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간 <문학과 현실> 겨울호(통권 7호, 도서출판 '문학과 현실사', 2008년 12.01 발행)에 발표한 저의 졸고입니다.
------------------------------
현대소설에 나타난 유년시절의 전쟁 체험과 그 극복
이 정 미
1. 들어가는 말 --과거 체험와 현실 반영
소설에서 허구성이 깃든 이야기란 작가와 독자 사이에서 경험을 주고받는 매개체인 과거 체험의 기억에서 동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 이와 같이 소설을 통한 과거 창조는 19세기부터 대중적 요구에 의해 나타났다. 현대인들은 무언가 과거 체험이 담긴 소설을 통해 타인의 삶을 엿보며 인간, 사회, 역사에 대한 자신의 관심을 확인하고 나아가 삶에 대한 의문을 풀어가려고 한다.
그 반면 90년대 이후에 등장한 일부 신세대 작가들에게는 IMF사태와 같은 현실의 무게감이 작품 속에서 반영되었지만 종전에 비해 체험의 부재가 한계점이 되고 있다. 이런 현상 은 도회지 감수성에 탐닉된 나머지 소비 사회의 풍요로움을 반영하는 선에서 대중문화의 경험이 작가들의 자아 형성에 주요 동인(動因)으로 작동하는 풍조에서 비롯되었다.
체험을 소설문학에서 형상화할 때에는, 전지전능한 작가의 시선에 의해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경우와 일인칭 화자가 자의적으로 자신의 과거 경험부터 전개하는 경우가 있다. 후자의 예 중에는 성인의 주인공이 유년기를 비롯한 성장기의 과거 생을 관조하는 패턴이 있는데, 여기에는 과거와 현재 이야기가 유기적 관계를 이루고 있다.
실제 현실에서 인간은 탈(persona)을 쓰고 있다. 인간은 지식인의 자아도취적 신념과도 같은 고등한 경지와 속된 경지를 공유하고 있는데 문학은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일찍이 사르트르는 말하기를, 문학은 탈을 쓴 인간을 심판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보다는 그런 인간을 보듬어주며 옹호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했다. 문학은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원초적 고뇌, 고독, 절망 등에서도 싹틀 수 있다. 여기서 원초적 고뇌란 유년시절의 체험과 정서도 포함이 된다. 유년의 시선이 깃든 유년시절의 체험은 역사적 격변기에 처할수록 자유분방하고 원초적이고 직감적인 유년의 속성으로 인해 마음의 안식처와 같은 낭만성보다는 정신적 외상에 노출되기 쉬운 비극을 주로 말해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분단의식을 지닌 작가 중 많은 수가 한국전쟁이라는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유소년기에 겪었다는 문학적 사실을 토대로 해서 유년의 의식이 주체가 된 참혹한 역사 체험과 성인의 시각에서 그것을 바라보고 수용․ 극복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분단문학에는 전쟁 전후 상황이나 이후의 궁핍한 생활로 이어지는 후유증을 겪었던 유년의 화자를 등장시켜, 성장소설의 문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들이 여럿 있다. 김원일의 「어둠의 혼」(1973) 「노을」(1977)외에도 윤흥길의 「장마」(1973), 현기영의 「순이삼촌」(1978), 「지상의 숟가락 하나」(1999), 이동하의 「굶주린 혼」(1980), 전상국의 「술래 눈뜨다」(1982) 등을 들 수 있다. 이 작품들은 1980년대의 사회 현실과 맞물리면서 극도로 보수적인 문학관을 표방하게 되었다.
2. 유년시절과 성장소설의 관계, 정신적 외상의 시각화
성장이란 한 인물이 유년시절을 거쳐 지리적 이동을 하거나 신분적 상승을 이루면서 스스로 사회적 위치를 만들어가는 외면적 환경 변모를 맞이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여기에는 헤겔의 말대로 ‘정신의 세속화’가 따를 수 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건 전쟁과 같은 역사적 사회적 변동 그리고 민중들의 지리적 이동과 신분적 변화 등이 심했다면 유년층의 성장 과정에는 끊임없는 삶의 변화와 정신적 혼란이 있기 마련이다. 유년에서 성인으로 가는 과정에서 치르는 특별한 역할을 무리 없이 치를 수 있는 전통적이고 안정된 사회질서나 역할 모델이 없다면 유년이나 젊은이는 혼란에 빠지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 역사적으로 안정과 풍요를 보장받지 못한 시대에 처할수록 심하다. 이럴 때에 젊거나 어리다는 것은 사회적 불의에 저항할 힘이 없기에 적잖은 혼란, 시련, 정신적 상처를 본의 아니게 부여받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소설문학에서는 이러한 유년 또는 젊은이의 문제가 흥미 있는 삶의 문제를 낳았다.
사회학 관점으로 보면 상처와 성장은 유기적 관계를 이루어왔기에 유년시절이 들어간 소설은 관습상 성장 소설(initiation story)의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그렇지만 소설의 사건 전개에서 유년층의 시각이 들어갔다고 해서 반드시 성장소설은 아니다. 회상의 주체인 성인이 등장하지 않고 서술 시점이 유년시절로 고정된 채 독자성을 띤 유년시절의 이야기가 완성된 이야기 형태로 된 소설도 있기 때문이다.
