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2월11일(목)맑음
삭발일. 건해(建海, 36)스님이 삭발해주고 운성(雲性, 53)스님이 등을 밀어준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와 쉰다. 할 일이 없다. 각황전에서 신도들이 화엄성중 기도를 하고 있다. 고성염불 소리가 멀리서도 들린다. 늘 적적했던 절 도량이 모처럼 열의에 찬다. 절이란 모름지기 불제자들의 신심과 열의로 가득 차있어야 하는데, 평소에는 거의 비어있다 시피 한다. 그만큼 불교가 매력이 없어진 것이다. 불법이 추락한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종단과 스님들이 보리심의 씨앗을 뿌리는데 소극적이었으니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났다. 절 살림이 당장 먹고살만하니 이대로 살면 되겠지 하고 하루하루 지낸다. 무사안일이요, 구태의연이다. 그런데 나는 무얼 하고 있는가? 나야말로 이런 형편에 무슨 도움이라도 되는 일을 하고 있는가? 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적고도 작다. 별 수 없다. 그저 분수껏 평소대로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다.
正心誠意 정심성의, 바른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一片丹心 일편단심, 일편단심 지켜가서
滴水穿石 적수천석, 물방울이 바위를 뚫을 때까지
遷流不息 천류불식, 흐르는 물이 쉬지 않고 가듯이
念念菩提 념념보리, 생각생각 보리심 챙기며
時時念佛 시시염불, 순간순간 부처님공덕 사유하리.
저녁부터 대숲 건너오는 바람에 물 기운이 베여있다. 아마 비가 올 모양이다. 내일은 봄비를 맞으려나, 숲속에 깃든 생령과 땅속의 씨앗들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겠네.
2016년2월12일(금)비
이젠 봄비라 불러도 되겠다. 하늘과 땅 사이에 안온하고 정다운 기운이 흐르는 것 같다. 봄비가 마른 나뭇가지 끝을 간질이며 촉을 일으키겠지. 땅속에 깃든 잠든 씨알도 깨울 테지. 평소 하던 대로 내복을 입고, 목도리며 털모자를 쓰고 나갔더니만 더워서 땀이 날 지경이다. 돌아와 땀이 베인 내복을 벗어서 빨래를 하다. 털모자와 장갑도 빨아서 방에 널었다. 이렇게 봄이 오나보다. 기다리던 임이 벼락같이 온다더니, 봄도 그렇게 오나보다. 이맘께 내리는 봄비를 어머니의 약손으로 느끼는 시인도 있구나. 강계순(1937~)의 봄비가 그렇다.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만유의 어깨 위에 내려
빈혈의 혈관을 채워 주고
서릿발 같던 하늘
비단 안개로 닦아 내어
천지에는
자근자근 땅 밟으며 일어서는
병후의 시력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다
천년을 다시 살아나서
죽은 혼 불러내어
일으켜 세워 주는
어머니의
어머니의
다시 보는
약손
寒氷지옥에서 인고의 겨울을 보낸 숲과 대지는 엄마의 약 손길을 받아 기력을 회복한다. 비단안개를 입고 자근자근 발걸음 옮기며 걸어온다. 넓은 논과 사래 긴 밭둑마다 냉이와 씀바귀, 쑥이 귀를 펴고 일어나겠지. 개울물도 불어 개골개골 내려간다. 봄비는 툭 치듯이 다가와서 옷깃을 스치는 인연처럼 사라진다.
Love can touch us onetime and last for a lifetime.
툭 치듯 다가온 사랑이 한 평생 가는군요. 영화 ‘타이타닉’의 주제가 가운데 한 줄이다. 인연이란 게 touch,觸이다. 모든 만남이 明觸명촉이냐, 無明觸무명촉이냐가 문제이다. 선업으로 가는 하얀 길(白道)이면 밝아지는 인연, 그러한 만남은 명촉이다. 불선업으로 향하는 검은 길(黑道)이면 어두워지는 인연, 그러한 만남은 무명촉이다. 너와 나의 만남은 하얀 길이냐, 검은 길이냐. 지금 다가온 대상과 인식하는 주관은 밝아지는 접촉이냐, 어두워지는 접촉이냐? 빗방울 소리가 명촉, 명촉, 명촉이라면서 만물을 어루만진다.
