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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복희 수필가님 축하드립니다!
선린대학교 문예창작과정의 도복희 선생님께서
(사)한국수필문학진흥회 . 계간【에세이문학】으로
* 초회추천 수필 「안개열차」 ㅡ 2024년 겨울호
* 완료추천 수필 「구-구-구- 외치는 아이처럼」 ㅡ 2025년 봄호
2회 당선되어 문단에 데뷔하셨습니다.
수필가로써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드리며
건필하시고 아울러 문운이 함께 깃드시기를 바랍니다.
■ 약 력
· 대구교육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졸업.
· 학위논문 : 『남·북한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수록된 시 제재 비교 연구』
· 제15회, 제22회 경상북도 초·중등 교원 예능실기 대회 금상.
· 제29회 통일문예작품 현상공모 일반부 우수상.
· 경북 愛 추억담기 경상북도 이야기보따리 수기 공모전 외 다수입상.
· 에세이문학 초회추천 (2024년 겨울호). 완료추천 (2025년 봄호).
· 초등학교 수석교사 퇴직.
· 이메일: onlydo01@hanmail.net
■ 등단소감
‘나도 그래’ 라는 말
바람이 허우룩한 심사를 부추길 때마다 바다에 갔습니다. 삼킬 듯 덤벼들던 파도가 바위벽에 부딪쳐 허우적허우적
물러나고 나면 바람은 잦아들었고. 윤슬 반짝이는 해변을 따라 알레그로 걸음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울다가 웃고, 주저앉았다 일어나고, 나를 토닥이던 순간순간이 다 수필이었습니다. 하지만 읽는 것과 쓰는 것은 달랐
습니다. 초등시절, 학교대표로 글짓기대회에 참가하고 발표를 손꼽아 기다리던 그때처럼, 초회추천과 완료추천을 기
다렸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엄마께 가져다드리려고 잡채에 깨소금을 뿌리다가 등단소식을 받았습니다.
전화기를 건너온 고소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합니다.
읽어주는 이들에게 ‘나도 그래’ 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글을 써서, 마음과 마음의 공감대를 공유하고 싶습니다.
수필의 숲속에 발을 들여놓게 해주신 에세이문학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똘기 같은 저를 숙성시켜 주신 유진 교수님과 함께해온 문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삶이 더욱 풍성해 질 것 같습니다.
■ 초회당선작
안개열차
도복희
"댁이 여기서 자고 간다니 참 고맙네요"
“왜 그래 엄마, 엄마 제발 정신 좀 차려봐"
내내 가슴을 졸이던 작고 큰 신호 끝에 결국, 차표도 구간도 없는 열차에 탑승하고 말았다.
구십여 년 인생 밭을 쉼 없이 갈더니만 이태 전부터 감정 신호등이 자주 고장 났고, 기억은 희뿌연 안개 속이었다. 황색 점멸등 깜빡이는 날이 점점 많아졌고, 빨간불이 켜지면 멈춤은커녕 더 속력을 내어 달렸다. 어쩌다 녹색불이 들어올 때는 여섯 자식과 맏손자의 이름을 엇갈림 없이 또박또박 말하지만, 금세 빨간불로 바뀌고는 본인 이름도 잊어버렸다.
가을풍경을 보여주려고 휴일 느지막이 팔공산으로 드라이브를 갔을 때다. 노랗고 빨간 단풍잎들이 석양에 물들어 더욱 화려하고 선명해서 감탄사가 절로 나왔지만, 엄마는 별다른 감흥을 보이지 않았다. 혼잣말로 “우리 집 언제 가나?”를 되풀이하다가 황색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운전사 아저씨한테 빨리 우리 집에 데려다 달라 해라.” 지겨움을 터트리며 연거푸 하품을 했다. 도로에는 기다란 먹잇감을 함께 끌고 가는 개미 행렬처럼, 느림보 차들이 꽁무니에 긴 꼬리를 달고 있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엄마의 이름을 물으니 “채화련”이라 했다. 그럼 채형조는 누구냐고 다시 물으니 “채화련, 내 이름 맞다”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집에서 불리던 아명이었을 것으로 짐작했다. 예정했던 시간이 훌쩍 넘어 집에 도착하자 나를 툭툭 치더니, 아저씨 차비를 줘야 하는데 지갑이 없다며 “네가 좀 주라”고 했다. 운전하는 뒷모습만 보아서인지, 가장 든든해 보이는 던 사위도 잊어버렸다.