유년층의 시각을 발단으로 해서 시간의 이동과 함께 사회 적응 과정을 드러내는 성장소설은 서양문학사에서도 있어 왔으며 자연히 가족사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유년의 시선을 매개로 추악한 현실을 고발하려는 의도가 있기에 그만큼 사실주의 면모를 띠기 마련이다. 사실주의 소설은 그저 현재에 대한 복합성을 띤 역사소설이라는 이론이 있다.
“역사가에게 과거는 점차 현대로 유도되는 전반적인 발전과정이며, 소설가에게 과거는 이야기를 전개할 낯선 세계이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는 더욱 소설처럼 되었고 소설은 더욱 역사처럼 되었다. 현대소설의 구조와 내용은 과거를 실질적으로 재배치한다. 19세기 소설의 선형적 시간은 옛날 일이다. 회상 장면(flashback), 의식의 흐름, 일구이언하는 내레이터, 그리고 복합적인 결말이 이제 일시성을 분해한다.”*
유년시절을 회상축으로 설정한 소설에선 주인공의 예민한 감수성의 촉수에서 스쳐갔던 강한 기억의 힘을 빌려 그 시절의 감각과 정서를 미화한 채로 나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농촌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유년의 주인공과 자연과의 미분화된 모습이 많이 나온다.
아, 보인다. 원색의 그 푸른 공간. 그 밑바닥에 꼬물꼬물 움직이는 그 아이가.
그 아이가 있는 물가에서 시작해서 드넓게 퍼져나간 바다. 바다와 하늘이 서로 푸른 빛을
다투며 멀리 수평선까지 퍼져나가 만나고 있는 그 광활한 공간. 그리고 작열하는 태양.
거기에 어린 내가 한 점 살아 있는 미물로서 물가를 뿔뿔 기어다니고 있다. 뿔뿔 기어다니는 한 마리 게나 다름없는 야생의 작은 생명. 눈의 흰자위만 하얗고 고름 짜낸 종기 그루터기만 분홍빛이던 그 깜둥이 아이.
그 아이는 지금 큰 갯바위를 돌며 게사냥에 한창 정신이 팔려 있는 중이다."
---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작가 자신도 소설 이전의 것이라고 위상을 부여했으며 “잊혀진 어린 시절을 글 속에서 다시 한번 살아보자는” 또 다른 생체험의 산물이다.
인용부분에서는 대상에 대한 유년의 감상이 얼마나 즉각적이고 경이로운지를 말해주고 있다. 이 부분은 과거 사실인 유년의 감상을 현재시제로 서술했다. 현재 시제는 서술의 시간으로서 서사학에서는 사건과의 관계에 따라 즉각적 사건이 일어난 시간에 비해 ‘담론의 시간’이라고 한다. 대상을 서정적인 시선으로 미학적으로 바라보는 유년의 감각은 선악의 흑백논리를 떠나 공존의 양립 원리가 담긴 대자연의 모습을 나타낼 때 주로 나온다. 이처럼 주객 분리와 거리감을 무시한 표현을 ‘상상적 동일시’라고 할 수 있다. 상상적 동일시는 말 그대로 라깡이 주장한 ‘상상계’에 속한다. 라깡은, 어린이는 대상에 대한 지각 상태를 오로지 눈에 들어오는 이미지를 통해서 대상을 규정하기에 성인이 된 후에 인위적 규정과 관습에 따라 대상의 의미를 규정하게 되는 ‘상징계’와 달리 ‘상상계’라고 칭했다.
이 기록에 나오는 어떤 사물, 사건, 어떤 관념, 말 그리고 그것들의 환경을 이루는 빛, 소리, 냄새 같은 것들은 어느 특정한 날에 고유한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여러 날의 것들이 시간 순서도 무시한 채, 거기에 섞여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당시 어린 내가 일일이 겪고 생각한 그대로를 옮겨놓은 것도 아니다. 그럴 정도로 내가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과 감수성을 지녔던 것도 아니다. 아마 느낌만은 분명 있었겠지만, 당시 내가 겪은 경험들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은 것은 어른이 된 후였다.
(중략) 기억된 과거의 이미지들은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당시에는 못 느꼈던 전체적 윤곽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들에 대한 재해석이 불가피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기억력의 한계를 메우기 위해 상상력 발동이 불가피한데, 그래서 어떤 장면들은 실제보다 더 부풀려 있기도 할 것이다.
---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서---
인용 부분은 유년시절의 과거 기억을 형상화할 때에는 성인의 시각에 힘입은 상상력이 동원될 수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유년의 정서와 상상력은 병립하고 있다.
그러면 유년시절에 겪는 정신적 외상을 서정적 시선에 빗대어 나타내는 예를 들어본다.
1)
더욱 짙게 배인 어둠 건너편 분선이의 얼굴은 하얗다. 표정이 없다. 까만 눈동자만이 어둠살 건너편에서 흐려진 것 같다. 속이 쓰려오기 시작한다. 가물가물하는 내 눈에 하얗게 돋보이는 분선이의 얼굴이 아래위로 끄덕거린다. 누나는 기진맥진해진 목소리로 아직 울고 있다.(중략)사립문 곁 꽃밭은 음침하다. 애써 구한 씨를 분선이와 함께 뿌린 꽃밭이다. 백일홍도 분꽃도 채송화도 아직 모종 티를 벗지 못하고 있다. 해바라기가 그 중 제일 잘 자랐다. 벌써 숟갈만한 잎을 의젓하게 벌리고 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꽃밭은 침침하다. 사실 꽃밭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좀 밝았으면 싶다. 꽃밭까지 어두워진다는 것은 하느님이 세상을 만들 때 무엇인가 잘못한 듯하다. 언제 보아도 꽃밭은 푸르고 알록달록해야지. 겨울도 꽃밭 주위만은 비켜 나가야지.