2016년2월13일(토)흐림
새벽까지 비 내리다, 아침에 그치다. 안개구름이 굼실굼실 파도일 듯 앞산을 지나가고 빗줄기가 뛰어간다.
미국에서 중력파를 검출하는 실험이 성공했다는 보고가 있다. 만물이 물질입자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중력에너지의 파도가 겹쳐서 나타나는 현상이란 것이다. 뉴턴이 발견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아인슈타인은 공간이 휘어지거나 비틀어지는 효과로 설명하였다. 별이나 혹성과 같은 몸집이 큰 물질의 밀도가 중력을 일으키며, 그 중력효과가 공간으로 퍼져나간다고 볼 때 이런 물리적 효과를 ‘중력파gravitational wave’라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다. 또 물질파라는 것이 있다. 평상시 물질로 보이던 것이 광속이나 광속에 가깝게 움직이면 파동처럼 행동한다. 이를 물질파라 한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일상에 접하는 물건은 에너지가 고도로 적집된 것이며, 개별 사물은 그것을 둘러싼 주변공간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에너지의 장場속에서 유영하고 있다고 봐야한다. 그리하여 모든 사물은 국소적local 성격과 편재적ubiquitous 성격을 동시에 나타낸다. 현대과학의 최신 정보에 의하면 이 세상은 에너지의 바다이며, 다중차원의 홀로그램이란 것이다. 개개 사물이란 에너지의 바다에 떠도는 물방울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 몸이란 것도 에너지가 밀집된 하나의 영상이다. 이 ‘몸’이란 영상이 에너지의 바다를 유영하는 것이다. 마치 대해를 유유히 헤엄치는 돌고래와 같이.
비가 슬그머니 그치는 듯하다가 밤이 되니 시나브로 내린다.
2016년2월14일(일)흐림&싸락눈
아침에 비긋더니만 날씨가 차지면서 싸락눈이 날린다. 빗방울이 얼어서 싸락눈이 된다. 먼 산의 머리가 하얗게 샜다. 어제는 기온이 높아져 봄인가 했더니, 오늘 겨울의 권세가 여전한 걸 실감한다. 계곡에 물 흘러가는 소리가 굉굉하다. 물이 불어나 바위를 씻기며 미래로 흘러간다. 밤이 되니 더 추워진다. 땅바닥이 얼어붙고 산속 공기도 얼얼하여 코끝이 매콤해진다. 동안거 해제가 열흘 정도 남았다. 옆방 스님은 미리 짐을 싸서 지인에게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방엔 옷가지며 용품이 훨씬 단촐 해졌다. 평소에 잡동사니들이 널브러져 좀 어지럽게 보였는데 말이다. 떠날 때는 한 점 티끌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떠나라. Clean cut란 말이 있듯. 淸斷了청단료. 좋은 말이다.
2016년2월15일(월)맑음
김윤식(金允植, 1936~, 문학평론가)의 <황홀경의 사상,1984>의 서문에 나오는 마지막 문장이다.
