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과 청화 큰스님의 위대함을 닮고 싶습니다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지선스님
절이 소풍 장소로만 인식되던 어린 시절, 법명을 들어본 스님은 당시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서옹스님과 주지 지선스님 둘 뿐이었다. 백양사가 있는 장성 바로 옆 고창 출신이어서인지 두 어른의 얘기는 지역의 선배나 언론 등을 통해서 심심치 않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부처님 일을 시작한 그해, 서용스님은 열반에 들었다. 어찌나 눈이 많이 오는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영결, 다비식이었다. 서옹스님을 가장 가까이 모셨던 지선스님은 활발한 사회 참여와 불교 개혁을 위해 진력했던 분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부처님 일을 시작하고 십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으로 후학을 제접하고 계신 지선 스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장성으로 향했다. 고불총림은 예전 그대로였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백암산 큰 바위를 바라보니 총림의 기상이 다시 느껴지는 듯했다.
…27~33쪽 생략
“탁발하러 나갔다 도인(道人)을 친견하고 왔습니다.”
고불총림의 완전한 복원과 참사람운동의 활성화 등을 강조한 지선스님은 화제를 청화 스님과의 인연으로 돌렸다. 지선스님과 청화 스님의 인연은 깊고도 넓었다. 스님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도 넉넉하지 않지만 제가 출가했을 때도 백양사는 살림이 아주 어려웠습니다. 수학여행 오는 학생들 받아서 먹고 살 정도였습니다. 사미계를 받고 강원에서 공부할 때였습니다. 공부할 책을 각자 마련해야 해 저도 도반과 함께 탁발을 다녔습니다. 백양사에서 탁발 나가는 코스는 남쪽으로는 장성을 출발해 목포로 가는 구간이 하나 있었고, 북쪽으로는 정읍을 거쳐 전주까지 가곤했습니다.
한번은 남쪽으로 탁발을 가려는데 주변에서 “무안에 도인이 계시니 시간이 되면 한번 찾아가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물어물어 무안 해운사로 갔습니다.
절에 도착해 물으니 조그만 토굴에 그 도인이 계시다고 그래요. 그래서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갔습니다. 처음 인사를 드리는데 저는 고행상의 부처님이 앉아 계신 줄 알았습니다. 더 설명이 필요 없는 부처님 고행상 말입니다. 말씀도 여쭙지 못하고 인사만 드리고 나왔던 기억입니다.
그렇게 탁발을 갔다 돌아와 저는 더 깜짝 놀랐습니다. 그 어른은 운문암에서 출가하신 분이고 금타 대화상님의 상좌라고 해요. 우리 문중 어른인데도 저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갔거든요. 나중에 보니 백양사 어른들은 청화큰스님에 대해 다 알고 계셨습니다. 저만 모르고 있었던 셈입니다.”
당시 청화 스님은 초인적인 수행을 이어가던 시기였다. 그렇게 강렬한 만남을 한 뒤에도 청화 스님은 수행정진을 계속했고, 지선 스님 역시 수행과 포교를 병행했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남이 찾아왔다.
“큰스님께서 곡성 태안사에 계실 때 저를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태안사 토굴로 갔습니다. 문 밖에서 말씀을 올리니 큰스님께서 맨발로 나오면서 손을 덥석 잡아주셔요. 너무 반가워해주셨습니다. 그때 저는 한창 재야 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께서는 걱정과 격려를 함께 해주셨습니다.
“자네는 생사를 걸고 활동을 하고 있네. 대중을 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몸도 잘 챙겨야 하네. 또 수행을 놓치지 않아야 하네.”
“저도 수행의 하나라고 생각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해보니 어떤가?”
