성격상, 기질상 잘 맞았다는 것이다.
당시 규수는 학문을 해서는 안 되었다.
바느질 잘하고, 살림 잘하며,
특히 시집살이 잘 하는 것이 부덕한 여자가 가는 길이었다.
안동 김씨 가문의 김성립과 결혼한 허초희는
너무도 완고한 시집 분위기에 적응도 못할뿐더러 살림에도 흥미를 못 느꼈다.
당연히 시어머니에게 찍히고,
게다가 허난설헌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김성립은 바람을 피며,
아내에게는 냉정하기 까지 하였다.
난설헌은
사랑, 시, 인생 이런 문제에 너무도 관심이 많은 여린 심성의 여성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랑하는 아들, 딸을 너무도 일찍 잃은 난설헌은 삶의 의욕도 잃어버렸다.
친정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동.서 당파싸움에서 밀려나는 동인의 핵심세력으로서,
몰락의 길을 걸으며 죽고, 귀양 가는 것 뿐 이었다.
그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허난설헌은 미모에, 두뇌는 천재였으며,
몸은 약하여 자주 친정에 들러 요양을 하기도 했다 한다.
난설헌의 사랑, 결혼 생활은 초기 아주 잠깐 동안만 깨가 쏟아졌고,
대부분의 기간이 어둡고 슬펐다.
문헌의 기록들은 주로 그녀의 文學, 漢詩를 다루고 있을 뿐
사생활에 관한 기록은 아주 단편적이다.
난설헌은 1000수 이상의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지만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에 요절하면서 스스로 그 많은 시를 불태웠다.
겨우 210수만 동생 허균에 의하여 후대에 전하여지고,
당시 중국, 일본의 지식층에서 최고의 격찬을 받는 등 인기절정이었다.
국제사회(동아시아)에서는 허난설헌의 한시를 아는 것이 인테리 취급을 받았다.
난설헌이 죽을 무렵에 이르러,
名門 士大夫家(사대부가)인 친정은 몰락해가기 시작하였다.
이미 몇 년 전에 아버지 초당은 경상 감사 자리를 마치고,
한양으로 귀경길에 상주 객관에서 객사하였다.
이 무렵,
둘째 오빠 하곡은 당파싸움으로 귀양 갔다가 끝내 폐병을 얻어 객사하고 말았다.
아들과 딸이 어려서 죽고,
뱃속의 아이까지 유산하고 말았으니,
감수성이 예민한 난설헌의 슬픔과 괴로움을 말하면 무엇 하리.
죽기 4년 전인 1585년 봄에,
외가집이 상을 당하여 외삼촌댁에 머물며,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다음의 한시를 지었다.
夢遊廣桑山詩(몽유광상산시: 꿈에 광상산에서 노닐며 지은 시)
碧海浸瑤海(벽해침요해) 푸른 바다 물결이 구슬 바다에 잠기었고
靑鸞倚彩鸞(청란의채란) 푸른 난새는 무지개빛 난새에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부용삼구타) 연꽃 스물일곱 송이가 떨어지니
紅墮月霜寒(홍타월상한) 붉은 꽃이 달밤 찬 서리에 시들었어라.
그 뒤 그녀의 나이 27세인 1589년 3월 19일,
아프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으며,
집안사람들에게 말 하였다.
〃금년이 바로 3.9의 수(3 * 9 = 27)에 해당되니,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하고 눈을 감았다 한다.
앞서 소개했던 이매창,
어저께 얘기한 황진이.
그리고 이번 허초희,
이들을 일컬어 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이라 한다.
황진이는 화담 서경덕과 격조 높은 썸씽이 있었고,
화담은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스승이기도 하다.
허난설헌의 동생 허균과 매창은 청아한 섬씽이 있는 관계였다.
허균은 매창 보다 4살 연상이고,
허난설헌은 매창 보다 10살이 연상이다.
허난설헌의 아버지 허엽의 스승이 서경덕인 점을 감안하면,
서 화담과 황진이의 존경과 사랑 관계가 설혹 나이차가 많다 해도,
적어도 허난설헌 보다는 황진이가 선배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3명의 위대한 시인들의 활동한 연대기를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哭子(곡자: 저승에 간 자식을 슬퍼함)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지난해는 귀여운 딸애 여의고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릉토) 서럽고 서러워라 광릉 땅이여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두 무덤 나란히 마주하고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백양나무 가지엔 쓸쓸히 바람 불고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도깨비 불빛이 솔숲에서 번쩍이네.
紙錢招汝魄(지전초여백) 지전 올려 너희들 혼을 부르고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맑은 물을 뿌리며 너희 무덤에 제를 지낸다.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알고 말고 너희 남매의 넋이여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밤마다 서로서로 따르며 놀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아무리 뱃속에 아이가 있다지만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그 어찌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부질없이 슬픈 노래 읊조리자니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 참고
1. 지은이는 허난설헌
2. 廣陵土(광릉토)는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허씨 가문 선영이 있는 곳.
3. 蕭蕭(소소)는 쓸쓸할 소 이므로 쓸쓸하다.
4. 松楸(송추)는 소나무 송, 개오동나무 추, 바둑판 추 이므로 소나무 숲.
5. 紙錢(지전)은 돈 모양으로 오린 종이로 죽은 넋을 부를 때
또는 장례 때 상여 앞에 뿌릴 때 사용한다.
6. 玄酒(현주)는 제사 때 술 대신으로 쓰는 맑고 차가운 물.
7. 奠汝丘(전여구)는 제사 지낼 전, 너희 여, 언덕 구, 무덤 구 이므로
너희 무덤에 제사를 지낸다.