‘인생이 짧은 마당에 예술이 길 이치가 없다. 설사 길더라도 대단치 않을 것이다. 다만 환각이 남을 따름이리라. 황홀경의 환각만이 남을 뿐이리라. 나는 그것을 사랑하였다. 1983년 가을. 저자’
일생동안 모종의 아름다움을 찾아 이리저리 산지사방으로 헤집고 다녔던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뱉어낸 위의 문장은 사실상 임종 때 남길 유언으로 여겨도 될 듯한 여운을 준다. 아름다움, 문학과 예술의 美, 그게 무엇인가? 문화적 유전자에 전염된 탐미적 취향에 기인한 아름다움을 향한 욕망, 그것이 문학과 예술을 이룩해냈다. 미를 향한 욕망의 추구, 그것의 화려함과 허무함. 김윤식이란 문학평론가는 바로 이 점을 토로한 것이다. 도서관의 산적한 책들, 그 대부분은 죽은 자들의 것이 아닌가. 죽은 것을 향해 애절한 마음으로 대화하고 뒤엉켜 어루만지는 작업, 바로 이것이 김윤식의 글쓰기 작업이었던 것이다. 죽은 것들을 애호하고 연모하면서, 그들과 공감하고 심지어 세뇌를 당해 그들의 메시지를 퍼 나르는 일까지 한다. 그게 바로 지식인들의 책읽기와 글쓰기이다. 도서관에서 보물을 찾듯이 찾아낸 책을 읽고 이해하는 것이 어찌 보면 ‘묘지기’와 같다. 도서관에는 죽은 자들이 남긴 말과 글들이 산적해 있다. 죽은 자가 산 자를 부르며, 산 자가 죽은 자를 불러일으킨다. 죽은 자의 과거가 산 자의 현재로 스며든다. 문화유전자가 영원의 현재를 사는 방식이다. 그러나 문화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숙주인 개인의 인생이란 얼마나 왜소하고 허무한가? 그의 일생은 책벌레요 정보전달자 밖에 안 된다. 왜 이런 짓에 평생을 거는가? 탐미적 취향 때문이다. 탐미적 취향이라니? 윤회하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 향수하려는 짓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진주를 찾는 일과 같아 무익하기도 할뿐더러, 미래에 받을 고통의 원인을 만드는 일이 된다. 윤회하는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 찬미하고 즐기는 습관이 생기면 윤회를 벗어날 수 없다. 그건 똥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똥 벌레가 하는 짓이라, 거듭 거듭 똥 벌레로 태어날 원인이 된다. 그래서 부처님이 윤회하는 것에는 아름다움이 없으니, 더럽다는 인식을 닦으라(不淨觀asubha bhavana)고 하셨다.
그런데 또 문학평론가들이 책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까닭은 저자와 서로 뜻이 상통했을 때 느끼는 황홀감 때문이라 한다. 황홀감이라니? 그러나 그건 자주 오는 게 아니다. 한 번 체험한 후에 다시 그 체험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금단 현상이라는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래서 책의 동굴에 유폐되면 빠져나오기 힘들고, 문자의 바다에 빠지면 심연으로 침몰하고 만다. 고래로 聞思修문사수를 이야기 한다. 聞이란 것에 讀을 포함시킬 수 있을까? 讀독은 간접적인 聞문이다. 자고로 문이란 저자의 목소리로 나오는 말을 직접 듣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직제자들을 聲聞성문, 부처님의 음성을 들은 제자라고 한다. 책을 통해 듣는 것은 讀經독경, 看經간경이라 한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지혜를 聞所成智문소성지, 들음으로써 얻어진 지혜라 한다. 듣고 기억해서 사유해야 자기 것이 된다. 스스로의 힘으로 사유해서 얻어진 지혜가 思所成智사소성지, 사유함으로써 얻어진 지혜이다. 지식인들도 여기까지는 한다. 그러나 修所成智수소성지, 닦음으로써 체득되어진 지혜는 얻기 어렵다. 닦음이란 修習수습을 말한다. 마음을 바꾸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독서인과 수행인의 차이이다. 김윤식의 평생은 독서였지, 수행이 아니었기에 ‘글만 쓰되 목숨을 건 글만 쓰며 글쓰기의 신이 되고자 한 사내’라고 체념한다. 책벌레가 늙어 죽을 때 책장 갈피 속에 늙은 몸을 누이곤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가련하다. 독서인의 일생이여.
밤 정진을 마치고 나오며 하늘을 보니, 반달이 분칠한 듯 뽀얗게 보인다. 가는 눈이 솔솔 내린다. 쌓일 것 같지는 않다.
2016년2월16일(화)맑음
아침부터 눈빨이 날린다. 눈이 쌓이게 놓아두면 길이 얼어붙는다. 울력을 해서 눈을 쓸다. 큰절에서 선방으로 올라오는 오르막은 얼어붙지 않게 항상 쓸어놓아야 한다. 그래야 선방으로 올라오는 공양물을 차로 실어 나를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항상 텅 비워져 열려있으면 화평하여 안온하리라. 무엇인가가 걸려 있거나, 무엇에 붙잡혀 있다면 불편해지고 고통스러워 진다. 그래서 옛날부터 放下著방하착, 莫錯去막착거라는 말이 있다. 놓아버리고, 잘못 알지 마라는 말이다. 화엄사 일주문 앞에 있는 돌다리 옆에 이 글귀가 새겨져 있다. 쭐라빤타카가 외우던 ‘라조하라낭rajo haranam’이 ‘쓸고 닦아라.’는 말이 떠오른다. 拂塵除垢불진제구, 티끌을 털어내고 때를 없애라고 쭐라빤타카는 항상 염sati했다.
