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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가톨릭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솔빛
아름다운 문의 사도 성 베드로(사도 3,1-10)
2011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창세46,1-7.28-30 마태10.16-23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마태오 10,16-23 )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서 /김찬선신부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 말씀은 이렇게 저에게 이해됩니다.
“너의 일을 말하고 너의 주장을 필 때는 네가 말하라.
그러나 나의 일을 말하고 나에 대해서 말할 때는 네가 떠들지 마라.”
이 말은 우리가 주님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어디에서건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어떤 때 우리는 얘기할 수 있는 자리이고 해야 하는 자리인데도
쑥스러워 또는 두려워
주님을 증거하지 못하고 복음을 선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성호경과 함께 식사기도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길을 가다가 누구를 돕고 싶어도
남이 볼까 봐 돕지 못합니다.
그러니 많은 사람이 보는 데서, 더구나 반대자들 앞에서
주님을 증거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감히 엄두도 못 냅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이리떼 가운데서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때 인간의 지혜와 능력으로 하지 말라십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지만
인간의 복잡한 머리 굴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께 맡기는 그러한 지혜와 순박함이어야 합니다.
미련스럽게도 하느님의 일을 제가 할 수 있는 것처럼 덤비고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되게 하려고 그악해서는 안 된다 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나의 일로 가로채고
하느님께서 하실 것을 내가 하겠다고 설치는,
그런 주제넘고 미련한 짓은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2011.7.8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창세46,1-7.28-30 마태10.16-23
시종여일(始終如一)의 삶 /이수철 신부님
주님의 복음 말씀은 셋으로 요약됩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나는 늘 너와 함께 있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이런 주님께서 우리에게
끝까지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오늘은 ‘처음과 끝’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매일 처음이자 끝처럼 사는 게 종말론적 삶이요
바로 우리 수도승들의 삶입니다.
이렇게 처음이자 끝처럼 살고 미사드릴 때
우리 나날의 삶은 참 절실할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가,
처음과 끝이 만나는 지점이,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인 바로 오늘 지금
여기의 영원입니다.
아무리 오래 살았어도 지나고 나면
늘 찰나처럼 여겨진다 합니다.
시종일관, 유종지미의 삶,
모두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삶을 뜻합니다.
“우리의 한반도에 대한 입장은 언제나 일관(一貫)되고
분명(分明)합니다. 한반도의 평화입니다.”
중국의 이 인자 시진핑이
손학규 민주당 대표를 접견한
자리에서 한 말이 아주 명쾌합니다.
처음과 끝이 일관되고 분명해야 좋은 삶이요
사람들의 신망도 받습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오늘 지금 여기의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이 사는 걸 목표로 할 게 아니라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의
영원을 살 수 있는 가를 목표로 할 때
죽음의 공포에서 해방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에서
‘영원한 현재’이신 주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디서도 주님을 만나지 못합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죽어야 끝나는 영적전쟁입니다.
평생 이리와 양이 공존하는
세상 싸움터에서, 마음 안 싸움터에서
영적승리의 비결을 가르쳐 주십니다.
언제 어디서나 시종여일하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늘 함께 하시는 주님께서 이런 은총을 주십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평생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 말씀입니다.
잘 살고 못 살고는 차후 문제이고
삶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뎌냈다는 자체로 구원이요
하느님도 고마워하십니다.
시작하는 이는 많지만
끝에 이르는 이는 별로 없습니다.
시작할 때에는 언제나 기쁨이 있지만,
끝은 시험의 기간입니다. 하여
용두사미로
끝나는 인생도 많습니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되지 않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 견뎌낼 수 없습니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좋게 끝맺는 것입니다.
좋은 삶의 진수는 좋은 죽음입니다.
마음이 확고하면 그 끝에 이를 수 있습니다.
육적인 갈망은 종종 좋은 것을 시작하지만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그 끝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여
시종여일의 은총을 청하는
짧고도 한없이 심오한
기도가 영광송과 성모송입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은총의 가득하신 마리아여 기뻐하소서.
주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도다.
천주의 성모 마리아여,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우리 죄인을 위하여 빌으소서.”
시종일관,
시종일여의 삶을 위해
이 기도문을 끊임없이
화살기도로 바치면 좋습니다.
그러니 과거에 한 일은 되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끝을 생각하십시오. 하여
사막교부들은 물론 성 베네딕도는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라 말씀하셨고
우리는 매일 끝기도 시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자기가 행한 좋은 일에 대한 생각은
우리를 자만하게 만들지만,
우리 죽음의 끝에 대한 묵상은
우리가 거룩한 흠숭을 바치도록 이끕니다.
늘 주님과 소통하며
시종여일의 삶을 살았던 성인들이요,
오늘 창세기의 야곱이 그 모범입니다.
길을 떠난 이스라엘(야곱)은
브에르 세바에 이르러
자기 아버지 이삭의
하느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마치 매일 하루를 시작하기 전
미사성제를 드리는 우리와 흡사합니다.
“야곱아, 야곱아!”
“예, 여기 있습니다.”
주님과 주고받은 이 말마디 안에서
늘 주님 안에 깨어 살았던 야곱의
시종여일의 삶이 잘 드러납니다.
즉각적인 주님의 축복의 응답 말씀입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요셉의 손이 네 눈을 감겨 줄 것이다.”
좋은 끝의 죽음을
예고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마침내 야곱이 요셉을 만나니 말 그대로
행복한 끝의 해피엔딩입니다.
“내가 이렇게 너의 얼굴을 보고 살아 있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는 기꺼이 죽을 수 있겠구나.”
주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정성껏 미사를 봉헌하는
우리 모두를 축복하시어
오늘 하루도 시종여일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모든 것을 단순화 시키십시오 /양승국신부님
사도들을 세상에 파견하기에 앞서
일장훈시하시는 예수님 분위기는 엄숙하고
비장하다 못해 강경하기까지 합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강도 높은 수련을 마치고
서원을 발하는 형제들에게,
오랜 신학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는 형제들에게,
그 모습이 못내 불안하고, 무척이나 안쓰럽고,
그래서 이런 저런 잔소리에 또 잔소리,
그것도 모자라, 마무리 정신교육, 그리고
정말 마지막이라며 또 한 소리...
그것이 제자들을 바라보는
세상 모든 스승들의 심정이겠지요.