8. 縱有(종유)는 세로 종, 비록 종 이므로 비록 있다고 하여도.
9. 浪吟(랑음)은 물결 랑, 터무니없을 랑, 읊을 음 이므로 크게 소리 높여 읊음.
10. 黃臺詞(황대사)는 중국 당나라 측전무후의 둘째 아들이 지은 노래이다.
측전무후의 장남이 태자로 있을 때 즉전무후가 독살을 하였다.
이어서 둘째아들이 태자로 책봉되었는데,
자기 자신도 형처럼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황대사 라는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결국엔 둘째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11. 呑聲(탄성)은 삼킬 탄, 소리 성 이므로 소리를 삼키다.
12. 앞으로 허초희(허난설헌) 한시를 30편 정도 소개할 예정입니다.
허난설헌이 끝나려면 2월 중순쯤 되겠군요.
첫댓글 그렇군요.. 이매창.황진이.허초희.조선시대 3대 여류시인.. 허난설헌~~30편의 한시를 올려주신다구요~~감사합니다..
네.. 여기 오시면 보게 될 겁니다..
많은것을 배우고 갑니다..새해엔 언덕님두 대박나세요....
천사님의 신경 써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올라님 덕분에 한시 공부 많이합니다. 감사해요. 마지막 장식 잘 하시고 다가오는 새해는 신나는 일만 가득하시길.....^^
예.. 여기에 또 "올라님" 이라고 하는 분이 계시군요.. 대부분은 "언덕님" 이러케 부르고.. 간혹 어쩌다 한두번 "언덕에"님 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그러고 보면 여자분들 색깔이 다양합니다.. ㅎㅎㅎ
이젠! 님이 올리신글이 기다려집니다. 읽는 즐거움은 두배니 ..... 님! 감사드리 옵니다. 새해 복 많이많이 받으시 고. 소원 성취하소서....^^
오시었소? 주니퍼베리님.. 님이 즐거우시다면 앞으로도 변함 없이.. 아침에 눈을 떠 컴을 바라보면 한시가 있어야겠구려.. ㅋ
" 알고 말고 너희 남매의 넋이여, 밤마다 서로서로 따르며 놀테지, 아무리 뱃속의 아이가 있다지만 그 어찌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아프고 아픈 엄마의 마음이겠지요... 공부 많이 합니다.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들국화*님이시여 !!!
황진이의 삶과 허난설헌의 삶은 격이 다른 듯합니다. 안타까움이 많은 여인이군요." 못 다 핀 꽃한송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아쉬움과 쓸쓸함을 남겨주고 갔네요.님 덕분에 고전에 심취합니다.인쇄해서 자료로 보관하는 중입니다.새해 복 많이 받으소서.
제가 여기 올리는 한시는 그 한문의 저작권은 지금은 땅속에서 진토가 되어 고이 누워 잠드신 분이고.. 저는 그저 알기 쉽게 한글로 옮겨다 놓은 것 뿐이옵니다.. 꽃신님을 위하여 전진하리다.. ㅋㅋㅋ
앞으로 자주 애용 하리다 그런데 난설헌은 님의 말처럼 27세에 요절한 것은 맞는데 그냥 죽은게 아니고 자살한 것으로 전해저 오은데 아닌가요? 또한 27송이꽃은 연꽃이 아니고 해당화꽃으로 알고있는데 (친정인 강릉 바닷가에 해당화꽃이 많기에 해당화를 어릴적 부터 좋아했다고 전해짐)물론저가 잘못알고 있을수도
그 어디 古文書에도 자살한 기록은 없습니다..
있구요 아무튼 님의 이매창 시와 설명 또한 이번 난설헌 글 모두 우리글방 님들께 좋은 소식입니다 그런데 그토록 조용하고 냉정하고 이지적인 난설헌 님께서 지금은 그시끄럽고 요란한 중부고속도로변 (경기도 광주)에서 잠들고 게시니 참으로 인생사 아이러니 입니다 기왕에 님께 하나 여쭤볼게요 이매창 시중에
중부고속도로 때문에 애초의 묘자리에서 허난설헌 묘와 아기들 묘 뿐만아니라 시집인 안동김씨 가문 묘들을 이장 했습니다.
뫼버들꺽어서 님의창에 걸어놓고 ---이렇게 나가는시 있나요? 또하나 아쉬운건 황진희 난설헌 매창 이세여인을 연구하고 뜻을 기리는 그러한 단체는 없나요?
뫼버들~ 이렇게 나가는 것은 아마도 홍랑 시조인듯 한데 여기 게시판에 일전에 제가 올려 놨습니다.. 제 닉으로 검색해 보시길...
저는 국문학을 전공한 사람은 아니고 공대 출신으로 직업도 첫직장인 MBC를 필두로 하여 주욱 전공분야에서 일해 왔습니다.
다만 누구나 취미가 있듯이 저는 한시, 문학, 고전, 소설, 역사 등등에 관한 讀書가 취미인지라 그래서 漢詩를 알게 되었을 뿐입니다.
황진이는 모르겠고 허난설헌 사업회가 있고, 매창도 그런 줄 압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십시요.
ㅎㅎㅎ 오늘에서야 복사와 붙여넣기(나눠서)를 배웠어요^^ 그래서.... 두 작품 옮겼습니다.. 고맙습니다....새해가 밝았습니다. 건강.행복.즐거움이 항상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잘 했다여..ㅉㅉㅉㅉ 님도 3 가지가 언제나 님에게.. 진정 바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