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양승국신부-
<매일 체험하는 부활>
예수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와 은총이 일년 내내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 우리가 이토록 예수님의 부활을 성대하게 기념하고 경축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다. 부활신앙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부활이 기억되지 않고 기념되지 않는 교회는 진정한 의미의 교회라고 볼 수 없을 것입니다.
부활 신앙을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일상 안에 부활을 살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려는 노력, 예수님의 십자가를 함께 지고 가려는 노력도 진정 소중한 노력이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굳건히 믿고 우리도 언젠가 그분처럼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원히 살리라고 희망하고 기대하는 부활신앙은 우리에게 더욱 중요합니다.
오늘 부활 성야는 일년 교회 전례력 안에서 가장 의미 있는 날입니다. 축제의 날, 기쁨의 날, 환희의 날인 이 부활성야에 부활하신 예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우리 죄인들, 우리 자신이란 쇠사슬을 끊지 못해 끝없이 고통당하는 우리 가련한 인간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과 정성을 드립시다.
오늘 부활성야에 우리가 읽은 복음은 빈 무덤 이야기입니다. 못 다한 장례절차를 마무리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무덤으로 간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보고 까무러치게 놀랍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진 그들 앞에 두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진정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죽음을 딛고 다시 일어서신 예수님께서는 활기찬 생명력으로 우리들 가운데서 현존하십니다. 우리 생활 한 가운데, 우리 삶의 현장 그 한 가운데, 우리의 마음속에 언제나 살아 숨쉬십니다.
영광스럽게 부활하셔서 우리 가운데 살아계신 예수님의 흔적을 찾아나가려는 노력, 그것은 진정 중요한 노력이지만 동시에 진정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이웃들 안에서 부활 예수님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족들, 아이들, 형제들 가운데서 부활 예수님의 자취를 자주 발견합니다.
저희와 함께 살아가는 한 의지력이 강한 한 친구는 꽤 골초였는데, 벌써 두 달째 담배를 끊고 있습니다. 참으로 대견한 일, 감사한 일입니다. 담배를 끊기 위한 그 친구의 노력은 눈물겹습니다. 주말에 외출 나가면, PC방에 가면 너무나 많은 유혹이 따르기 때문에 요즘 주말에 외출도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욱 기특한 일은 담배를 끊기 위한 가장 일차적인 목적은 담배 값을 절약하기 위해서도, 나빠졌던 기관지 때문도 아니고 바로 살레시오 회원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살레시오 회원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담배를 끊어야 되지요. 기특한 친구의 대단한 의지와 노력, 또 담배를 끊고 나서 훨씬 싱싱해진 얼굴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또 한 친구, 2%가 부족해서 주말이 와도 자유외출이 안되고 늘 동반외출을 해야만 했던 한 친구는 오랜 노력과 다짐 끝에 드디어 지위도 상승하고 홀로 외출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괜찮겠나?" 걱정이 상당했던 수사님들을 배신하지 않고 무사히 귀가를 했습니다. 단독외출을 무사히 마치고 스스로도 신기하다는 얼굴로 귀가한 친구의 환한 얼굴에서 저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뵙습니다.
멀리서보다 우리 삶 가까운 곳에 계시는 부활 예수님, 우리 일상 한 가운데, 많은 사건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부활 예수님, 우리 각자의 내면 안에 끊임없이 활동하시는 부활 예수님의 자취를 지속적으로 찾아나가는 부활성야가 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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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김유철 신부-
주간 첫날 새벽 일찍 여자들은 예수님이 누워 계신 무덤으로 향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그들을 따르던 제자들과 뒤에서 도움을 주던 여러 여자들에게는
큰 실망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기득권 세력의 강한 힘에 두려움을 가지게도
되었을 것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마음속에 살아 계신 예수님은 없습니다.
함께했다는 추억과 더불어 앞으로의 일이 걱정일 뿐입니다. 유다인들이 무서워
무덤에 가 그분의 죽음을 기릴 용기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암흑 속에서 용기를 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뽑아 세운 자도 아니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남자들도 아닌 약자의 계열에 있던 여인들이었습니다.
새벽 남들이 다 잠잘 시간에 용기를 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갑니다. 끝까지
사람의 도리를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됩니다.