부디 잘 해줬으면 하는 마음에,
나같이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때로 타이르고, 때로 호통치고, 때로 섬뜩한 경고까지
마다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해보니
예수님의 ‘잔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아직도 갈 길이 먼 사도들이어서 그랬는지
이런 저런 일장연설이 끝도 없습니다.
“너희들을 세상으로 파견하려니 내가 너무 걱정 되서 밤잠이 안 온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란다.
세상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절대 속아 넘어 가지 마라.
이유 없이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 날카로운 발톱을 몰래 숨기고 있는
사람들을 조심해라. 부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혹시라도 적대자들 앞으로 끌려가더라도 겁먹지 마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 받더라도 부디 끝까지 견뎌라.
끝까지 견디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들을 만나거든
맞서 싸우지 말고 다른 고을로 피해가라.”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는
예수님의 당부말씀이 계속 마음에 남았습니다.
성덕이란 삶을 단순화시키며,
그 삶을 온전히 사는 것입니다.
성화의 삶이란
하느님 외, 복음 선포 외,
옆으로 새어나가는
에너지들을 부단히 차단하고
한 방향으로 자신의 삶을 정렬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충만하고 거룩한 성인(聖人)의
삶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오늘 하루 여러분의 삶을 성공적인 삶,
일생일대의 걸작으로 만들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방법은 단 한가지입니다.
오늘 하루 내 앞에 펼쳐진
하루를 단순화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을 단순화시키고, 마음을 단순화시키고,
삶을 단순화시켜보십시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여러 과제들,
대상들 앞에서 우선순위를 정하고
가장 중요하고 긴박한 대상을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선택한 대상에 대해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너무나도 당연히 하느님이며,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께서 남겨주신 복음이며,
또 다른 예수님이신
내 이웃들, 내 가족들이 아닐까요?
성인의 삶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고 박해하고
죽음으로 몰고간다할지라도
끊임 없이 세상을 용서하고, 세상을 위해 기도하며,
내 성화된 삶을 통해 세상을
정화시켜나가는 그 삶이야말로
성인(聖人)으로서의 충만한 하루가 아닐까요?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 선포자로서
세상 속으로 투신하며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결코 세상에 물드는 법 없이
세상에 하느님을 선물하는,
세상에 하느님의 선하심과 위대하심을 선포하는
사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11. 7. 8>(마태 10,16-23)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송영진 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라는 말은 처세술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들의 기본자세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게 되라는 것은 지혜롭게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이건 약삭빠르게 행동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신앙인의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지혜와 다릅니다.
구약성경 집회서에서는 '지혜'에 대해 이렇게 정의합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14)"
"지혜의 충만은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16)"
"지혜의 화관은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18)"
"지혜의 뿌리는 주님을 경외함이며(집회 1,20)"
한마디로 말해서 지혜란 주님을 경외함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 속에서 살면서 지혜롭게 처신한다는 것은
주님을 올바르게 섬기면서 신앙인의 본분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잔머리를 잘 굴리는 것은 지혜가 아닙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행동하라는 것은
온유함, 너그러움, 평화, 선함 등이 신앙인의 모습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 순박함이 나약함은 아닙니다.
열정도 없고 용기도 없고 무기력하고 비겁한 것은 순박함이 아닙니다.
비둘기처럼 순박한 것은 강하면서도 부드럽고,
용감하게 역경을 헤치고 나가면서도 사람들에게 평화를 심어 주는 그런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27장에 나오는 바오로 사도의 모습이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죄수의 처지가 되어서 쇠사슬에 묶여서 로마로 압송되는 중이었습니다.
바오로와 다른 죄수 몇 명이 배에 태워져서 지중해를 건너서 로마를 향하고 있었는데,
중간에 어떤 항구에 도착했을 때 바오로 사도가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이대로 항해를 계속하면 짐과 배도 위험하고 사람들의 목숨도 위험하다고...
당시의 항해술로는 겨울에 항해를 하는 것은 위험했습니다.
그러나 선주와 항해사는 자기들의 경험만 믿고 항해를 계속했고,
죄수들을 책임지고 있던 백인대장은 선주와 항해사의 말만 믿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고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이 바로 지혜와 순박함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대로 그 배는 얼마 후에 거센 폭풍을 만났고,
사람들은 모두 살아날 수 있다는 희망을 잃고 말았습니다(사도 27,20).
그때 바오로 사도가 다시 사람들을 격려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배만 잃을 뿐 여러분 가운데에서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사실 나의 주님이시고 또 내가 섬기는 하느님의 천사가 지난밤에 나에게 와서,
'바오로야,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황제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너와 함께 항해하는 모든 사람도 너에게 맡기셨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용기를 내십시오.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천사가 나에게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섬에 좌초하게 되어 있습니다(사도 27,22-25)."
그러면서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고 기운을 차리라고 권고를 하고
자신이 먼저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용기를 얻어서 음식을 먹기 시작합니다.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는 것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일의 결과를 말하면, 바오로 사도의 예언대로 배는 잃게 되지만
사람은 하나도 죽지 않고 모두 살아납니다.
선주나 선장이나 항해사도 아니고, 군대의 지휘관도 아닌,
쇠사슬에 묶여 있는 죄수일 뿐이었던 바오로 사도가
배에 타고 있는 276명을
지휘하고 인도하고 살려내는 모습이 바로 지혜롭고 순박한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슬기'는 머리가 좋은 것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올바른 믿음에서 제대로 된 슬기(지혜)가 나옵니다.
성격이 나약한 것이 순박함은 아닙니다.
믿음, 용기, 끈기, 열정을 바탕으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순박함입니다.
지금까지 한 이야기를 종합해서 한마디로 요약하면 '믿음'입니다.
믿음 속에서 주님과 대화를 나누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행동하면 지혜롭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믿음 속에서 참고 견디고, 믿음을 바탕으로 용기를 내면
자기 자신도 평화를 얻을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 속에서 살게 되면
저절로 온유하고 너그럽고 부드럽게 행동할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말로 설명하는 것은 쉬운데,
이걸 실제 삶으로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니...