2)
대추나무 뒤편 하늘은 벌써 짙은 보라색이다. 나는 보라색을 싫어한다. 손톱에 들이는 봉숭아물도, 닭벼슬 같은 맨드라미꽃도, 코스모스의 보라색 꽃도 다 싫다. 어머니의 젖꼭지 빛깔까지도 싫다. 보라색은 어쩐지 아버지의 하는 일을 떠올리게 해주고 어머니의 핏멍 든 얼굴을 생각나게 한다. 보라색은 또 말라붙은 피와 같고 깜깜해질 징조를 보이는 빛깔이다. 옅은 보라에서 짙은 보라로, 그래서 야금야금 어둠이 모든 것을 잡아먹다가 끝내 깜깜한 밤이 온다는 것은 참으로 무섭다. 이 세상에 밤이 없는 곳이 있다면 나는 늘 그곳에서 살고 싶다. 나는 빛 속에 함께 끼어 놀고 싶고, 또 빛 속에서 자고 싶다. 그러나 아버지는 어둠 속에서 총살당할 것이다.
(중략)
녀석들도 우리 집만큼이나 가난한데 그래도 오늘 저녁은 알차게 먹은 모양이다…우린, 왜, 이렇게 못살까? 어머니 말처럼 모두 아버지 탓일게다.…뒤편 대추나무는 꼭 귀신 가타. 곱슬한 머리카락을 풀어 흐트린 게 무섬기를 들게 한다. 어두워진 뒤에 보는 대추나무는 언제나 한 가지 생각을 떠올리게 한다. 열흘쯤 전이었던가. 그때도 그랬다.…순사들은 소스라쳐 일어나 어머니의 가슴에 총부리를 들이대며 소리쳤다…이년아, 네 서방을 어디에 숨겼느냐? 이거야! 순사는 어머니의 멱살을 틀어잡기까지 하며 악을 썼다. 한 순사는 어머니의 허리를 모질게 걷어찼다.
--- 김원일의 「어둠의 혼」에서 ---
불어! 이 빨갱이년아. 죄 줄란 말야!
숟갈로 주발 밑바닥을 긁는 것 같은 여자의 외마디 비명이 뒤를 이었다. (중략)
갑자기 여자가 악을 썼다.
이 짐승 같은 놈! 난 웬수 갚은 일두 사람 쥑인 일두 읎다. 이 백정.....
여자는 다시 자지러지는 비명을 질렀는데 아아, 무서워라. 그리고 그것은 엄마의 목소리였던 것이다. 짐승 같은 같은 외마 소리를 지르며 할머니가 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밥통과 옷보따리가 바닥에 나딩굴었다.
엄마는 마치 회초리 맞은 개구리처럼 배를 뒤집은 채 마루바닥에 널브러져 사지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풀어헤쳐 새둥우리가 된 머리칼, 오랏줄에 묶인 윗도리, 갈가리 찢겨진 적삼 사이로 피망 든 흰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아아 끔찍해라. 무엇보다도 아랫도리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살이었다.
---김성동의「엄마와 개구리」(1979)에서 ---
「어둠의 혼」의 주인공 화자는 배갑해 소년인데, 일본에서 공부한 지식층이며 빨치산이었던 아버지 배용만이 체포되어 사형 당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회상하는 성인 화자의 현재는 가려져 있은 채 유년시절의 이야기만 완성된 형태로 되어 있다. “아버지가 잡혔다는 소문이 온 장터에 좍 깔렸다…사람들은 오늘 밤에 아버지가 총살 당할 거라고들 말했다…이제 아버지는 한 줌의 연기처럼 자취도 없이 사라질게다”라는 첫 문장을 통해 혼란한 시대상에 가려진 개인의 비극을 담담하게 응시하고 있다. 아버지는 해방 이후 남로당 폭동 사건에 가담한 명목으로 사형당한다. 갑해의 가족은 도망다니는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버지로 인해 호구에만 급급한 어머니가 경찰에 붙잡혀서 매찜질을 당하고 오는 수난을 겪는다. 갑해는 백치인 누나와 누이동생를 부양하며 식당을 경영하는 이모의 도움을 받으며 간신히 배고픔이나 면하며 살아간다.
「어둠의 혼」의 첫 번째 인용 부분은 갑해가 아버지의 죽음을 동네 지서에서 확인하기 전에 누이와 함께 배고픔을 견디며 어머니를 기다리는 장면이다. 유년만이 지니는 향토적 감수성이 깃든 서정적 시선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암시하고 있다. 두 번째 인용 부분은 아버지의 부재로 이어지는 불안으로 인한 무의식적 억압을 나타내고 있는데 인용한「엄마와 개구리」에서처럼 아버지로 인해 겪는 참혹한 체험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유년의 정신적 외상으로 남는다. 이렇게 시청각적 이미지로 유년기에 받은 정신적 외상을 나타내는 표현은 장편「노을」(1977)에도 있다.
