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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ṃyutta Nikāya, nidānavaggo n, 1. nidānasaṃyuttaṃ, 3. dasabalavaggo n,
5. bhūmijasuttaṃ n (SN 12.25)
12:25(3-5) 부미자의 경 2421)잡아함 14권 1(大正 2, 93b, 잡34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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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sāvatthiyaṃ viharati.
1. 한때 세존께서 싸밧티 시에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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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ha kho āyasmā bhūmijo sāyanhasamayaṃ paṭisallānā vuṭṭhito
yenāyasmā sāriputto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āyasmatā sāriputtena saddhiṃ sammodi.
sammodanīyaṃ kathaṃ sāraṇīyaṃ vītisār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bhūmijo āyasmantaṃ sāriputtaṃ etadavoca —
그때 존자 부미자가 홀로 고요히 명상하다가 저녁 무렵에 일어나
존자 싸리뿟따가 있는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38] 존자 싸리뿟따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은 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2.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존자 부미자는 존자 싸리뿟따에게 이와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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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반 사리뿟따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업을 설하는데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합니다.
♦ “santāvuso sāriputta, ek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santi panāvuso sāriputta, ek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par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santāvuso sāriputta, ek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ñca paraṃkatañca sukhadukkhaṃ paññapenti.
santi panāvuso sāriputta, ek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부미자]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벗이여, 싸리뿟따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는 것이라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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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ha no, āvuso sāriputta, bhagavā kiṃvādī kimakkhāyī,
kathaṃ byākaramānā ca mayaṃ vuttavādino ceva bhagavato assāma,
na ca bhagavantaṃ abhūtena abbhācikkheyyām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eyyām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pāt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eyyā”ti?
3.벗이여 싸리뿟따여, 여기에 대해서 세존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며 어떻게 설명하십니까?
제가 만약 세존께서 말씀하신 바를 설한다면, 어떻게 설명해야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설한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한 것이고,
저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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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ṭiccasamuppannaṃ kho, āvuso, sukhadukkhaṃ vuttaṃ bhagavatā.
kiṃ paṭicca? phassaṃ paṭicca.
iti vadaṃ vuttavādī ceva bhagavato assa, na ca bhagavantaṃ abhūtena abbhācikkheyy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eyy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pāt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eyya.
4. [싸리뿟따] "벗이여, 세존께서는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연유로 생겨납니까?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납니다.
이와 같이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을 말한다면, 세존께서 말씀하신 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세존을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한 것이고,
그대의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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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trāvuso, ye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adapi phassapaccayā.
yepi te ... pe ... yepi te ... pe ...
yepi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adapi phassapaccayā.
5. 벗이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납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납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납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 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생겨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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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업을 설하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기 스스로도 짓지 않고 남이 짓지도 않는
우연히 발생하는 것이라고 천명하는데
감각접촉 없이 [그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것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 “tatrāvuso, ye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e vata aññatra phassā paṭisaṃvedissan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yepi te...pe. ... yepi te ... pe ...
yepi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e vata aññatra phassā paṭisaṃvedissan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ī”ti.
6. 벗이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39]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없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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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ssosi kho āyasmā ānando āyasmato sāriputtassa āyasmatā bhūmijena
saddhiṃ imaṃ kathāsallāpaṃ.
atha kho āyasmā ānando yena bhagavā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bhagavantaṃ abhivādetvā ekamantaṃ nisīdi.
ekamantaṃ nisinno kho āyasmā ānando yāvatako āyasmato sāriputtassa
āyasmatā bhūmijena saddhiṃ ahosi kathāsallāpo taṃ sabbaṃ bhagavato ārocesi.
7. 그때 마침 존자 아난다가 존자 싸리뿟따와 존자 부미자의 이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존자 아난다는 탁발을 하러 라자가하 시로 들어가 탁발을 하고 식사를 마친 뒤,
탁발에서 돌아와 세존께서 계신 곳으로 찾아왔다.
