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05월 11일(주일) 낮 설교 - 부활절 제4주[어버이주일] -
우리를 풍성케 하시는 목자
{ 요한복음 10 : 1~10 }
Ⅰ. Story. 「 나무궤짝 하나 」
아내를 잃고 혼자 살아가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젊었을 때는 힘써 일했지만, 이제 몸조차 가누기 힘든 노인이 되었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어느 날 목수를 찾아가 나무궤짝 하나를 만들어서 그것을 집에 가져와 그 안에 유리조각을 가득 채우고 튼실한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와 침상 밑에서 못 보던 궤짝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아들들이 그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노인은 신경 쓰지 말라고 할 뿐입니다. 궁금해진 아들들은 아버지가 없는 틈에 그것을 열어보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물쇠로 잠겨있어 내용물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속에서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들들은 속으로 ‘그래! 이건 아버지가 평생모아 숨겨놓은 금덩이일거야!’ 아들들은 그때부터 누구 먼저 할 것 없이 서로 아버지를 모시겠다며 효심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노인은 돌아가셨고, 아들들은 장례를 치룬 후 기다리고 기다렸던 궤짝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깨진 유리조각만 가득 들어있었습니다. 두 아들은 화를 내며 서로 쳐다보다 말했습니다. “당했군!” 첫째는 궤짝을 멍하니 바라보는 동생에게 말했습니다.
“왜? 궤짝이 탐나냐? 그럼 네가 가져라!” 둘째아들은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한참동안 그 자리에 서있었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적막한 시간과 함께 두 눈에 맺힌 이슬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궤짝을 집으로 옮겼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하나라도 간직하는 것이 그나마 마지막 효도라 생각했습니다. 아내는 구질구질한 물건을 왜 집에 들이느냐며 짜증냈습니다. 결국 유리조각은 버리고 궤짝만 갖고 있기로 하고 궤짝을 비우니, 밑바닥에 편지 한 장이 있었습니다. 아들은 편지를 읽으며 엉엉 울었습니다. 아내가 달려왔고, 아들딸도 달려왔습니다.
“첫째를 가졌을 때, 나는 기뻐서 울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좋아서 웃었다. 그때부터 삼십여 년 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나를 울게 하였고, 또 웃게 하였다. 이제 나는 늙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달라졌다. 나를 기뻐 울게 하지도 않고, 좋아 웃게 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 처음엔 진주 같았던 기억이 중간엔 내 등뼈를 휘게 한 기억으로 지금은 사금파리, 깨진 유리처럼 조각난 기억만 남아있구나! 아아, 내 아들들만은 나 같지 않기를… 그들의 늘그막이 나 같지 않기를…” 아들가족은 서로 부둥켜안고 울었습니다.
Ⅱ.
어느 날. 이제 갓 세 살 난 아이에게 엄마가 ‘우리 몸의 모든 부위는 소중하다’는 것을 설명해주며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눈은 왜 있지?” 그러자 아이는 “여기저기 잘 보라고.”하며 대답합니다. “그럼 코는 왜 있지?” “냄새를 잘 맡으라고.” “귀는 왜 있을까?” “잘 들으라고.” 아이는 엄마가 묻는 말에 막힘없이 술술 너무 대답을 잘했습니다. 아이의 작은 입에서 나오는 대답이 너무 신기해서 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마지막으로 물었습니다. “그럼 배꼽은 왜 있을까?” 그러나 아이의 대답은 명쾌했습니다. “인사를 잘하라고!”(배꼽인사) 그렇죠. 인사만 잘해도 인간관계는 더욱 풍성해질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물질문명’이라고 할 정도로 너무 한가지의 풍요로움에 치우쳐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비교적 잘사는 나라에 속합니다. 잘산다는 의미는 그 기준이 ‘경제적인 가치관’입니다.
