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
찬미 예수님!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부활의 기쁨을 잘 누리고 계신가요?
이제 부활 팔부는 오늘로 끝이 나지만
부활의 기쁨은 계속 누리시길 기도드립니다.
올해는 부활을 얼마나 정신 없이 지냈는지
지내고 나서 보니까 부활 메일도 못 올려드렸더군요. ㅠㅠ
죄송합니다.
늦게 나마(오늘까지는 부활 팔부니까 ^^*)
부활을 축하드리고
부활하신 주니의 선물인 평화가
여러분의 가정에 충만하길 기도드립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의 다섯 손가락은 각각 쓰이는 곳이 있습니다.
엄지는 자신을 위한 것인데 권위를 나타내죠.
그래서 지장을 찍는다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거는 것입니다.
검지는 다른 사람을 위한 것입니다.
주로 무엇을 가리킬 때 사용합니다.
중지는 어디에 써나요?
잘 모르겟어요.
외국인들은 욕을 할 때 사용하죠.
약지는 약손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할만큼
귀중한 것을 지니는 손가락입니다.
새끼손가락은 관계를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할 때는 새끼 손가락으로 하죠?
손가락을 쓸 곳에 잘 써야지 잘못 사용하면 곤란을 당합니다.
예를 들면 주먹을 쥐고 '내 탓이오’하며 가슴을 치면
손가락 다섯 개가 모두 일치합니다.
그런데 '네 탓이다!’하고 상대방에게 손가락질을 하면
검지 하나는 상대방을 가리키지만
엄지는 하늘을 가리키며 하느님을 원망하는 것이 되고
나머지 세 개는 오히려 나를 가리키면서 내 탓이라고 외칩니다.
형제 자매님,
로마에 가면 santa croce성당 곧 성 십자가 성당이 있습니다.
그 곳에는 십자가와 관련된 아주 귀중한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는데
성광 모양의 보관대가 여러 개 있습니다.
그중 가운데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달았던 죄목의 일부분이 보관되어 있고,
오른 쪽에는 예수님의 머리에 박혔던 가시 두 개와
손에 박았던 못 조각이 있습니다.
그리고 왼쪽에는 조금 이상한 것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람의 손가락이 하나 보관되어 있는데
바로 ‘토마스 사도의 검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못자국에 넣어 보겠다던 손가락입니다.
진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손가락을 한 번 잘못 사용하려다가 지금까지 고생하고 계십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 복음은 잘 믿지 못하는 토마스 사도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지켜본 제자들은
자신들도 똑 같은 운명에 처해질 것을 몹시 두려워하여
문을 꼭꼭 닫아걸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께서 닫힌 문으로 들어오십니다.
예수께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를 하셨지만
제자들은 유령이 나타난 줄 알고 두려움이 더욱 커졌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분명히 손의 못 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의 상처를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너무 기뻐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임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요한 복음사가는 이 짧은 이야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두 가지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꼭꼭 잠긴 문으로 들어오셨듯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영화로운 몸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제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분을 속박할 수가 없습니다.
즉 온전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몸입니다.
둘째로, 영화로운 몸이지만 여전히 상처가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지상의 삶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지상 삶의 결과가 부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의 인격이 그대로 유지되는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지상에서 맺는 관계와 행하는 일들이
죽음 후에도 여전히 의미를 지닌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신앙을 받아들인다면
이해할 수 없고 무의미하게 여겨지는 세상의 고통 중에서도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자
제자들의 두려움이 기쁨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다시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하고 인사하십니다.
평화는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가장 큰 선물입니다.
그 평화는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을 통해서 성취한 평화이기에
세상의 모든 고통을 극복하는 평화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인간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죽음을 이겨내고
성취한 평화이기에 세상의 모든 두려움을 이기는 평화입니다.
형제 자매님,
그런데 이 평화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의 평화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성령을 주시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셨음을 전하며
그들이 처음 부활의 소식을 전한 토마스 사도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기쁨이 충만한 다른 제자들로부터
부활 소식을 들었지만 자신이 직접 체험해야 믿을 수 있다고 반박합니다.
토마스는 의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경험을 추구하는 사람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들어오셨습니다.
그런데 토마스는 막상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는
직접 만져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만 듣고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믿지 못하겠다고 말했던 토마사도가 발한 신앙고백은
복음서 안에서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입니다.
누구도 부활하신 주님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여드레 뒤’라는 말입니다.
즉 다시 모인 사람들은 한 주일이 지나고 다시 주일이 되어
전례를 거행하기 위해서 모인 공동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의 토마스는 바로 나 자신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체험하지 못하고
사도들 곧 교회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 받은 사람,
믿기는 하지만 완전히 믿지를 못하고 의구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람이 토마스요 나 자신입니다.
그런데 복음사가는 그런 사람이 교회의 전례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전례 특히 미사성제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곧
그분의 파스카 제사를 성사적으로 시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세상이 주는 두려움 때문에
굳게 닫아 버린 마음의 문을 열고 전례에 참여할 때
그 안에서 우리를 찾아 주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그때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사도들과 똑같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백할 때
우리도 사도들이 누리던 그 평화를 누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이 가져다 준 것이고,
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것이기에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앗아갈 수 없는 고귀한 선물입니다.
다만 내가 부활에 대한 확신을 잃어버릴 때,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살지 못할 때 스스로 잃어버리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오늘 미사를 봉헌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체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이 말씀을 새겨주실 것입니다.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너는 행복하다!”
대구대교구 산격성당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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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아멘
예수님의 생명이 죽음을 이기셨네요.
하느님찬미뫄 영광받으소서! 아멘!
아멘!
예수님 부활 축하드립니다~!! 알렐루야!알렐루야!
감사 합니다~1
아~멘!
아멘
아~멘
아 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