가까이 다가와서 세존께 인사를 드리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한쪽으로 물러나 앉아 존자 아난다는 존자 싸리뿟따와 존자 부미자의 대화를 모두 세존께 말씀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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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ādhu sādhu, ānanda, yathā taṃ sāriputto sammā byākaramāno byākareyya.
paṭiccasamuppannaṃ kho, ānanda, sukhadukkhaṃ vuttaṃ mayā.
kiṃ paṭicca? phassaṃ paṭicca.
iti vadaṃ vuttavādī ceva me assa, na ca maṃ abhūtena abbhācikkheyya,
dhammassa cānudhammaṃ byākareyya,
na ca koci sahadhammiko vādānupāto gārayhaṃ ṭhānaṃ āgaccheyya.
8. [세존] "아난다여, 훌륭하다. 아난다여, 훌륭하다.
싸리뿟따가 올바로 설명한 것과 같이 설명해야 한다.
아난다여, 즐거움과 괴로움은 연유가 있어 생겨나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무엇을 연유로 생겨나는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이와 같이 말한다면, 내가 말한 대로 설하는 것이고, 진실이 아닌 것으로 나를 잘못 대변한 것이 아니며,
가르침에 일치하도록 설명하는 것이고, 그 주장의 결론이 비판의 근거를 제공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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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trāna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adapi phassapaccayā.
yepi te ... pe ... yepi te ... pe ...
yepi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adapi phassapaccayā.
9. 아난다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없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즐거움과 괴로움은 접촉을 연유로 해서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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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atrānanda, ye te samaṇabrāhmaṇā kammavādā sayaṃkat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e vata aññatra phassā paṭisaṃvedissan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yepi te ... pe ... yepi te ... pe ...
yepi te samaṇabrāhmaṇākammavādā asayaṃkāraṃ aparaṃkāraṃ
adhiccasamuppannaṃ sukhadukkhaṃ paññapenti,
te vata aññatra phassā paṭisaṃvedissantīti netaṃ ṭhānaṃ vijjati.
10. 아난다여,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남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들기도 하고 남이 만들기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업보를 믿는 자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은 자신이 만든 것도 아니고 남이 만든 것도 아닌
원인없이 생긴 것이라고 주장하는
수행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접촉이 없이 즐거움과 괴로움을 경험할 수 있는 그러한 여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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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아난다여, 몸이 있을 때 몸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말이 있을 때 말을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들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마노[意]가 있을 때 마노를 반연하여 일어난 의도를 조건하여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 “kāye vā hānanda, sati kāya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vācāya vā hānanda, sati vacī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mane vā hānanda, sati manosañcetanāhetu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11. 아난다여, 또한 신체가 있으면 신체적 형성을 원인으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40]
아난다여, 또한 언어가 있으면 언어적 형성을 원인으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아난다여, 또한 정신이 있으면 정신적 형성을 원인으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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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kāyasañcetanā kāyasaṅkhāro,
vacīsañcetanā vacīsaṅkhāro,
manosañcetanā cittasaṅkhā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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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여, 身이 있어서 身思(kāya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또한 語가 있어서 語思(vacī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意가 있어서 意思(manosañcetanā)를 因(hetu)으로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한다.
아난다여, 無明을 緣하여(paccayā)
스스로(sāmaṁ, 자신이) 身行(kāyasaṅkhāra)을 결합시킨다면(abhisaṅkharoti)
그것을 緣으로 하여(paccayāssa)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하고,
아난다여, 다른 상태에서 身行을 결합시킨다면
그것을 緣으로 하여(paccayāssa) 안으로(ajjhattaṃ) 樂과 苦가 生起하며, …[생략]…
語行(vacīsaṅkhāraṃ)을 결합시킨다면. …[생략]…
意行(manosaṅkhāra)을 결합시킨다면, …[생략]… http://cafe.daum.net/pali-study/9akK/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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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도는 무명을 조건으로 한 것이다.”
avijjāpaccayā ca.
무명을 조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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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25) avijjāpaccayā ca: 이 구절은
PTS본의 'avijjāpaccayā va'를 미얀마본에 따라 수정한 것인데,
바로 앞 문장에 소속시킬 수도 있고 다음 문장에 소속시킬 수도 있다. ....
역자는 뒷 문장에 소속시킨다.