눈부신 옷을 입은 남자 둘이 나타나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24,5-6)라는
놀라운 소식을 전해준 것입니다. 절망에서 놀라움으로, 이 놀라움은 희망으로
발전해갑니다. 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믿고 그분의 자녀가 된
우리들은 그분께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돌아가신 듯 안 계시는 부재를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곁에 계십니다. 조금만 더 의지를
가지고 자녀된 도리를 펼칠 때 더욱 더 큰 희망의 은총을 갖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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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느낌
-이홍일 신부-
부활 밤이다. 부활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신앙인은 부활을 믿는 사람이다. 지금 나는 부활을 믿고 있는가? 그리고 부활의 느낌, 신앙의 기쁨을 느낀 적이 있는가? 내가 겪은 신앙 체험이 부활의 기쁨을 말하고 있을 것이다.
신앙 체험은 번개 치는 것 같은 요란한 것을 말하지 않는다. 코끝에 스치는 산들바람에서 하느님을 느끼면 그것이 부활의 체험, 신앙 체험이 된다. 우리의 일상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것이다. 한때 하느님을 느끼려고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내가 하느님을 느끼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느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에 성소까지도 흔들리던 때가 있었다.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찾아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묵상하고, 기도도 해보고, 노력을 했지만 그 어떤 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하느님 찾기를 포기했을 때 갑자기 평화가 찾아왔다. 부활 성야미사를 드리러 가던 중이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고, 나의 존재가 바로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증거로 다가왔다. 그로 인해서 내 안에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날 가장 기쁘게 부활미사에 참례했다.
부활 체험·신앙 체험·하느님 체험은 특별한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 안에서 우리가 느껴야 하는 것이다. 복음에서도 제자들이나 여인들이 그저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하고 말한다. 평범한 일상 안에 숨어 있는 놀라운 신비를 발견하고 느끼며 감탄하는 그 순간이 바로 부활 체험이며 하느님 체험인 것이다.
부활은 믿고 깨닫는 것
- 이성길 신부-
흔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라고 말합니다. 이 좋은 계절에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축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소생과는 전혀 다릅니다. 부활은 완전한 변화입니다. 생성 소멸하는 만물의 법칙에서 벗어나,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완전한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육적인 존재에서 영적인 존재로 변화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안식일 다음날 예수님의 무덤에 간 여자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누군가가 다른 곳에 시신을 옮겼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자들의 말을 듣고 제자들이 무덤으로 달려가 무덤이 비어있음을 확인하지만 그들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을 때에도 제자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령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처형되실 때 못에 뚫린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기도 하고, 만져보라고도 하시고, 음식을 잡수시기도 하십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당황하는 것은 부활이 단순한 소생이 아니라 질적인, 그리고 전적인 변화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감으로써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백성이 된 것을 구약의 파스카라고 합니다. 파스카란 지나감, 건너감이라는 뜻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 죽음을 지나, 죽음을 건너 육체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생명에 이르신 것을 신약의 파스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참 파스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나가셨고, 건너가셨습니다. 이미 강을 건너가 보이지 않는 사람을 강 이쪽에서 찾는다면 흔적만 발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여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예수님께서 이미 지나가셨고, 건너가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여자들과 제자들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의 흔적, 곧 빈 무덤과 수의뿐이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새로운 삶을 살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삶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생활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물론 제자들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면서 스스로 변화되는 가운데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자신들의 부활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부활이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면서 자신의 삶이 변화되는 가운데 깨닫는 것입니다.
오늘 서간의 말씀대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고,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죽고 난 다음에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부터 변화된 새 삶을 사는 것입니다. 교만함이 겸손으로, 원망과 불평이 감사와 찬미로, 불신이 믿음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거듭거듭 새롭게 변화하는 삶, 그리하여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 그것이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며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려고 애쓰는 가운데 우리는 부활의 신비를 깨닫고 우리의 부활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된 신앙인의 경우에는 신앙이 생활을 지배하지만 변화되지 않은 신앙인의 경우에는 생활이 신앙을 지배합니다.