서산마루를 가득 채우며 노을은 붉게 번졌고, 수백 마리의 길가마귀 떼가 어지럽게 원을 그리며 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대장간의 불에 담군 시우쇠처럼 붉게 피어난 노을을 보자 엄마를 만나 가슴 뛰던 기쁨도 어느덧 사그라지고, 나는 그만 그 노을에 몸을 던져 한 줌 재로 사위어 버리고 싶을 만큼 못견디게 울적했다. 죽고 싶었다. 죽음이 두렵기는커녕 죽는 순간이 지극히 평안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타박타박 걸으며 혼잣말로 외쳐보았다. “아, 노을이 곱다. 아부지는 밉다. 엄마도 밉다. 아부지가 노을색이라면 엄마가 하늘색일까. 그러면 두 가지 색을 보태모 보라색이 되겠지. 그런데 엄마나 아부지는 왜 합쳐지기를 싫어하노. 노을은 죽고 싶도록 저렇게 아름다분데 말이다.” 그래도 시원치가 않았다. 먹장구름 같이 가슴을 눌러오는 그 어떤 어두움이 종내 그쳐지지가 않았다.
--- 김원일의 장편 「노을」에서 ---
지금 그 고장에 관광갔던 사람들은 눈 속에 피는 붉은 동백꽃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눈 위에 무더기로 떨어져 뒹구는 붉은 낙화들도 아름다웠을 것이다. 아름답게 보는 것이 정상이다. 나도 더 어렸을 때는 떨어진 그 통꽃에 입을 대고 꽃물을 빨며 즐거워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 악한 시절 이후 내 정서는 왜곡되어 그 꽃이 꽃으로 보이지 않고 눈 위에 뿌려진 선혈처럼 끔찍하게 느껴진다.(중략) 그 잔인한 낙화는 어쩔 수 없이 나에게 목 잘린 채 땅에 뒹굴던 그 시절의 머리통들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 현기영의 장편「지상에 숟가락 하나」에서 ---
「노을」은 주인공 갑수가 진영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30년전에 남로당 폭동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 좌익이 된 백정 아버지 슬하의 유년을 회상하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의 아내에게도 이와 비슷하게 사상 문제 때문에 장독(杖毒)으로 비참하게 죽음을 당한 아버지 기억을 지니고 있다. 갑수는 일자 무식인 백정 아버지를 두어서 동네에서 열등감으로 지내던 유년 시절, 아버지의 학대를 못 이겨 도망간 어머니, 그로 인해 동생들과 굶주림과 주변의 따돌림으로 보내던 일, 정부 수립 전후에 벌어진 남로당 사건, 학교 운동장에서 목격한 인민재판, 아버지가 빨치산 폭동을 일으켜 학살을 당한 기억 등을 펼친다.
인용 부분에서 유년의 주인공 갑수는 노을을 바라보며 동네 사람들과 남로당 모의에 참가했다가 끝내 빨치산으로 몰리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의 학대를 못 이겨 집을 떠난 어머니가 아름다운 보라색 노을처럼 화해하기를 갈망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죽음을 맞이하고 주인공 갑수는 그런 상처 어린 추억이 깃든 고향을 잊고서 “근면과 검소함과 학구열”로 학교를 마치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고 노년의 어머니를 모시며 도회지의 안락한 중산층이 된다. 주인공이 격변기에서 희생자 위치에 섰던 유년시절의 기억을 인위적으로 지우려는 노력을 했다는 것은 내면의식에서 결코 탈피 극복하지 못했음을 의미하기에 유년시절의 정신적 외상을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지상의 숟가락 하나」에 나온 참혹한 기억은 제주도의 4.3사태로 인한 것이다. 제주도 4.3 항쟁은 해방 이후 단일 정부냐 통일정부냐를 놓고서 민중과 권력 간에 벌어진 격전이었다. 소설은 해방 이후의 궁핍함과 4.3사태 등 정치적 변란을 담고 있으며 실지로 정권이 바뀌면서 그간 왜곡되었던 그에 대한 평가를 바로 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이처럼 유년시절의 역사적 격변기를 매개로 해서 탈피하지 못한 정신적 외상을 개별적 경험으로 다루는 소설에선 과거와 현재 그리고 고향과 도회지라는 등식으로 시간과 공간의 대조를 나타내고 있다. 역사적 격변기가 있었던 특정한 시간과 공간을 탈피해서 이미 성장한 주인공은 많은 변모를 이룬 채 다른 처지와 각도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래서 결말에는 공익성을 띤 화해와 극복의 과정이 따른다.
3. 아버지 콤플렉스
도회지 감수성에 젖어 사는 현대인에게 고향은 원래 그리워하기 위해 존재한다. 고향에 대한 애착은 현재 세계와의 소외감에
서 비롯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기 동일성을 존재론적으로 확인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유소년기에 6.25를 겪은 세대의 작가들에게 각인된 생생한 전쟁 체험 이야기는 그 비참했던 기억을 되살리는 공간인 고향에서 펼쳐진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전쟁을 통해서 파란만장하고 참혹한 유년의 기억을 간직한 성인의 주인공이 어느 날 무슨 계기로 고향으로 내려가는 패턴으로 이야기를 엮어나간다. 가족에 대해서는 ‘나의 아버지는 빨치산(좌익)이었다.(또는 월북했다)’ 등으로 설정한다. 이럴 때에는 사건배열이 서술상의 시간의 흐름과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독자로선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건들을 기억에 누적시키며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면서 내용을 분석하며 이해하게 된다.