일종의 숙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담대하고 자유로운가? /이준석 신부님
며칠 동안 우리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하신 말씀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지상 생활
동안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서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놓고 볼 때 예수님께서
후대의 교회를 두고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무엇 때문에 박해를 받고 사랑하는 가족들과도 분란에 휩싸였던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라는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
즉 그분의 인격과 그분께서 가르쳐 주신 모든 내용들이 세상의 가치와 가르침에 반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견된 이들이 걷는 사명의 길이란 고통과 박해와
논란으로 점철될 수밖에 없는 길임을 예수님께서 미리 알려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언제나 반대와 논쟁에 노출되어 있는
존재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세상을 결정적으로 심판하시기 전까지는
적어도 교회는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역경과 논쟁 속에서 교회는
성령의 힘을 받아 담대하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가치들을 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 교회는 그 어떤 권력이나 세태에도 흔들림 없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유로운 교회입니까? 이는 오늘 하루
깊이 묵상하며 성찰해 볼 질문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증언할 때 /강신모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박해 상황에서 당신께 대한 믿음을 증언하라고 권고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좀 더 넓게 이해하자면 ‘박해란 신앙을 버리게 강요하는 모든 상황’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한테도 여전히 박해 상황은 존재합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성실히 책임을 다하는
생활을 했는데 덜커덕 큰 병에 걸렸을 때, 또는 부도가 났을 때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과연 하느님이 계시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기도 합니다.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신뢰심을 잃게 됩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냉담해서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권고를 해도 아들은 바쁘다는 핑계만 댑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폐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긴 아버지는 의식이 회복되자
걱정스런 표정으로 곁에 있는 아들을 보았습니다.
아직 의식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제발 성당 다시 나가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아버지가
다른 무엇보다도 자신의 신앙생활을 걱정하는 것을 보고
아들은 성당에 다시 나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늙어가고, 건강도 잃어가고, 명예와 자존심도 잃어갑니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슬픔이며 고통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상황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좋으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증언해야 합니다.
주님이 보여 주시는 길로 갑시다 /김기현신부님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쌍둥이 빌딩을 폭파했을 때,
그 안에서 일하던 많은 사람이 서둘러 건물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물결을 거슬러 건물 안으로 들어간 이들이 있었다.
무거운 방화복과 소방장비를 든 소방관들이었다.
이들은 붕괴되는 건물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하고 불을 끄려고 뛰어들었다.
이들 중 많은 소방관이 붕괴된 건물과 함께 산화했다.
동료를 잃은 소방관들은 슬퍼할 겨를도 없이 무너진 건물 잔해 속에서
쉬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허리가 휘는 고통과 싸우며 한 사람이라도
생존자를 찾고자 또 시신을 찾고자 필사적 투쟁을 벌였다.
소방관들의 희생적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그런데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인터뷰할 때였다.
기자들이 소방관들의 영웅적 행위에 대해 인터뷰할 때마다
그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내 이름을 부르시는 그분’ 참조)
미국의 소방관들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에서 ‘뛰어들어야 할까 말까’를 고민하며
구조를 지체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신앙인들에게도 그런 정체성이 필요하리라 생각합니다.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할지
충분한 고민과 신념이 없다면 어떻겠습니까?
주저하고 휩쓸리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예전에 사회 사목국에 계신 신부님이 오셔서 강의를 해 주셨는데,
다음과 같은 말씀이 기억납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즉시 도와줘야 합니다.’
즉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신앙인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또 주님의 길을 걷고자 결심하고 다짐한 이들일 겁니다.
반대로 그러한 결심과 다짐이 없는 신앙인은 가난한 이들이나 소외된 이들을 보았을 때
도와주기를 망설이고 지체하리라 생각합니다.
그 모습이 오늘 독서에 나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주님의 길은 명확하고 단순합니다.
사랑하는 길이고 생명을 지키는 일이고 믿는 길입니다.
그 길에서 갈팡질팡하고 비틀거리는 이들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주님의 길과 세상의 길 사이에서 방황하는 사람일 겁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자니 손해가 있을 것 같고 몸과 마음이 고생할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보고 다른 길을 부러워하며
주님의 길이 아닌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일 겁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또 생명을 얻어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이 보여주시는 길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지뢰밭을 가로질러 가는 상상을 해 봅시다.
우리 앞에는 지뢰가 묻혀 있는 곳을 탐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를 향해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쪽으로는 가지 마십시오.’ 할 때,
누군가 그 사람을 향해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시오.
나는 강요당하는 것이 싫소.’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의 지시를 한 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하고 집중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인도한 길을 한 발자국도 어긋남 없이 따라갈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인도하는 길만이 우리의 목숨을 보장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주님의 말씀대로
사랑의 길, 용서의 길, 그리고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말씀대로 성실히 걷고 있는지 반성해 봅시다.
끝까지 참고 견디면 /기정희 수녀님
3년 전 방인수도회 차원에서 일본 수녀님들과 문화 교류를 통한
일치를 모색하며 서로의 나라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일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성지였다. 거창하게 꾸미기는커녕
폐허 그대로 둔 성지가 초라해 보였지만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원자폭탄 투하로 성당은 처참하게 파괴되었고
열두 사도의 성상은 부수어져 있었는데, 복원하지 않은 잔해들이
어제 일인 듯 처참한 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역사를 그대로 인정하고 보존하면서 그 사건에 담긴 의미를
신앙으로 알아듣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뼈아픈 유배를
잊지 않고 그때를 대대로 되새기는 것과 같은 마음을 보았다.
일본의 박해는 우리나라보다 더 잔인했다는 사실과
긴 역사의 공백에도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신앙의 역사에
대해 들으며 신앙의 신비를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성 베네딕토 축일인 오늘, 복음은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끝까지 참고 견디기 위해서 현재의
내가 누구이고 내 삶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모진 박해에도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일 때 끝까지 견딜 힘이 생긴다.
검증할 수 없는 가짜가 너무 많은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큰 결단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그러한 삶을 보여주신 분들이 성인들이다.
아버지의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어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려 한 이들.
성 베네딕토는 그 영께 민감하게 열려 있기 위해 ‘기도하고 일하라.’고
수도자들에게 권고했다. 창조의 삶으로 부름 받은 우리가
기도하면서 또 다른 창조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일상을 비범화하는 노동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끈기도 인내도 부족하다. 하지만
끝까지 참고 견디면 구원받으리라는 확답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과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식별할 때 그분은 분명 참고 인내할 힘을 주실 것이다.
성인들처럼 내밀한 자아 안에서 만난 하느님 체험만이
끝까지 참고 견디며 완성에 이르는 힘이 될 것이다.