함께 퍼즐 맞추기도 하고, 종이접기와 색칠공부 등, 갖은 프로그램으로 인지기능이 더 나빠지지 않도록 노력했지만, 뿌옇게 흐려지고 지워진 기억을 되찾게 할 방법은 없었다.
요양보호사는 예쁜 치매라며 위로를 하지만, 커다란 바위에 짓눌린 가슴으론 끄덕일 수가 없다.
가스레인지를 켤 줄도 모르고, 전기밥솥 스위치도 누를 줄 모른다. 당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는 무엇이든 쥐어준다. 자식들에게 받은 영양제도 나눠주고, 집에 다녀가는 사람이면 누구든 차비하라며 돈을 준다. 안 받는다고 극구 사양을 하면 몰래 가방에 넣어놓기도 한다. 돈이며, 간식이며, 눈에 보이면 준다. 지갑에 천원 권 지폐만 넣어 놓았었는데 지금은 그 지갑마저 못 챙긴다.
오빠가 편히 모시겠다고 매번 사정을 해도, 내 집이 최고라는 황소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다.
의논 끝에 평일에는 요양보호사 도움을 받고 주말에는 여섯 남매가 돌아가며 당번을 하기로 했다. 엄마의 반찬은 가위로 잘게 잘라 다짐 식단으로 만든다. 불고기에 깨소금을 듬뿍 뿌려 쓱쓱 비빈 밥을 미역국과 드리면 제일 잘 드신다. 생선도 살을 발라서 밥숟가락 위에 올려 준다. 김치를 잘게 잘라서 중간 중간 올려 준다. 밥을 다 드시면 “우리 엄마 밥 다 먹었네. 표창장 줘야겠다!” 기쁜 표정으로 그릇 바닥을 보여주면 서너 살 어린애처럼 손뼉을 친다.
휠체어에 태워 수목원이나, 공원으로 산책을 가면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부끄러울 때도 있었지만, 기분이 좋으면 장소 불문하고 가수가 되는 엄마가 마냥 사랑스럽고 고맙다. 언젠가 가족들 모두 노래방에 갔을 때, 마구 손사래를 치다가 부른 노래는 음정 박자가 잘 맞지 않았다. 그날이후 엄마의 노래를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랬던 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면서는 늘 노래와 함께였고, 애창곡들은 주로 타령조의 노래와 울고 넘는 박달재 같은 옛 가요와 동요들이었다. ‘동자야, 줄잡지 마라. 줄 떨어지면 정 떨어진다’로 시작하는 노래와 ‘내 딸 주고 내 사위야, 울고 갈 길을 네 왜 왔노. 이왕지사 왔거들랑 발치 잠이나 자고 가소’란 노래를 즐겨 부른다. 해질녘 도원지 수변공원을 산책하는데 오늘은 신곡이다.‘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그 노래는 어찌 아느냐 물으니 고개만 끄덕이고는 무한 리바이벌이다. 엄마의 애창곡 리스트에 ‘고향 생각’을 추가했다.
추석날밤, 곁에 누워 잠자는 동생 다리를 보더니 갑자기 일본말을 했다. 깜짝 놀라 말뜻을 물으니 ‘네 다리 굵다’란다. ‘네 눈 참 예쁘다’를 일본말로 해보라니 발음이 유창하다. 유년시절 배웠던 일본말들이 떠올랐나보다. 근래의 일은 물론이고, 어제 일도 기억 못하면서, 동네 친구들과 함께했던 놀이도 말한다. 고무줄놀이도 하고, 땅따먹기도 하고, 정월 대보름에는 쥐불놀이도 했던 모양이다. 그저 엄마로만 알았던 내게는 엄마의 유년 앨범이 한 장, 한 장 채워지지만, 정작 엄마에게는 하나씩 지워지는 중이다.
엄마의 기억을 태운 열차는 지금 어디쯤에, 얼마나 짙은 안개 속을 달리고 있는 걸까?
열여섯에 시집와서 평생 가꾸고 지켜온 집을 이제는 떠나야 한다. 속옷도 새로 사고, 서랍장에 있는 옷들을 챙겼다. 실밥 터져 나온 것은 불로 지지고 뻑뻑한 지퍼는 양초를 문질렀다. 따뜻하고 가벼운 분홍색 셔츠와 카디건을 샀다. 생필품에 이름표를 붙이고, 늘 덮고 자던 오리털 이불과 침대 커버에도 헝겊 이름표를 주문해서 바느질했다. 어린이집 가는 자녀들의 준비물을 챙기듯 입소 준비물 리스트를 꼼꼼히 챙겼다. 엄마의 칠순 기념일에 찍은 가족사진도 챙겨 넣으며, 자식들 얼굴은 부디 잊지 말라고 기도한다.
