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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 찬미
여기 한 남자가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유다 임금 헤로데 시대에 아비야 조에 속한 사제로
이름은 즈카르야이고 그의 어머니는 아론의 자손으로서 이름은 엘리사벳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이들로 주님의 모든 계명과 규정에 따라 흠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그들은 좋은 가문 출신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고
있었고 남부럽지 않은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아이가 없었고, 둘 다
나이가 많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아이를 못 낳는 여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자식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의 저주로 여겨졌고, 또한 혼인한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커다란 수치였고, 따라서 치욕적인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사제인 즈카르야는 더더욱 부끄러운 삶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모시는 사제인
자신이 하느님의 복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굳건했던 신앙마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나이가 들도록 아이를 가지게 해달라고 기도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여자로서
잉태를 바랄 수 없는 나이가 되었고, 시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굳은 신앙으로 평생 하느님을 모시고 살던 이 부부가 애타게 바라던 아기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다고 포기한 그때, 하느님의 시간은 달리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모든
것이 끝났지만 하느님께는 끝이란 없는 것이니까요. 하느님께서는 그 부부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의 구원사업의 시작이 될 아기를 허락하기로 하신 것이죠.
제비를 뽑아 주님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을 하게 된 즈카르야는 천사의 발현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천사로부터 들은 놀라운 소식, 아들을 얻게 될 것이며 또한 주님께서 주신 아들의
이름까지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천사는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터이지만 많은
이가 그의 출생을 기뻐할 것이다. 그가 주님 앞에 큰 인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포도주도 독주도 마시지 않고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성령으로 가득 찰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을 그들의 하느님이신 주님께 돌아오게 할 것이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부모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리고,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의인들의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여, 백성이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게 할 것이다."라는 최상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즈카르야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가 현재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모든 것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간의 기도에 응답이 없으셨던 하느님께 대한
실망감이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의 마음은 하느님께 있지 않고 오로지 인간적 이성에 따라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하고 살아가며 하느님과의 관계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징표를 요구합니다.
결국 그는 그 불신앙으로 말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제직무 가운데 전례행위와
함께 예언은 가장 중요한 역할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하느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역할을 말하는데, 사제가 행해야 할 예언직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는
듣는 능력까지 잃어버려 사람들이 손짓으로 아이의 이름을 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 말씀을 잘 듣고 잘 전해야 하는 사제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즈카르야가 처한 상황과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곤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세상의 가치에 모든 것을 걸었을 때, 귀로는 각박한 현실에 하느님의 말씀보다는 비교와
경쟁을 부추기는 말들에 귀 기울이고, 듣고, 믿게 되며, 돈과 권력에 줄 서게 되고, 입에서는
편을 가르고 남을 비난하고 남을 딛고 올라서야 한다고 경쟁을 정당화하는 말들을 하고,
갑질과 모함으로 이를 실천하는 현실을 볼 수 있지 않나요?
우리 신앙인들 안에 하느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 이가
있다면 귀먹고 혀 굳은 즈카르야와 무엇이 다를까요?
그러나 자신의 불신으로 당하게 된 그 불행은 즈카르야에게는 은총으로 다가옵니다. 귀가
먹고, 혀가 굳어버린 즈카르야는 침묵과 정적 속에서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보고 그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깨닫는 시간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부인은 갑자기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느낍니다. 그리고 오 개월 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몸을 숨기고 하느님께 감사를 올리는 시간을 갖습니다. 부부는 하느님의 현존을
체험하고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는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모든 체험은 아들을
교육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이렇게 이 남자는 명문가 출신에, 평판 좋고 주변의 존경을 받는 부모 슬하에서 태어났으며,
잉태 또한 하느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의 방문을 받던 날, 어머니
엘리사벳의 태안에서 뛰놀았던 그, 그리고 그는 태어나던 날, 하느님께서 천사를 통해 주신
이름을 받고, 모든 이들의 관심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있었던 것이죠. 오랜 침묵 끝에 믿음을 회복한 즈카르야는 아들이 태어남과 동시에 말문이
터져 예언을 합니다. 이 노래는 우리에게 즈카르야의 노래로 알려져 있고, 성직자,
수도자들은 이른 새벽 이 노래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소중한 아들을 얻은
기쁨에 넘쳐 노래합니다.
"아기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예언자라 불리고
주님을 앞서 가 그분의 길을 준비하리니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 주려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이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고 루카 복음사가는
적고 있습니다.