중용 /전삼용신부님
저의 동기신부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습니다.
검사 결과를 본 의사선생님은 그 신부에게 왜 젊은 사람이 몸을
이렇게까지 만들었느냐며 버럭 화를 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태라면 몇 년밖에 살 수 없다고 협박을 하였습니다.
겁이 난 그 신부는 여러 다른 병원에서 같은 검사를 하였습니다.
물론 결과는 거의 같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의사 선생님은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몸이 안 좋은 것은 맞지만 열심히만 치료하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신부는 낼 모래 죽는다는 의사 선생님보다
희망과 위로를 주는 의사 선생님께 치료를 받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도 무서운 사제보다는 자비롭고 온유한 사제가
되어야 신자들이 편하게 자신에게 올 것이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신부가 여동생의 옷을 사주기 위해 백화점에 들어갔습니다.
한 옷가게에 갔더니 판매원이 그 신부의 아래위를
훑어보더니 다짜고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손님은 상체보다 하체가 짧기 때문에 칠보바지는 피하시고
짧은 반바지나 다리를 길게 보이게 하는 바지를 입으셔야겠습니다."
그 친구는 허리에 철심을 박았기 때문에 상체가 더 깁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분이 나빠 다른 가게로 옮겼습니다.
그곳 판매원은 정반대였습니다. 지나치게 친절했고
모든 것에 있어서 칭찬만 해 주었습니다.
동생이 자신이 고른 옷을 입고 나오자 또 매우 잘 어울린다며
마치 동생을 위해 만든 옷 같다고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오빠가 볼 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옷이었습니다. 그 판매원이
무조건 팔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오빠는 좀 전의 냉철하게 판단해 주었던 판매원이 있는
가게로 가서 옷을 사기로 결심했고 그 판매원의 조언에 따라 옷을 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좋은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구나!'라고 느꼈다고 합니다.
결국 가장 좋은 것은 하나의 성격의 두드러지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다 지니되 중도를 지킬 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콘을 보면 어떤 이콘은 예수님의 양쪽 얼굴을
다르게 그려놓은 것들이 여럿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왼쪽은 자비롭고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고 오른쪽은 무섭고 정의로운 모습을 지니게 그린 것입니다.
이는 작가들이 실제로 예수님의 한 얼굴에 자비와 정의를 일부러 그려 넣은 것입니다.
하느님에겐 반대로 보이는 두 성격, 즉
자비와 정의가 공존합니다. 용서와 심판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만약 인간이 자비와 사랑만을 강조하게 된다면,
오리게네스와 같은 신학자들이 빠졌던 것과 같이, 마지막 날엔
지옥이 사라지고 마귀들까지도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오류에
빠지게 되고, 정의만을 강조하게 되면 길거리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만을 소리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이 두 극단을 조화시킬 수 있는 힘이 바로 예수님을 만든 것입니다.
성모님은 처녀이면서도 어머니셨습니다.
이렇게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성격이 공존하기에
성모님은 보통 사람과는 다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서도
서로 상반되는 성격이 공존하는데 두 성격을 공존
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큰 사람인 것입니다.
제가 이명치료를 할 때 느낀 것인데, 한방에서는
양방에서 이명을 치료할 수 없는 이유를 양방에선
어디가 아프면 그 부분만을 보려고 해서 그렇다며 자신들은
내부와 외부의 전체적 기능에서 오는 이유들을 찾아내고
그것을 치료함으로써 이명을 줄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는 턱과 목과 척추까지 틀어져서
턱 밑의 긴장된 근육이 신경을 눌러 이명이 들리는 것
같다며 전신 척추의 사진을 찍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양방병원에 가서 엑스레이를 찍어달라고 했더니
귀가 안 좋은데 왜 척추를 찍느냐며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식으로 한방의 의술을 좋지 않게 말했습니다.
한방에서는 양방의 기술에 도움을 청하였는데
양방은 한방을 이해할 수 없다고만 하는 모습을 보며,
둘이 합쳐지면 더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질 것 거란 생각을 했습니다.
한 쪽만 옳다고 믿는 것은 다른 쪽의 좋은 점을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성격이 더 좋고 저 성격이 더 나쁘고 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성격이 옳다고 느끼고 상반되는 성격이 나쁘다고
생각할 때 잘못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해도 부부가 서로 상반되는
성격을 가졌을 때 더 잘 맞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로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뱀과 같은 면과 비둘기와 같은 면을 동시에 지닐 것을 명령하십니다.
뱀처럼 슬기로우면서도 비둘기처럼 온순하고, 또 비둘기처럼
온순하지만 말고 뱀처럼 슬기로우라고 하십니다.
뱀과 비둘기가 한 우리에 함께 있다면 둘 중의 하나는
죽어야겠지만, 실제로는 그 두 상반되는 성격을
한 우리 안에 넣는 능력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균형 잡힌 사람이 되어 하느님을 닮게 됩니다.
이 균형은 바로 나와 상반되는 성격을 인정하고 그것 안에서
장점을 찾아내어 나에게 적용시키려고 노력하는 데서 얻어집니다.
세 명이 걸어가면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성격이 상반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나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성격은 원래 이래!’라고 단정 짓는
것보다 ‘나는 이런 성격도 저런 성격도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아.’라고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말라.”
그분께서 내 뒤에 /양승국신부님
서품이나 종신서원을 하고 첫 사목지로 파견되는
형제들을 바라보면서 지난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오랜 양성 기간을 끝내고 드디어 파견되는 첫 소임지입니다.
그 어려운 신학공부, 오랜 초기 양성기간을 일단락 짓고
새 출발하는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기대감에 밤잠도 설칩니다.
만나게 될 아이들 생각에 가슴도 설렙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두려움도 큽니다.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겠는가?’ ‘
혹시라도 사람들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어쩌지?’
짧게나마 예수님으로부터 ‘특별 제자교육’을 받고
전도여행을 떠나는 제자들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기쁨, 가슴 설렘, 기대감도 컸겠지만,
갖은 걱정, 불안감, 당혹감도 교차했을 것입니다.
‘나는 말주변이 없는데’ ‘나는 체력이 약한데’ ‘나는 남들 앞에 서면 완전히 쫄아드는데’
이런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조목조목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치고 계십니다.