하루 종일 날씨가 쌀쌀하다.
2016년2월17일(수)맑음
<신성한 경제학의 시대(Sacred Economics)>
저자: 찰스 아이젠스타인(Charles Eisenstein)/역자: 정준형/출판사: 김영사(2015)를 읽다. 智湖지호보살이 보내준 전자책(e-Book)을 읽다. 소련을 위시한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진 후 전세계는 자본주의화 되었다. 소위 글로벌 자본주의, 자본의 글로벌화이다. 그리고도 금융자본주의이다. 남섬부주가 욕계인 것을 가장 적나나 하게 보여주는 게 자본주의체제이다. 세계의 구조적인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해 좀 알아야 한다.
행자가 근면을 좋아하고
방일을 두렵게 보기에
자신을 이끌어낸다,
진흙탕에 코끼리같이
행자가 근면을 좋아하고
방일을 두렵게 보기에
모든 죄를 씻어내나니
바람이 낙엽을 쓸어가듯
慣性관성의 법칙이란 게 있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은 한 정지한 물체는 영원히 정지해 있다. 정지한 물체에 힘이 가해져야만 힘이 가해지는 방향으로 물체가 움직인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렇다.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신구의를 움직이지 아니하는 한 영원히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즉 도덕적 윤리적으로 발전이 없이 습관대로 살다가 죽어갈 뿐이다. 보통 사람은 거의 다 이렇게 살다간다. 그러나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선업을 짓고 또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 삶의 방향이 굳건히 세워진다. 그런 삶을 받혀주는 논리적 확실성이 납득이 되어야 실천의 자발성이 확보된다. 이것은 견해가 확립되어야 그렇게 된다. 그래서 이런 견해를 확립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런 걸 中觀중관에서 다룬다. 공과 연기에 대한 견해가 서로 相補상보하면서 자비심과 반야바라밀을 향해 가도록 힘을 받혀준다. 달리는 말은 달리는 그 추동력으로 말미암아 그 달림을 지속해가듯, 일단 선업을 짓는 힘이 생겨나면 선업은 저절로 나날이 불어나게 된다. 마치 산비탈을 구르는 눈덩이가 불어나듯이. 이런 사람의 앞날은 밝다. 오래 살수록 선업의 쌓이며 세상에 덕이 된다. 나아가서 내생에도 이런 삶을 살게 될 확률이 높다. 그러니 어이 시간을 허비하랴, 방일하면서 하루를 보내랴.
산청에서 일광스님과 지견스님이 찾아와서 공양간에서 공양을 마치고 연기암으로 드라이브 가다. 연기암 구름속의 카페에서 모과차와 당귀차를 마시다. 도향스님이 곧 도착하여 합석하다.
일광스님이 물었다: 어떻게 좋은 생각을 일으키며 지속해나갑니까?
도향스님이 답했다: 생각에는 두 종류가 있다. 번뇌로 번져가는 생각과 선업을 짓는 생각이다. 번뇌로 치달리는 생각은 쉬고 놓아버릴 것이며, 선업이 되는 생각은 일이키고 지속하고 끝까지 밀고나가야 한다. 이런 바른 생각, 바른 사유를 훈련하는 것이 Lamrim람림의 가르침이다.’
일광스님: 백자진언을 어떻게 수지합니까?
도향스님: 진언을 하기에 앞서 공과 자비심에 대한 견해를 확립해야합니다. 백자진언을 자격을 갖춘 분께 룽lung을 받아야합니다. 그분 앞에 무릎 꿇어 앉아 그분에 발음하는 것을 세 번 씩 따라 외워야 합니다.
일광스님: 제가 어떤 단체에 관여하고 있는데 이젠 빠져나와 수행에 전념하고 싶어요. 그런데 마음이 약해 결단을 하지 못하고 있어요. 조언을 해주세요.
