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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25S0RNMivz4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바다의 신, 성웅 충무공 덕암(德巖) 이순신(李舜臣) 장군
이순신 장군에 대한 TMI 시간
시호: 충무공(忠武公)
군호: 덕풍부원군
본관: 덕수 이씨
이름: 이순신
자: 여해
호: 기계, 덕암
품계: 대광보국승록대부
공신호: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출생과 사망: 1545년 4월 28일 ~
1598년 12월 16일(53세)
출생지: 서울특별시 중구 인현동
거북선은 철갑선이다?
현재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거북선이 실제로는 철갑선이 아니다'
쪽으로 결론이 나고 있다.
이유는 첫째로,
노를 젓는 배에서
철갑선은 무겁기 때문에
쓰여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로는,
당시 조선이 철이 굉장히 귀했기 때문에,
철을 구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난제라는 것이다.
철갑선이었다면,
난중일기에
분명히 철을 구하느라 힘들었다라든지
관련 기록이 있을 터인데,
그런 것이 전무 한 것으로 보아,
나무판자 위에 쇠못을 거꾸로 박은 정도
였을 것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거북선의 정확한 설계도라던지,
내부에 대한 자료가 아직까지 없기 때문에,
물론 사실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현재로서는 '아니다'에
좀 더 무게 중심이 쏠려있다.
(거북선의 설계자는
이순신이 아닌, 나대용이다.)
윗사진은 이순신 장군님의 모습이다?
사실 아니라고 보면 된다.
따라서 백원에 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도
실제 모습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생김이 풍만하지도 후덕하지도 않으며,
입술이 뒤집혀서
복있는 장수는 아닌 듯했다.
- 고상안의 『태촌집』
신은 체구가 크고 용맹이 뛰어나며
붉은 수염에 담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 윤휴의 『백호전서』
부산 동아대학교 박물관 소장
이순신은 팔척장신에 팔도 길어
힘도 세고, 제비턱과 용의 수염,
범의 눈썹에 제후의 상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순신의 이름 비화?
이순신의 형제들이
전설 속의 중국 성인인 임금들,
복희, 제요, 제순, 대우의 이름을
(중국 초기의 전설의 태평성대 시절,
요순시대라 불림.
한자가 이 시기에 창안됨)을
따와서 지었고,
이순신 또한 마찬가지로
셋째로 태어나 희신, 요신에 이어
순신으로 지어졌다.
이순신의 사후?
권율, 원균과 함께
임진왜란 3대 공신으로
인정 받았으며
덕풍부원군으로 추봉,
이후 좌의정에 추증된다.
인조때, 충무라는 시호를 받고
숙종때, 유생들의 상소로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직접 현충사라는
현판을 하사한다.
정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된다.
물론 우연의 일치겠지만,
이순신 탄생 400년 뒤에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광복한다.
이순신은 역적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상이 기묘사화에 연루되었다고
하는 것은 누명이고 오명이다.
따라서, 인터넷에 징키즈칸의 결의를 모방하여
적힌 글은 사실이 아니다.
이순신은 굉장한 술꾼이었다?
기록을 보면 맞는 말인듯 하다.
이순신이 출옥한 날인 4월 1일
난중일기에도 몸을 가누지 못 할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다고 적혀있다.
심신의 고됨을 음주로
많이 풀었을 것으로 예상된다.
권율과는 원래 알던 사이였다?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낸
류성룡의 소개로
서신을 주고 받는 사이였으나,
공무 및 인원 차출의 문제로
이순신이 잠시 권율에
불만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순신의 이름을 딴 것
충무공 이순신급 구축함 1번함
충무공 이순신 함
서울의 충무로, 충무아트홀
경남 통영은 원래 충무시와
통영시로 분리되있었음
이순신대교(여수),
이순신종합운동장(아산) 등등...
이순신 장군에 대한 국내 외 평가
마치 무릇 나라에 이롭고
군사에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면
용감히 진행하여 주저하지 아니 함이
마치 음식이나 여색을 즐기듯하여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ㅡ이항복 『충민사기』
역사를 통틀어
정면 공격과 기습 공격,
병사를 뭉치고 산개시키는 전술에
모두 뛰어났던 장군은
얼마 되지 않는다.
육군에서는 정복전의 대가였던
나폴레옹이 그런 장군이었고,
해군 중에는 더욱 천재적인 전술가로서
동양에서는 한국의 이순신,
서양에서는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대한 기록이
부족하다는 점과
그가 조선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서양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의심의 여지 없는
최고의 해군 지휘관이다.
이순신과 비견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네덜란드의
미힐 더 라위터르
(Michiel de Ruyter)보다
뛰어나야만 할 것이다.
호레이쇼 넬슨은
이순신에 비해서
인간성과 성실성의 측면에서
한참 뒤떨어졌다.
(또한) 이순신은 거북선이라고 알려진
장갑 전함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진정으로 위대한 지휘관이었고
300여 년 전 해군 전술의 달인이었다.