여러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 오늘 복음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무엇보다도 모든 근심을
아버지께 맡기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무능력, 소심함을 걱정하기보다는
아버지의 능력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하실 것인데
미리 앞서서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계속되는 불볕더위 가운데 하늘은 장관입니다.
휴식시간에 잠깐 평상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니 강렬한
햇볕과 쪽빛 하늘, 뭉게구름의 조화가 환상입니다.
햇볕이 강하니 온갖 초목들도 제 색깔을 되찾습니다.
완연한 초록입니다.
마찬가지겠지요.
하느님 은총이 강하니 부족한
우리들도 저마다 제 빛깔을 되찾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무한한 은총으로 인해
우리의 나약함이 강건함으로 바뀝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들이 평화로 변화됩니다. 우리
내면의 모든 두려움들이 담대함으로 변화됩니다.
우리를 파견하시지만, 절대로
홀로 보내시는 주님이 아닙니다. 든든한 동반자,
강력한 협조자, 하느님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십니다.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의식,
내 뒤에 그분께서 받쳐주고 계신다는 생각,
그분께서 지속적으로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야말로
복음 선포자가 지녀야할
최우선적인 마음자세입니다
조심하여라, 그러나 두려워하진 마라 /김찬선신부님
오늘 복음은 이제 복음 선포를 위한 여행을 하면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조심하라 그러나 두려워할 것까지는 없다.
남자는 늑대, 여자는 여우.
남자는 다 도둑놈.
통념적으로 형성된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인간관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들을 쓰는 속뜻은
아무리 양의 탈을 쓰고 있어도 정체는 늑대임을 알라는 것이고,
그러니 믿지 말고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주님께서도 그 파견이
양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고 걱정하십니다.
이것은 처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는 부모마음과 똑같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당신들 보호아래만 있던 자식이,
그래서 지금까지 보호를 떠난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자식이
처음 보호를 떠나는 것이 우선 걱정이고
보호 없이 맞닥뜨려야 할 사람들이 당신들과는 달리
자식들을 잡아먹으려 호시탐탐 노리는 것이 두 번째 걱정입니다.
그러나 걱정의 본질은 자식에 대한 걱정입니다.
아직 믿음이 가지 않습니다.
보호 없이 살 수 있을까?
사람들이 다 부모와 같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이리와 같은 사람을 그렇게 믿었다가 잡혀먹는 것은 아닐까?
좋은 사람이지만 부모와 같을 것이라 믿었다가 실망하고
좋은 사람을 잃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아직 믿음이 가지 않고 걱정이 되지만
세상에 아니 내 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내 보내면서 단단히 타이르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만날 사람들은 이리들이고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
그러니 조심하여라.
그런데 조심만 해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각오를 해야 합니다.
걱정하고 조심해도 결국 닥칠 것은 닥치기 때문입니다.
각오 없이 조심하면 될 것이라 생각하다 맞닥뜨리면
감당하기 힘들 것이고
당황하게 될 것이고
끝내는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각오하고 준비하면 차분히 맞이할 것이며
해야 할 것을 끝까지 해낼 것입니다.
그 각오가 죽을 각오라면
두려울 것도 없고
못 이룰 것도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최악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이리 같은 사람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각오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와 부모와 자식이 이리 같은 짓을 할 것도 각오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복음 선포를 하는 경우에는 주님 때문에
부모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미움과 핍박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죽을 각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몰아내는 것은
주님께 대한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비둘기처럼 닥칠 모든 것을 순박하게 받아들일 용기를 주시고
뱀처럼 해야 할 말을 잘 할 수 있는 지혜 주실 것이라는 믿음 말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우리는
‘왜 나에게!’,
‘왜 이런 것이 나에게!’,
‘왜 그 사람이 나에게 이런 짓을!’을 하고 거칠게 따지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차분히 해야 할 것을 해나갈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거부하고 따지고 흥분하다
해야 할 일 하나도 못하는 바보짓을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손길 안에 /홍영선 신부님
미사가 끝난 후 내리쬐는 햇빛이 참 곱다고
쳐다보다가 반가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이는 간 이식 수술을 하고 늘 마스크를 하고 미사에 왔는데
오늘은 환한 얼굴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습니다.
건강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 하자 사실은 지난주에 몹시 앓았다고 했습니다.
상태가 악화되어 재이식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진정이 되어 왔다면서 옆에 서 있던 부인은 눈물을 글썽입니다.
20퍼센트의 실패율이 있다고 하면 다섯 명 중 하나에, 30퍼센트의 재발 가능성이
있다고 하면 세 명 중 하나에 속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한 순간을 이야기했습니다.
그 모든 어려움을 겪고 나니 오히려 이제는 마음이 편하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더 살게 해주시면 더 살고, 일찍 데려가시면 그대로 맡기겠다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에는 자신이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교만한 마음도 있었지만 사람이 자랑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별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이 교우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다 풀잎과 같이 연약한 인생을 살고 있지요.
인도하시는 목자의 뒤를 따라 걷고,
어려운 때를 만나면 그분께 의지하며 견뎌나가는 인생이지요.
왜냐하면 인생은 막막한 우주 공간에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자비하신 하느님의 손길에 싸여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슬기와 양순함이.../박재현 신부님
예수께서는 사도들을 불러 권능을 주시고 파견하십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떠나 보내시는 예수님의 걱정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하십니다.
그러면서 목자 예수님은 양들에게 닥쳐올 위험을 말씀하십니다...
의회에 넘겨져서 매질을 당할 것이요 채찍질 당할 것이며 총독과 왕들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을 것이며 서로 고발하여 죽게 할 것이며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 라고 하십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양순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슬기와 양순함이 닥쳐올 어려움을 이겨내는 열쇠입니다.
비둘기처럼 양순하여라. 200주년 성서는 "순박하여라"로 번역합니다.
악한 것에 물들지 않는 것, 흠잡을 데 없이 순결한 것, 이것이 양순함의 의미입니다.
죄 없이 순결한 사람. 깨끗한 사람은 닥쳐올 위험 앞에서도 두려움이 없습니다.
제자들은 먼저 순결함, 양순함, 깨끗함으로 무장을 해야 합니다.
슬기로움은 무엇인가?