도향스님: 사람이 착해서 남의 말 잘 들어주고, 남의 말 따라 가다보면 큰 일, 진정하고 싶은 일을 못하고 맙니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사회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라도 가슴에서 즐거움이 우러나오지 않는 일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좀 똑똑해져야 합니다. 감성적이기보다는 지성적이 되도록 하세요. 스스로 사유하는 힘을 키워야합니다.
일상에서 마음훈련하기, 사유를 지속해가는 공부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니 시간이 흘렀다. 다음에 진주에서 만나 배움을 계속하기로 하고 헤어지다.
2016년2월18일(목)맑음
새벽 정진 마치고 나와 하늘을 보니 반달이 살이 쪄서 통통해지고 있다. 그렇지, 보름이 가까워지는구나. 정월 대보름. 민족사 편집위원에게서 이메일이 왔다. 책 출간에 앞서 보도자료로 쓸 글을 써 보내라는 요청이다. 늦은 밤까지 자판을 두드리며 문장을 다듬다 보니 새벽 1시가 다되어 자리에 들 수 있었다. 호연거사님이 좋은 거처를 찾았다고 연락이 왔다. 비봉산 아래 전망 좋은 곳에 있는 단독주택을 발견했는데 집주인이 수행하는 사람이어서 불교센터를 세우는 일에 협조적이라 한다. 고무적인 일이다. 부처님 일은 부처님이 바라시는 대로 이루어진다. 왜? 법계에 이익이 되는 일이며, 중생에 덕이 되는 일이기에. 우주의 합목적적 일이기에 우주가 그 일이 성취되기에 유리한 상황을 조성해준다.
2016년2월19일(금)맑음
새벽 정진 후 입승스님이 죽비를 놓으면서 한 마디 하신다. ‘동안거를 이끌었던 무거운 죽비를 이제 내려놓습니다. 대중스님들께서 노고가 많았습니다. 오늘부터 해재 준비에 들어가겠습니다.’ 아하, 겨울 한철이 이렇게 흘러갔구나. 지리산의 품안 화엄사에 깃들어 겨울 한철을 잘 보냈구나. 무엇이 제일 큰 소득인가. 도향스님을 만나 중관의 법을 듣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진주의 법우들 모임에 법사로 초청한 일이다. 무엇이 그 다음의 소득인가? 불법에 관한 견해가 투명해지고 견실해진 것이다. 깨달아야겠다는 강박감과 깨닫지 못했다는 불안한 마음이 깨끗이 사라졌다. 마음이 가볍고 가슴이 뻥 뚫렸다. 하늘을 나는 구름처럼 가볍고, 바람처럼 자유롭다. 부처님이 살아계셔서 옆에서 지켜봐주며 내가 하는 일을 도와주고 계신 것처럼 느껴진다. 법의 은혜가 충만하다. 털 끝 하나라도 내 것으로 취하지 않고, 티끌 하나라도 소유하지 않으니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로운가? 손끝 하나 대지 않은 천지만물 이대로 깨끗하여 흠이 없고 일마다 걸림이 없다. 어떤 것도 내 것으로 삼지 않으니 만사가 쉬어버린다. 들이쉬고 내쉬는 숨 한 가닥, 밟고 다니는 땅 한 뼘, 먹고 마시는 한 숟갈과 한 모금도 내 것으로 붙잡지 않는다. 다가오는 대로 느껴주고 놓아버린다. 그냥 그렇다. 어디에 ‘나’와 ‘내 것’을 세울쏘냐? 나와 내 것을 세우지 아니하니 걱정할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두려워하랴? 보리심 서원 세운대로 이루어진다. 한강에 돌 던지듯 이 한생 아낌없이 진리의 바다에 던진다.
2016년2월20일(토)맑음
청명한 날. 아침 먹고 이불과 담요피를 빨아서 햇볕에 널다. 누비바지를 기우려고 지대방에 갔더니 건해스님이 재봉틀을 사용할 줄 알아 자기가 기워주겠다고 한다. 고마운 일이다.
