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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당송 시편 70(69),2.6
하느님, 저를 구하소서. 주님, 어서 저를 도우소서. 저의 도움, 저의 구원은 주님이시니,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
●본기도
주님,
주님의 종들에게 끊임없이 자비를 베푸시니
주님을 창조주요 인도자로 모시는 이들과 함께하시어
주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고
새롭게 하신 모든 것을 지켜 주소서.
▥ 예레미야서의 말씀입니다.28,1-17
1 유다 임금 치드키야의 통치 초기 제사년 다섯째 달에,
기브온 출신의 예언자이며 아쭈르의 아들인 하난야가
주님의 집에서 사제들과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나에게 말하였다.
2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기로 하였다.
3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곳에서 가져가 바빌론으로 옮겨 놓은 주님의 집 모든 기물을,
내가 이곳에 다시 돌려 놓겠다.
4 바빌론으로 끌려간 유다 임금 여호야킴의 아들 여콘야와
유다의 모든 유배자를 이 자리에 다시 데려다 놓겠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정녕 바빌론 임금의 멍에를 부수겠다.’”
5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가 사제들과,
주님의 집 안에 서 있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6 예레미야 예언자가 말하였다.
“아무렴,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
주님께서 당신이 예언한 말을 실현시키시어,
주님의 집 모든 기물과 모든 유배자를 바빌론에서
이곳으로 옮겨 주시기를 바라오.
7 그러나 이제 내가 당신의 귀와 온 백성의 귀에 전하는 이 말씀을 들어 보시오.
8 예로부터, 나와 당신에 앞서 활동한 예언자들은
많은 나라와 큰 왕국들에게 전쟁과 재앙과 흑사병이 닥치리라고 예언하였소.
9 평화를 예언하는 예언자는 그 예언자의 말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그가 참으로 주님께서 보내신 예언자로 드러나는 것이오.”
10 그러자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내어 부수었다.
11 그러고 나서 하난야는 온 백성이 지켜보는 가운데 말하였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두 해 안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모든 민족들의 목에서 벗겨 이와 같이 부수겠다.’”
그러자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기 길을 떠났다.
12 하난야 예언자가 예레미야 예언자의 목에서 멍에를 벗겨 부순 뒤에,
주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내렸다.
13 “가서 하난야에게 말하여라.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는 나무 멍에를 부수고, 오히려 그 대신에 쇠 멍에를 만들었다.′
14 참으로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이 모든 민족들의 목에 쇠 멍에를 씌우고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들이 그를 섬길 것이다. 나는 들짐승까지도 그에게 넘겨주었다.′’”
15 예레미야 예언자가 하난야 예언자에게 말하였다.
“하난야, 잘 들으시오.
주님께서 당신을 보내지 않으셨는데도,
당신은 이 백성을 거짓에 의지하게 하였소.
16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오.
‘내가 너를 땅 위에서 치워 버리리니, 올해에 네가 죽을 것이다.
너는 주님을 거슬러 거역하는 말을 하였다.’”
17 하난야 예언자는 그해 일곱째 달에 죽었다.
●화답송시편 119(118),29.43.79.80.95.102(◎ 68ㄴ 참조)
◎ 주님, 당신 법령을 저에게 가르치소서.
○ 저를 거짓의 길에서 멀리하시고, 자비로이 당신 가르침을 베푸소서. ◎
○ 당신 법규에 희망을 두오니, 진리의 말씀을 제 입에서 결코 거두지 마소서. ◎
○ 당신을 경외하는 이, 당신 법을 아는 이, 모두 저에게 돌아오게 하소서. ◎
○ 당신 법령 안에서 제 마음 흠 없게 하소서. 제가 부끄럽지 않으리이다. ◎
○ 악인들이 저를 없애려 노리지만, 저는 당신 법을 마음에 새기나이다. ◎
○ 당신이 저를 가르치셨기에, 당신 법규에서 벗어나지 않았나이다. ◎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4,13-21
그때에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관한 소식을 13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시고 따로 외딴곳으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여러 고을에서 그 소문을 듣고 군중이 육로로 그분을 따라나섰다.
14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
15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16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17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18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
19 군중에게 풀밭에 자리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20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21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묵상
예레미야는 하난야의 말에 “주님께서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얼마나 좋겠소!”(예레 28,6)라고 말합니다. 그는 멸망을 바라지 않지만, 하느님의 말씀이 심판을 선고하라는 것이었기에 그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난야는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지 않으셨는데도 임금과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물리쳐 버립니다.
내 마음 안에도 참예언자와 거짓 예언자가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을 알아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명백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알면서 거부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있는 거짓 예언자가 나를 속이는 순간에는, 정말 깊이 돌아보지 않으면 속아 넘어갑니다. 사람들이 하난야의 말을 따라가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네부카드네자르의 멍에를 부수시고 성전 기물들을 되찾게 하여 주신다는 말이, 그들이 믿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에서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있을 때, 그 마음으로 속게 됩니다. 그런 마음은 여러 가지 그럴듯한 이유를 대면서 하느님의 뜻이라고 속삭입니다. 식별은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예측을 벗어나기 때문에, 어떤 도식에 따라 간단하게 알아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난야에게, 평화를 예언할 때는 그 말이 이루어져야 참예언자로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멸망을 예언할 때는 그 일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심판 선고를 들은 이들이 회개하면 그 심판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믿을 때는, 진실하게 깨어 있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안소근 실비아 수녀)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 어떤 것들은 쉽게 이해가 되지만, 어떤 것들은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리게네스는 성서 해석의 기준을 정하였습니다. 첫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말씀’ 그대로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말씀 그대로의 해석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2000년 전과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많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2000년 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정국가였습니다. 한 국가에는 한 종교가 허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교권과 신권이 다르지 않았습니다. 이방의 종교는 인정받지 못하였고, 이방의 종교는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두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윤리와 도덕’입니다. 윤리와 도덕은 시간과 장소에 크게 영향받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를 도와주고, 병든 이를 치료해 주고, 어린이를 돌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강론과 말씀에 대한 해석은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큰 어려움이 없습니다.