마태오 복음서는 현명함을 이렇게 3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마태 2, 24)
2.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사람을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주인이 돌아올 때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다가 주인을 맞이하는 종이 아니겠느냐 (마태 24, 46)
3. 신랑이신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고 기다리는 사람이 슬기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등잔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준비하고 깨어 있는 것,
그것이 슬기입니다. (마태 25, 2 + )
순결함, 깨끗함으로 무장하고 말씀을 실행하고 깨어 준비하고
맡겨진 책임을 다하는 것. 그것이 어려움과 위험을 물리칠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고,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어서
현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1고린 4, 10) 그리스도를 믿음이 슬기며 현명함입니다.
파견된 제자의 덕목 - 슬기롭고 순박하게 /여성국 신부님
얼마 전 미사 때 성체를 분배하다가
성체 가격(?)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성체 값을 낸 그 자매는 약간의 정신 지체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미사 때마다 성체를 영하러 나오는 그 자세가 너무 불량했습니다.
어느 날 미사 시작 전에 시간이 남아서 이 자매에게 영성체 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다음 미사 때 성체 값으로 바나나와 토마토를 주는 겁니다.
성체를 분배하는 도중이라 순간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내심 사제품을 받은 후 받았던 선물 중에
가장 가치 있는 것 중 하나였기에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슬기로움’과 ‘순박함’의 덕목을 갖출 것을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미사 때마다 예수님으로부터 파견을 받습니다.
파견받은 제자로서 우리 또한 슬기롭고, 순박해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을 사는 우리는 순박함이 더욱 더 필요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영악스러울 정도로 슬기롭지(?) 않습니까?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백남국 신부님
예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박해를 각오하라고 하시면서
가족 안에서까지도 서로 불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만큼
복음을 철저히 살아가야 함을 강조하신 말씀이겠지요. 그런데 한편으로
주님께서는 또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 하시며
무조건 맞서기보다는 조금 더 지혜롭게 그 난관을 극복할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뚜렷이 드러나는 박해는 없을지라도 지금 역시 수많은 어려움이
우리의 믿음을 공격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슬기롭고 무엇에 순박해야 하는 것일까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물러서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우리의
적으로 돌리지 않는 슬기로움이 아닐까요? 또한
성령께서 이끄신다는 믿음으로
온유하게 박해자들 앞에 맞설 수 있는 여유로움이 아닐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면 우리를 적대하는 자들 앞에서 온유해질 수가 있지요.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참 부끄러운 기억이 많이 떠오릅니다.
온유해야 할 상황에서 얼마나 자주 화를 내고 분노를 터뜨렸는지요.
그만큼 자신감이 없었다는 뜻이겠죠. 또
슬기롭게 주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할 시점에 얼마나 무식하게 몰아세우며
그들에게 주님께 대한 반감을 심어주었는지요.
주님을 증언하는 데 슬기로움과 순박함보다 더 효과있는 무기가 있을까요?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의 말씀처럼 저의 삶이 슬기롭고
순박하게 성령 안에서 신앙을 잘 증언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기 바랍니다.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장재봉 신부님
우리는 예수님의 사도단입니다.
예수님 께서 손수 뽑아주신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갖고 오신 그 능력을
“세상이 끝날 때 까지” 우리들이 전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지신 그 힘을 세상에 전하기 위한
‘그리스도의 군사가 바로 우리들이다’라고 하면
더 적절한 표현이 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들은 예수님께
아주 요긴하고 필요한 사람들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로 모인 우리 교회는 즐기기 위한 사교모임일 수 없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이해관계로 모인 단체가 되어서도 안됩니다.
참된 삶 의 공동체란 그분께서 사시기에 합당한 거처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이룬 이 공동체는 순수한 사랑의 집단이며
성령으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심에 잠겨있는 축복의 공동체입니다.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고 행하는 일이 세상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우리들이 추구하는 바는 세상이 바라고 원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이 세상에서 어리석다 하면
틀림없는 예수님의 일이라는 것을 믿으십시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 세상에서 잘나지 않았다 면 더욱 감사하십시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을 더 닮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 은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세상에서 우리들이 겁먹을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누누이 밝혀 주십니다.
예수님은 나를 뽑으실 때에도 밤새워 기도하셨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헤아렸다는 것 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하느님 나라를 넓히시기 위해
나에게 필요한 힘 을 쏟아 주고 계심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 나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간구하고 계시는 사실에 감사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오로지 성령의 힘을 믿는 것만으로 “의인”이라 불러 주시는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면서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음을 고백해 드리고
맑은 영혼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맑은 영혼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자유.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하느님이기에”, “예수님이기에”, “내 이웃이기에”
비록 나에 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일지라도
사랑하신 하느님의 뜻을 위해 사랑하는 것. 참 자유입니다.
예수님이 누렸던 바로 그 기쁨입니다.
오늘 하루, 나를 심판하시지 않고, 자비로이 용서하시어
구원하시기 위한 그분의 뜻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 뜻을 꺾어 바치면서 그 수를 헤아려 보아도 좋겠습니다.
얼마 만큼의 잔 꽃송이를 드렸는지 계산해 보도록 합시다.
못난 내 마 음을 꺾어 그분의 부드러움을 접목시킨
그 자리마다 고운 꽃 한 송이 피어 있을 것입니다.
잠들기 전 그 분 앞에 그 꽃다발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진리로 자유로운 복된 자입니다.
나의 자리 /김동엽 신부님
오늘날 많은 사람이 대인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습니다.
저 또한 무대공포증이 좀 있습니다. 신학교에 입학하고 5년 동안
저한테 심한 스트레스를 준 것은 독서직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래서 사제직은 저의 꿈이면서도 언제나 두려움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다 드디어 독서를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엄숙한 전례 분위기에서 교수 신부님들이 뒤에 앉아 계시는 가운데
마침내 저는 독서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이제는
신부가 되어 미사 강론을 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
제가 특별히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노력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리,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기에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가끔 모임에 가면 ‘한말씀’ 을 부탁받기도 합니다.
이것도 저한테 큰 짐입니다. 그런데 미리 준비를 하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는 시키지 않고, 아무런 준비가 없을 때 꼭 이런 청이 오곤 했습니다.
그러면 문득 생각나는 것을 차근차근, 겸손하게 전합니다.
오히려 그것이 신자들에게 더 좋은 것이 되었습니다.
앞의 경우와 똑같습니다.