오후에 대구 관오사에서 정초 3사寺 순례단을 이끌고 주지인 지우스님이 왔다. 천은사와 사성암을 들렀다가 화엄사 각황전에서 회향기도를 한다. 속가의 어머니와 아는 불자들도 참석했다. 석가모니불 정근을 하고 잠시 좌선을 같이 했다. 주지스님의 말씀이 있고 난 후 내게 인사말을 할 기회가 주어졌다. 관오사 불자여러분, 바깥 경계의 3사 순례를 이제 원만히 회향했으니, 우리 안에 있는 3사 순례를 하세요. 거기가 어디인가요? 신, 구, 의 三業삼업이 우리 안에 있는 3사입니다. 행동, 말과 마음을 선용하여 바라밀을 닦읍시다. 그리하면 지혜와 자비가 늘어나서 병신년 한 해 나라와 가족과 나의 신심이 안락하고 평화로울 것입니다.
저녁이 되니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2016년2월21일(일)맑음
최봉수 교수님의 불교학개론 동영상 강의를 들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으리라.
불교가 죽더라도 중생이 불행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불교의 이름으로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 다른 종교와 차별된다.
불교는 행복의 종교이다.
오늘은 동안거 마지막 삭발일이다. 입승스님과 도향스님, 대현스님과 함께 지리산 산동온천으로 목욕하러 갔다. 점심을 먹고 산동면 산수유꽃길을 걸으며 봄이 오는 느낌을 맛보다. 고목이 된 산수유나무가지 끝에 봉우리가 맺혀있다. 봄볕이 좀 더 내려쬐면 이내 노란 꽃이 터질 것이다. 내일이 정월 대보름이라 시냇가에나 논이나 들판에 달집이 세워진 것이 보인다. 달집태우기는 정월 대보름날 밤에 보름달을 맞이하며 달님에게 바치는 집을 태우면서 양재초복(禳災招福), 잡귀와 화를 쫓아내고 복을 부르는 의식이다. 보름달을 보러 마당에 나가본다.
笑光照十方, 소광조시방 그 웃음 온 누리 환히 비치니
衆生水心淨; 중생수심정 중생의 마음 물같이 맑아라,
元宵瑠璃月, 원소유리월 유리광여래시여, 정월 대보름달로 나투시니
處處華金剛. 처처화금강 곳곳마다 금강의 꽃으로 피어나도다.
저녁예불 후 自恣자자회를 가졌다. 주지스님의 말씀이 있고나서 입승스님이 한 철 함께 살았던 동안거 살림을 돌아보며 대중스님들의 여일한 정진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스님들께 말할 기회가 돌아가면서 주어진다. 짤막하게 ‘감사합니다.’라고 하는 사람, 그조차도 할 말이 없어 묵언으로 넘어가는 사람도 있다. 어떤 스님은 한 철 뜻한 바만큼 공부에 열의를 내지 못한 것 같아 죄송하다는 말을 한다. 내 차례가 되어 말하기를 ‘1996년 몇몇 스님과 짜고 惺寂堂성적당에서 하안거 결제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아름다웠던 추억이 이번 화엄사 선등선원을 찾게 만들었습니다. 장대한 지리산의 품안에 깃든 호쾌한 화엄사 선등선원에서 한 철 지내는 소원이 이제 성취되었습니다. 결제가 원만히 회향되도록 마음써주신 소임자 스님들께 감사드리며 함께 정진할 수 있었던 대중스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여름 한 철 함께 정진했던 법의 인연 성숙하여 마침내 부처님 문중에 들어올 때 세우신 큰 뜻 모두 이루시기를 기원합니다.’
2016년2월22일(화)맑음
동안거 해제일. 10시30분에 각황전에서 법요식을 갖는다. 아침 먹고 짐을 꾸리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가져갈 것만 챙긴다. 단촐한 여행 가방에다 등산화와 스틱이 한 묶음이다. 배낭여행자가 한 곳에 장기 투숙하다가 짐을 꾸려 다시 길을 떠나는 기분이다. 늘 그렇듯 머물다가 떠나는 연습이다. 늘 그대로인 듯 보이던 것들이 멀어져가는 풍경이 된다. 내가 여기 살았던가? 여기에 얼마동안 머물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이제 떠나고 나면 화엄사에서 지낸 동안거는 기억속의 한 사건으로 남을 것이다. 또 시간이 더 흘러가면 기억조차 희미해질 것이니, 흔적도 없다. 삶이 沒蹤迹몰종적이다. 자취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니 남기려 해도 남겨지질 않는 것이다.
