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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수
평소 비교적 자주 사용하는 두 단어를 꼽으라면 ‘오늘’과 ‘역사’일 것이다. 어쩌면 말본새를 가리는 버릇 때문에 거창한 개념조차 너무 쉽게 사용하는 우(遇)를 저지르며 살지 않았나 싶다. 그런 이유로 일상의 가벼움과 삶의 무게감을 언뜻언뜻 혼동하며 살았다. 주변을 돌아보면 일상에도 천근같은 무게감이 있고, 역사 한복판에서 새털같이 가벼운 처신 역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허긴 그런 소박한 고집조차 없었다면 별난 고민없이 세상과 밀착하며 살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지난 금요일에 만난 고(故) 김영수 목사(1946-1984)는 일상을 참으로 무겁게, 그리고 역사를 더더욱 막중하게 바라보면 살았던 분이다. 오래도록 잊혀져 아예 누군들 기억하랴 싶었는데, 40주기 추모기도회라니, 그의 죽음은 기억의 긴 어둠에서 마침내 부활한 셈이다. 이를 사회적 복기(復碁)라고 할 수 있겠다.
꽤 오래 전에 5월을 기념하기 위해 몇몇이 어울려 광주 망월동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미 정부주관 행사는 마쳤고, 자유롭게 묘역을 돌아볼 수 있었다. 몇몇 유명 인사의 묘비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소한 이름들이다. 그 중에 임기윤 목사와 청년 김의기도 존재하였다. 감리교인 순교자들이다. 일제강점기에 활발했던 감리교인의 역사참여와 수난의 삶에 비해, 현대사에서 역할은 아주 미미했기에 두 분의 묘석은 더욱 눈에 띄게 반가웠다.
그런데 동행한 친구들은 ‘겨우’ 10여 년 정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두 인물에 대해 알지 못하였다. 약간 무참해졌다. 선배된 입장에서 반성하는 마음이 들었다. 오늘과 역사는 둘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 말이 두루 적용될 일은 아니었다. 오늘과 역사 사이는 아주 먼 간격으로 떨어져 있었다. 그렇게 1980년대는 누군가에게는 가슴 높이에 있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아예 시선에서 가려져 있었다.
물론 고 김영수 목사 40주기는 예외여서 오늘과 역사의 간격을 좁혀 준 실례였다. 참석자들은 40년 전 역사적 인물을 오늘의 김영수로 불러냈다. 추모사를 하던 이들은 저마다 엊그제 일처럼 생생하게 그를 기억하고, 소환하였다. 강화경찰서 유치장에 갇혀있던 그를, 감신대 잔디밭에서 잔잔히 대화를 주도하는 그를, 서탄교회 소년소녀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던 그를 회상하였다. 물론 그 가운데 오롯이 아픔을 감싸온 아내와 두 딸이 있었다.
목사 김영수는 임기윤, 김의기 두 순교자와 함께 1980년을 대표하는 감리교인 순난자(殉難者)이다. 5월 광주를 현장에서 목격한 청년 김의기는 국민의 눈을 가리는 거짓 뉴스의 홍수 속에서 광주의 진실을 몸으로 증언하다가 쫓겨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추락하였다(1980.5.30.). 결국 ‘죽음’, 아닌 ‘죽임’으로 웅변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에서 비밀리에 그가 뿌린 유인물 ‘동포에게 드리는 글’이 배포되었고, 김영수는 동대문교회 야학 사무실에서 유서같은 무거움으로 전달받았다. 재건중학교 교감직을 마치고, 강화도 창후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하던 중 잠시 방문한 자리였다.
의분은 김의기에서 김영수로 이어졌다. 김영수 전도사는 강화도 청년연합회 행사에서 등사본을 배포하고 낭독했다는 이유로 ‘계엄법’으로 구속되었다. 무시무시한 죄명 ‘국가원수 모독과 비방죄’가 덧붙여졌다. 수도군단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불의에 맞선 항거는 계속 이어졌다. 광주의 5월이 역사로 굳어가던 즈음, 김영수에게 5월은 여전한 오늘이었다. 그는 일상에서 번번이 비장한 태도로 불한당 세력과 맞섰다.
예비군 훈련 거부 양심선언(1980.5.31)은 그가 맞이한 오늘의 무게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역사를 운운하기에 앞서 일상적인 저항을 한 셈이다.
“2533 부대장 귀하 ... 오늘의 군은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비상계엄을 확대하여 국민을 억압하고 구속하며 심지어 선량한 시민을 향해 총과 칼을 서슴없이 휘두르고 있습니다. 이는 군을 사랑하고 지원하는 나라의 주인에 대한 일대 배반 행위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본인은 비상계엄이 철폐되고 수많은 민주인사가 석방되며 광주사태의 책임을 지고 관계 군 지휘관과 군 통수권자가 물러나지 않는 이상 어떠한 훈련에도 응할 수 없음을 천명하오니 이에 귀하가 발부한 예비군 훈련소집 통지서를 반납하오니 선처바랍니다.”
시대의 생채기는 너무나 거칠었다. 결국 그는 급성백혈병을 진단받은 후 5개월 만에 순직하였다. 1984년 3월 17일로, 38세가 채 못되었다. 사순절의 깊은 시간을 보내는 지금, 김영수의 무거운 오늘과 더 묵직한 역사가 아프게 다가온다.
“오늘 우리는 김영수 목사님의 40주기 추모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김영수 목사님을 그냥 기리는 일이라면 오늘 추모예배가 의미하는 많은 부분을 놓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예수께서 펼쳐 보이신 하나님 나라 운동 안에서 김영수 목사님이 우리에게 남겨준 모본을 우리 역시 학습하고 실천해야만 반듯한 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래서도 오늘 이 추모예배가 저를 포함, 이곳에 참집한 우리 모두에게 빈곤한 실천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자성하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이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