시내에 나갔다가 붕어빵이 있어 한 봉지 사왔습니다. 옛날 생각도 나고 그런대로 맛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운데 팥이 안 든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아마 붕어빵 장사가 딴 생각을 하거나 바빠서 그 붕어빵에 팥을 넣는 걸 깜빡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는 줄은 알지만 붕어빵에 팥이 안 든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예상대로 맛이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똑같은 붕어빵이라 하더라도 팥이 든 것과 안 든 것은 맛이 천지 차이입니다. 부활 신앙을 갖고 사는 사람과 부활 신앙 없이 사는 사람의 차이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 생명을 간직하고 있고,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생각하고 부활의 삶을 삽시다.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로 나아가신 예수님처럼 아픔도 있겠지만 기쁨이 훨씬 더 클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도 죽음을 건너 생명으로, 세상을 지나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내리시는 기쁨과 은총의 교우 여러분과 교우 여러분의 가정에 가득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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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님 달님의 부활이야기
- 김기환 신부-
'햇님 달님' 이야기를 잘 아실 겁니다. 마실에 품팔러 나갔던 어머니가 돌아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납니다. 호랑이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라고 꼬셔서 어머니를 잡아먹고나서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 하다가 결국 죽음을 당한다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어보면 예수님을 몰랐던 우리 조상들이었지만 자신들의 삶 안에서 부활의 의미는 깨닫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정네 없이 아이들 셋을 먹여 살리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젊은 나이에 홀로 되어 남의 집에 품팔며 사는 여인네의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을 겁니다. 호랑이가 어머니를 잡아 먹었다는 것은 어머니가 곧 호랑이로 변한 것입니다. 어머니 마음속에 쌓인 한이 호랑이로 둔갑한 것이지요. 결국 그 호랑이가 자신의 아이들까지 잡아먹으려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어른이 다 되어도 자식을 편하게 놓아주지 않는 호랑이 같은 어머니,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를 우리는 흔히 보지 않습니까.
아이들은 호랑이를 피해서 나무로 올라갑니다. 나무에 올라간 아이들은 땅에 있을 때와는 달라졌습니다. 맨날 어머니가 품팔아서 가져다주는 양식에만 의존해야되는 수동적인 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호랑이라는 무시무시한 동물과 대적하면서 온갖 꾀를 낼 줄 아는 훨씬 성숙한 아이들이 되었습니다. 결국 자신들의 꾀에도 한계가 있어서 하늘에 도움을 청합니다. 그리고는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이 되지요. 호랑이는 수수밭에 떨어져서 죽고요.
아이들이 온 누리를 비추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호랑이와 나무였습니다. 먼저 호랑이를 볼까요. 호랑이는 곧 어머니(혹은 아버지)입니다. 호랑이가 죽지 않으면 아이들이 부활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어른이 다 되어서도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완전히 떨쳐 내지를 못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 분노 등 부모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이 호랑이가 되어 늘 나를 쫓아다닙니다. 그 호랑이가 죽어야 아이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여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갔다는 것도 참 재미가 있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동양이나 서양이나 나무는 '생명과 성장'을 상징합니다. 또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주는 역할도 하구요. 나무는 사람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입니다. 아이들은 나무에 올라갔기 때문에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자나무에 달리셨기 때문에 온 인류를 비추어 주는 구세주로 부활하실 수 있었습니다.
호랑이가 아이들을 잡아먹는 부모의 모습을 상징하고 있지만 나무 역시 부모의 모습입니다. 호랑이는 내가 극복하고 떨쳐 버려야할 부정적인 부모의 모습이지만 나무는 부모님과 화해하고 난 뒤에 맑은 눈으로 바라보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부모님에 대한 나의 사랑과 애정이 새롭게 솟아나는 부모님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이야기의 형태로 두고두고 오늘날까지 내려왔을 테지요. 하지만 그것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햇님 달님 이야기는 전해주고 있습니다. 조상들 중에 누군가는 햇님 달님으로 부활하는 체험을 했기 때문에 자신의 지혜를 후손에게 전해 주었겠지요.
옛날 이야기 속에서 부활의 의미를 찾아보고자 했던 것은 결코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를 축소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나의 삶 속에서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라는 것을 조상들의 지혜를 빌어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햇님 달님 이야기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 호랑이도 죽어야 하고, 나무에도 올라가는 인간적인 노력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하느님의 은총)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이 번 부활은 동아줄 잡고 햇님 달님되는 체험들을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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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24,1-12 :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 장효강 신부-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3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4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8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9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10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11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 묵상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리가 사십일 동안 기다려온 예수님의 부활을 드디어 맞이했습니다. 먼저 모든 형제 자매님들께 예수님의 부활 인사를 드립니다. "부활 축하드립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기뻐하며 경축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 전부를 예수님께 투신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스승 예수님은 너무나도 힘없이 처참하게 죽으시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제자들에게 있어서 그들이 걸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림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위해 내던졌던 모든 것을 되돌려 주는 사건입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무의미하고 값어치 없는 것이 아니라, 참으로 소중하고 세상에 더할 수 없는 보물을 가져다 주는 의미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계속해서 우리에게 주시겠다던 영원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의 이 부활 사건이 내세에서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오늘날 우리에겐 큰 위안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힘은 오늘의 현실 안에서도 발휘되고 있습니다.
