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의 배경 및 생애
인수대비(1437~1504)의 아버지 한확(1403~1456)은 조선 제일의 중국통이었다. 태종 17년(1417) 명나라에 공녀로 간 그의 누나가 황제 성조(成祖)의 후궁이 된 덕분이었다. 성조는 한확에게도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이란 벼슬을 내리고,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했을 때는 조선인인 그를 사신으로 임명해 고명(誥命)을 줄 정도로 총애했다.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을 제거하는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 한확이 수양편에 선것은 딸 때문이었다. 정난 1등 공신에 책봉된 한확은 수양대군의 의도대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즉위를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한확은 귀국 도중 만주에서 사망했는데, “부음이 들리자 임금이 놀라고 슬퍼”했지만, 세조의 즉위를 왕위 찬탈이라고 본 대부분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고,
이런 민심에 그녀는 상처받았다. 남편 의경세자가 세조 3년(1457) 만 1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때는 더했다. 의경세자는 단종보다 한 달 전에 죽었는데도 세조가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 현덕왕비의 저주를 받아 죽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의경세자의 죽음은 그녀가 꿈꾼 왕비의 길이 좌절됐음을 뜻했으나 10년후에 기회가 찾아왔다. 세조의 후사인 예종이 1년 2개월의 짧은 재위끝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만 세살짜리 예종의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한씨는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넘길 자신이 있었다
천하의 권신 한명회가 사돈이었다. 한명회는 예종의 장인이기도 했으나 세살짜리 손자 대신 열두살짜리 사위 자을산군(성종)을 선택했다. 성종보다 세살위의 월산대군이 있었으나 그에게는 한명회같은 장인이 없었다. 한명회와 밀약한 세조의 부인 정희왕후가 세조의 유명이라는 명분을 댔으나 그런 말을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대비의 말을 반박하고 나올 인물도 없었기에 한씨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은 임금이 될 수 있었다.
1469년 성종이 의경세자를 덕종(德宗)으로 추존하자 한씨도 왕후로 높여지고 동시에 대비가 됐다. 그녀는 조선의 모든 여성을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시키는 것이 대비로서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성종 6년(1475) ‘내훈’(內訓)을 펴낸 것은 이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그녀는 “나라의 치란(治亂) 흥망(興亡)이 비록 남자에게 달려 있지만 부인의 착하고 그렇지 않음에도 연결돼 있으니 부인도 가르치지 않을수없다”라면서 여성도 배울 것을 주장했다. 그녀가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 학문은 성리학이었는데, 성리학 이념은 남존여비(男尊女卑)라는 점이 문제였다.
그녀가 ‘내훈’의 「부부장」에서 “아내가 비록 남편과 똑같다고 하지만 남편은 아내의 하늘이다. 예로써 마땅히 공경하고 섬기되 그 아버지를 대하듯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대표적이다
심지어 “남편이라는 직책은 높은 것이 마땅하고 아내는 낮은 것이니, 혹시 남편이 때리거나 꾸짖는 일이 있어도 당연히 받들어야 할 뿐 어찌 감히 말대답하거나 성을 낼 것인가?”라고도 했다. 그녀의 ‘내훈’은 남녀가 비교적 자유롭고 평등했던 고려시대의 유제가 남아 있던 조선 초기의 여성들을 강하게 억압했고, 때로는 충돌했다.
자기 자신은 전혀 지키지 않았던 것을 여인들에게 강요를 했다..도대체 이 인수대비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인수대비와 며느리의 충돌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왕비 윤씨는 인수대비가 ‘내훈’에서 말한 “(남편에게는) 오직 순종할 뿐 감히 거스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말을 수긍할 수 없었다. 윤씨는 궁에 들어오기 전에 베를 짜서 팔아 늙은 어머니를 봉양할 정도의 효녀였지만, 남편 성종의 호색(好色)을 달게 받아들이는 열녀(烈女)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성종의 바람기에 제동을 걸면서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갈등이 시작되었다. 야사에는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냈다고 전하지만, 정사인 ‘성종실록’에는 오히려 성종이 윤씨의 뺨을 때린 내용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다툼의 진상은 분명치 않다.
그러던 중 후궁들과 성종의 총애를 다투던 왕비 윤씨의 처소에서 비상을 바른 곶감이 발견됐다. 곶감을 둘러싼 의혹은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인수대비는 성종이 아니면 후궁들을 죽이려는 의도로 단정지으면서 그녀는 위기에 빠졌다. 인수대비는 윤씨를 폐출시키려 했다. 왕비 폐출에 대해 명나라의 승인을 받는 것이 문제였으나 인수대비는 걱정하지 않았다.
