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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시대, 성숙한 신앙의 길,(가톨릭일꾼,가톨릭평론 2023년 여름호에서 퍼온 글)
토마시 할리크
토마시 할리크 몬시뇰은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태어나서 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사화학과 철학, 심리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영어 공부를 위해 영국 웨일즈 뱅고어 대학교에서 유학생활을 했다. 공산주의 정권 시절에는 심리치료사로 근무했으며, 1978년 동독에서 비밀리에 사제 서품을 받고 지하 교회 활동을 하면서 종교의 자유를 위한 활동을 펼쳤다.
1989년 벨벳혁명으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수립된 바츨라프 하벨 대통령의 외부 자문단, 체코 주교회의 총대리를 거쳤다. 1992년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교황청 비신자 대화 평의회(이후 문화평의회로 명칭 변경) 위원으로 임명되고 그 해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실천신학 교수 자격증을 취득했다.
옥스퍼드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초빙교수로 지내면서 현재 프라하 카를 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의 저서 가운데 <상처입은 신앙>, <신이 없는 세상>,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고해사제의 밤>, <그리스도교의 오후> 등이 분도출판사를 통해 우리말로 번역 출간되었다.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과 신을 믿지 않는 사람들 간의 대화, 저술 및 교육활동, 영적 자유와 인권보호 증진에 힘쓴 공로를 인정 받아 2010년 로마노 과르디니 상을 수상한데 이어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을 수상하면서 “사람들간의 많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템플턴 경이 이 상을 창설하게 된 정신, 바로 영성의 고양이 개인과 사회의 발전에 필수적이라는 사상”이라고 말헀다.
2023년 5월 1일부터 이틀동안 전주 치명자산 성지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샬롬문화영성강좌에서 행한 체코의 토마시 할리크(tomas Tomas Halik) 몬시뇰의 두 번째 강의 전문을 게재합니다.(번역:황경훈)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속에 살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이 말씀으로 성찰을 시작해 봅시다. 우리 시대는 자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기후변화와 정치적, 문화적, 도덕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경제적 변화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현재 변화의 속도, 범위, 깊이는 그간 확실하다고 여겨온 것들을 전반적으로 뒤엎고 있습니다 오래된 전통적인 종교적 확신이 무너진 다음에, 우리는 이제 세속적인 인본주의의 확신도 흔들리며, 제도에 대한 신뢰와 전문가의 권위가 흔들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교회, 함께 걷는 길
세상은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연결 되어 있습니다. 세계의 상호연결 과정은 역설적으로 우리를 한편으로는 우리의 차이점을 더 많이 드러냅니다. 세계화의 과정은 ‘지구촌’을 만들어 낸다기 보다는 오히려 세상의 철저한 다원성을 마주하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섞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지요.
세계화 과정의 현 위기로 인해 이제는 국가, 민족, 종교, 종교기관 사이뿐만 아니라, 그들 내부에서도 새로운 분열과 분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세대 간 격차가 커지고 있으며, 많은 곳에서 가족 내 긴장과 심지어 가족붕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세상의 다양성과 유동성에 대한 혼란과 불안이 커지면서 복잡한 질문에 대해 간단한 대답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대중영합주의, 종교적 근본주의가 확산되고 있습니다. 세계화는 상품과 정보의 빠른 교환 뿐만 아니라 감염병, 조직범죄, 테러, 폭력 등 악의 급속한 확산을 촉진했습니다.
