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증인으로 살자!
시편 42:1~9(성령감림후 제2주/ 순교자 기념주일/ 6.25민족 화해주일)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이며, ‘순교자기념주일’입니다. 또한, 한국기독교장로회에서는 ‘6.25 민족 화해 주일’로 지킵니다. 국가적으로 6월은 ‘호국보훈의 달’입니다.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서 생각해 보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목숨을 내어놓고 싸운 ‘호국 영령’들도 ‘순교자’입니다. 그리하여 6월에 ‘순교자기념주일’이 제정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 순교자

‘순교자’라는 말은 신앙의 진리를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으로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 martus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장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는 예수님을 ‘충성 되고 참된 증인(3:14)’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을 증언한 이들을 ‘증거자’라고 했고, 말씀을 증언하다 죽음을 당한 이들은 ‘증인’이라고 구분하여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폴리캅주교의 순교전(165년경)’에서 순교자를 처음으로 ‘증인’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하여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을 피 흘려 증거 하는 자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입니다. 초대교부 터툴리안은 “순교자는 그리스도 교인의 씨앗이다‘라고 일찍이 설파하였습니다. 복음은 스데반 집사를 위시한 수많은 순교자의 헌신으로 우리에게 전해졌고, 순교자들이 바로 교회의 씨앗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순교자‘는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 교회력 본문

구약 : 열왕기상 19:1~15 / 아합과 이세벨의 위협과 엘리야의 피신,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과정에서 권력자들에게 생명을 위협당하는 상황
시가서 : 시편 42, 43편 / 고라자손의 시, 고난 중에서, 불의한 자들의 압제에서 하나님을 구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찬송하는 내용
서신서 : 갈라디아서 3:23~29 / 모세의 율법을 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복음이 전해지기까지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다.
복음서 : 누가복음 8:26~39 / 거라사인 지방의 군대귀신에 들린 자. 박해자의 폭력은 ‘군대(집단적)’이며, 현실적인 이익에 목매는 사람들 사이에서 순교자는 ‘현실적인 이익을 초월한 자’라는 강조점이 있음을 도출할 수 있다.
■ 교회력 본문을 관통하는 내용

‘순교자기념주일’이므로 이런 관점에서 교회력 본문을 읽고 묵상했습니다.
예언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가 아합 왕과 이세벨에게 쫓겨 브엘세바의 로뎀나무 아래서, 호렙 광야의 굴에서 “차라리 저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께 탄원할 만큼 두려움에 빠져 있습니다. 얼마 전, 바알의 선지자를 가차 없이 죽였던 용맹스러운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두려움에 떠는 연약한 인물로 묘사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에서는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이 어디 계시느냐?”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을 조롱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롱은 마치 군대귀신처럼 집단적인 폭력으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오로지 이해타산과 현실적인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군대귀신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이를 치유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조차도 거부합니다. 율법과 조문에 사로잡혀 복음을 거부할 뿐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이들을 공격합니다. 이런 가운데에서도 순교자들은 현실적인 이익을 초월한 믿음을 지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 시편 42편

성령강림후 제2주, 순교자기념주일에 제가 설교 본문으로 택한 것은 시편 42편의 말씀입니다.
시편 42편의 말씀은 고라 자손의 시입니다. 시인은 극심한 고난 중에서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인이 경험하는 현실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눈물을 밥 먹듯이 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지만, 하나님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불안과 두려움 속으로 빠져 들어갑니다. 시인은 ‘깊은 바다의 모든 파도와 물결’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듯한 두려움에 빠져듭니다. 원수들이 칼로 뼈를 찌르며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조롱하는 것과도 같은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낙심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상황에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시 42:1)”고백합니다. 이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침묵하고 계시는 그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시 42:11)하며 믿음을 지킵니다. 시편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이러한 시인의 믿음으로 그가 불의한 자들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다니엘과 하박국 선지자가 고백했듯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런 고백 끝에 그는 오랜 장마 끝에 ‘맑게 갠 하늘’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침묵에도 시인은 자신의 신앙을 훼손하지 않고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며 답을 찾은 것입니다. 그가 찾은 답은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반석이시라는 것입니다. 반석으로 상징된 하나님은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습니다. 바람에 흔들리고 변하는 것은 인생이었던 것입니다.
■ 코람데오(Coram Deo) - 하나님 앞에서

