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 연혁
김포(金浦)는 경기도 서쪽 한강(漢江) 하구에 위치한 옛 김포군 지역의 이름이다. 고구려 때 김포는 검포현이라 하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김포로 고쳐져 장제군(長堤郡: 富平)의 영현이 되었다. 1172년(고려 명종 2)에 분리되어 감무를 두었으며, 1198년(신종 1)에 이르러 왕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현으로 승격하였다.
1414년(태종 14)에 양천(陽川)을 합하여 금양현이라 하였고, 나중에 다시 양천은 금천에, 김포는 부평부에 합하였다가 1416년에는 다시 현으로 복귀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인조의 생부(生父) 원종(元宗)의 능인 장릉(章陵)을 양주로부터 이장함에 따라 군으로 승격되었다. 1896년(고종 33)에 경기도 김포군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양천군이 김포군에 통합되었고, 1934년에는 김포군의 일부였던 군내면이 김포면으로 개칭되었다. 1979년 5월 1일 김포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1995년 검단면이 읍으로 승격하였고, 같은 해 검단읍이 인천광역시에 편입되었다. 1998년에는 김포군이 김포시로 승격되었다.
성씨의 역사
시조인 공윤보(公尹輔)는 공자의 제자인 공하수(公夏守)의 후손이며, 노(魯)나라 왕족의 후예로서 당나라 18학사의 한 명이다. 공윤보는 당나라 현종 때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755년(경덕왕 14)에 귀화하여 김포에 터를 마련하여 공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 후 고려와 조선 초기까지의 상계(上系)를 알 수 없는 상태라서 후손들은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여러 파로 나뉘어 진채 세계를 이어왔다. 1478년(성종 9) 계공랑(啓功郞)으로 왕에게 직간을 하다가 미움을 받아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강제 이거 당하여 그 곳에서 정착하게 된 공명례(公明禮)가 벽동파(碧潼派)의 파조가 되고, 세조 때 불복신(不服臣)으로 몰려 함경도 문천(文川)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 살게 된 공보언(公普彦)이 문천파(文川派)의 시조가 되었다. 그리고 창원파(昌原派)는 정승 공의(公義)의 후손들이 누대로 함안에 살다가 창원에 이거하면서 일파를 이루게 되었다.
분적종 및 분파
공씨의 본관은 김포와 문천(文川)을 비롯하여 창원(昌原), 개성(開城), 인천(仁川), 풍곡(楓谷), 삼계(森溪), 삼가(三嘉) 등 10여개 본이 있는 것으로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김포공씨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이 공윤보의 동원혈족이 확실하므로 그가 처음 뿌리를 내린 김포를 관향으로 삼아 벽동파, 문천파, 창원파로 계통을 이었다고 한다.
주요 세거지
평안북도 벽동군
평안북도 초산군
평안북도 창성군
함경남도 문천군
인구분포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김포공씨는 521가구 총 1,715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