두려움은 악의 위험한 무기입니다. 두려움 그 자체는 종종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여러분의 아름다운 나라 북쪽(북한)에는 – 그리고 그 곳뿐만 아니라 – 두려움을 일으키는 하나의 커다란 장치인 정치체제가 있으며, 두려움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노예로 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제 인생의 대부분을 공산 정권하에서 살았기 때문에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잘 압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침략은 세상의 변방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지역 분쟁일뿐만 아니라, 세계 경제, 정치, 사회, 도덕에 영향을 줄 것입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와 충분한 연대를 보여주지 않고 러시아의 침략을 막을 수 없다면, 민주주의 세계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지고, 전 세계의 모든 독재자와 침략자들이 대담해질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제3차 세계대전’에 대해 오랫동안 언급해 왔습니다. 소련 공산주의가 무너진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 초강대국간의 냉전이 다시 돌아와 세계 곳곳에서 유혈충돌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베드로 성인이 탔던 배, 그 교회도 수 많은 폭풍에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계속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믿음이 없느냐?” 히브리 성경(구약)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하느님의 부르심과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첫 번째 과제는 이러한 말씀을 선포하고, 두려움과 절망을 마주하여서도 쓰러지지 않고 이 말씀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믿음, 살아 있고, 깊고, 성숙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성숙한 믿음은 단지 ‘교리’나 예식, 또는 관습의 쳬계 그 이상입니다. 그리스도는 ‘교리’를 제시하기 위햬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 다른 사람들, 사회, 자연환경, 그리고 하느님과의 모든 관계를 비롯해 우리의 인간성, 인간됨의 방식을 변화시키도록 끊임없이 배우는 여정을 위애 오셨습니다.
교회사 초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가 무엇인지, 그것이 새로운 종교인지 새로운 철학인지 질문을 받을 때 , 그들은 “길 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나는 길이요” 라고 말씀하신 분을 따르는 길 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역사를 통틀어, 특히 위기의 시기에 이렇듯 역동적인 신앙과 교회의 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어 왔습니다. 심각한 여러 위기를 맞고 있는 우리 시대에 프란치스코 교종은 교회를 “함께 걷는 길”(SYN-HODOS), 시노드 형태의 교회로 쇄신할 필요성을 선언합니다.
교회, 제도적이고 민주적이며 카리스마적인
프란치스코 교종은 거의 매일 ‘시노달리타스’에 관해 이야기합니다. 모든 국가와 모든 대륙의 지역 교회에서 시노드 모임이 있으며, 올해와 내년에 세계 주교들이 참가하는 로마 시노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모든 수준에서 열리는 시노드 모임은 신앙 경험을 솔직하게 나누고, 서로의 말을 경청하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상호 경청을 통해 오늘날 교회에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경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또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시대의 징표’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사건에 대한 관상적 접근을 배워야 하며 ‘영적 식별’의 기술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소셜미디어, 신문,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세상의 이미지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종종 피상적이며, 때로는 이념적이고 상업적인 이익으로 채색되기도 합니다. 묵상과 관상의 실천은 우리가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하느님의 언어인 ‘시대의 징표’ 를 변화하는 ‘시대정신’, 여론, 광고, ‘가짜뉴스’, 편견 등과 구별할 수 있게 해줍니다. 세상의 소음 속에서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 예언직을 보여주기를 당연히 기대합니다. 예언자의 역할은 성령의 지혜로 현재의 사건들을 해석하여 두려움을 정복하고 희망을 전하는 것입니다.
수세기 동안 종교 공동체는 치유하는 희망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가톨릭공동체를 포함하여 세계의 많은 종교가 확실성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신앙에 무관심해지거나 교회를 떠납니까? 서로의 말을 경청하는 시노드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따르면, 많은 곳에서 교회는 ‘성직주의‘라는 질병의 공격을 받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여 교회를 엄격한 관료적 권력기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교회에서 권력과 권위의 남용은 성직자에 의한 성적, 심리적, 영적 학대 추문에서 특히 그 폐해가 컸습니다.
시노드의 개혁은 교회의 다른 형태, 즉 상호 의사소통 관계망으로서의 교회로 이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과의 소통을 심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서 주교, 사제, 평신도, 사이의 소통이 깊어지고, 여성과 청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그런 다음 다른 이들과의 소통, 즉 다른 그리스도인 다른 종교와 문화와의 형제적 대화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교회는 제도적이고 민주적이며 카리스마적인 요소로 구성된 한 편의 교향곡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 각각이 다 소중합니다.