저는 시편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코람데오’라는 2개의 라틴어 단어를 떠올렸습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인데,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며,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자신을 친히 나타내시는 거룩한 행위를 표현할 때도 사용됩니다.
‘증인’이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서’ 좀 더 직설적으로 해석한다면 ‘하나님 얼굴 앞에서’ 살아가듯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날에는 과거처럼 ‘피 흘려 순교하는 시대’는 아닙니다. 그러다 보니 ‘값싼 은혜’가 판을 치는 것처럼 ‘값싼 순교’가 판을 칩니다. 얼마 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는 선봉에 선 한기총 회장 전광훈이라는 분이 단식 선언을 하면서 ‘본 회퍼’를 언급하여 비아냥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욕심과 편향된 생각에 사로잡힌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행위를 ‘순교자적인 행위’로 믿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나치의 치하에서 신앙을 지키고자 죽음을 당한 순교자 ‘본 회퍼’는 감히 전광훈 같은 사이비 목사와 비교 대상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 회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분노한 것입니다.
‘코람 데오’, 우리 신앙인들이 늘 품고 살아야 할 말씀입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과 행동이 하나님 얼굴 앞에서 행해지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에 많은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마치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데 익숙해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고난의 때일수록,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것과도 같은 상황 속에서 더더욱 ‘코람 데오’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 하나님의 증인으로 살아간 시인

고라 자손의 시는 42편에서 43편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43편에서도 역시 “네 하나님이 어디있느냐?”는 비아냥은 이어집니다. 이런 현실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나를 판단하시고, 나를 변호하시고, 나를 건지소서!(시편 43:1)” 이로써 시인은 ‘하나님의 증인’이 됩니다.
시인의 어떤 모습이 증인의 모습일까요?
절망과 낙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시인은 기도합니다. 절망과 낙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소망을 둡니다. 절망과 낙심과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시인은 존재의 근원을 갈망합니다. 기도와 소망과 갈망, 이것이 ‘하나님의 증인’이 된 시인의 모습입니다.
■ 복음의 증인이 되자!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피 흘리는 순교자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증인이 되라’고 강권하십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주님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셨습니다. 이후 수없이 많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증인’으로 살아가기 위해 순교했습니다. 그 순교의 열매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며, 한남교회도 순교의 씨앗으로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신앙인 된 도리요, 하나님의 자녀 된 도리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살려면,
첫째,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목마름을 모르는 사람은 병든 사람이듯,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 신앙은 병든 신앙입니다.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을 갈망하십시오.
둘째, 고난 중에서 오히려 반석이신 하나님을 든든히 붙잡아야 합니다.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임을 자각해야 합니다. ‘코람 데오’의 하나님, 그분을 소망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서도 변하지 않는 믿음을 간직하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셋째, 현실적인 이익을 초월해야 합니다. 거라사인의 귀신들린 자의 이야기에서 보시듯, 병자가 고침을 받자 기뻐하기는커녕, 당장 눈앞에 보이는 손해로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현실적인 이익에 눈이 멀면,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값싼 은혜’로 치장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를 짓게 될 뿐입니다.

복음의 증인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으로 기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이요, 진리를 따라 사는 길입니다.
한남교회 교우 여러분,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묵묵히 신앙을 지키시며 하나님만 소망하며 헌신하시는 여러분의 수고를 하나님은 아실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시인이 ‘눈물로 된 음식’을 먹는 것처럼, 우리의 삶의 아픔을 보시며 ‘보혜사 성령님’을 통해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힘차게 살아가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