“수행자가 어떻게 하면 개인 구원을 할 수 있고 또 어떻게 하면 수행자가 사회 현실 참여를 통해 사회 구원을 함께할 수 있을지가 궁금합니다. 이것은 제 마음속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해 사실 고민이 좀 됩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자네 스스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태안사에서 몇 차례 만나면서 청화 스님과 지선스님은 진솔한 얘기를 나눴다. 곡성 성륜사로 주석처를 옮긴 청화 스님이 또 지선 스님을 불렀다. 불교 안팎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졌다. 성륜사 조선당을 나올 때 청화 스님은 꼭 마당까지 나와 지선 스님을 배웅했다.
“태안사에도 그랬고, 큰스님을 뵙고 나올 때면 항상 여비를 주셨습니다. 작은 돈이 아니라 100만원씩 주셨어요. 1980년대 중후반에 100만원이면 상당히 큰돈입니다. 계속 주시니 제가 사양을 했습니다. 그러면 큰스님께서는 ‘내가 자네보다 부자라네. 받으소. 자네가 이 돈을 어디에 쓸지 다 알고 있으니 받아야 하네.’하며 한사코 주셨습니다. 그때 큰스님께서 보태주신 돈은 제가 단체 활동을 하면서 아주 요긴하게 썼습니다. 큰 스님의 도움으로 회원들이 회비도 내기 어려울 때 저는 빼먹지 않고 회비를 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실무자들이 저를 더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계속된 만남 속에서 청화스님은 따뜻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자네 안의 갈등은 다 극복이 되었는가?”
“완전하게 해소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이 불교 운동의 맹아기인데, 제가 잘 못하면 큰 누가 될 것 같아 조마조마합니다.”
사회 활동을 하면서 지선스님은 정부의 탄압은 물론 민주 진영 내의 크고 작은 갈등 때문에 여러 어려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때마다 청화 스님의 조언은 큰 도움이 됐다. 청화 스님은 지선스님이 투옥됐을 때도 면화를 주저하지 않았다.
“제가 광주교도소에 있을 때 교도관이 ‘스님이 면회를 오셨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나가 보면 큰스님께서 오셨어요. 저는 깜짝 놀랐죠. ‘어떻게 이렇게 멀리 오셨습니까?’ 하고 여쭈면 ‘잠깐 틈이 나서 들렀네. 건강하게 잘 있는가?’라고 위로를 해주십니다. 너무 감사한 일이죠. 영치금도 넉넉하게 넣어주셨습니다. 35쪽
나중에도 그렇게 갑자기 오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가 암수술을 하고 시골의 요양병원에 있을 때도 밤늦게 찾아오셨습니다. 그때도 ‘지나가다 들렀네.’라고 하시며 치료비를 보태주시고 가십니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했습니다. 큰스님께서 젊은 시절 고행하실 때 얘기를 해주시면서 몸을 잘 돌보라고 당부를 해주셨습니다.“
“큰스님은 진짜 대종사”
청화스님은 지선스님을 상당히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 지선 스님이 고초를 겪을 때면 어김없이 나타나 격려하고 등을 두드려줬다. 이런 인연은 청화 스님이 곡성 태안사에서 성륜사로 주석처를 옮길 때에도 큰 밑거름이 됐다.
“지금의 성륜사 터를 기증한 분은 아산 조병원 화백입니다. 아시다시피 그분은 남종화의 대가였습니다. 그전부터 저와 인연이 있어 가끔 만나서 마음을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저에게 성륜사 자리에 남종화의 총본산을 만들려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는데 여러 가지 장애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총본산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그 터를 기증하고 싶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청화 큰스님께 추천해드렸습니다. 아산 선생도 큰스님을 잘 알고 계시던 차여서 그렇게 하자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논의가 시작돼 청화 큰 스님의 근본도량으로 성륜사 불사가 진행됐습니다. 남종화의 총본산은 되지 못했지만 청화 스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도량이 되어서 저도 아주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선스님은 청화 스님을 만날 때면 불교계 안팎의 소식에 대해서도 자세히 보고를 했다. 지선 스님은 특히 ‘청화스님 외도설’에 격분했다. 누구보다 청화 스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흑색선전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지선스님은 청화스님에게 그간의 일을 전했다.