교회,경계를 넘어 환대하는
신학적으로 말해서 그리도인의 역할은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부활을 목겨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의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시다는 것을 자기 삶의 방식으로 증거하는 것입니다. 빈 무덤에서 천사들이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라고 묻습니다.우리는 과거에서 예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서, 우리의 삶에서, 세상에서 살고 계신 그 분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교를 미완의 진행중인 이야기로 이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복음서의 이야기에도 해당하며, 교회의 역사에도 해당하고, 육체적 죽음으로도 끝나지 않는 우리의 개인적 삶의 이야기에도 해당합니다. 교회의 신앙과 우리 개인의 신앙이 움직이고 성장하고 성숙하고 깊어지는지, 그 여부로 그리스도께서 그분 교회의 신앙과 우리 개인의 신앙 안에서 살아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고유하지만, 진행중인 과정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신앙과 수많은 표현들 즉 성사와 전례, 신앙에 관한 강론 안에 살아 계십니다. 또한 도움이 필요한 모든 이들에게 행하는 그리스도인의 봉사 안에서 살아계시며 활동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경계를 넘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안에 사시기 때문입니다.
교종에 선출되기 전에 베르고글리오 추기경은 “예수님께서 문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예수께서 안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나가고자 하시므로 우리는 그분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현재의 정신적 제도적 경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종에 따르면 교회는 개방되어야 하며(열린교회), 환대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종 베네딕토 16세는 교회가 예루살렘 성전처럼 ‘영적구도자’를 위해 ‘경건한 이교도’를 위한 공간인 ‘이방인들의 안뜰’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표명했습니다. 종파(sects)는 철저하게 준수하고 헌신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이지만, 교회는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그리스도에 어느 정도 친근함을 느끼는 사람들, 즉 영적 구도자를 위한 공간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신학자중 한 사람인 '칼 라너'는 그들을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분은제자들에게 혁명주의자들과 종교재판관의 광적인 태도, 최후 심판의 천사 역할을 하며 밀과 가라지를 너무 일찍 가려내려는 시도를 주의하라고 이르셨습니다. 심지어 아우구스티누스 성인도 자신이 밖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많은 이가 사실은 안에 있고, 자신이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중 많은 이가 사실은 밖에 있다고 주장헀습니다.
다 걷지 못한, 길위에 있는 교회
교회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만, 교회가 어디에 있지 않은지는 모릅니다.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보면 교회는 수많은 종교기관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교회는 그 이상입니다. 즉 우리는 교회가 신비요, 성사이며, 표징(signum)이라는 것, 곧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인류가 일치하는 표징이라는 것을 믿고 고백합니다. 교회는 역동적인 성사이며, 그 목표를 향한 길 입니다.
전 인류 가족의 전체적인 하나됨은 역사의 끝에서야 비로서 완전히 실천될 수 있는 종말론적인 목표입니다. 그때에야만 교회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하나이고, 거룩하며, 보편적이고 사도적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만 우리는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완전히 보고 비추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과제는 이 목표에 대한 열망이 인간의 마음속에 항상 존재하도록 유지하고, 동시에 어떤 형태나 상태의 교회나 사회이든 간에, 또 어떠한 종교적 철학적, 과학적 지식이든 간에 이를 최종적이고 완전한 것으로서 간주하려는 유혹을 뿌리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교회의 구체적인 형태와 종말론적인 형태를 항상 구별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길위에 있는 교회(ecclesia viatrix), 전투중인 교회(ecclesia militans)를 개선하는 교회(ecclesia triumphans)와 구별해야 합니다.
역사 한가운데 있는 교회를 완전한 승리의 교회(ecclesia triunphans)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형태의 우상숭배인 승리주의로 귀결됩니다. 더욱이 ‘투쟁중인 교회(ecclesia militans)’는 승리주의 의 유혹에 저항하지 않으면 죄 많은 호전적 기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이런 일이 반복되었슴을 겸허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비극적인 경험은 이제 교회의 사명이 영적 영감과 변화의 원천이 되어 모든 인간의 양심의 자유를 온전히 존중하고 어떠한 무력의 사용, 어떠한 형태의 조작도 거부하는 것임을 굳게 확신하게 합니다.