8. “아난다여, 스스로가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아난다여, 남들이 그에게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 “sāmaṃ vā taṃ,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VAR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pare vā taṃ VAR,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n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1) 아난다여, 자신에 의해 신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타자에 의해 신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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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차리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몸으로 의도적 행위를 짓더라도
그것을 조건으로 해서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이 일어난다.
sampajāno vā taṃ,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asampajāno vā taṃ, ānanda, kāya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2)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신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신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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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āmaṃ vā taṃ, ānanda,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pare vā taṃ, ānanda,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n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3) 아난다여, 자신에 의해 언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타자에 의해 언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sampajāno vā taṃ, ānanda ... pe ...
asampajāno vā taṃ, ānanda, vacī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4)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언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언어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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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āmaṃ vā taṃ, ānanda,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pare vā taṃ, ānanda,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n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5) 아난다여, 자신에 의해 정신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타자에 의해 정신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sampajāno vā taṃ, ānanda ... pe ...
asampajāno vā taṃ, ānanda, manosaṅkhāraṃ abhisaṅkhar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6)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며 정신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거나,
아난다여,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며 정신적 형성을 일으키더라도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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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난다여, 이러한 법들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
♦ “imesu, ānanda, dhammesu avijjā anupatitā.
12. 아난다여, 이 여섯 경우는 <*chasu dhammesu> 무명으로부터 영향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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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몸이 없으며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말이 없으며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마노가 없다.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조건인
터전이 존재하지 않고
… 기반이 존재하지 않고
… 장소가 존재하지 않고
…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
avijjāya tveva, ānanda, asesavirāganirodhā
so kāyo na h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sā vācā na h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so mano na h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ṃ.
khettaṃ taṃ na hoti ... pe ...
vatthu taṃ na hoti ... pe ...
āyatanaṃ taṃ na hoti ... pe ...
adhikaraṇaṃ taṃ na hoti yaṃpaccayāssa taṃ uppajjati ajjhattaṃ sukhadukkhan”ti.
아난다여, 무명이 남김없이 사라져 소멸하면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게 하는 신체적 형성이 소멸하고,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게 하는 언어적 형성이 소멸하며,
그것을 연유로 자신에게 [41]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게 하는 정신적 형성이 소멸한다.
곧 그것을 연유로 내적으로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겨나게 하는
터전이 소멸하고
기반이 소멸하고
영역이 소멸하고
관계가 소멸한다."
pañcamaṃ.
∴
25. Bhikkhuvaggo 제25장 수행승의 품 Dhp. 360. 361.
[眼] Cakkhunā saṃvaro sādhu, 눈을 삼감은 훌륭하여라,
[耳] sādhu sotena saṃvaro; 귀를 삼감은 훌륭하여라,
[鼻] Ghānena saṃvaro sādhu, 코를 삼감은 훌륭하여라,
[舌] sādhu jivhāya saṃvaro. 혀를 삼감은 훌륭하여라!
.
[身] Kāyena saṃvaro sādhu, 몸(身)을 삼감은 훌륭하여라,
[口] sādhu vācāya saṃvaro; 말(口)을 삼감은 훌륭하여라,
[意] Manasā saṃvaro sādhu, 의(意)를 삼감은 훌륭하여라,
.
sādhu sabbattha saṃvaro; 일체처에서 삼감은 훌륭하여라!
Sabbattha saṃvuto bhikkhu, 일체처에서 삼가는 비구는
sabbadukkhā pamuccati. 일체의 괴로움에서 해탈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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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앙굿 6:63 꿰뚫음 경
감각접촉[觸]이 감각적 욕망의 원인과 근원이다.
감각접촉[觸]이 느낌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감각접촉[觸]이 인식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감각접촉[觸]이 업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무명이 번뇌들의 원인과 근원이다.
갈애가 괴로움의 원인과 근원이다.//
무명에 덮히고 갈애에 묶여서 이 몸이 생겨나는 ...근원적인 연기도 잘 잡도리 해야 하지만...
감각접촉이 현실에서 직접 나타나는... 육육연기가... 참 중요하다고 다시 봅니다.
여기 부미자 경에서는...