언제 돌아올지도 모른 채, 칠십 년 가까이 동고동락한 집을 떠나는데, 해맑게 웃고만 있는 엄마에게 ‘나들이 가자’며 옷을 갈아입혔다. 제집에 엎드려 눈알만 굴리고 있는 흰둥이에게 “그동안 친구가 되 줘서 고맙다, 집 잘 지켜줘서 고맙다” 눈빛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승용차 뒷좌석에 엄마와 나란히 앉아 밖을 보니 언니가 돌아서서 울고 있다. 가까스로 참았던 눈물이 왈칵 솟구쳐 차에서 내렸다. 집 뒤로 데려간 언니를 부둥켜안고 소리죽여 울었다.
요양원에 도착하자 직원들이 친절하게 마중한다. 코로나진단키트 검사결과 음성이 나오자, 요양사는 점심이 늦었다며 엄마를 얼른 식당으로 모셔간다. 남편은 말없이 내 등을 쓸어준다. “엄마 적응 잘하고 계세요. 곧 면회 올게요”라는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돈다. 혼자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작별 인사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날까봐 늘 두려웠는데, 낮밤을 보살펴 줄 테니 그나마 다행인 걸까?
원장과 사무장, 간호사의 요양원생활에 관한 상세한 안내에 애써 마음을 달래보지만, 불안은 한 겹도 줄어들지 않는다. 서류 작성을 끝내자 분수처럼 눈물이 솟구친다.
휑한 주차장, 버썩거리는 바람 속에서 불효라는 주홍 글씨가 휙, 나를 낚아챈다.
■ 완료 당선작
구- 구- 구- 외치는 아이처럼
도복희
학습교구를 챙기면서 혼자 웃는다. 도자기체험 수업을 마친 뒤 식당으로 갔을 때, 식탁에 붙여진 숫자 9를 가리키며 구- 구- 구-를 외치던 그 아이 모습이 생각나서이다.
도움반교사의 퇴직으로 인해 2학기동안 도움반담임을 맡게 되었다. 도움반(Special need class)은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교육하는 특수학급이다.
반 아이는 다섯이지만 항시 돌발 상황에 대비하고 있어야 했다. 알게 모르게 차별과 놀림을 받았을 아이들이다. 각각이 다른 장애에 대해 이해시키는 것, 학습과정을 쉽게 설명하고 이해를 시키는 것, 아이들이 자신의 능력과 가치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 등등, 경험부족인 나에겐 처음부터 딜레마였다.
특수교육을 전공한 선생님께 자문도 구하고, 많은 자료도 찾아보고, 특수교육 관련 강의도 많이 들었다. 결과는 무한 반복학습과 관심사에 집중할 인내력, 진심어린 사랑으로 하나하나 눈높이를 맞추고, 자기긍정과 자존감을 갖도록 기다려 주는 것 이외의 특별한 방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마주보며 눈을 맞추기도 힘든 아이였다. 소근육이 발달하지 않아서 연필을 잡을 수 없었고, 혼자서는 화장실 출입도 서툴렀고, 옷 단추를 끼우지도 못했다. 등교를 해서도 첫 시간은 소파에 앉아서 쉬어야 했다. 등을 기대고 앉은 자세가 워낙 느긋하고 여유로워서 회장님이라는 별명을 지어주었다.
2주일이 지나고부터는 시계바늘 4까지만 쉬고 책상에 앉자고 손가락약속을 했다. 시계를 보여주면 스스로 일어나 자기 자리에 와서 앉았다.
1학년도 풀 수 있는 문제를 5학년에게 반복하고 반복해서 가르쳤다. 눈물을 글썽이며 겨우 겨우 문제를 풀고 나면, 나는 엄지를 세워 칭찬했고, 얼싸안으며 감격했다. 어떤 때는 전날과 똑같은 문제를 내어놓고 풀어보라고 하면, 어렵다고 고개를 저으며 나의 기운을 빼기도 했다.
한 학기동안의 성과는 1부터 10까지 세기, 1부터 3까지 쓰기, 연필을 바로잡고 이름쓰기였다. 글씨를 잘 썼다고 칭찬하면 ‘마니, 마니, 마니’라며 동그라미를 쳐달라고 했다. 기분에 따라 다섯 개 또는 두 개 라고 개수까지 주문했다.