나는 무심결에 쇠전걸 뒤의 어두운 들판에 눈을 주었다. 들 저편의 변전소에는 철탑마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나의 시선이 그 변전소 오른쪽의 젖봉 아래를 더듬었다. 상것내도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다만 끓고 있는 더위와 거기에 묻혀 있을 뿐이었다. 그 곳이다. 바로 거기, 스물 아홉 해 전에 도살장이 있었다. 그 해 여름, 그렇다, 꼭 이맘때쯤 거기에 아버지와 삼촌과 추 서방이 소를 잡고 있었다.
“아버지,빨리 가잖고 뭘 그렇게 보셔요.” 현구가 내 팔을 끌었다. 그러나 나는 잠시 동안 그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다. 아니, 나의 시선이 그 무엇을 찾아내어 그것을 헤집고 있었다. (중략) 나 역시 고향의 어둠과 무더위 속에서 허기에 지친 두려움을 만나고 있었다.
--- 김원일의 장편「노을」에서 ---
인용부분은, 이야기의 첫 부분으로서 주인공이 고향의 삼촌 별세 소식을 접하고서 아버지의 기일을 치를 겸 해서 가족과 함께 고향에 도착한 순간의 감정을 나타낸 것으로서 과거와 현재가 누적되어 있다.
유년시절의 체험을 소설에서 형상화할 때에는 유년이 흔히 겪는 정서인 불안과 공포 또는 호기심, 금기에 대한 반란을 기본 모티브로 한다. 6.25 동란 체험과 제주도 4.3 항쟁체험이 소재로 된 소설에선 참혹한 기억의 대표적인 예로 죽음의 목격을 들 수 있다.
죽음의 목격은 가정에서 아버지 부재 또는 타인과의 이별로 이어진다. 아버지 부재는 유년의 주인공에게 성장의 모델이 없었다는 뜻이 된다. 철학적 의미로 본다면 가족은 동일성을 추구하며 사랑이 함축된 객관적 실체이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남아 있는 가족이 고초를 겪는 것에서 아버지 콤플렉스를 지닌 작가와 작품들이 있다. 박완서(1931년생), 김주영(1939년생), 현기영(1941년생), 김원일(1942년생), 윤흥길(1942년생), 김성동(1947년생), 이문열(1948년생), 등처럼 1930~1940년대에 출생해서 유소년시절에 해방과 6.25를 보냈던 작가군의 작품에서 이런 유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문구와 김성동의 부친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 후퇴 때 우익의 손에 총살당했다.반면 김원일과 이문열의 부친은 9·28 서울 수복 이후 인민군 퇴각 때 단신 월북했다.그런데 이들이 자신의 소설을 통해 부재하는 부친을 바라보며 묘사하는 방식은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 좌익 아버지를 두었던 탓에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 또는 연민을 품는 콤플렉스를 지니게 되는 유형이 있는가 하면 이문열처럼 거부하는 유형이 있다. 분단문학으로 분류될 만한 작품을 집중적으로 발표한 김원일은, 실존적으로는 부재하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을 통해 개인 체험 속에 깃든 고통의 근원을 정면으로 파헤쳤다.
“아부지는 높은 산을 넘어가셨다고 그랬잖아? 높은 산을 넘어가구 높은 산을 넘어오넌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고 그랬잖아? 그래서 아부지는 훌륭한 사람이라제? 아부지는 거기서 새 시상을 넘어오실거라구 그랬잖냔말여. 그런디 워째서 신작로질루 오신다넌겨? (중략)
“높은 산 높은 산. 그놈의 높은 산 소린 입에 올리지두 말어. 높은 산이구 얕은 산이구 산 소리만 들으면 꿈속이서두 숨이 멕히니께”
인두를 미는 아낙의 손길에 시퍼런 힘줄이 돋우면서 그 여자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찢어 육포를 뜰 늠덜, 급살 엠병이나 맞다가 거우러나질 늠덜. 설중이 높은 산 넘어온 과객 하나 잠재워주구 보리곱살미 스스박이다 감자두 갱신히 삶아먹넌 집이서 애 아버지 돌아오면 해줄라구 보꾹이 메달아놓구 사자 어금니 애끼덧 애끼더니 쌀봉지 터져서 밥해준 조이밖에 읎던 지집사람을 잡어다가 주먹으루 져지르구 발질루 죈이기구 대침으루 쑤시구 몽뎅이루 후려서 짐장 때 광천 독배서 받어온 조귓대갈 저믓듯 온 삭신을 짓뇐여놔서 갱신을 못허게 헤노니, 이늠의 시상이 무신늠의 시상여, 이늠의 시상이 무신늠의 해방시상이구 무신놈의 민쥐지여.
---김성동의 「눈오는 밤」에서 ---
몇 해전, 해방이 되던 날만 해도 아버지는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장터에서 만세를 불렀다. 쨍쨍 내리쬐이는 햇빛 아래서 목이 터져라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그런데 언제쯤부터인가? 그렇다. 재작년 겨울부터 아버지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었지. 밤을 낮삼아 다니기 시작했었지. 어디론가 감쪽같이 사라졌다간 나타나고, 나타났다간 사라져버리곤 했었지. 아무도 모른다. 아버지가 무슨 일을 맡아서 그러고 다녔는지는.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를 두고 쑤군쑤군했고, 순사들이 자주 우리 집을 들랑거렸지만 재작년 겨울부터 그들은 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인지, 누구를 시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쌀 한 톨 생기지 않는 일에 목숨을 걸고 산길을 타고 다닌 아버지의 요술을 어쩜 다른 사람은 알 필요가 없다. 아버지가 하는 짓은 스스로의 문제라는 듯 나에게는 물론 어머니나 이모부에게조차 알리지를 않았으니깐. 꽃이 왜 피는지, 꽃은 향기를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듯이 세상에는 남이 모를 일이 너무 많으니깐.
