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CK 씨
손 창 섭
뭐 남달리 키가 훤칠하게 크다거나 막대기처럼 말라깽이가 되어서 ‘스틱 씨’ 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아니다. 도리어 그와는 반대로 자그마한 키에 절구통 모양으로 딱 바라진 몸뚱이인 것이다. 그러한 준호의 부친이 스틱 씨라는 별명으로 유명해지게 된 것은 단지 그의 손에서 잠시도 스틱이 떠나본 일이 없다는 사실에 연유한 것이다. 준호의 부친은 단장을 들지 않고 외출하는 예가 없었다. 우산대처럼 손잡이가 꼬부라지고 반들반들 길이 든 그 등나무 단장을 의젓하게 내짚으면서 골목을 걸어 나가는 것이다. 한길에 나서면 스틱 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애용의 소프트 모자(중절모)를 한번 벗었다가 고쳐 쓰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한충 더 근엄한 표정과 점잖은 자세로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물론 단장은 한결 더 힘차게 내두르면서.
그러한 스틱 씨를, 지나는 사람들이 길을 비키고, 아이들은 일부러 돌아서서 바라보고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다.
연대가 오랜 소프트 모자며 여차하면 지나가는 사람을 후려갈길 것 같은 단장이며, 턱 밑의 노랑 수염이며, 작달막하나마 야무지게 되바라진 몸집이며, 딱딱하고도 강직해 보이는 얼굴이며가 모두 주위를 위압할 만한 위업을 갖추고 있는 듯이 보이기 때문이다. 스틱 씨 자신, 그러한 자기의 위풍에 은근히 만족하고 도취해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씨는 아는 사람이 인사를 하여도 결코 웃음을 보이는 일이 없다. 그저 한쪽 손을 올려 의젓이 소프트 모자를 들었다 놓을 뿐이다. 함부로 웃음을 짓는 날이면 자기의 그 근엄하고도 품 있는 위풍이 단박에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만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 민의원에 입후보했다가 낙선된 이후로는 씨의 근엄한 위풍은 한 등 격이 높아진 감이 있었다. 이러한 스틱 씨는 외부에서만 강직하고 근엄하고 위엄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 있어서도 그러하였다.
가족들과 한자리에 둘러앉아서 지껄이고 웃고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씨 자신만이 그러는 게 아니라, 식구들이 잡답을 나누며 웃고 떠들어도 점잖지 못하다고 일쑤 나무라는 것이었다. 집안에서는 누구 하나 마음 놓고 농담을 하거나 함부로 소리를 내어 웃을 수도 없었다.
모친을 비롯해서 큰형님이나 출가한 누나도 그랬으니까 준호나 그 밑의 조무래기들은 어림도 없었다.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도, 문 밖에서 우선 부친이 집 안에 있나 없나부터 살폈다. 부친이 있는 줄만 알면, 문도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해서 여닫았고, 숨소리조차 크게 못 쉬 ㅆ다. 이처럼 무섭기만 한 부친이고 보니, 준호네 형제들은 부친에게 히거나 안기기는 고사하고, 옆에 가 기댄다거나, 매달려본 기억마저 없이 자라났다. 그러니 준호네 집 안은 언제나 빈집처럼 조용했다. 마치 팬터마임을 보는 듯, 거의 말없이 움직이기만 했다.
이렇듯 가족들을 부당하게 위압하고 구속하는 데 사용하는 부친의 전용어는 따지고 보면 극히 단순한 두 마디뿐이었다. ‘버릇이 없다’ ‘점잖지 못하다’ 하는 그것이다. 오늘 아침만 해도 준호는 부친에게 톡톡히 닦이고 나온 참이었다. 사건은 이러했다. 준호는 대학에 입학한 뒤로 반년이 넘은 요즈음에 와서야 처음으로 구두를 맞추어 신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몇 달을 두고 별러오던 끝에, 꾸지람을 들어가며 장기간 계속한 모친의 교섭이 성공한 탓이었다.
여태까진 주로 부친이나 형의 퇴물을 마지못해 주워 꿰고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준호가 생전 처음으로 맞춤 구두를 신어보게 된 터라, 아주 멋진 최신형으로 주문을 했다. 완성된 구두는 발에도 꼭 맞았고, 모양도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은근히 부친이 뭐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그랬더니 그예 그 구두가 부친의 비위를 건들어놓고야 만 것이다.