매일 두세 번씩 연습을 시켰더니 셔츠단추를 제구멍에 맞게 끼웠고, 혼자서도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언어에서는 유독 'ㅊ' 발음이 어려웠다. “무슨 학교에 다닙니까?” 물으면, 입을 벌리고 한참을 더듬거리다가 “ㅊㅊㅊ어엉림 ㅊ초오~등학교”라 말하고는 크게 숨을 내뱉었다. 엄지를 세워 칭찬을 하면, 와~와~ 박수를 치고, 몇 번이나 하이파이브를 하자고 했다. 그 모습이 얼마나 대견하고 예뻤던지....그 순박함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흐뭇한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도움반 아이들과 함께하면서 나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느긋해진 나로 인해 아이들이 편해지고, 집안 분위기가 좋아졌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출근을 앞둔 아침시간은 초를 다투는 전쟁이었다. 화장을 하면서 아이들을 깨우고, 아침을 차리면서 아이들의 일과를 챙겨 확인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으려면 집안일, 직장일, 과외활동, 어느 것에도 소홀하면 안 되었다. 가족들의 불평이나 원성을 들으면서도 굼뜬 행동을 참기 어려웠다. 완벽을 추구할 뿐이지 매사에 완벽할 수 없다는 말을 하면서도 무슨 일이든 빨리 해결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생각대로 해결되지 않는 일이 스트레스로 누적되어 가끔 몸살을 앓기도 했다.
그 무렵 친구가 권해 준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읽었다. 한가로이 거닐 것, 들을 것, 권태로울 것, 기다릴 것, 마음의 고향을 간직할 것, 글을 쓸 것이라는 여섯 가지의 삶의 태도를 제시하고 있었다.
충분히 공감되는 내용들이었고, 그렇게 변하고 싶었다. 하지만 익숙해진 삶의 틀을 깬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껏 만들어 온 것들이 달아나 버릴 것 같은 불안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수다를 떨고, 감정을 노닥거리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여겨 온 나의 삶에는 결국 적용하지 못했었다. 후배로부터 수필 쓰는 모임에 가입 권유를 받았을 때도 ‘시간여유가 생기면’을 내세워 거절했었다.
그렇게 고지식했던 내가 무엇이든 빨리해야 된다는 생각을 내려놓게 되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많이 보고, 듣고, 읽어도, 자신이 동화(同化)되어 실천하지 않으면 지식이나 상식으로 머물 뿐이라는 것,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매사에 여유가 생긴 것이다.
기한이 정해진 업무가 아니면 조금 늦어도 독촉하지 않는다. 목표가 정해진 등산보다는 여유로운 산책을 택한다. 일방통행이던 삶에서 때론 샛길로 빠져서 꽃도 보고 나무도 보고 개울에 손발도 담가보면서 우회의 즐거움을 맛보는 중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걸 놓치고 살아왔는지, 얼마나 단순하고 건조한 사람이었는지를 이제야 알아가는 중이다.
후배를 따라간 수필모임의 문은 아주 작은 두드림에도 큰소리로 응답해주었다.
마침 그 날은 동호회문집 출판기념일이었다. 무대 뒤에 걸린 작은 걸개는 너무나 웅장해보였고, 탁자위에 올려둔 책은 값져보였다. 감미로운 음악이 흐르고 문우들의 머리에는 빨간 나비들이 팔랑거렸다.
책 한 권을 살짝 가져와 펼쳐보았다. 책장마다 글들이 뛰어나와 ‘어서 와요’ ‘잘 왔어요’ 속삭이는 듯했다. 마음의 여유가 없으면 한 줄도 쓸 수가 없는 것이 글이라며, 후배는 귓속말로 그분들 중에는 나보다 더 바쁜 분들도 많다고 했다. 글쓰기를 통해보다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다는 그들의 문집에서는 잘 닦은 놋그릇처럼 은은한 광채가 났다.
그래, 이제다시 시작이야. 확실히 알게 된 숫자 9를 가리키며 자신 있게 구- 구- 구-를 외치던 그 아이처럼..... 몸은 비록 빠른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사소한 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느리게 사는 것의 의미를 하나하나 느껴가며, 마음의 여유를 가꾸어 가는 거야.
느리고, 서툴고, 한없이 더디지만, 진지한 자긍심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도움반 아이들의 모습에 나를 겹쳐보면서 빙그레 혼자 웃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