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李滉)
조선 중기 주자성리학을 심화, 발전시킨
조선의 유학자.
시호는 문순(文純),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 퇴도, 도수이며
1548년
단양군수, 풍기군수를 지내다가
이듬해 병을 얻어
퇴계의 서쪽에 한서암을 짓고 공부했다.
이후 성균관대사성으로 임명되고
여러 차례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퇴했다.
1560년
도산서당을 짓고
독서, 수양에 전념하면서
많은 제자를 길렀다.
선조에게 '무진육조소'를 올리고
'사잠', '어집주', '주역' 등을 진강했으며
'성학십도'를 저술해 바쳤다.
이듬해 낙향했다가 병이 깊어져
70세의 나이로 죽었다.
지적장애 아내를
평생 사랑으로 보살핀 퇴계 이황
우린 누구나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인생을 살아간다.
물론 날이 갈수록
독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일정한 나이가 되면
결혼해서 부부가 되어 살아간다.
인생이란 거친 세상을
혼자서 살아가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부부란 대체 무엇이고
어떻게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다들 별다른 마음의 준비 없이
결혼하여 숱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부부생활을 해나간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부부이야기,
특히 부부사랑에 대해 듣게 된다면
좀더 지혜롭게 부부생활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퇴계 이황의 부부 사랑법에
대해 들어보자.
다들 퇴계를 조선의 성리학을
정립시킨 분으로,
엄숙한 유학자처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의외로 개방적이요
인간적인 분이었다.
특히 재혼할 때
상대방이 정신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고도
받아들였고,
결혼한 후에도
그런 부인을 끔찍하게 챙긴 ‘애처가’였다.
그는 바로 높은 학문에다
덕(德), 즉 어진 인품까지 갖춘
이른바 ‘군자(君子)’였던 것이다.
퇴계는 두 번 장가를 갔다.
첫 번째 부인인 김해 허씨는
아들 둘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 못하여
일찍 죽고 말았다.
그의 나이 31살에
둘째 부인인 안동 권씨와 재혼했는데,
권씨는 정신이 혼미한
지적장애를 갖고 있었다.
전해오는 말로는
당시 안동으로 귀양을 온
권질이 찾아와
과년한 딸이 정신이 혼미하여
아직도 출가하지 못 했다면서
맡아줄 것을 부탁하자,
퇴계가 별다른 거리낌 없이
승낙했다고 한다.
그만큼 퇴계는 국량이 넓은 분이었고,
장애에 대한 편견이나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이다.
결혼 후 권씨는
여러 가지 실수를 범했지만,
퇴계는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인내심으로 포용하여
부부의 도리를 다했다.
한번은 온 식구가 분주하게
제사상을 차리는 도중
상 위에서 배가 하나 떨어졌다.
권씨는 얼른 그것을 집어
치마 속에 감추었다.
퇴계의 큰형수가 그것을 보고 나무랐다.
“동서, 제사상을 차리다가
제물이 떨어지는 것은
우리들의 정성이 부족해서라네.
근데 그걸 집어 치마 속에
감추면 쓰겠는가?”
방안에 있던 퇴계가
그 소리를 듣고 밖으로
나와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수님.
앞으로는 더욱 잘 가르치겠습니다.
조상님께서도 손자 며느리의 잘못이니
귀엽게 보시고
화를 내시진 않을 듯합니다.”
그러자 큰형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동서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일세.
서방님 같은 좋은 분을 만났으니 말야.”
얼마 후 퇴계가 아내 권씨를 따로 불러
치마 속에 배를 감춘 이유를 물었다.
권씨가 먹고 싶어서 그랬다고 하자,
퇴계는 그 배를 손수
깎아주었다고 한다.
또 하루는 권씨가
흰 두루마기를 다림질하다가
조금 태우고서는,
하필 붉은 천을 대고 기웠다.
그럼에도 퇴계는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히 입고 외출을 했다.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경망스럽다고 탓하자,
퇴계가 웃으면서 말했다.
“허허, 모르는 소리 말게.
붉은색은 잡귀를 쫓고
복을 부르는 것이라네.
우리 부인이 좋은 일이 생기라고
해준 것인데
어찌 이상하단 말인가.”
이렇듯 퇴계는
권씨의 잘못을 탓하지 않고
사랑과 배려로 감싸주며 살아갔다.
그 후 권씨가 세상을 떠나자,
퇴계는 전처소생의 두 아들에게
친어머니와 같이
시묘살이를 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권씨의 묘소 건너편 바위 곁에
양진암을 짓고
1년 넘게 머무르면서
아내의 넋을 위로해주었다.
부모도 아닌 아내의 죽음에
시묘살이를 한 경우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별이 빛나는 밤에
[노트]
퇴계 이황은
자신의 딸을 거두어 달라는
스승의 청을 받아들여
어린아이 같은 아내를 감싸 주며
평생 남편의 도리를 다했다.
한번은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제자가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편지를 써 주며 말했다.
"편지를 여기서도,
집에 들어가서도 말고
사립문 앞에서 읽게."
제자는 의아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스승의 말대로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사립문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와,
이황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깨달은 것이 쓰였다.
"사립문은 가정과 세상의 경계지점이네.
가정은 세상의 가치가 적용되지 않는
또 다른 세상이지.
사립문 앞에서
마음을 정화하고 들어가야 하네.
이것이 내가 사립문 앞에서
편지를 읽으라고 한 이유네."
재경구구회 호당 김건우 동문이
단톡방에 올린 글 편집
청산 노승렬
첫댓글 부부애에 관해서 유익한 글을 올려 주셨네요.
'사립문은 가정과 세상의 경계지점이네.'
노년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는 부부애를 ....
과연 군자답습니다.^^
권질은 퇴계 이황의 은사였습니다. 은사의 따님이니까 집안은 믿을 수 있었겠지요. 그래도 지적장애 내지 저능아로 보이는데도 생을 다할 때까지는 물론이고 사후 장례 및 시묘까지 아내를 위했으니 훌륭한 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