세 번째 성서 해석의 기준은 ‘영성’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재물과 권력으로는 우리의 썩을 몸을 구할 수 없습니다. 진시황제도, 알렉산더도, 나폴레옹도 많은 재물과 권력을 가졌지만 모두 썩어 한 줌의 재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도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야 합니다. 그 십자가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꾼의 품삯에 관해서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도, 오후에 일한 사람도, 저녁이 되어서 일한 사람도 똑같은 품삯을 받았습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하기도,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영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의 능력과 재능이 아닙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것은 세상에서 쌓아온 업적과 성과가 아닙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남은 것을 모아보니 12 광주리가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까요? 문자 그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여러 표징을 보여 주셨던 것처럼 그런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다는 해석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냥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윤리와 도덕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예수님께 가져왔습니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것을 나누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먼저 나누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주님께서는 놀라운 표징을 보여 주실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지하에 있는 많은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듯이, 우리의 나눔은 많은 이들에게 위로가 됩니다. 기쁨이 됩니다. 수단에서 이태석 신부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오웅진 신부님이 꽃동네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의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서 나눔의 풍요로움을 볼 수 있습니다.
영성적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 표징이 복음을 읽는 나와는 어떤 상관이 있을까요?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날이 오면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거기에는 사자도 없고 맹수도 들어서지 못하리라. 그런 것들을 볼 수 없으리라. 구원받은 이들만 그곳을 걸어가고 주님께서 해방하신 이들만 그리로 돌아오리라.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늑대와 새끼 양이 함께 풀을 뜯고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으리라. 나의 거룩한 산 어디에서도 그들은 악하게도 패덕하게도 행동하지 않으리라.”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나눔의 차원을 넘어서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선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조재형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십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그들을 돌려보내야 한다는 제자들에게 그들을 먹이라고 하십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만약 제자들이 자신들이 함께하시는 분이 누구신지 알았더라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니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믿음과 제자들의 믿음의 차이입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당신 믿음을 본받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십니다. 그 씨가 잘 자라면 새들이 깃들어 쉬게 됩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입니다. 행복입니다. 씨는 꿈입니다. 그런데 그 꿈은 누군가를 쉬게 하고 힘을 주는 일이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가 가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내어놓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을 지치게 만드는 것은 불안이고 인정받지 못함인데, 이웃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명을 가진 이는 능력자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에 지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온 세상을 배불리고 더 나아가 온 우주에 이익이 되는 일입니다. 그러니 단순히 나의 능력으로 내가 만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식의 작은 꿈은 버립시다. 작은 꿈은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스웨덴의 화학자, 엔지니어, 발명가인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은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으며 355개의 특허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특히 폭발물 산업에서의 그의 발명품과 사업 벤처는 그를 믿을 수 없을 만큼 부유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노벨은 전쟁과 산업 분야에 널리 사용된 그의 발명품의 파괴적인 잠재력 때문에 종종 비판받았습니다.
1888년 알프레드 노벨(Alfred Nobel)의 동생 루드비히 노벨(Ludvig Nobel)이 프랑스 칸에서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신문은 실수로 Ludvig 대신 Alfred의 사망 기사를 게재했습니다. 죽음의 상인은 죽었다(The Merchant of Death is Dead)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는 노벨이 폭발물을 발명하고 폭발로 인한 파괴로 이익을 얻었다고 비난했습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보다 더 빨리 더 많은 사람을 죽이는 방법을 찾아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가 어제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사건으로 노벨은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쿠르지 영감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고 난 후 변화하게 된 똑같은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이 자신에게 묶여 있다면 여전히 죽음으로 벌어들인 돈으로 남을 것임을 깨닫습니다.
노벨은 자기 재산을 인류에 대한 긍정적인 기여에 보답하는 데 바치기로 했습니다. 그는 2,000억 정도 되는 재산으로 어떻게 세상에 지속적이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는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분야에서 업적을 이룬 개인과 조직에게 수여하는 노벨상을 제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1895년에 작성된 그의 유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남은 실현 가능 재산 전체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야 합니다. 나의 유언집행인이 안전한 증권에 투자한 자본은 기금을 구성하고, 그 이자는 매년 전년도에 인류에게 가장 큰 이익을 안겨주었을 다음과 같은 사람들에게 상금 형태로 분배되어야 합니다: 물리학, 화학, 의학, 문학, 평화.”
2,000억을 가진 부자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러나 노벨은 그 돈으로 온 인류를 먹일 방법을 찾았습니다. 알프레드 노벨의 노벨상 제정은 그의 유산을 ‘죽음의 상인’에서 ‘인류의 은인’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과 재물에 감사할 줄 알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여길 때 사람은 그것으로 세상의 배를 불리는 일에 사용하게 되고 이것은 그리스도를 닮는 일이 됩니다.
먼저 가진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물고기를 잡는 기술이든, 공부하는 기술이든, 예체능의 능력이든 그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께 그것을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그것으로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십니다. 나는 그 일의 일꾼이 됩니다. 이것으로 은총의 통로가 되고 이 은총의 통로가 됨으로써 그 은총을 주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이 때문에 5천 명을 먹이는 기적 안에서 정작 놀라는 것은 빵과 물고기를 봉헌하고 그것을 다시 나누어주는 자기 자신입니다. 하느님께서 도와주고 계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전삼용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