세가지 의도 중에서... 쩨따나에서 상카라로 ...바뀐 단어가 나오는 삼행은........ 무명의 영향을 받는다고 나오므로.....
꿰뚫음 경에 나오는 원인인... 감각접촉과 연결해서 보면...
무명 + 촉 ... 즉 무명촉이 되겠네요......
@니까야 신구의 삼행에 의한 ... 십선업이....... 실천해야 할 실제적인 행동이니만큼... ...........
육육연기에 나오는... 외입처 계열의 의도를 제어하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되겠네요.
봄봄님 덕분에 부미자 경을 다시 보게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_()_
부미자 경은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기는 조건을 설하고 있는데요....
즐거움과 괴로움을 짓는 자는 없다...
1) 무명-> 行(신행, 구행, 의행) -> 감각접촉 ->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2) 여기서 무명과 행 사이에 뭔가 빠진 느낌입니다.
우선 이 몸인 身(kāya)가 있어야만..... .
그 까야와 함께하는 의도cetanā)가 생깁니다.
그 다음 그 의도에 의한 신구의 삼행이 일어납니다.
이제서야 무명과 행 사이가 채워진 느낌입니다.
이 신구의 삼행을 조건으로 감각접촉이 일어나서 우리는 즐거움과 괴로움을 겪습니다.
2) 무명-> kāya[身口意]가 생김-> [身口意]와 함께하는 의도(cetanā) -> 行(身口意 삼행) -> 감각접촉 -> 즐거움과 괴로움이 생긴다.
● 여기서 의도cetanā)와 행(saṅkhāra)의 관계가 아리송하고
● 의도가 업인지, 행이 업인지, 둘 다 업인지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으로 <무명에 대한 무여이탐>을 말씀하십니다.
3) 무명에 대한 무여 이탐 -> kāya[身口意)가 소멸 -> 즐거움과 괴로움의 모든 터전이 없어집니다.
이때 함께 제거되는 것들이 놀랍습니다.
부미자 경은 무명이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하면
내적인 즐거움과 괴로움을 일어나게 하는 모든 조건(緣)인
@해맑은 몸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고
마노가 없어지고
터전(khetta)이 없어지고
기반(vatthu))이 없어지고
장소(āyatana)가 없어지고
이유(관계, adhikaraṇa)가 없어진다.,,, 고 합니다.
@해맑은 12연기의 무명 다음으로 발생하는 상카라는... 신행 구행 心행... 이고.......
명신에서 나오는 쩨따나는 ...意행이면서... 舊업일 것이고........
최종... 태어남 죽음에 나오는 오온의 쩨따나도 ...의행이면서... 新업이 되겠지요.
66연기에 나오는 쩨따나는... 신행 구행 意행... 이지요.
수와 상은... 心행이구요.
까야가 중간에 있어야 할 것 같다는 말씀에 동의하면서........
명신이... 수상사...를 모두 갖추고 중간에 있으므로........또 수상은 심행... 사는 의행이므로...... 명신이 중요하게 떠오르네요...... 구업이 면서... 신업을 만드는 연결고리로요.........
@니까야 66연기의 쩨따나는... 6외입처의 쩨따나이므로........
십선업 십불선업의... 신 구 의행과 겸해서 ... 다시 정리해보면.......
밖으로 드러나는 다양한 연기의... 시작이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6외입처의 연기에 ... 내입처인 意가 나타나는 것은...... 참 특이해서... 아위자님의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할 것 같구요.
싸리뿟따여,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취한다면, 그것을 두고 허물 있는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Yo kho, sāriputta,
imañca kāyaṃ nikkhipati aññañca kāyaṃ upādiyati
tamahaṃ ‘saupavajjo’ti vadāmi.
...라는 경문도 있지만
왓차여, 중생이 <이 몸을 내려놓고 아직 다른 몸을 받지 않았을 때>는 갈애가 연료라고 나는 천명한다.
왓차여, 그 경우에는 갈애가 연료이기 때문이다.”
‘‘Yasmiṃ kho, vaccha, samaye
imañca kāyaṃ nikkhipati, satto ca aññataraṃ kāyaṃ anupapanno hoti,
tamahaṃ taṇhūpādānaṃ vadāmi.