--- 김원일의 「어둠의 혼」에서 ---
인용한「눈오는 밤」(1983)에서는 유년의 주인공이 높은 산으로 상징한 아버지의 월북을 바라보는 시선과 그 후에 이어진 개별적 체험을 보여준다.「어둠의 혼」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본다면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인 즉 당대 이념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하지는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가는 유년의 주인공 갑해의 모습을 설명할 때에 비밀을 간직한 듯한 아버지에 대한 과거 기억을 비롯해서 절박한 굶주림과 밤이면 들이닥치던 순경에 대한 공포 등 생리적이고 직접적인 고통에 비중을 더 두었다. “무슨 죄를 졌기에 왜 도망만 다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갑해에게 아버지는 금기시되고 은폐되어야 할 존재로만 남는다. 물론 검열을 비롯하여 이데올로기 문제에 매우 민감했던 당대의 상황을 우회하려는 작가의 전략적 방편이었음도 부인할 수는 없다. 유년 주인공의 시선을 빌어 이데올로기의 모순성을 보여주는 것이 신선한 발상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좌우이데올로기 대립의 전모와 실상에 대한 깊이 있는 시각을 기대하기에는 한계점이 있다. 궁핍했던 환경에 사는 유년의 생태를 배고픔 따위의 감각적 체험을 통해 잘 드러냈지만, 유년의 시점으로 그 이면에 숨겨진 본질을 파헤치기에는 역부족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삶과 세계에 대해 많은 의문을 품고 있는 유년의 시선을 빌림으로써, 순진무구한 어린이 세계와 극명하게 대조되는 어른들의 계산적이고 냉혹한 세계는 독자에게 비판적 시각과 함께 흥미를 줄 수 있다. 이모부가 “앞으로는 아부지를 절대 찾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갑해에게 총살된 아버지의 시신을 보여주는 행동은 그러한 금기와 은폐를 다시 한 번 환기하는 한편, 앞으로 한 집안의 장자(長子)로서 집안을 짊어져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년의 갑해가 품는 의문은 역설적으로 죽은 아버지를 다시 뚜렷이 되살리게 하면서 소설 속의 직설적인 설명을 떠난 현실을 통해서만이 의문이 해소된다는 것을 작가는 암시하고 있다. 아버지 죽음을 실감한 것은 이제까지의 아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대신 갑해로 하여금 “어떤 길이 우리 모두에게 행복과 평등을 가져다주는 길인지 배우고 깨쳐야 한다”는 아버지의 옛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고 궁극적으로 “어떤 어려움과 슬픔도 이겨내야 한다”고 각성하게 한다. 결말에서 이러한 그의 깨달음은 아버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것인데 어찌 보면 성인의 시각에서 인위적으로 구성된 것이며 작가가 공익 차원에서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서 상처를 극복하는 의지를 심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김성동은 6.25와 분단 상황을 총체적으로 인식하면서 내내 자신에게 다가왔던 자기 연민과 자괴감의 굴레를 벗고 모든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하면서 해결하려 했다.
빨갱이 새끼.....그렇다. 나는 사람들이 침뱉고 발길질하고 그리고 아무나 찢여죽여도 좋은 빨갱이 새끼였던 것이다. 나는 왜 빨갱이 새끼로 태어났을까. 그때처럼 아버지가 미웠던 적도 없다. 아버지는 어쩌자고 사람들이 침뱉는 빨갱이가 되어가지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풀기 빠진 핫바지처럼 주눅들게 만드는 것일까? 할머니는 말했다. 엄마도 말했다. 영뵉아. 사람들헌티 뿕겡이 자석이란 소릴 들어선 안뎌. 알겄지. 그때마다 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거리곤 했는데 글쎄, 어떻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일까?
--- 「엄마와 개구리」에서 ---
「엄마와 개구리」에서는 일제 시대부터 좌익에 몸담았던 아버지가 예비검속에 의해 처형되어서 인민군에서는 애국자 가족이란 말을 듣게 되었지만 남한에서는 좌익이란 오명 속에서 고초를 겪는 어머니 사연을 담았다. 인용 부분은 유년의 주인공이 부재하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아버지는 애초에 나와는 동일성이 없는 진정한 타자(other)로 인식되지 않았었다. 이것은 가족이란 결합체가 가져다주는 유대감의 힘이다. 그래서 아버지라는 객관적 대상(타자)이 과거에 현존했었기에 기억하고 기대되는 바가 있기에 아버지의 부재는 현존의 상대 개념으로 자각되는 것이다. 부재와의 고통스런 조우(遭遇)는 극복으로 이어진다.
4. 과거와 화해하기
전쟁과 분단의식 같은 역사적 변혁에 이어 1960~1970년대에 올수록 정치적 사회적 자유가 억압되면서 문학을 통해서 모순된 현실을 비판하며 대응하려는 리얼리즘 문학이 대두되었다. 이것은 시대, 사회, 역사, 문화라는 배경을 지닌 주인공의 사적 경험의 세계가 보편적 의미로 확대되는 과정이 된다. 그러기에 앞서 주인공 자신이 자신과 타인에 대해 연민을 갖는 심성과 함께 그 어떤 사소한 체험이라도 낯설게 하기를 통해 삶을 관조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그러면 개인의 체험 중에서 개인의 잠재의식 속에 여과되지 않은 한(恨)으로 자리잡은 것을 들춰내어서 외부 지향성을 띤 자의식에다 대입해 본다. 심화된 자의식은 때로는 비일상적인 방황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의식의 양상이 본래 내면적 자기 집중의 틀 안에서 자아에 대한 자각적 의식을 한다 해도 외부적 상황과 유기적 관계를 지니기 마련이다. 이런 자의식을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는 움직임을 지니기 마련인데, 그것은 나를 ‘나’이게 하는 외부의 부당한 강압, 고통, 내부의 풀리지 않는 의문점, 불안, 절망 등을 극복하면서 당연성을 띤 ‘나’이고자 하는 의지를 말한다.