- 사토 제독 『제국국방사론』
와키자카 야스하루
"나는 이순신이라는
조선의 장수를 몰랐다.
단지, 해전에서 몇번 이긴
그저 그런 조선 장수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내가 겪은 이순신은
그 어떤 장수와도 달랐다.
나는 두려움에 떨어
음식을 며칠 먹을 수가 없었으며,
앞으로의 전쟁에 임해야 하는 장수로서
나의 직무를 다 할 수 있을지 의문이 갔다."
-한산도 해전 패전 후
와키자카 야스하루 회고록
"내가 제일로 두려워 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증오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존경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이순신이다."
※ 와키자카의 후손들은
매년 이순신의 탄생때
이순신의 묘를 찾아온다고 함
영국 해군 장군,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
G.A.Ballard
"이순신은 서양 사학자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순신은 전략적 상황을 널리 파악하고
해군전술의 비상한 기술을 가지고
전쟁의 유일한 참 정신인
불굴의 공격원칙에 의하여
항상 고무된 통솔원칙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의 맹렬한 공격은
절대로 맹목적인 모험이 아니었다.
영국인에게 넬슨과 견줄 수 있는
해군제독이 있다는 사실은
시인하기 힘든 것이지만,
이순신이 동양의 위대한
사령관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만약 누군가가 넬슨과 비견되어야 한다면,
그건 일생동안 패배를 몰랐고
적의 앞에서 최후를 맞은
아시아의 이 위대한 제독이어야 할 것이다."
"그 이름은 서구 역사가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의 공적으로 보아서
위대한 해상지휘관들 중에서도
능히 맨 앞줄을 차지할 만하며,
이순신 제독을 존재하게 한 것은
신의 섭리였다."
그의 행적을 좇아가면,
용맹한 수병들을 품고
한반도 해안가의 바다 밑바닥에 가라앉은
수백 척의 일본 함선으로
항적도(航跡圖)를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지휘관도, 최소한 해전에서는,
"전쟁이란 다수가 아닌,
단 한 사람이 주도하는 것이다"라는
나폴레옹의 말을
그만큼 철저하게 증명하지는 못 한다.
그는 적보다 열세인 전력을 가지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의 모든 행동은
어떤 상황에서든
비판을 거부할 정도로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의 경력을 몇 마디로 줄이면,
과거에 지침으로 삼을 만한
전훈이 아무 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해전 지휘는
전투에서 확실한 결과를 얻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런 지휘와 같았으며,
조국의 수호자로서
장렬히 희생함으로
생을 마쳤다고 할 수 있겠다.
장웨이린 교수
(동북공정의 일환으로
고구려역사 편입작업을 하다,
'이순신학술회'를 시작으로
그 자리에서 물러남)
"역사학자가 후세사람들에게
해서는 안 되는 두가지 부끄러움이 있다.
하나는 히틀러가
200만 유대인을 죽인 것보다
그 역사를 감추며 숨기는 것이고
또 하나는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 하고 찾지 못 하는 것이다."
"사실 조선의 역사에 관심 없었다.
일본교수들의 말만 듣고
학술연구회에서
거북선을 처음 보았다.
저런 배가 400여 년전에 있었단 말인가?
나의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본 교수진의 도움으로
책 7권을 하루만에 다 읽고 책을 놓은 뒤,
가느다란 한숨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느껴지는 심장소리...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서양과 일본에게 전쟁에 패한 청나라를
구할 위인이 있다면 누구일까? 물었다.
'항우', '제갈공명', '관우', '손무'
나는 한참동안이나
창문 너머를 바라보다 말했다.
'여러분들이 말한 영웅들이 나타난다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거북선 사진을 보여주었다.
모두들 의아해 했다.
400여 년전 조선을 구한 '이순신' 장군이야 말로
중국을 구할 유일한 영웅이라고 여러분께 말한다.
(중략)
만일 이순신이 일본 장수였다면,
당시 명나라는 물론이고,
태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까지
일본군에 점령당했을 것이다.
세계 어느 국가도 한 인물의 존재에 따라서
이렇게 역사가 뒤바뀌는 경우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명의 도독 진린
"황제폐하, 이 곳 조선에서 전란이 끝나면,
조선의 왕에게 명을 내리시어
조선국통제사 이순신을
요동으로 오라 하게 하소서
신이 본 이순신은
그 지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그 성품과 또한 장수로서
지녀야 할 품덕을 고루 지닌 바,
만일, 조선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황제폐하께서 귀히 여기신다면,
우리 명국의 화근인 저 오랑캐를
견제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저 오랑캐의 땅 모두를
우리의 명국으로
귀속시킬 수 있을 것이옵니다."
- 명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편지
(세번 쓰러져 탄식하며)
아아 동서고금에 실로 이만한 자 없다!