실제로 우리나라는 물질적으로 엄청 풍요롭습니다. 쭉쭉 뻗어 올라가는 건축물들, 도로를 달리는 각양각색의 자동차들, 슈퍼마켓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공산품들 등등. 그러다보니 진정 삶의 풍요로움이 무엇인지 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가족관계도 물질위주로 바뀌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풍요로움은 물질적인 것만 가지고는 누릴 수 없습니다.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대사회는 물질적으로 풍요하지만, 정신적으로 매우 빈곤합니다.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부요함과 풍성함을 주시려고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10절하) 주님이 진정한 풍요를 주십니다.
Α. 예수님이 양의 문입니다(7).
이스라엘은 오래 전부터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이는 다윗의 시이지만, 다윗만의 고백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든 이스라엘사람은 같은 고백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사람들을 양으로 표현하시면서 주님은 스스로 ‘선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11). 요한복음에는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예수님의 자기선언이 7번 나옵니다(6:35, 8:12, 10:7, 10:11, 11:25-26, 14:6, 15:1). 본문에서는 ‘양의 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양들은 저녁때가 되면 울타리가 쳐진 우리 안으로 들어와야 합니다. 울타리 밖은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양들은 문을 통하여 울타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편안한 쉼을 얻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양의 문입니다. 우리는 양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주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은 우리를 그의 나라에서 평안히 쉬게 하시는 것입니다.
Β. 양문인 주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고 꼴을 얻습니다(9).
양의 문이신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습니다. 단지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내게 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영원한 하나님나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양의 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 그렇습니다. 양문이신 주님은 우리는 하나님아버지께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옛날에는 서울에 4대문과 4소문이 있었습니다. 서울을 둘러싼 도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중 어느 문이든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한양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나라는 오직 양문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구원과 함께 꼴을 얻습니다. ‘꼴’이란 삶의 양식입니다. 하나님나라에서 살려면 하늘양식이 있어야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함께 하늘양식을 주시는 참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Γ.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생명을 풍성케 하기 위함입니다(10).
10절을 보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참 목자는 양들을 풍성케 하기 위하여 바른 길로 인도합니다. 세월호 침몰로 인하여 여전히 온 나라가 슬픔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월호(청해진해운)가 기독교이단으로 정죄된 ‘구원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청해진해운의 실세인 유병언은 구원파 창시자인 권신찬의 딸과 결혼한 사이로 현재 구원파교주입니다. 잘못된 종교는 수많은 사람을 멸망으로 인도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도둑’입니다.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 도둑의 목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뿐만 아니라 더욱 풍성케 하십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나 구하는 것보다 더욱 넘치도록 더하여 주시기 원하시는 것! 이것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입니다.
Ⅲ.
어떤 철학자가 제자들과 세계 일주를 했습니다. 10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학식이 깊은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도 모두 뛰어난 학식과 경륜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철학자는 마지막으로 풀밭에 앉아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지난 10년 동안 너희들은 모두 박식한 인재가 되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이다.” 제자들은 스승을 둘러싸고 앉았습니다. 그때 철학자가 물었습니다. “지금 너희들은 어디 앉아 있느냐?” “풀밭에 앉아 있습니다.” 스승은 풀밭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묻자 제자들은 ‘잡초’가 가득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철학자는 어떡하면 이 잡초를 제거할 수 있을 지 물었습니다. ‘삽으로 파내자, 불로 태우자, 석회를 뿌리자, 풀뿌리를 뽑자’는 등 의견이 다양했습니다. 묵묵히 듣고 있던 스승이 마침내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수업은 여기까지다. 돌아가서 너희들만의 방법으로 각자 잡초를 없애라. 없애지 못한 사람은 1년 후에 다시 이곳으로 오너라.” 1년의 지난 후 제자들은 모두 다시 그곳에 모였는데, 보니 그곳은 잡초가 가득한 곳이 아니라 농지로 변해 있었습니다. 스승이 가르쳐주고자 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안에서의 근본적인 변화가 우리를 풍성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