정체성 확립하기는 그 자체가 내면 의식의 변화를 꾀하는 것으로서 사회 역사적 연속성하고도 연관이 있다. 개인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정, 직장, 환경, 사회 등과 관계를 맺고 살기에 사회적 존재도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상실에서 회복으로 또는 의문에서 해결, 상처를 주었던 과거와 화해하기의 등식으로 이어진다. 인간은 고독을 참고 견디는 것에서 자존심을 지킬 수 있지만 그 방법은 완전한 해결책은 못 되는 것과 같은 경우이다.
과거와 화해하기는 앞서 밝힌 아버지 콤플렉스를 극복한 것 외에도 관계 맺기가 있다.
박완서의 자전소설「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1992),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1995)에서 오빠는 부재하는 아버지를 대신해서 주인공의 성장 과정에서 일종의 역할모델로 작용하는데 나중에 인민군에 의해 총살을 당한다. 이에 대한 극복은 앞서 발표된 「엄마의 말뚝2」(1981)에 나타난다. 작품에는 유년의 소녀인 화자 ‘나’와 “지조를 최고의 이상으로 삼는 선비 기질”을 가졌으며 “명석하고 사려 깊고 특유의 자존심과 도덕적 순수성을 유지하고 있는” 열 살 연상인 오빠가 나온다.
여기서 ‘말뚝’에 대해 설명한다. 부모는 처음에 자식에게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며 이동하는 자유를 준다. 그러나 부모는 자식이 모르게 설정한 당신의 기준이나 보호막에 구속되도록 한다. 이것을 뜻하는 물리적 물체가 말뚝이다.
오빠는 유년의 주인공에게는 아버지를 대신하는 상징적인 존재였으며 동시에 가족 모두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말뚝이었기에 「엄마의 말뚝2」에서 오빠의 다리 부상은 그 말뚝의 훼손을 상징한다. 오빠는 ‘나’와 함께 어머니의 부러진 뼈를 고치기 위해서 속악한 신령님에게 고개를 숙이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는 효자이다. 오빠가 두 손자를 남기고 죽은 후 엄마는 말년에 다리 대수술을 앞두고 과거 오빠가 산골에서 신령에게 빌었던 요법과 동일하게 처치하려 한다. 수술 후 당신의 다리를 부여잡고 “내 새끼”라고 말하는 것에서 오빠는 엄마의 종교이자 엄마 몸의 일부와 동일시되고 있다. 엄마의 오빠의 관계를 보면 르네 지라드의 ‘욕망의 삼각형’처럼 엄마는 오빠를 통해서 욕망을 대상화하는 것이다.
오빠는 해방 후 한때 좌익 운동을 했다가 전향한 적이 있는데 그것 때문에 남하를 못하고 적치하의 서울에 남은 것을 불안해 했다. 그후 의용군에 입대해서 몸과 영혼이 속속들이 망가진 상태로 돌아온다. 시민증도 없는 오빠를 데리고 엄마와 가족이 서울에서 처음으로 말뚝을 박았던 현저동 괴불마당집으로 가짜 피란을 가지만 그곳에서 잔류한 북한군에게 오빠는 결국 총살을 당하고 만다.
오빠의 죽음은 「엄마의 말뚝 2」에서 잘 드러나듯이 엄마에게는 말뚝의 상실이자 참척(慘慽)의 아픔과 마음속 “오지(奧地)”로 남아 있게 된다. 주인공은 오빠의 죽음으로 인해 “속에서 썩이고 있는” 가족과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서 벗어난다. 오빠의 죽음을 진술하는 것은 전쟁으로 인한 가족사의 상처를 치유하는 행위이자 전쟁의 반(反)생명성에 대한 고발이라는 현실 비판 의식으로 확장된다.
오빠의 살은 연기가 되고 뼈는 한 줌의 가루가 되었다. 어머니는 앞장서서 강화로 가는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갔다.(중략) 지척으로 보이되 갈 수 없는 땅을 향해 그 한 줌의 먼지를 훨훨 날렸다. (중략) 어머니의 모습엔 운명에 순종하고 한을 지그시 품고 삭이는 약하고 다소곳한 여자 티는 조금도 없었다. 방금 출전하려는 용사처럼 씩씩하고 도전적이었다.
어머니는 한 줌의 먼지와 바람으로써 너무도 엄청난 것과의 싸움을 시도하고 있었다.
--- 「엄마의 말뚝 2」에서 ---
인용한 작품의 말미 부분처럼 엄마는 훗날 주인공 ‘나’에게 오빠와 똑같은 방식으로 화장을 해서 한 줌 먼지와 바람으로 남고자 하는 소원을 말하는데 ‘나’는 이를 “분단이란 괴물”과의 싸움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극복 방식은 지극히 서정적인 견지에 머물고 있다.