보인 것에는 보인 것만 있을 뿐, 남은 게 없다.
들린 것에는 들린 것만 있을 뿐, 남은 게 없다.
느낀 것에는 느낀 것만 있을 뿐, 남은 게 없다.
생각된 것에는 생각된 것만 있을 뿐, 남은 게 없다.
남은 게 없으니 걸림이 없고 두려워 할 것이 없다.
자, 구름이여 흘러가라. 어느 하늘인들 반갑지 않으랴.
물이여, 흐름을 따라가라. 어떤 골짜기와 들녘, 마을과 도시를 지난들 지겨움이 있겠는가?
동안거 해제 법요식을 마치고 기다리는데 호연거사가 도착했다. 도향스님의 짐과 나의 짐을 실고 진주로 돌아오다. 죽향에 들어 차 한 잔하고 명상센터 후보지로 보아둔 단독주택을 둘러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시 칠암동 한주아파트 12층 4호에 들렀는데 안온한 분위기와 그런대로 쓰임새가 있을 것 같아 아파트로 결정했다. 안방을 법당으로 꾸며서 강의와 명상을 하면 좋겠다. 6시30분 죽향차문화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다. 재회의 기쁨이 넘쳐 꽃병에 꽂힌 홍매 봉오리가 벌어지려 한다. 죽비 삼배로 재회인사를 나누고 도향스님을 소개드리고 스님께 법을 청하다. 인사를 끝내고, 끝나자 차와 다과를 들면서 환담을 나누다. 그동안 품었던 질문이 터져 나오면서 자연스레 도향스님의 법문이 흘러나와 학생들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마음을 일으키는 법을 언제 배운 적이 있었던가? 자비와 복이 되는 생각을 일으키는 훈련을 한 적이 있었던가? 선한 마음, 선법에 속하는 마음은 저절로 계발되지 않는다. 생각을 바라보아 고요해진 데 머물지 말라. 거기가 끝이 아니다. 선한 자질의 마음을 일으켜야한다. 생각을 끊으려고 하지 말라, 오히려 선한 생각을 일으켜서 지속해가라. 한 생각 복된 생각이 무한한 미래 생을 위한 자량이 된다.
첫댓글 "할 일이 없다."
일이 없으면 초조하고, 일이 많으면 생활의 노예가 되는 것 같고. 언제 일에서 자유로워질까? 늘 기다리는 글 잘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물은 국소적 성격과 편재적 성격을 나타낸다."
오실로스코프와 스펙트럼아날라이저가 있습니다. 전자제품 개발하는데 필수적 입니다
오실로스코프는 타임 도메인을, 스펙트럼아날라이저는 주파수 도메인을 측정할 수있습니다.
그런데 타임과 주파수는 정반대 입니다. 물리에서 배운대로 t는 f분의 1이고, 동시에 f는t분의 1 입니다. 이것이 국소적 성격과 편재적 성격을 나타낸 것이 아닐까요?
지금 여기 이순간에는 온갖 스펙트럼이 다 있습니다.
도서관에는 죽은 자들이 남긴 말과 글들이 산적해 있다.
윤회하는 세계에서 아름다운 것을 찾아 향수하려는 짓은 쓰레기 더미 속에서 진주를 찾는 일과 같아 무익하기도 할뿐더러 미래에 받을 고통의 원인을 만드는 일이 된다.
거듭 거듭 똥 벌레로 태어날 원인이 된다.
닦음이란 修習수습을 말한다.
마음을 바꾸는 훈련을 반복하면서 습관을 들이는 것이다.
_()()()_
2월 15일자 글을 읽고 글을 하나 써 보았습니다.
많은 경전을 외우더라도 행하지 않는다면, 문소성지(聞所成智)보다 수소성지 (修所成智)를
http://blog.daum.net/bolee591/16156869
2월 19일 일기를 보니 스님의 마음이 어떻게 그렇게 가벼워질 수 있었을까 궁금한 마음이 듭니다. 안거를 잘 마치시고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오셔서 기쁩니다.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