오늘 말씀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
제자들을 파견하는 주님의 마음은 어떻게든 우리를 격려하고
용기를 주려고 하십니다. 제자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시는 주님은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서 보내신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상황에 맞춰 준비하고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누구를 위해 한 일이 다른 누군가한테는 상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한계를 갖고 살아갑니다. 특히
하느님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자신의 한계를 고백하고 그분께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으면 하느님은 이런 우리를 통해
당신 일을 하십니다. 주님께서 당신 일을
하시도록 하는 게 바로 우리의 일이 아니겠습니까 ?
걱정 /홍금표 신부님
걱정하지 말고 박해를 견디라! 한동안 우리 사회는 아이들의 성공적인 삶을
위해 지능지수(IQ)를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감성지수가 관심의 대상이
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지능이나 감성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지수와 고통을 견디는
능력들이 성공적인 삶을 위해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교육현장에서 도덕지수(MQ)란
용어가 사용되고 유행처럼 번졌던 극기훈련도 이러한 이론을 바탕에 두고
있습니다. 구원도 같은 이치입니다. 박해라는 고통스런 상황을 어떻게
견디느냐에 따라 구원의 열쇠가 거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도 같은 의미입니다. 이 말은 걱정해야 할 상황에서
걱정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성경에 나오는 걱정이란 말은 해야 할
일이나 사명을 위하여 기울이는 적극적인 관심을 말합니다. ‘한 가지 필요한
것(하늘 나라)’을 위해 현세에 대한 모든 걱정을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걱정에 대한 성경의 정의입니다.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는 말씀의 요지는
성령에 대한 믿음 안에서 미래에 일어날 일에 대한 관심으로 마음의 중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과 함께,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현재 나에게 부여한
중요한 사명, 즉 복음 선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나를 싫어하게 하라 /남상근 신부님
모두가 나를 좋아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무도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수상한 것입니다. 마냥 좋기만 한 평가를 받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이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것과 일치하지만은 않는
법입니다. 독불장군처럼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새겨보면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기에 세상으로부터 받을 수밖에 없는 미움이
반드시 있어야만 합니다. 복음을 내 삶에서 온전히 지켜내기 위해서
더러 미움받기를 원해야 합니다. ‘왜 그렇게 사람이 꽉 막혔어’ 내지는
‘융통성이라곤 도무지 없네’, ‘혼자서만 거룩한 척하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튀게 살아.’ 누군가로부터 이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의 삶이 복음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 때문에 미움받지 못함을 부끄러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니 모두로부터 받는 인정을 구할 것이 아니라, 미움받을 것을
불사하고라도 마냥 좋은 사람이 되려는 환상에서 벗어나
주님 보시기에 충실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청합니다.
주님은 언변의 마술사 /노성호 신부님
말주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인물의 전형이 바로 나다.
왜 그리 멋쩍고 창피하던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발표할라치면 원고를 준비하고 충분히 연습한 끝에 시도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이다음에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할 수 있을까?’ 하고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제가 된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제품을 받고 처음 강론하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를 준비하고 강론대에 섰는데 긴장한 탓에
신자석에 앉은 교우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강론 원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작정 입을 열었다.
시작 부분은 좀 얼버무리고 주제에서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점점 교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원고 없이도 강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강론할 때인 것 같다.
강론 준비를 잘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가 그만
준비도 못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을 빌미로 강론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며 당신 일을 하실 때
나를 당신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이 생겼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견디는 이한테는 구원이 따를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때문에 /강석진 신부님
대체로 사람들은 ‘마음의 평안’을 얻고
‘참된 사랑과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며’, 또는
‘잘살고 싶은 마음’에서 신앙을 갖는다고 합니다.
유한 (有限)한 세상에서 무한 (無限)을 꿈꿀 수 있는 신앙의 가치,
모든 것이 다 변한다 할지라도 절대자인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에 대한 온전한 의탁 등은 신앙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기에
그러한 생각을 할수록 마음 한편에 잔잔한 기쁨이 젖어드는 듯합니다.
바로 그때, 복음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말씀의 배경은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심각한 박해 상황에 대한 긴박한 묘사와 그 당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현실을 한마디로 말해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순교 역사가 지나가고
오늘날 대부분의 나라가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는 이 시점에서
이 말씀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지나온 교회 역사에서 ‘예수님’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았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모든 사람들에게 미움 받을 짓 (?) 을
오히려 더 충실히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물질만능이 팽배한 세상에서 비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것이 참으로 아름다운 삶임을 보여줄 때,
성적인 문란과 인간 생명이 경시되는 세상에서 배우자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성가정이 누리는 행복, 그리고 인간 생명에 대한 소중함이
무엇보다 우선적 가치가 되는 삶을 살아갈 때,
이 세상에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사는 이들에게
그분의 사랑이 얼마나 인생을 긍정적으로 살게 해주며,
그 어떤 어려움과 고통, 고난과 슬픔 속에서도 다시금 의연히
딛고 일어설 수 있는 힘이 있음을 보여줄 때!
세상의 사고와 판단에 맞서 주님 안에서 누리는 건강한 양심과
아름다운 가치를 믿고 살아가는 우리의 미움 받을 짓 (?) 이 어쩌면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며, 이 세상이 바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된 세상임을
용기 있게 드러내는 삶이 아닐까 합니다. 문득 세상의 미움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내가 내 가족과 이웃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간다면! 그런 미움, 매일 매일 받아도 좋겠네.
말씀의 봉사자 /안융 신부님
선교지에서 활동하는 형제들이 잠시 휴가를 보내기 위해 귀국하였습니다.
수년 만에 돌아온 그들은 검게 그을린 피부와 긴 여행으로 인한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은 생기가 돌고, 무척이나 밝아 보였습니다. ‘무엇이
이 형제들을 이토록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걸까? 분명 낯선 이웃, 다른 문화,
열악한 생활환경으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텐데 그들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기쁨의 원천이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말씀’이 되어 오신
‘주님’ 바로 그분 때문이리라 자문자답해 봅니다.
흔히들 선교사의 삶은 제2의 성소라고 합니다. 사제로서, 수도자로서
삶으로의 입문이 첫 번째 성소라고 한다면, 고국과 친지를 떠나 말씀의
전파자로서 살아가는 삶은 더 어렵고 힘들어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말씀의 전파자, 곧 선교사로서 파견되는
사도들에게 그들 앞에 펼쳐질 탄탄대로가 아닌 그들이 겪게 될 박해와 시련을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럼에도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으리라.’ 약속하십니다. 당신께서 그들에게 희망이 되어 주시고, 힘이 되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에 부여된 복음 전파자로서의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주님께만 희망을 두는 하루가 되도록 합시다.
