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앨범 속의 어머니 모습 가운데 1940년대 초기라고 여겨지는 사진이 나에게는 최초의 미인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모습은 조금도 꾸밈이 없어서인지 특별히 지금의 보통 미인들의 모습과 별다를 게 없다. 그러나 여자와 남자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철이 든 뒤, 최초로 본 아름다운 여배우의 모습은 나의 어머니의 그 모습과 뚜렷이 구분된다. 무성영화시절의 유행처럼 보이는 백치 같은 화장술은 지금의 영화배우들과도 구분된다. 둥근 얼굴,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 작고 도톰한 입술, 초생달처럼 수줍게 그린 가녀린 눈썹은 눈과 눈썹 사이의 여백이 넓게 드러나며 조선조의 미인상을 보는 양 고혹적이다. 그것은 서양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개인적 기억 속에선 외국영화의 경우 최초의 천연색 영화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이미 비비안 리의 모습이 찰리 채플린이나 키튼의 무성영화에서 보이는 미인과 확연히 다르다. 한국영화에선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인 1950년대의 영화들에서 옛 미인의 모습이 사라지거나 변하고 말았다. 해방둥이인 내가 1945년 광복 전의 미인에 대해 얘기하기는 심히 낯간지러운 일이다. 1950년 전쟁 후의 영화들은 초등학생 시절, 전후의 사내아이답게 여기저기 빨빨 쏘다니면서 극장 앞에서 오래도록 한눈 팔던 경험이 있어 옛 여배우들이 낯설지 않다. 물론 복혜숙이니 눈물의 여왕 전옥이니 자유만세의 김신재 등, 아버지 세대를 통해 말로만 듣던, 지금은 고인이 된 미인들의 모습도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그들은 해방 전 세대로 분류하겠다. 이른바 이승만 정권의 나라 세우기 시절부터 허물어지기까지인 50년대를 20대의 청춘으로 구가한 인기절정의 노경희, 이민자, 최은희, 조미령, 황정순, 주증녀, 도금봉, 문정숙 등등, 지금 생각하면 잘 익은 김장김치처럼 완숙하게 느껴지는 미인들부터 이 자리에서 거론하겠다. 그들이 지금의 미인들과 확연히 다른 것은, 당시에는 상당한 글래머로 소개된 이들 농염한 이미지의 육체파 미인들이 결코 지금처럼 저돌적이거나 개방적인 성적 매력을 갖추고 관객의 숨통을 조였던 것이 아니고, 오히려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수줍고 은은하고 조용한 분위기로 역설적인 관능을 자극하면서 아주 향기 높은 성적 매력을 풍겼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남자들에게 보호본능을 일으키게 하는 연약한 매력은 더더욱 아니어서 수줍어하면서도 생활력 강한 모성의 여인상을 느끼게 했던 미
琯湧甄? 조미령씨나 주증녀씨처럼 몸집이 작고 깜찍하고 귀여운 미인형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조차 생활력 강하고 희생적인 모성의 이미지로 시대 분위기에 잘 어울렸던 미인이다. 대체로 그녀들의 나이는 나의 어머니 세대에 속한다. 전쟁이 끝난 폐허 위에서 먹고 살려고 애쓰던 시절이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문화생활이란 꿈에서나 이룰 수 있었던 고달픈 시절이다. 여성에게 산아제한의 유리함을 깨닫게 하는 약삭빠른 시절은 아직 아니고 다산(多産)이 미덕이던 시대였다. 그래서 무엇보다 가슴과 히프의 볼륨이 커야 하고 몸매도 풍성하고 영양이 좋을수록 관능적 매력과 함께 아름다움이 돋보이던 시절이다.
60년대가 지나면서 조금씩 미에 대한 욕구가 달라진다. "젊은 표정" "아름다운 수의" "푸른 꿈은 빛나리" "맨발의 청춘" 등의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시대 변화와 새로운 세대의 등장이 눈여겨지는 시기이다.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바야흐로 청춘의 힘으로 등장한 학생세대인 4.19 세대, 그들이 바로 그 시대의 신세대이다. 우리 모두 알다시피 피의 희생을 치르고 등장한 이 신세대에 역사는 잔인하게도 주역을 맡기지 않았고, 엉뚱하게 5.16 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오히려 이들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하지만 그 새로운 힘은 결코 공중으로 증발되지 않고 이지러지며 변질되어 지하로 숨고 또 군사정권의 강력한 개혁의지는 좋든 나쁘든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으므로 어찌됐던 지난 50년대와 문화감각은 달라진다. 김지미, 이빈화, 최지희, 엄앵란, 남미리, 김혜정, 전계현, 태현실, 최난경 등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미인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 세대에 비해 훨씬 지적 이미지를 풍기고 저돌적이고 파격적인 이미지를 풍기면서 산아제한의 영악함을 연상시키고 어쩐지 자유로운 연애를 꿈꾸게 하는 이들 미인의 등장은 새로운 시대, 새로운 세대가 시대의 요구에 의해 도래했음을 알리고 있다. 그러나 그 요구는 철저한 군사문화적 압력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즉 아름다움이 대중에게 자연스럽게 사랑받는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나 재력에 의해 그 욕구의 제물로 희생되는 그런 신봉건주의적 피해 부산물로의 전락이다. 일생을 연기자로 남겠다는 여배우가 사라지기 시작하던 때였다. 지식인은 속셈을 안 보이고 입을 굳게 다물고 복수심만 내심으로 깊이 잠재해 있어 비뚤어진 학사주점이 유행하고 뮤직홀이 성황이었다. 얼마 뒤에는 장발, 통기타, 대마초가 한꺼번에 젊은이들 속에서 돌풍을 일으킨다. 마침 세계적으로 히피 문화가 선풍을 일으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