무덤에 처음으로 갔던 막달라 여자 마리아도 처음에는 부활한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도 한참동안이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며 걸어갔지만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에 처해진 후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다락방에 숨어서 가슴을 움츠리고 두려움에 떨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렇게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제대로 듣지 못하며 가슴이 있어도 움츠려 있기만 한다면 이 어찌 살아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눈을 뜨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제대로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움츠렸던 가슴을 활짝펴고 우리의 가슴이 활활 타오르게 해 주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참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단 한번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쉽게 망각하고 식어버리기에 매 년 이 부활을 기념하며 새롭게 태어나야 합니다. 매 주일 미사를 통하여 부활을 기념하며 뜨겁게 데워져야 합니다. 부활을 맞이한 우리는 단순히 2,000년 전의 사실을 기념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을 통해 가져다 준 참 생명을 살아가고 있는지 반성해 보고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다시금 부활한 삶에 동참하도록 우리의 눈을 뜨고 귀를 열어 뜨거운 가슴으로 뛰어들어야 할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단순히 "참 신기한 일이야", 또는 "정말 그럴까?"하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신기한 일도, 행운도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 미사 때 장엄하게 봉독된 여러 독서들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 인간을 사랑에 넘쳐서 창조하셨고 인간이 하느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예언자들을 통해 불렀으며, 급기야는 자신의 사랑하는 외아들까지 보내셨음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오로지 사랑의 결과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알게 해주는 증표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부활 잔치에 함께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냥 그렇게 시간을 보내어 부활을 맞이했다면 그 부활의 감격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내 자신이 그렇게 사순 시기를 무감각하게 보냈다면 부활의 축하인사를 받음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부활하여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기만 한다면 그리고 우리의 모든 것을 걸기만 한다면 그 가슴 벅찬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기쁨을 안고 우리의 가정으로 이웃으로 갑시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같은 힘찬 발걸음으로 달려갑시다.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방에 알리러 말입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 도다. 알렐루야! 알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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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선물
-양승국 신부-
부활성야를 잘 지내셨는지요? 오늘 저녁 저희 수도원에서도 수사님들, 아이들, 후원자들과 함께 하는 성대한 부활성야 미사를 드렸습니다.
빛의 예식 때, 그리고 세례 갱신 예식 때 제대 위에서 내려다보니 촛불을 들고 서있는 저희 아이들의 얼굴이 어찌나 예뻐 보이던지요? 다들 한 송이 화사한 꽃과 같았습니다. 꽃도 그냥 꽃이 아니라 생명력이 펄펄 넘치는 꽃, 영원히 시들지 않을 것 같은 예쁜 꽃으로 보였습니다.
다시 한번 부활하신 예수님의 평화와 은총이 모든 분들 가정에 함께 하시길 빕니다.
오늘은 여러 소중한 체험을 한 날이었습니다. 아침에는 입원해 계시는 한 신부님 병문안을 갔었지요. 병문안을 마치고 엘리베이터가 만원이길래 운동 삼아 계단으로 내려오고 있었는데, 내려오는 계단 한 가운데 한 어머니가 앉아계셨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태가 심각한 듯 했습니다. 고개를 무릎에 파묻고 흐느끼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상심했으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저렇게 울고 계실까 하는 마음에 저 역시 마음이 아파왔습니다.
오늘 부활 대축일을 맞아 투병 중에 있는 분들, 그리고 그 환자들로 인해 가슴아파하고 힘들어하는 모든 분들이 오늘 하루라고 주님의 은총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시길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오후에는 황사현상으로 출가(出家)했던 두 아이를 우여곡절 끝에 데려왔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 두 아이를 저희 공동체에 부활선물로 주신 듯했습니다.
저녁에는 부활 때면 언제나 잊지 않고 찾아오는 이곳 출신 기숙생을 만났습니다. 꼬마때 와서 거의 10년 이상 저희 집에 살다가 취직해서 나간 친구인데, 얼마나 야무진지 모릅니다. 얼마나 자기 앞가림을 잘 하는지요? 이 야무진 친구 역시 또 하나의 부활선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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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무덤을 경축하는가?
