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지역 연고 학교중에 맨 먼저 기사가 올랐네여..
올해에도 충청지역 학교들이 좋은 성적을 올리기를..
[명가를 찾아서] 천안 북일고
76년 개교한 천안북일고가 명문 고등학교로 이름을 얻은 데는 야구의 힘이 컸다.창단 이듬해인 78년부터 전국대회 4강권을 드나들며 교명을 전국에 떨 치기 시작했다.
인문계 고교임에도 입시성적 이상으로 야구에 많은 애정을 쏟고 있는 것도 그래서다.그런 노력이 결실을 보며 학교와 동문 사이에서는 ‘야구성적이 좋은 해에는 입시성적도 좋다’는 것이 정설이 됐다.
동문들의 모교사랑도 야구를 연결고리로 표현된다.99년 봉황기대회 결승전 에 근래 보기 드물게 동대문운동장에 1만명이 넘는 동문이 몰려든 것이 훌륭 한 방증이다.
북일 야구부는 창단 초기부터 화제였다.화약으로 기업을 일으킨 김종희씨( 한화그룹 설립자·작고)의 아낌없는 지원 때문이었다.일체의 회비를 걷지 않 고 오로지 재단 출연금으로만 야구부를 운영했고 창단 2년째인 78년에는 전 용구장을 만들었다.옛 모습 그대로인 야구장이 오는 10월 천안 전국체전의 공식 경기장으로 사용될 정도다.
좌우 펜스까지 98m,중앙까지는 110m로 공식경기를 치르는 데 부족함이 없 다.외야에 잔디까지 깔아놓은 북일고 야구장은 당시만 해도 그야말로 ‘꿈의 구장’이었다.
김씨가 이렇게 야구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두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 다.76년 개교기념식에 축하사절로 참석한 당시 슈나이더 미국 대사,스틸웰 미8군사령관 등이 야구용품을 지원한 것이 첫번째였다.
결정적인 계기는 화약으로 기업을 일으킨 김종희씨가 사업차 LA를 방문한 것이었다.우연히 들른 다저스타디움의 귀빈석에 자리잡은 김씨를 장내 아나 운서가 “한국에서 온 다이너마이트 김”이라고 소개했다.
아름다운 녹색 다이아몬드에서 펼치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와 팬들의 뜨거 운 반응을 몸소 체험한 김씨는 야구를 교기로 삼기로 마음을 굳혔다.
첫해에는 인근에서 선수들을 수급할 수 없어 75년 중학대회를 제패한 춘천 중 선수들을 주축으로 선수들을 끌어모아 77년 창단식을 했다.
이후 풍부한 재단의 지원을 발판삼아 전국적으로 우수선수들을 스카우트하 며 순식간에 고교무대의 새로운 강자로 자리잡았다.그렇게 모인 선수들이 OB 에서 활약한 김진욱(현 구리 인창고 감독),한화 이상군 코치,김상국 북일고 감독 등이다.
이들은 80년 봉황기 우승을 시작으로 북일고 야구의 첫 전성기를 화려하게 장식했고 이제는 지도자로 북일의 새로운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
진정필 구동우 지연규 양용모 김종훈 김정민 심성보 임재철 한화의 차세대 에이스로 인정받은 조규수가 그 뒤를 받치며 전국대회 14회 우승이라는 명 예를 쌓았다.
창단 초기에는 여건이 좋아 전국적인 스카우트가 가능했다.그러나 80년대 초반 고교 야구에 지역연고가 도입돼 북일고에 입학한 이성근(현 삼성 스카 우트) 등 유망주들을 연고지역으로 되돌려보내는 아픔을 겪었다.
대전이 광역시로 승격되면서 충남지역과 분리된 것은 결정타였다.당시 대 전을 제외하면 충남지역에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공주중이 유일했다.
학교측에서는 천안북중 태안중 천안남산초등 온양온천초등 태안초등 합덕 초등학교 등 6개교의 창단을 지원하며 적극적인 선수 발굴에 나섰다.IMF체제 의 경제 한파로 재단 지원금이 줄어든 것도 야구부 활동을 위축했지만 끝내 학부모의 손을 빌리지 않았다.
학부모의 입김에서 완전히 벗어난 덕분에 아마추어 야구계를 좀먹는 ‘성 적지상주의’의 폐해도 입지 않았다.창단작업 때부터 야구부 운영에 관여한 이창욱 교장이 수시로 강조하는 것도 이 부분이다.
“아름다운 패배는 훌륭한 교육”이라고 말한다.고교 시절은 앞으로 인생 을 설계하는 단계이므로 완성품을 요구하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대신 이기더라도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거나 ‘최고를 자랑하 는 북일인’이라는 모토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호 통이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