고모 한씨가 선제(先帝)의 후궁으로서 황제의 효도를 받는 위치였으므로 사촌 한한을 사신으로 보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윤씨는 비록 쫓겨났으나 원자의 생모였다. 폐출된 지 3년째인 성종 13년 시독관(侍讀官) 권경우(權景祐)가 경연에서 윤씨에게 처소를 장만해주자고 주장한 것을 계기로 그녀 문제가 다시 떠올랐다. 대사헌 채수(蔡壽)가 이 주장을 지지하자 성종은 “원자에게 잘 보여 훗날을 기약하려는 것“이라고 분노했으나 사태는 가라앉지 않았다.
삼대비(인수대비,정희왕후,안순왕후)는 한글 문서를 조정에 내려 윤씨가 “우리들이 바른말로 책망을 하면, 손으로 턱을 고이고 성난눈으로 노려보았다“고 비난하고 나섰다. 하지만 6년 전 그녀를 왕비로 책봉하며 “정숙하고 신실하며 근면하고 검소한데다 몸가짐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공경하였으므로, 삼대비의 총애를 받았다“고 쓴 교명(敎命)과는 정 반대의 내용이었다.
민심은 인수대비의 성리학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폐비 윤씨의 억울함을 동정했다. 그러자 인수대비는 이런 여론에 정면으로 맞서 윤씨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결국 윤씨는 인수대비의 주도로 사약을 받았다. 연산군은 재위 10년째 드디어 복수에 나섰다. 성종의 두 후궁을 때려죽인 연산군의 분노는 인수대비에게 향해 “대비는 어찌하여 우리 어머니를 죽였습니까?“라고 대들었다. ‘
연산군일기’는 그녀가 연산군의 이런 모욕때문에 ‘마침내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나 죽었다’고 적고 있다. 연산군은 나아가 삼년상으로 치러야 할 국상을 한 달을 하루로 치는 역월제(易月制)로 25일만에 마쳐버려 확신으로 가득 찼던 대비의 인생을 조롱했다. 사랑이 최고의 이념인 줄 몰랐던 할머니와 용서가 최고의 무기인 줄 몰랐던 손자의 충돌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그 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의 모든 것이 부정되면서 그녀의 성리학 이데올로기는 조선 여성들이 받들어야 할 이념이 됐고, 조선은 극심한 남존여비의 나라가 되어 갔다.
● 연산군과 폐비 윤씨
윤씨가 사사당할 때 연산군은 만 세 살이었다. 야사들은 이에 착안해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를 어머니로 알고 지내던 연산군이 재위 10년(1504:갑자년) 임사홍의 소개로 외조모 신씨(申氏)를 만나 어머니의 비극을 알게되고 피의 복수에 나섰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연산군이 재위 1년 전라도 장흥에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할머니 신씨를 석방한 것은 이 당시 이미 사태의 진실을 알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가 재위 초 어머니의 무덤을 회묘(懷墓), 또는 효사묘(孝思墓)라고 불렀던 것도 마찬가지 증거다. 그는 재위 10년 갑자사화 와중에 윤씨에게 제헌(齊獻)이란 시호를 바치고 회묘를 회릉이라 높였다. 그러나 연산군이 왕자(王者)의 가장 큰 복수는 ‘정사를 잘 하는 것‘이란 사실을 도외시한 채 소인의 복수에 집착하다 쫓겨나자 제헌왕후란 시호도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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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군주를 모신 내시 김처선
김처선이 처음 역사의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단종 1년인 1453년이다(처선이 1505년, 연산군에 의해 죽을 때 나이가 80가까이 되었다고 하니, 이 때 나이는 대략 20대 후반쯤이 되겠다.). 그 이전에 처선이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개인적으로 처선 아역배우 주민수 군이 멋있긴 했지만...다 픽션이다...안습 T^T) 그런데 처선의 역사무대 첫 대뷔는 좀 엉성하다고 해야되나? 여튼 그 기록이란 처선을 유배보냈다가 다시 석방시켰다는 기록이다. 왜 유배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대략 앞뒤정황을 맞춰보면 추측은 가능하다. 계유정난이 일어난 지 3일 후에 이런 기록이 보인다는 점과 함께 처선이 풀려날 때를 전후로 하여 김종서 일파들이 유배당한 점을 보면, 아마도 권력주변에서 어물어물거리다가 김종서에게 찍힌 듯 하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처선의 삶은 순탄하지 않다. 그 이후 조정의 실세로 떠오른 수양대군에게 반기를 들었던 금성대군과 연관되어 결국 관노로 전락한다. 그러나 다시 인생역전의 기회는 찾아온다. 수양대군이 왕위에 오르고 난 뒤 1457년, 관노에서 해방되고 3년 후 원종3등공신이 된다. 아마도 관노에서 해방된 뒤 오래지 않아 내시로 복귀한 것 같다. 그렇지만, 처선의 삶은 원래 그랬던 것처럼 순탄하지가 않았다...술 먹고 난동을 부려 곤욕을 치루기도 하고, 직무유기로 곤장을 맞는 일도 있었다. 그런가하면 귀성군과 세조의 후궁과의 스캔들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세조의 관용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래도 내시라는 직책에 비해 처선은 비교적 호사롭게 살았고, 왕의 총애도 대단했다.