-박상대신부-
어제 성금요일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는 전례를 통하여 우리는 어떠한 욕설과 조롱도, 침 뱉음과 모욕적인 발언도, 무자비한 채찍질과 구타도, 살을 파고드는 아픔도, 나아가 인간 최대의 부정적인 체험인 사형선고와 그로 인한 죽음도 예수님의 인간적이고 하느님적인 사랑을 굴복시킬 수 없음을 보았다. 하느님 사랑은 이렇게 죽음까지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자기에게 모든 불리한 것을 참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지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제 다 이루었다."(요한 19,30)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인간 예수님은 고개를 떨구며 숨을 거두셨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신 순간, 공관복음이 공통적으로 보도하는 바에 따르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으며(마태 27,51; 마르 15,38; 루가 23,44), 예수의 죽음을 지켜보던 백인대장과 사람들은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마태 27,54; 마르 15,38; 루가 23,47) 하고 고백하였다. 마태오는 그 순간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리면서 잠들었던 많은 옛 성인들이 다시 살아났다는 사실을 추가로 보도하고 있다.(마태 27,51-53)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이 가져온 사건들이다. 사태는 분명히 돌변했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순간, 그분이 원래 지니고 계셨던 신성(神性)이 그 모습을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세계의 역사에는 또 다른 하느님의 자기계시가 시작되었다. 예수의 죽음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가 드러난 것이다. 예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승리의 사건이다. 이는 인류의 역사가 지금껏 누려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누리지 못할 최대의 승리이다. 이는 죄에 대한 승리요, 죄로 말미암은 죽음에 대한 승리로서 곧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시 살아 나셨다.
이방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는 일이었고, 유다인들에게는 비위에 거슬리고, 온갖 분노와 모욕을 불러일으킨 일이었지만(1 고린 1,23), 예수님의 공생활 중 모든 가르침과 행동의 마지막 책임 있는 결론이 십자가상 죽음이라면, 오늘 우리가 자랑스럽게 믿고, 경축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것이 참되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그분이 일찍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영원히 살 것"(요한 11,25)이라는 말씀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는 말씀에 대한 확증이다. 따라서 그분의 부활은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우리의 믿음과 희망이 죽음으로 끝나거나 죽음에 머물지 않고 살아 있는 자에 있다는 사실을 보증해주는 것이다. 참된 믿음이란 거짓에 뿌리를 둘 수 없다. 참된 믿음은 변할 수 없는 ’진리’에 그 뿌리를 두어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자기 아들을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분 삶의 내용뿐만이 아니라, 그분 자체가 진리임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진리는 불멸한다. 죽을 수 없다. 만약 죽더라도 다시 살아나야 하는 것이 진리이다.
하느님께도 예수님께도 죽음은 없다. 그분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며, 이것이 곧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 편에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죽어야 할 운명을 지닌 우리 인간들 편에서 진리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에 관한 믿음을 얻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일단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들은 루가복음에서도 부활을 목격했다는 보도는 아무 데도 없다. 이는 모든 복음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확실한 것 두 가지는 안식일 이른 아침에 무덤을 찾아갔던 여인들이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빈무덤만을 보았다 것과 (두) 젊은이가 전해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는 것이다. 결국 빈무덤과 메시지를 가지고 우리는 예수부활의 믿음에 도달하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렇다면 예수부활에 관한 믿음은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하는 도전이다. 이 도전이 비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만 갑자기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첫날 아침부터 그랬다.
부활의 믿음에 대한 도전의 실마리는 빈무덤과 젊은이의 메시지이다. "너희는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고 있느냐?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분이 전에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죄인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처형되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고 하시지 않았느냐?"(5-7절) 이 구절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는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죽은 자 가운데 있을 수 없으므로 무덤이 비어있다는 것이며, 갈릴래아 활동시절에 세 번에 걸쳐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라는 것이다. 더욱이 오늘 복음에서 빈무덤을 최초로 목격한 여인들이 바로 갈릴래아에서부터 예수님을 줄곧 따라 다녔던 여인들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루가 23,49) 오늘 루가복음의 내용을 미루어 볼 때 이 여인들은 예수님 부활의 최초 증인들이다. 이 여인들은 갈릴래아 시절부터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었다. 안식일 이른 새벽에 급하게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에 갔던 이유도 ’명절 준비일’과 ’안식일 시작’ 때문에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과 함께 경황없이 치렀던 예수님의 장례(루가 23,50-56)를 송구스럽게 생각하여 보완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그들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그 이상을 그분과 함께 하려 했던 것이다. 결국 이런 여인들에게 부활신앙의 은총은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들 또한 부활신앙이 갈릴래아와 빈무덤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애독자 여러분, 주님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