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 한백륜(韓伯倫)이 졸(卒)하니, 철조(輟朝)하고, 조제(弔祭)와 예장(禮葬)을 예(例)와 같이 하였다. 한백륜의 자(字)는 자후(子厚)이고, 본관(本貫)은 청주(淸州)이며, 관찰사(觀察使) 한창(韓昌)의 아들이다. 처음에 내시 별감(內侍別監)에 소속되었으며, 천순(天順) 임오년에 세조(世祖)가 그의 딸을 뽑아 동궁(東宮)에 들이고 소훈(昭訓)으로 삼았으니, 곧 인혜 대왕 대비(仁惠大王大妃)이다. 성화(成化) 병술년에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에 뛰어올려 제수되고, 무자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으로 옮겼다. 예종(睿宗)이 즉위하자 왕비의 아버지이므로 보국 숭록 대부(輔國崇祿大夫) 청천군(淸川君)에 제수(除授)되고, 남이(南怡)가 모역(謀逆)하다가 복주(伏誅)되자 추충 정난 익대 공신(推忠定難翊戴功臣)의 호(號)를 받았다. 성종(成宗)이 즉위하여서는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議政府右議政)에 제수되었으며, 신묘년에 순성 명량 경제 좌리 공신(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의 호를 받고 갈리어서 청천 부원군(淸川府院君)에 제배(除拜)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였는데, 나이는 48세이며
, 시호(諡號)는 양혜(襄惠)인데, 일에 따라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고, 관유(寬柔)하고 자인(慈仁)한 것을 혜(惠)라 한다. 한백륜은 성품이 순근(淳謹)하나 다른 기능(技能)은 없었다
. 정승이 되어서는 외척(外戚)으로서 번영한 것을 두렵게 여겨 여러 번 사직하고 물러갔으며, 사는 집이 좁으므로 친구가 고쳐 지으라고 권하면 웃으며 말하기를,
“이 집은 선인(先人)에게서 받았으며, 비바람을 막을 만한데, 어찌 고칠 수 있겠는가?”
하였다. 병이 위독하게 되어서는 손수 아들에게 유서를 써서, 상제(喪制)는 한결같이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를 지키도록 하였다. 맏아들 한환(韓懽)은 광패(狂悖)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