이 축복 가득한 아이의 이름은 '요한'이었습니다.
요한은 이제 아버지의 대를 이어 사제가 되어서 안락한 삶을 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그는 평생 존경받으며 백성의 지도자로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제직과 평안한 삶을 거부하고 광야로 나갔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그들로부터 받은 교육,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세례운동을 시작합니다.
당시 백성들이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는 성전에 속죄제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고백하고 물에 잠기는 것만으로도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고 특히 세례자가 베푼 세례는 그 대상의 제한이 없었습니다.
당시 세리나 창녀 등은 죄인으로 성전에서 속죄제를 할 수 없었던 무리였는데, 그런 모든
이들이 세례를 통해 자신의 죄를 속죄할 수 있다는 것은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단지 물에 잠김으로써 죄가 사해진다는 세례 운동은 당시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평생 단
한 번 물에 잠김으로써 죄가 사해지고, 동시에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다고 한
요한의 외침은 전국으로 퍼져 각지의 사람들이 갈릴래아로 찾아오게 합니다. 그리고 차별
없이 모든 이에게 행해진 요한의 세례는 유다인들이 이방 민족과 자신들을 구별하고
분리시키기 위해 지켰던 정결례가 아닌 모든 이들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낙타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고 빵도 먹지 않고 포도주도 마시지 않았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었습니다. 이는 당시 가난한 이들이 먹는 음식으로 그는 가난하고
금욕적인 삶을 통해 일부 백성들에게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지만, 대다수 백성들로부터
대단히 큰 존경을 받았으며,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3,2)라는 선포는
아버지 즈카르야의 예언과 같이 많은 이들을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합니다.
그는 나눔으로 사회 정의를 실천하게 하고, 세리와 직업 군인 등을 받아들였고 그들 역시
직업윤리에 충실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라고 말은
그들을 책망하는 것 같았지만, 그 말 안에는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서 세례 받으러 온 율법학자, 세리, 군인들에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마태 3,7-8; 루카 3,7-8)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이에게 나누어 주어라. 먹을 것을 가진 사람도 그렇게
하여라."
"정해진 것보다 더 요구하지 마라."
"아무도 강탈하거나 갈취하지 말고 너희 봉급으로 만족하여라." (루카 3,11.13.14 참조)라고
강조하여 사회 정의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그는 불의가 있다면 왕실까지도 비난하였고,
이에 헤로데 임금은 세례자 요한을 무척이나 부담스러워했습니다.
요한은 하느님의 진노의 시간이 임박했다고 하여 사회적 삶으로부터의 도피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정의와 자비의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세례는 구체적인
회개와 그 실천을 앙양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사람들로부터 '이분이 혹시 오시기로 한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기대를
갖게 했고 그를 따르고자 하는 제자들이 줄을 섰으며, 백성의 중심에 서게 되고 시대의
양심을 대변하는 인물로 존경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늘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요한 1,20)
"나는 이사야 예언자가 말한 대로 '너희는 주님의 길을 곧게 내어라'하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다." (요한 1,23)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마태 3,11)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 내 뒤에 오신다. 나는 몸을 굽혀 그분이 신발 끈을 풀어
드릴 자격조차 없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마르 1,7-8; 루카 3,16)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런데 너희 가운데에는 너희가 모르는 분이 서 계신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신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요한 1,26-27)
그러던 어느 날, 그 앞에 한 젊은이가 다가왔습니다.
세례자는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은 앞에 서 있는 그 젊은이가 오시기로 한 분이고, 자신의
역할이 이제 끝났다는 것을요. 난감하고 착잡한 마음.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자신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둘러봅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많은
제자들도 보았죠.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고, 시대의 양심을 대변했던 그는 자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과 함께 세속적으로 더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었지만, 그간 해왔던 그 어떤
일보다 가장 의미 있는 일을 하기로 합니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이시다. 저분은 '내 뒤에 한 분이 오시는데,
내가 나기 전부터 계셨기에 나보다 앞서신 분이시다.'하고 내가 전에 말한 분이시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준 것은, 저분께서 이스라엘에 알려지시게
하려는 것이었다."(요한 1,29ㄴ-31)
그 순간, 모든 이의 시선이 요한에게서 젊은이에게로 향합니다. 그리고 세례자 요한은 그
젊은이에게 세례를 베풉니다. 이 젊은이가 바로 오시기로 약속된 예수님이시죠. 그리고
요한은 증언합니다.