반면 유년의 상처를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며 극복하는 모습을 보인 예는「노을」에서 두드러진다. 주인공 갑수는 유년의 상처를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새로 관계를 맺으며 화해한다. 그는 삼촌의 부음을 계기로 고향에 온 후 유년시절의 굶주림과 학대가 있었던 고향의 아버지를 다시 확인하고 받아들인다. 아버지가 사상에 대한 지식이 없이 남로당 운동을 했을 때에 그 매개 역할을 했던 주변 인물들로는 대지주의 아들인 노년의 배도수, 아버지와 남로당 모임을 했던 이중달, 아버지와 같이 백정을 했던 추노인 등이 있다. 특히 갑수와 동년배인 이중달의 아들 치모와 동생 갑득은 주인공 갑수와 달리 일부러 고향에다 생존의 터를 잡으며 과거 비극적 운명을 회피하지 않고 농민의 대변자로서 살아간다.
1)
48년의 폭동으로 하여 이쪽 편에 의해서든 저쪽 편에 의해서든 죽거나 헤어진 상태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많은 고향 사람들, 지울 수 없는 그 시절의 상처를 제가끔 안고 사는 그들의 염원이 하늘에 닿아 신은 오직 이 한 가정을 모델로 선택하여 만남을 베풀었다고 나는 믿고 싶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 가정의 행복을 파괴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된다, 하고 생각하며 나는 배도수씨 부부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중략)
“그렇긴 하지예, 배 선생님이 폭동의 주모자라 해도 그걸 배 선생님의 잘못이라고는 말할 수 없으니깐예.”하고는 치모가 “저녁은 드시고 차를 타실건대 통일할머님이나 한 분 뵙옵지예?” 하고 청해 왔다.
2)
산 위에 걸린 쌘구름이 노을빛에 물들어 있었다. 노을은 산과 가까운 쪽일수록 찬란한 금빛을 띠고 차츰 거리가 멀어질수록 보라색 쪽으로 여리어져, 노을을 단순히 붉다고만 볼 수는 없었다. 자세히 보면 그 속에는 여러 가지의 색이 교묘히 섞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노을을 붉다고만 말한다. 진 노란색, 옅은 푸른색, 회색도 저 속에 섞여 있지 않는가.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무엇인가 한가지로 뭉뚱그려 구별지어 버리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그러자 문득 아버지와 헤어져 봉화산에서 내려왔던 저녁이 생각났다. 장마끝이라 노을이 유독 아름다웠다. (중략) 나는 희망을 키우는 만큼…눈에 비친 하늘은 분명 어둠을 맞는 핏빛 노을이 아니라 내일 아침을 기다리는, 오색 찬란한 무지개빛이리라. --- 김원일의「노을」에서 ---
첫 번째 인용 부분은, 갑수가 과거 아버지의 남로당 행적에 관계된 어른들을 만나보면서 “우리는 다 그 시절의 그늘을 갖고 사는 사람이니깐”이란 말로 과거를 서로 돌이켜보며 현재 위치에서 다시 해석․ 관조하는 행위를 통해 잊고 싶었던 과거와 화해를 하는 장면들 중의 하나이다. 소설에서 인물들이 자신의 체험과 그 체험의 의미에다 새로운 가치관을 부여하며 수용하기까지에는 이처럼 그 체험을 대상화하는 단계를 거쳐야 한다. 이들은 각자 과거 체험을 대상화하면서 인위적인 화해의 움직임을 보이는데 비극적 운명을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이는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인용 부분은 주인공 화자의 내적 독백이 있는 작품의 말미인데, 노을이라는 특정한 객관적 상관물을 통해 흑백논리를 떠나 서로 화해하며 자기 정체성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지만 서정적 감수성으로 처리하고 있다.
5. 나오는 말
지금까지 몇 개의 소설들을 텍스트로 해서 유년시절의 도입과 성장소설과의 유기적 관계, 유년의 변별적 감수성에 담긴 각 인물들의 정신적 외상, 아버지의 부재라는 멍에에 대해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거나 새로운 관계를 맺으며 극복하는 방식 등을 살펴보았다.
「어둠의 혼」에서는 아버지의 비참한 파멸로 이어진 아버지 콤플렉스를 성장의 획기점으로 여기고 극복하는 주인공의 자세가 단순한 교양 수준에 머물 정도로 도식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상상력의 한계를 보인 것으로서 당대 문학경향에서 보이듯 6.25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에서 부여받은 개인적 한풀이를 극적인 감동 장면을 통해 극복하려는 작가의 문학관이었다.「노을」에서는 세월의 경과를 통해서 시공간의 이동과 함께 사회적 변모를 이룬 인물들이 각자 생을 관조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고통들을 객관적 운명으로 받아들이면서 극복했다. 이것은 과거에서 현재라는 시간 이동을 통해 의식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으로서 성장소설의 한 전형을 이루었을 뿐이다. 리얼리즘이 주류를 이뤄왔던 우리 소설 문학사의 성과를 본다면 유년시절의 전쟁체험담 도입은 인물의 개별적 경험의 심화를 이룬 채 현실 반영과 함께 새로운 감수성의 발굴에만 기여했을 뿐 그 현실 인식이 현실세계의 복합성에 맞설 만큼 견고하지 못했다는 한계점을 보였다.
*데이비드 로웬덜, 김종원,한명숙 옮김, <과거는 낯선 나라이다>, 개마고원, 2006년,51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