“점잖지 못하게 이게 뭐냐? 곰보딱지처럼 구두 코숭이에 돌아가며 구멍이 송송 나 있으니 대체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이냐. 유치원이나 국민학교 아동 같으면 또 모르지만, 대학생이 이런 경망스런 구두를 신고 백주에 나다닐 수 있느냐. 당장 가 물러 오지 못해?”
아침에 세수하고 들어오다가 아들의 최신형 구두를 발견한 부친은 대번에 이렇게 노발대발했던 것이다.
준호도 불쑥 반감이 치솟았다. 지나치게 완고하고 독재적인 부친의 태도에 평시부터 은근히 품어온 반감이었다. 비록 집을 쫓겨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몇 마디 쏘아주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러나 재빨리 눈치를 채고 모친이 막아서서 애원하듯 달래는 바람에 준호는 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화를 참느라고 준호는 눈물이 찔끔거려졌다. 조반도 먹지 않고 볼이 부어서 그 길로 집을 뛰어나오고 말았던 것이다.
준호는 그 길로 고등학교 때 동창이면서 대학도 한 반인 K군의 하숙을 찾아갔다. 마침 등교할 준비를 하고 있는 K군을 끌고 거리로 나왔다. 속이 좀 가라앉기 전에는 학교에도 나갈 기분이 나지 않았다. 준호는 영문을 몰라 하는 K군을 끌고, 어느 2층 다방에 올라가 대로에 면한 창가에 자리잡고 마주 앉았다. 준호는 조반 대신 토스트와 밀크를 시켜 먹으며, K군 앞에서 부친에 대한 불평을 쏟아놓고 마침내는 공격을 퍼부었다. 한참 동안 울분을 토하고 나니 한
결 속이 풀렸다. 마침 그때, 창밖을 무심히 내려다보고 있던 K군이 준호에게 눈짓을 했다.
“호랑이두 제 얘길 하면 온다더니, 바루 저기 너의 그 스틱 씨가 나타났다.”
준호도 얼른 창밖을 내다보았다. 근엄한 표정을 한 부친이 단장을 내저으며 점잖은 걸음새로 뜨적뜨적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애용의 소프트 모자를 단정히 쓰고 있는 부친은 언제나 마찬가지로 당당한 위풍이었다. 바로 그 몇 걸음 뒤로 두 명의 미국 군인이 따라 걷고 있었다. 그중 키가 작은 군인이 갑자기 앞을 걸어가고 있는 스틱 씨의 걸음걸이를 흉내내 보였다. 그리고 두 군인은 유쾌하게 큰 소리로 웃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멀쑥하게 키 큰 쪽의 군인이 스틱 씨의 바로 뒤에 바싹 접근해가더니, 성큼 그 소프트 모자를 벗겨 군모를 쓴 자기의 머리 위에다 얹었다.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순간 가슴이 철렁하였다.
너무나 뜻밖에도 대로상에서 모자를 벗긴 스틱 씨의 근엄한 얼굴이 어떻게 변했으리라는 것은 여기서 구차스레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대뜸 낯색이 달라지고, 눈이 곤두선 스틱 씨는,
“웬 놈야!”
하고, 쩌르릉하니 냅다 호령을 지르며 홱 돌아서는 것과, 요절에 결단을 낼 듯이 단장을 치켜든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스틱 씨의 격노한 얼굴은 비참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삽시에 그 무서운 노기 대신 비굴과 애소와 치욕이 뒤섞인 표정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머리 꼭대기에 꼬나들었던 단장도 한번 부르르 떨고는 슬며시 내려와버리고 말았다. 미군은 호기 있게 웃고 나서 소프트를 쓴 채로 그냥 지나가버리려 했다. 스틱 씨는 몹시 당황했다.
“할로, 할로'’
하고 외치며 몇 걸음 따라갔다. 그러자 미군은 솔직하게 이내 걸음을 멈추고 섰다. 스틱 씨는 발돋음을 해가며 손을 들어 벗기려 했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그의 손은 미국 군인의 머리 꼭대기까지 채 미치지 못했다. 가뜩이나 키가 껑충한 군인은 심술궂게도 힘껏 발돋음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려자 스틱 씨는 당황하게 한번 더 웃고 나서 단장을 들어 그 끝으로 소프트를 건드려 떨어뜨렸다.
노상에 굴러 떨어진 자기 모자를 부리나케 집어든 스틱 씨는 잠깐 사이에 옆 골목으로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그 진기한 광경을 바라보고 섰던 사람들이 일시에 와그르르 웃었다. K군도 간신히 참아온 웃음을 마침내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러나 준호는 웃지 못했다. 그는 차마 웃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끝-
2016년 11월 1일 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