.....
<이 몸을 내려놓고 아직 다른 몸을 받지 않았을 때>도 있다는 경문은 이미..
무명-행-식....에서
행은 <身행, 어행, 심행>으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身행>은 [色 = 4대 (혹은 소취색)]이라고 읽으시면 이해하시기 쉽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즉 무색계에서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무색계에 태어날 중생(혹은 불환자)들은 색과 관련된 身행은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그러나 만약 색에 대한 탐(희애)를 해결하지 못했다면
무명-행-식-명색(<-이것이 색)으로 진행된다고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
받아들이기 싫으시면 그냥 통과....
그 다음에 나타나는
무명-행-식-명색-육입(<- 이것이 욕계)라고 아무리 말씀드려도
관심 없으시면 통과^^....
@봄봄 <aññataraṃ kāyaṃ anupapanno> [다른 身을 획득]에서의 身은
[想成, 意成, 거친 색]의 <무색계, 색계, 욕계>의 身을 말하고
무명-행의 身行은 <색, 즉 색계, 욕계>와 관련된 行이라고 여러 차례....^^
@봄봄 오래전부터...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봄봄 더불어... 명신 색신에 대한 ... 봄봄님과 아위자님의... 세밀한 대화를 보면서.... 많은 영감을 받아왔다고..... 고백?^^;; 합니다.
@봄봄 意思(심행/의행)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추가: 3愛-욕애,유애,무유애/욕.색,무색애가 작동하지 않음]은
누겁의 심행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고 지금 현재 새로운 업을 짓지 않는 마음상태이지
의식불명의 코마상태의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意에 의해서 法을 識하지만 [욕탐]이 없음.
여기서 <[욕탐]이 없음>이란 법에 대한 <[욕탐]이 없음>이고
또한 이 법은 마노가 만든 법[마노마야 담마]라면
근본적으로 <마노>에 대한 <[욕탐]이 없음>.
즉 삼계 공통인 [心]-<[욕탐]>-[意]가 끊어지고 해결된 상황.
@봄봄 누겁의 업과 현재의 새로운 업......... 구분해서 설명해주시는 덕분에...... 안목이 넓어지고 있습니다.
Ud2-4 우빠디를 緣하여 觸들이 接한다.
Phusanti phassā upadhiṃ paṭicca,
집착의 대상을 조건으로 접촉들이 접촉하니,
Nirūpadhiṃ kena phuseyyu phassā’’ti.
집착의 대상을 여읜 님을 어떻게 접촉들이 접촉하겠는가?
Tatra, puṇṇa, yamidaṃ kammaṃ kaṇhaṃ kaṇhavipākaṃ tassa pahānāya yā cetanā,
yamidaṃ [yampidaṃ (sī. pī.)] kammaṃ sukkaṃ sukkavipākaṃ tassa pahānāya yā cetanā,
yamidaṃ [yampidaṃ (sī. pī.)] kammaṃ kaṇhasukkaṃ kaṇhasukkavipākaṃ tassa pahānāya yā cetanā –
idaṃ vuccati, puṇṇa, kammaṃ akaṇhaṃ asukkaṃ akaṇhaasukkavipākaṃ, kammakkhayāya saṃvattatīti.
뿐나여, 여기서 어두운 과보를 가겨오는 어두운 업을 제거하려는 의도(cetanā)와,
밝은 과보를 가져오는 밝은 업을 제거하려는 의도와,
어둡고 밝은 과보를 가져오는 어둡고 밝은 업을 제거하려는 의도를 일러
어두운 과보도 밝은 과보도 가져오지 않고
업의 소멸로 인도하는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업(kamma)이라고 한다.
phassasamudayā sabbe dhammā, 일체법(Ex. 마노 등)- 어떠한 법이든지 觸集으로부터
vedanāsamosaraṇā sabbe dhammā, 어떠한 법이든지 受로 모여들고(수렴하고).
외도 경 S12:24도 같이 참고하시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Channaṃtveva, āvuso, phassāyatanānaṃ asesavirāganirodhā phassanirod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