- 이순신의 전사소식을 듣고
역사작가 시바 료타로
"이순신은 청렴한 인물로,
그 통솔력으로 보나,
전술능력으로 보나
충성심과 용기로 보나
이런 인물이 실재했다는 자체가
기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는
이상적인 군인이었다.
영국의 넬슨 이전에
이름난 장수기도 하거니와,
세계 역사상 이순신만한 사람이 없으며,
이 인물의 존재는
조선에 있어서까지도
잊혀지지 않겠지만,
도리어 일본사람의 편에서
그에게 존경심이 계승되어
메이지 유신 기간에
해군이 창설되기까지 하였으니,
그 업적과 전술이 연구되어져야 한다."
일본 해군 전략 연구가 가와다 고오
"도고가 혁혁한 전공을 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그 발가락 한개에도 못 따라간다.
이순신에게 넬슨과 같은 거국적인 지원과
그 만큼의 풍부한 함선을 주었다면,
우리 일본은 하루 아침에
점령을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대단히 실례인 줄은 알지만,
한국인들은 이순신을 성웅이라고
떠받들기만 할 뿐,
그 분이 진정으로
얼마나 위대한 분인가 하는 것은
우리 일본인보다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조선 22대 왕 정조
"내 선조께서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로에
기초가 된 것은 오직 충무공 한분의 힘,
바로 그것에 의함이니라
내 이제 충무공에게
특별한 비명을 짓지 않고,
누구 비명을 쓴다 하랴.
당나라 사직을 안정시킨 이성과
한나라 왕실을 회복시킨 제갈량을
합한 분이 충무공이다."
미국 역사학자 토마스 브레너
"나는 35년 동안 역사를 공부했지만,
이 분에 대해서는
단 한번도 들어보지 못 했다.
이렇게 훌륭한 분이 안 알려져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도고 헤이하치로 -
러일전쟁의 영웅 쓰시마 해전의 주인공,
일본 역사상 최고의 해군제독
영국의 넬슨제독과 비견하여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넬슨은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비슷한 수준의 함대를 가지고 싸워서 이겼다.
그러나 나와 나의 함대는
러시아 발틱함대의
3분의 1규모로써 이겼다"
라고 대답했다.
이어 다른 기자가
조선의 이순신 장군과 비교하면
어떻냐고 묻자.
"이순신에 비하면,
나는 하사관에 불과하다.
나를 넬슨에 비하는 것은 가하나,
이순신에 비하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이순신이 나의 함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세계의 바다를 제패했을 것이다."
"당신 나라의 이순신 제독은
나의 스승입니다.
실로 존경할 만한 인물입니다."
- 도고가 조선의 실업가에게,
후지이 노부오 『이순신각서』
※ 러일전쟁 출정전 승리의 의미로
이순신에게 제사를 치른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그의 전술 또한
이순신의 것과 매우 닮아있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
사막의 여우 롬멜을
아프리카 전선에서 무찌른
버나드 로 몽고메리
"그러나 일본은 뭍에서 성공을 거둔 반면,
바다에서는 일대 타격을 받았다.
한반도 사람들은 항해에 능한 민족이었고,
조선에는 이순신이라는
뛰어난 장군이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전략가, 전술가이며
탁월한 자질을 지닌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계 제작에도 뛰어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아시아의 해군 전술은
여전히 화살 공격을 가하고
배를 들이 받아
적선에 올라타는 차원에
머물러 있었으며, 대포는
배에 장착되지 않은 상태였다.
이순신 장군은 어떤 공격에도
버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방어력을 지닌 배를 고안했다.
그 배의 선체는 속도를 낼 수 있고
작전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갑판 위에는 거북 등처럼 철갑을 씌워,
불, 화살, 탄환 등이
뚫고 들어오지 못 하게 했으며,
적이 배에 올라타지 못 하도록
철갑 위에는 큰 못을 박았다.
뱃머리는
공격적으로 적선을 들이받을 수 있도록
강화했으며,
둘레 전체에 포문이 설치되었다.
일본 선원들은 용감하게 싸웠지만,
이순신 장군의 철갑 전함에
저항할 수 없었다.
조선이 바다에서 승리를 거둔 결과
히데요시의 지상 공격은
마비되고 말았다.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한반도를 침략했지만,
이번에는 조선 사람들과 중국인들이
지상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싸웠고,
일본인들은 바다에서
또다시 패배를 맛보았다."
"이순신은 백 번 싸운 장군으로서
한 손으로 친히 무너지는
하늘을 붙든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순신은 재질을 가지고도
운수가 없어
백 가지 재능을 한 가지도
풀어보지 못 한 사람이었다."
『징비록』 서애 류성룡
그러나, 그를 낮춰 평가한
한 사람이 있었으니...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 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에 대해 내린 평가
『난중일기』 中
말 그대로 망국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
적에게 바다의 신이라며
공포에 떨게 했던 인물.
그러면서도 가장 인간적이었던 장군
성웅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옮겨온 글 편집
청산 노승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