“밖에서는 자꾸 큰스님에 대한 왜곡된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적극적으로 해명을 해도 말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허허, 나는 괜찮네.”
그러면서 청화스님은 지선 스님에게 평소 가까이 두고 보던 <금강경>과 <육조단경>을 꺼내 보여줬다.
얼마나 많이 봤는지 형형색색의 메모가 빈틈없이 적혀 있었다.
탐독의 흔적 때문인지 경전이 너덜너덜해졌을 정도였다.
“나는 절대 이 두 경전의 말씀에 어긋나게 살아본 적이 없다네. 그러니 너무 신경쓰지 말게.”
지선스님은 청화 스님의 진심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수행자로서의 청화스님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 어른은 이사(理事)가 무애(無碍)하고 또 이사에 통달한 대종사입니다. 정말로 선교(禪敎)에 통달한 대종사에요. 이름뿐인 대종사가 아닙니다. 진짜 대종사를 만난다는 것은 큰 복입니다. 불자로서 최고의 영광이고 행복입니다. 저는 그런 복을 누린 사람입니다. 일부에서 큰스님은 염불선만 한다며 외도라고 폄하했지만, 그 어른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큰스님은 염불선만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모든 수행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회통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원통불교를 주창하셨기 때문에 더 위대하신 것입니다.”
지선스님은 2017년 가을쯤 백양사 부도전에 조성될 예정인 금타 스님의 비에 들어갈 글을 직접 썼다. 생전 청화스님이 아꼈던 지선스님이 금타 스님의 비문을 쓰는 것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지선스님에게 2017년을 맞는 국민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씀을 청했다. 스님은 잠시 호흡을 정리했다.
“우리 백양사에서 정진하셨던 학명 선사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서 사네.
학명선사는 불성 자리도 그대로고 해와 달과 하늘도 변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생사운회를 끊고 견성성불 하는 것이 우리의 1차적인 목표지만 세상의 인간적인 가치와 사회적인 정의에도 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특히나 2017년에는 ‘참사람’처럼 깨어 있는 시민이 역사의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줄 것을 요청드리고 싶습니다.”
지선스님은 “온몸으로 보여주는 진실한 행동이 필요하다. 우리 불자가 역대 조사계서 강조하셨던 가르침을 국민에게 증험시켜줘야 한다”며 강조했다.
지선스님에게 마지막 질문을 꺼냈다.
“청화 큰스님의 어떤 점을 닮고 싶습니까?”
“제가 부처님한테 닮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위대한 버림’, ‘위대한 정진’ ‘위대한 회향’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위를 버리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 정진을 한 뒤 도를 깨달아서 중생을 위해 살다 열반에 드셨습니다. 이 세 가지를 꼭 닮고 싶습니다.
그런데 청화 큰스님께 부처님의 이 위대한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삶 자체가 부처님과 거의 같아요.
부처님과 청화 큰스님의 ‘위대한 버림’, ‘위대한 정진’
‘위대한 회향’을 꼭 닮아 보겠습니다. 40쪽 2017.5.27.(토) 05:00 타이핑중
오늘 아침 타이핑한 부분입니다.
오늘은 좀 특이해요. 저는 아무리 애써도 보통 4시 전에 일어날 수가 없는데 오늘은 3시 20분에 일어났습니다. (평상시는 4:20 기상시각) ^^ 놀라운 일이지요. 오늘부터 이 책을 타이핑하고자 마음 먹은 덕분이라고 생각해봅니다. ^^ 고맙습니다.
오늘 하루도 모두 평안하소서!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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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_()_()_()_
가슴은벅차오르고 눈엔눈물이흐르는아칩입니다.감사합니다.
'청어남'이 되셔서 큰스님을 진정으로 기쁘게 하셔야...나무아미타불...()()()...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미타불_()_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_()_
감사합니다 아미타불 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