영리하되 영악치 말아야 /김찬선신부님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며 하시는 주님의 이 말씀을 들으니
제가 군대 갈 때 서양 철학 교수님의 충고 말씀이 생각납니다.
군대 가는 제자들에게 일반적으로 하신 말씀인지
제가 그렇게 보여 저에게만 하신 말씀인지 모르지만
평소 선생님의 인품에 비추어볼 때
너무 뜻밖의 말씀을 충고로 해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말씀인 즉,
군대에 가면 요령도 배우고 영리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요령 피우면 안 된다고 말씀하실 분이 요령을 배워야 하고
영리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니 좀 의아스러웠지만
선생님 말씀이니 무슨 뜻이 있겠지 많이 생각했습니다.
영악하고 요령만 피우면 안 되겠지만
세상 물정 모르는 신학생이 세상 가운데 살아가려면
세상도 알아야 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요령도 알아야 하고
영리하게 처신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했고
그것을 배우는 좋은 기회로 군대를 삼으라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한 동안 우리 사회에서 회자된 말이 바보입니다.
바보 김 수환.
바보 노 무현.
모두가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추구하는데
반대로 바보를 추구한 사람이었다는 것이고
이것이 이들의 위대함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바보스러움이 칭송의 대상이 된 것은
똑똑하고 영리한 것을 추구한 것이 참으로 지혜로운 것이라기보다
영악한 것에 가까운 것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리함과 영악함은 사실 어쩌면 종이 한 장 차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다릅니다.
요령을 아는 것과 요령을 피우는 것이 다르듯
영리함은 남에게 해악을 끼치는 영악함과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리하되 영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되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라는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닐까 저는 생각해봅니다.
사람들 앞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 때
형제간에 그리고 부자간에 서로 거스르는 일을 당할 때
어느 마을에서 박해를 받을 때
하느님께서 계시고 하느님께서 해 주시는데
괜히 자기 힘으로 하려고 힘으로 하려하지 말고
하느님을 위해 순교해야 하는데
고작 인간에 의해 상처 받지 말고
내가 한 번 져주어 다른 곳으로 슬쩍 피하면 되는데
끝까지 어느 곳을 고집하며 맞서 싸우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그러고 보니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함은
자기를 버리고 하느님으로 채우고
자기를 고집하지 않고 하느님으로 무장한 사람의 경지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천국에 이르는 꽃길 /양승국 신부님
큰 도로에서 저희 수도원까지 올라오는 진입로가 있습니다.
산을 마주보며 걷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적당한 언덕길이지요.
언젠가 사목활동을 나갔다가 늦게 돌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밤늦은 시간, 기온도 뚝 떨어져 얼마나 추웠는지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장대비가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산도 없이 그 길을 걸어 올라오자니,
얼마나 멀던지, 얼마나 짜증나던지, 얼마나 또 무섭던지...
반면에 꽃 잔치가 계속되던 4월 말경,
그 길을 올라오는데, 정말 천국이 따로 없더군요.
진입로 왼쪽 언덕에는 노란 개나리꽃이 만발했습니다.
오른쪽에는 벚꽃이 만발했습니다.
바람이 불어오니 꽃잎들이 흩날렸습니다.
그 향기가 온몸으로 스며들었습니다.
배경으로 보이는 뒷산은 온통 연둣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중이었습니다. 황홀경에 빠질 정도였습니다.
그 길을 올라오자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습니다.
“주 하느님 지으신 모든 세계 ♬...”같은 노래가 저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똑같은 길인데, 어찌 그리 느낌이 달랐는지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네 인생길 마찬가지겠지요.
나 혼자 걷는다고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외로울 뿐입니다.
두렵습니다. 지루합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내 바로 옆에 동행하신다고 생각할 때,
주님께서 내 앞길을 인도하고 계신다고 확신할 때,
우리의 인생길은 날이면 날마다 천국으로 향하는 꽃길이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떠받치고 계신다고 생각할 때,
아무리 악천후의 날씨라 할지라도
찬미의 노래가 우리의 입술에서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을 위해
길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특별 정신 교육을 실시하십니다.
걱정이 많이 되셨기에 안쓰러운 마음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몇 가지 특별 당부를 하십니다.
그리고 가장 힘을 주시는 한 말씀을
추가하십니다.
그 말씀에 제자들을 용기를 얻습니다.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오늘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여정을 걸어가면서 절대로 두려워할 일 없습니다.
아버지의 영께서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께서 우리의 손을 꽉 잡고 계십니다.
할 말이 있을 때는 그분께서 대신 말씀하십니다.
그분께서 세상 끝날 까지 우리의 여정에 함께 하십니다.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하라 /강영구신부님
+이제 내가 너희를 보내는 것은 마치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양순해야 한다.
그대에게
세상은 살벌한 생존경쟁(生存競爭)의 장(場)입니다.
어떤 형태의 힘이든 힘을 가진 사람이 살아남는 곳입니다.
돈과 재물, 권력과 지위, 명예와 지식,
하다못해 완력(腕力)이나 폭력이라도 지녀야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새벽부터 밤늦도록 뛰어다는 이유도 이런 힘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스승 예수께서는 이런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마라.”(마태10,9-10)고 명령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하늘나라(天國)는 재력이나 권력이나 학력 따위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벌한 세상 한가운데 보냄 받은 비무장(非武裝) 무소유(無所有)의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자기를 내어줌이거나 잡아먹힘입니다.
사실 하늘나라(天國)는 내어줌과 잡아먹힘으로 도래(到來)합니다.
내어주지 않고 오히려 잡아먹겠다고 서로 덤벼들면 그때부터 지옥(地獄)이 시작됩니다.
이리 떼 가운데 보냄 받은 양이 살아남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이리 떼에게 자신을 비둘기처럼 양순한 모습으로 내어주는 것이 슬기이자 지혜입니다.
세상 한가운데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의 빵(요한 6,48)으로 이 땅에 오신
스승 예수님을 닮아서 이리들의 밥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당신의 오늘은 송두리째 자신을 내어주는 하루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당신은 행복할 것이며, 당신을 잡아먹는 사람도 행복할 것입니다.(一明)
♪ 내 안에 사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