"나는 성령께서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저분 위에 머무르시는 것을 보았다. 나도
저분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과연 나는 보았다. 그래서 저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내가
증언하였다."(요한 1,32-34)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합니다. 극구 자신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증언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그 애처롭기까지 한 그의 증언은 기쁨에서 우러나온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예수님은 요한과 함께 세례를 베푸십니다. 그러면서 요한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게다가 요한을 따르던 제자들도 스승을 떠나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요한에게 세례 받으러 오는 사람이 줄자 요한의
제자들이 실망해서 투덜거리고 이에 요한은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하고 내가 말한 사실에 관하여, 너희 자신이 내
증인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시대, 신랑의 친구들은 신랑이 혼인잔치에서 하객들과 어울릴 사이 신방에 머물고
있는 신부가 약탈당하지 않도록 밤늦도록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신랑이 오면 그간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녹아내리며 신랑이 올 때까지 신부를 무사히 지킨 사실과 신부를
신랑에게 잘 넘겨주었다는 사실에 기뻐했죠.
자신의 심정을 이와 같이 표현합니다.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예수님께 가더라도
목적을 이룬 것에 기뻐하는 모습, 그리고 '그분은 커지셔야 한다.'는 성경의 명언을
남깁니다. 이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원계획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는 필수성을 말한
것입니다.
요한이 던진 이 말은 우리 또한 그분은 커지시게 하고 나는 겸손하게 작아지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의미가 아닐까요?
오래전, 미사에서 복사로 봉사하는 것은 집안의 영광이라고 할 만큼 복사하는 어린이의
부모들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첫 영성체를 받은 아이들 중에서도 신앙심이 깊다고
인정되는 어린이들이 선정되어 임명됐습니다. 그리고 부모님들은 어린이가 나이가 들고
상급학교에 가더라도 계속 복사로 봉사하도록 권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거나 또는 중학교 1학년만 되더라도 성당 안의
모든 활동을 중단시키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한다고 합니다. 결국 어린 시절부터
신앙보다는 성공이 중요하다고, 이웃 사랑보다는 이웃을 이겨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하도록
교육받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린 시절 주일은 반드시 성당을 다녀와야 하는 날이라고 교육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요즘은 성당에서 어린이들을 찾기 힘들어졌습니다. 이미 쉬는 날은 집중적으로
수업을 보충하는 날 또는 스포츠 레저 활동하는 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잘되기를
바라고, 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주고 싶어 하는 부모님들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점점 작아지는 현실에 마음이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 또한 예수님은 사라지고 산타 할아버지만 남은지 오래이니 말입니다.
어린이들이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좀 더 큰
영향력을 지닌 사람이 되어서 하느님의 정의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라고 알고 있다면
참 좋겠습니다.
활동이 축소되고, 제자도 줄고, 추종자도 준 요한은 끝내 그를 부담스러워 한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 갇힌 그는 어서 예수님께서 민중 봉기를 일으켜 세상을
심판해 자신으로 감옥에서 나오게 해 주고, 그리고 이스라엘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민족으로
바꿔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것을 보니 전혀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잠시 예수님께서 메시아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메시아, 하느님의 법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메시아, 사랑
가득한 치유와 화해의 메시아를 언급하십니다. 이후 요한은 자신의 결혼에 대해 유대법을
들어 반대한데 앙심을 품은 헤로데의 아내 헤로디아의 계략으로 참수형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어린 딸의 춤에 대한 보상으로 한 사람의 목숨이 그렇게 어이없게 스러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께서 참 메시아이심을 드러내기 위해 선택되었을 것입니다. 연중
제2주의 복음으로는 안성맞춤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라는 인물을 두고 봤을
때, 그는 때를 기다릴 줄 알았고, 때를 준비했고, 때가 왔을 때 자신의 모든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주님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주님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 또한 연중 제2주일을 지내며 세례자 요한과 같이 때가 올 것을 확신하고 생활 안에서
늘 깨어있는 사람으로 살아야 할 것이고, 우리의 모든 것 앞에 예수님을 우선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 우리의 삶에 당신보다 우선하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돈이, 명예가,
친교가 또는 자녀들의 성공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데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이런 많은
유혹 앞에서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이 말한 바와 같이 당신께서 커지는 삶을 실천해
하느님의 나라가 이땅에 설 수 있도록 이끄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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