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의 길 / 김도은
건조했던 나의 귀가 수족관을 채우는 맑은 물소리에 촉촉해진다. 병원 관리원이 복도에 있던 유리 속 세상을 대청소중이다. 호스를 타고 들어온 투명한 물줄기들이 수족관으로 콸콸 쏟아지고 물이끼로 불투명했던 유리 안쪽 세상이 말갛게 깨어난다. 붕어, 잉어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주저앉았던 수초가 다시 일어선다. 느릿느릿 우렁이들이 서로 몸을 비빈다.
입원 중인 엄마를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었다. 작년에 결혼해 임신한 딸이 입덧이 심해서 새콤한 무생채를 해볼 참이다. 막상 무를 사 오기는 했는데 무생채를 만드는 일이 아득하다. 커다란 무를 썰려니 칼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칼을 힘주어 누르니 중간에 단단히 꽂혀 칼날이 빠지지 않는다. 아삭아삭 씹히는 무가 이렇게 단단했던가. 무에게도 근육이 있었던 모양이다. 문득,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심이 박힌 무가 떠올랐다. 어쩌면 그것이 무의 뼈였는지도 모르겠다. 겨우 칼을 빼내고 다시 힘을 내어 채칼에 무를 가져갔다. 커다란 무가 내 손안에서 자꾸 미끄러졌다. 채 써는 일이 이렇게 힘든 일이었던가.
작년까지만 해도 팔순이 넘은 어머니는 김장을 200포기나 했다. 썰어야 할 무가 산더미였을 것이다. 체구가 작은데 그것을 혼자 다 해치우셨다. 나는 직장을 이유로 평생 엄마 김치만 얻어먹었다.
사계절 김치가 내 집에 넘쳐나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고도 엄마의 한숨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소리 없이 모든 일을 척척 해내셨다. 무를 썰며 자식 사랑에 돌연 눈이 매웠다.
텃밭에 배추와 무를 심어 기르신 어머니는 김장하는 날은 이른 아침부터 손질하여 앞마당에 수북이 절여놓았다. 이튿날 새벽까지 밤새 몇 번을 뒤집고 찬물에 헹구어 물기를 뺐다. 고무대야에 수북이 무채 썰어놓은 것을 보면 언제 그 많은 것을 다 하셨을까 생각했지만 뜬 눈으로 밤을 지샌 고단함은 생각지 못했다.
김장을 주말에 하시면 거들어 드리고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자식들 힘들까 봐 한사코 주중에 일을 다 해치우고 김치를 가져가라고 연락하셨다.
내리사랑은 있어도 치사랑은 없다더니 평생 엄마 덕분에 무생채 한번 썰어보지 않던 내가, 내 자식 먹이려 무를 썰고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무생채를 완성해 딸에게 보내고 엄마 몫을 따로 담아 입원해 계신 병원에 면회를 갔다.
지난번에 수족관 청소하던 분이 물 위에 뜬 검은 뭔가를 연신 건져냈다.
"어머, 우렁이가 죽었나 봐요?"
"예정된 죽음이죠. 토종 우렁이는 성체로 산란을 해요. 우렁이 새끼들이 어미 살을 모두 파먹고 밖으로 나오면 어미는 껍데기만 남아 이렇게 물에 뜨죠."
그 말을 듣고 등골이 오싹해져서 관리원 곁으로 다가가 물속을 살폈다. 수십여 마리 건강한 토종 새끼우렁이들이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새끼들에게 몸을 내준 어미는 허깨비가 되어 물 위로 둥둥 뜬 것이었다. 관리원이 내 손에 건넨 껍질은 가볍다 못해 푸석푸석 부서졌다.
"어디 우렁이뿐입니까? 우리 어머니들의 삶도 똑같지요. 진자리 마른자리 다 갈아주고 금이야 옥이야 키우잖아요. 철없는 우리는 저절로 큰 줄 알지요. 이곳에 늙고 병든 부모들 많은데, 자식들은 부모 면회를 자주 오지 않아요."
어디선가 들은 말이 생각났다. 새끼 우렁이가 제 어미의 살을 다 파먹고 껍질이 물에 뜨면 "우리 엄마는 뭐가 저리도 신나서 둥실둥실 춤을 출까" 하면서 기뻐했다던가.
그때 이상한 광경이 보였다. 다른 어미 우렁이가 몸을 밀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어디로 가나 한참을 지켜봤더니 수족관 구석에 몸이 뒤집힌 새끼를 향해 가고 있다. 어미 우렁이는 새끼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듯 보였지만 너무 느린 속도였다. 한참 몸을 밀고 간 어미가 몸이 뒤집힌 채 허우적대는 새끼를 향해 자신의 몸을 들이밀었다. 새끼가 재빨리 빨판을 엄마의 몸에 갖다 댔다. 어미가 새끼의 손을 잡아주듯 중심을 다시 잡아 주었다. 몸이 바로 돌아온 새끼는 수족관 벽을 유영하며 다시 이끼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어미 우렁이는 그제야 느릿느릿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게 보였다. 발이 없어 배로 기어가는 복족류인 우렁이, 우렁이도 두렁 넘을 꾀가 있다더니 오직 그 마음은 새끼를 향해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의 이런 희생 덕분에 내가 이렇게 잘 사는구나...."
나도 모르게 눅진해진 눈가를 닦으며 어설피 버무린 무생채를 들고 205호 병실로 들어섰다. 한 생을 자식에게 다 파먹힌 우렁이가 거기 둥둥 떠 있었다. 이제는 손만 대도 바삭, 부서질 듯 텅 빈 노구가 병상에 힘없이 누워 계신다. 나는 가만히 다가가 엄마의 손을 잡아보았다.
차갑고 핏기 없는 손마디, 평생을 우렁이 새끼처럼 딸이 파먹어 엄마는 껍데기만 남았다. 작은 몸은 이미 모서리마다 금이 가고 부서져 내리는 중이었다. 엄마에게 눈물을 들킬까 봐 잠시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있는 수족관에는 새끼를 등에 업은 우렁이가 또 어딘가로 천천히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