예종을 거쳐 성종 대에 이르러 그는 최전성기를 맞이한다. 성종은 그를 자헌대부(정2품이나 되는 높은 벼슬이다!)에 제수하는 등 그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물론 내시에 불과한 처선에게 왕의 총애가 쏟아지는 걸 보고 반감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생애에서 큰 걸림돌로 작용하진 않았던 모양이다. 성종은 죽으면서까지 그를 아끼는 마음을 내비쳤는데 바로 그를 자신의 능을 돌보는 시릉내시로 임명한 것이었다...
성종이 죽은 후 3년동안 그의 능을 돌보면서 처선은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은 걸로 보인다. 이 때 기록을 보자면 그가 선릉을 관리하던 일이나 말을 하사받은 일 등 자질구레한 것들밖에 없다...그리고 3년상이 끝난 후 그는 궁궐로 복귀한다. 연산군 10년인 1504년, 처선은 폭정을 일삼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했다가 죽도록 맞고 옥에 갇힌다. 그리고 이듬해, 처선은 연산군이 "처용희"라는 괴상한 놀이를 벌이자 목숨걸고 직언을 한다...
우선 처선은 주변사람들에게 "나는 오늘 죽을 것이다"라고 비장한 각오로 말한 뒤 연산군 앞으로 나아가 거침없이 말한다.
처선 : 이 늙은 신이 일곱 임금을 섬겼고, 경서와 사서를 대강 통하지만 고금에 상감과 같은 짓을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당연히 연산군은 노발대발(...제정신이 아닌 군주였으니...처선의 목숨건 직언이 먹힐 리가 없다...). 대꾸도 없이 바로 옆에 있던 활을 주워들어 처선을 향해 쏘니, 처선의 갈빗대에 정통으로 박힌다. 그러나 처선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한 몸...다시 한 번 비장하게 말한다.
처선 : 조선의 대신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데, 늙은 내시가 어찌 감히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다만 상감께서 오래도록 임금 노릇을 할 수 없는 것이 한스러울 뿐입니다.
연산군은 격노하여 다시 화살 한 발을 쏘아 처선의 다리를 맞힌다. 처선이 쓰러지자, 그의 다리를 잘라버린다(욱!)...그리고 냉소하며 처선을 조롱한다.
연산군 : 똑바로 서서 걸어보라!
처선은 연산군을 쳐다보면서 희망이 없다는 듯이 말한다...
처선 : ...상감은 다리가 없이도 걸어 다닐 수 있습니까?
연산군은 그 말을 듣자마자 처선의 혀를 뽑아버리고(우욱!)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낸 뒤(웩!) 호랑이에게 먹이로 줘버린다...이로써, 일곱 군주의 그림자 역할을 하며, 충언을 마지않던 내시, 김처선 사망...
하지만 처선에 대한 연산군의 미움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처선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하여 모든 문서에 처(處)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게 하니, 24절기의 하나인 처서(處暑)를 조서라고 고쳐부르고, 사인 성몽정이 교서에 처(處)자를 썼다하여 사헌부에서 국문을 당할뻔한 웃지못할 헤프닝도 있었다 한다...
또한 그의 가산을 몰수하며, 그 가족을 모두 죽이고, 그의 집을 파 연못으로 만들었다...
그 이후, 김처선은 영조에 이르러서야 다시 그 충정을 인정받게 된다. 영조는 "왕이 된 자가 충성한 이에 대하여 정문(旌門)을 세워 주는 것은 세상을 권면하는 큰 정사이니, 사람이 비록 미천하다 하더라도 없을 수 없는 일이다. 중관 김처선이 충간을 하다가 운명을 하였다는 것은 일찍이 지난날에 아주 익숙히 들었다. 그러므로 내부로 하여금 2백 년 뒤에 후사를 세우도록 하였으니, 뜻이 대개 깊다 할 것이다. 이러한 말세에 마땅히 포양하여 권면해야 할 것이니,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정문을 세워 주게 하라"하여 특명으로 그의 고향에 공적을 기리는 정문을 세우도록 하였다.
평생동안 일곱 임금의 그림자가 되어 충언을 아끼지 않았던 김처선...
아마도 그는 조선을 통틀어 최고의 내시로 손꼽히기에 손색이 없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