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제자와의 만남은 가슴 설레는 일이다.
재작년 기업은행에 입사한 제자 도형이. 입사시험에 합격한 뒤 교무실로 찾아와 넙죽 엎드려 큰절을 하며 “선생님 덕분에 오늘의 제가 있습니다.”하고 겸손해했던 제자다. 일요일 저녁에 내 집 근처에서 만나기로 했다.
“선생님,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게요. 무엇이든 말씀만 하세요.”
“그래, 알았다. 목 빼고 기다릴게. 차 두고 오너라. 소주도 한 잔 하게.”
“네, 선생님!”
서울에서 내려오는 제자를 맞이하러 정거장에 나갔다. 제법 쌀쌀한 겨울바람에 턱이 시리다.
“아, 선생님! 나와 계셨어요?”
그레이블루 코트에 머플러를 휘날리며 버스에서 내리는 제자를 보니 가슴이 벅차다.
“도형아, 멋지구나! 장하다, 장해!”
2년 만에 보는지라 반가움에 몇 번이고 등을 쓸어 주었다.
인근 고기음식점에서 갈빗살을 구우면서 물었다.
“그래, 은행 일은 재미있고?”
“네, 제가 입사동기회 부회장을 맡고 있어요. 은행 일도 무척 재미있어요.”
지적인 안경테가 잘 어울리는 도형이의 눈이 반짝반짝 빛난다. 윤기 흐르는 얼굴에는 자긍심이 넘친다.
도형이는 고3 때 교실 칠판 지우는 일을 전담으로 맡아 아주 성실하게 봉사했다. 매 시간마다 칠판을 지우고 지우개를 터는 일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10분 쉬는 시간의 절반을 할애해야 하고, 8교시가 끝날 때까지 매시간 반복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런데도 도형이는 1년 내내 한 번도 이 일을 거른 적이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분필 가루가 칠판 턱에 쌓이는 일도 없었다. 물걸레를 곁에 두고 수시로 닦아냈기 때문이다.
“도형아, 칠판이 늘 깨끗하니 교실이 상쾌하구나. 고맙다.”
틈틈이 듣는 칭찬에 도형이는 멋쩍어하면서 웃었다. 도형이는 공부도 성실하게 했다. 그러나 요령이 부족한 탓인지 성적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도형이는 그해 4년제 대학 입시에서 모두 낙방했다.
“선생님께서 그 때 저를 붙잡아 주셨죠. 마지막에 전문대 원서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 갔을 때를 기억하세요?”
“글쎄다…….”
“무조건 재수해라! 반드시 네가 원하는 대학에 합격할 거다 하셨잖아요. 그 말씀이 제게는 어떤 암시랄까…… 계시처럼 들렸어요.”
“그랬구나……, 하지만 너는 네 힘으로 모든 것을 이루었다. 누군가의 암시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아도 원래부터 충분한 능력이 네게 있었던 거야.”
“늘 칭찬해 주시니 부끄럽습니다.”
긍정적인 격려나 칭찬은 인간의 성장을 돕는 훌륭한 촉매이다. 그래서 젊은 부모들은 칭찬의 기술을 활용하여 자녀를 성공적으로 키우려 애쓴다. 그러나 중년의 부모들은 그런 방식으로 아이를 키워서 실패했다고 한숨 쉰다. 부모 말은 들으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구는 아이가 되었다고. 이러한 모순의 원인은 칭찬의 기술을 오해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칭찬에는 진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진정성이 결여된 칭찬은 부작용을 불러온다. 진심으로 하는 칭찬과 다른 목적이 있어 시쳇말로 살살 꼬이기 위해 하는 칭찬, 건성으로 하는 칭찬을 아이들은 정확하게 구별한다. 후자의 경우, 칭찬하는 입과는 달리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칭찬을 들어도 그 의도를 알고 씁쓸해한다. ‘우리 엄마는 늘 저런 식이야!’
칭찬은 일관되게 또 지속적으로 하여야 한다. 밥 잘 먹는다고 열 번 칭찬하다가 “돼지 같은 놈!”이라고 한번 소리치면 아이는 부모를 예측불허의 변덕쟁이라고 생각한다. 변덕쟁이의 칭찬이 자녀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조건이 달리는 칭찬도 바람직하지 않다. “너는 머리가 좋으니까 일류대학에 합격할 게 틀림없어. 노력만 한다면…….” 아이는 앞의 칭찬이 기쁘기보다 뒤에 붙은 조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현재는 내가 노력을 하지 않는다는 말이지.’ 조건이 붙은 칭찬은 아이를 격려하려는 부모의 의도와는 달리 자녀에게 질책이나 핀잔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진정성이 있고, 일관성 있으며, 조건 없는 칭찬은 자녀에게 기쁨을 준다. 이러한 기쁨은 자녀의 자존감을 높여 주고 성취동기를 불러일으키며 자발적인 노력을 촉발시킨다. 가식적이거나, 일관성이 없거나, 조건부로 하는 칭찬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약 좋다고 남용 말고, 약 모르고 오용 말자’는 표어는 칭찬에도 적용된다. 칭찬하고 싶어도 도대체 칭찬할 거리가 없다고 탄식하지 말자. 부모 마음에 쏙 들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노여워하지 말자. 자녀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우리 부모님은 칭찬해드리고 싶어도 할 거리가 없어.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아.’ 욕심을 조금만 버리고 아이들을 바라보자. 어릴 때 갖은 애교로 부모를 기쁘게 해준 아이들이 아닌가. 건강하게 자라줘서 고맙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아서 고맙고, 곁에 있어서 늘 고마운 우리 아이들이 아닌가.
(2009.MBC여성시대.신규진)
저자에 대하여...
저자 신규진은 연세대학교 지구과학 80학번 동기생으로 지질학과 졸업후 인문사회과학대학원에서 상담공부를 하고 현재 서울 경성고에서 지구과학교사 겸 상담교사로 재직중이며, 학생들에게 참교육을 실천하는 자랑스러운 친구다. 딸은 인천국제고교생으로 성적뿐아니라 악기연주 및 교내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는 등 그 아버지에 그 딸, 체구는 자그마하고 술 한잔 하면 얼굴 벌개지는 순박한 친구지만 정말 존경스런 친구다.
내 동기생 중에 여러명의 현직 교사가 있는데, 대부분 ○선생 혹은 이놈 하고 부르지만 이 친구 한테는 신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선생 혹은 선생님에 대한 비판적인 나의 시각을 그나마 바로잡아준 친구이기도 하다.
ㅅ |
과학 교사, 카운슬러, 교육작가, 한국일보 교육칼럼 1년 연재. MBC여성시대 교육칼럼 1년 연재.이화여대복지관솔루션위원. 저서: "아이들의 성장을 돕는 학교 상담", "자퇴상담 학교를 떠나는 아이들", "가난하다고 실망하는 아이는 없다." "AnS 과학" 등 |
|
첫댓글 고맙고 감사 하다고 생각하면 정말 움직일수 있다는거 숨쉬는거 ....무엇하나 안 고맙고 감사 한게 없찌....
무지 아프고 난후...늘 덤으로 산다고 생각하니 세상이 모두다 그렇게 아름답고 감사 할수가 없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