선교는 교회의 영원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선교는 사람들을 교회의 기존 정신적, 제도적 경계안으로 밀어 넣는 노력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경계를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의 경험으로 교회를 풍요롭게 해야 합니다. 선교는 일방적인 과정으로 이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상호 이해를 추구하는 탐구, 대화정신을 동반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진리의 주인’이라는 자만과 오만함으로 다른이들에게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진리는 우리 중 누구도 아직 끝까지 읽지 못한 책입니다. 우리는 진리의 주인이 아니라, 진리에 봉사하고, 사랑하는 자이며, “나는 진리다.”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을 사랑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은 “진리가 무엇이오?” 라는 빌라도의 질문에, 이론이나 이념, 혹은 진리에 대한 개념으로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모든 교리와 이념을 초월하는 진리를 증언하셨습니다. 그분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살아있고 인격적인 진리를 드러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나는 진리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생명이다.” 살아있지 않고 길이 아닌 진리는, 이념에 더 가깝고 이론에 불과할 것입니다. 올바른 교리(orthodoxy, 正敎)는 올바른 실천(orthophraxy, 正行)인 올바른 행동과 결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리안에서 사는 삶의 더 깊은 세번째 차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올바른 체험(orthopathy, 正感), 올바른 열정과 열망, 내면의 경험, 곧 영성입니다.
무엇보다도 성령께서 우리에게 점진적으로 진리의 전체성을 만나게 해주시는 것은 개별신자들과 교회 전체의 영적 체험인 영성을 통해서 입니다.
교회 개혁 영성을 바탕으로
성령은 우리 안에서 신앙의 본질적인 깊이의 차원인 영성,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내적 삶을 발전시키는 내면의 스승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우리는 바오로 사도가 증언한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안에 사는 것입니다.”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같은) 위대한 그리스도교 영적 스승들은 피상적인 ‘겉 사람’은 ‘외부의 신’을 가지고 있는 반면, ‘속 사람’은 ‘내면의 신’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한 피상적이고 외적인 종교는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와 같은 무신론자들에게 마땅히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기적 자아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이해타산에만 머무는 사람은 미성숙한 사람이고 성숙한 신앙에 이르기 어렵습니다. 오직 내적으로 자유로운 사람만이 (물질적이 부와 권력과 같은) 외적인 것에 대한 의존에서 벗어나 있을 때만, 유아적 환상에서 해방된 진정한 하느님, “벌거벗은 신”을 만날 수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자신의 이기심을 넘어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초월 경험을 의미하며, 타인에 대한 개방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서 살고 활동하실 수 있는 공간을 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개인적인 삶뿐 아니라 교회의 삶에도 적용됩니다. 교회가 자기 중심성, 즉 ‘집단적 나르시즘’에서 빠져서 자신만 돌보고 두려움에 빠지면, 살아계신 그리스도께 문을 닫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족적인 형태의 교회는 신뢰성과 생명력을 잃고 죽게 됩니다.
현재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시노드 개혁의 목적은, 교회의 제도적 구조를 새롭게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든 개혁에는 신앙생활의 쇄신, 특히 그 깊은 차원인 영성를 심화 시키는 일이 선행되거나 병행되어야 합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신앙의 삶은 끊임없이 계속되는 부활 사건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그리스도교는 움직이고 있고, 되어가고 있고,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종말론적 완성을 향한 길에 있을 뿐입니다.
성숙한 신앙를 위한 정직한 의심
우리의 믿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성숙할 것입니다.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들을 점차 진리의 충만함으로 인도할 협조자 성령을 약속하셨습니다. 여러 차례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지만 나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인내해야 합니다. 진리는 개별 신자의 삶과 교회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역동적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린이를 예로 드실 때, 우리가 어린이로 남아 있어야 한다거나 우리의 종교가 유아적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개방적이고 위선적이지 않으며 꾸밈이 없다는 점에서, 또 궁금해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능력이라는 점에서, 어린이를 닮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춘기 때어린시절의 신앙에 대한 위기가 닥치는 것은 당연하며, 어린이의 신발을 신을 수 없듯이, 그때의 신앙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성숙한 신앙, 즉 비판적 사고와 의심을 소화시킬 수 있는 신앙을 깊게 하는 것이 매우 필요합니다. 신앙은 신비의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입니다. 신앙의 신비는 수학적 확신이 아니며, 우리가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도달하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믿는 용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직한 의심은 신앙의 유익한 자매가 될 수 있으며, 신앙의 길에서 서로를 보완해 줄 수 있습니다. 의심과 자유로운 질문이 없는 믿음은 근본주의와 편견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자신의 의심을 의심해 볼 능력도 없고 믿을 용기도 없이 의심하는 사람은 씁쓸하고 냉소적인 실용주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의 길에는 위기,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는 어두운 골짜기를 지나는 좁은 길, 하느님의 침묵도 포함됩니다. 많은 신비가 말하는 개인적인 ‘어두운 밤’외에도, 집단적인 어두운 밤도 있습니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분도, 2016)이라는 책에서 저는 개인적이 삶과 교회의 세상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침묵’의 시대에 대한, 성숙한 반응과 미성숙한 반응에 관해 썼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에 대한 미성숙하고 참을성 없는 반응은 무신론으로서, 그것은 이 경험을 하느님의 부재 또는 ‘신의 죽음’으로 해석합니다. 근본주의자나 광적인 종교인들은 낡은 이론이나 격정에 취해 ‘알렐루야’를 반복함으로써, 하느님의 고요한 선율인 침묵위에 소리를 내지르며 무신론과 비슷하게 피상적으로 반응합니다. 희망과 사랑이 결합된 성숙한 신앙만이 인내의 시험을 견딜 수 있습니다. 인내는 참된 사랑, 참된 희망, 참된 신앙에 필수적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오후
이번에 한국어로 출간된 <그리스도교의 오후>(분도, 2023)에서 저는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신앙의 성숙에 관해 썼습니다. 신앙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는 단순하거나 일방적인 진보가 아닙니다. 빛과 어두움, 거룩함과 죄가 그 안에 섞여 있습니다.
저는 분석심리학의 창시자인 융(C. G. Jung)이 개인 삶의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한 은유에서 영감을 받아 ‘오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인생의 아침은 사람들이 자기 성격의 기본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고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는 청소년기와 초기 성인기 입니다. 그리고 ‘정오’의 위기인 중년의 위기가 옵니다. 피로, 졸음, 에너지 손실 또는 ‘소진(burn-out) 증후군’의 시작입니다. 위기는 우리의 건강, 직업, 파트너십, 신앙 그리고 영적인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성숙기와 노년기인 인생의 오후는 평생의 성숙과정을 완성할 수 있는 기회이며, 우리의 내면적이고 영적인 삶을 발전시키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있습니다. 경력과 부를 쌓는 것과 같은 ‘아침 활동’만 계속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완고해지고, 불안해 하고, 우울해지는 ‘나쁜 노화’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은유를 그리스도교 역사에 적용하고저 합니다. 근대 이전의 시대는 ‘아침’으로, 교회가 제도적이고 교리적인 구조를 구축한 시기입니다. 그리고 정오 위기가 왔는데, 종교개혁에서 계몽주의에 이르기까지, 무신론의 부상에서 종교적 무관심에 이르기까지 근대에 이르러 이러한 구조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풍토의 변화인 세속화는 종말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변모를 가져왔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 역사에서 ‘오후’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더 성숙한 그리스도교로 더 깊이 나아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수 많은 새로운 길이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리스도교의 역동적인 특성을 되살리고 심화시킬 때입니다.
그 이름에 걸맞은 진정한 ‘새로운 복음화’는 오늘날 새로운 과제를 안고 있는데, 살아 계시고 부활하시며 변모시키시는, 보편적인 그리스도를 찾는 것입니다. 그분의 위대하심은 종종 우리 시야의 한계, 너무나도 좁은 관점과 지적 범주에 가려져 있습니다. 우리의 많은 개념, 생각과 기대, 많은 형태의 신앙, 많은 형태의 교회와 신학은 사라져야 합니다.
그것은 너무 비좁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아브라함처럼 미지의 길을 따라 알지 못하는 미래로 모험을 떠나기 위해서, 두려움과 용기 부족으로 쌓은 벽을 넘어야 합니다.
우리는 많은 변화와 위기로 둘러싸인 도전적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기는 가능성이자 기회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성숙해지는 것은 위기를 통해서이며, 성숙한 신앙만이 이 시대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본 강의 내용은 가톨릭평론 제40호, 2023년 여름호에 실린 내용과 같은 내용이며, 황경훈 바오로 형제님의 번역임을 밝힙니다. 또한 가톨릭평론에 실린 내용도 개재할 예정입니다. 가톨릭일꾼 한상봉 편집인과 가톨릭평론 연구소장 이미영자매님의 동의를 구해서 개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