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행 무궁화 열차 풍경
아침 진주역은 태양 빛에 나 앉아 있다. 한옥 식으로 잘 지어진 건물이 웅장하다. 단지 접근성과 하루 몇 차례 없는 열차 간격으로 효율성에서 문제가 있는 듯하다. 대합실에는 포항행 열차를 기다리는 몇 사람이 전부다. 구석에는 외국인 남성과 그의 아내인 한국 여성이 아들을 가운데 두고 앉아 있다. 그 아이 생김의 반은 백인이다. 출근 시간인지 몇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열차는 곧 포항으로 떠나갔다. 나는 맥주 한 캔 사들고 플랫 홈으로 나갔다. 작열하는 태양 속에서도 높은 천장 때문인지 나무 의자 밑으로 바람이 제법 불어왔다. 그 후 얼마 동안 목포로 가는 열차는 아주 더디게 들어왔다.
달랑 3량의 열차에 몸을 싣고 차창으로 지나가는 시골 마을을 쳐다봤다. 내리쬐는 햇볕에 몸을 던진 채 밭일과 논일에 부지런한 사람들. 그때 딱정벌레 같은 장애전동차에 몸을 실은 한 할머니가 모자도 없이 언덕을 넘어갔다. 고장이라도 나면 어떨까하는 걱정이 앞섰다. 열차 객실의 기름 섞인 비릿한 냄새가 한결 익숙해질 즈음 북천역에 도착했다. 키 낮은 코스모스 밭에서 연신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고 있다. 더위는 가는 잎들도 늘어지게 했다. 방금 떨어진 잎사귀에서 태양이 반짝인다. 서서히 떠나가는 북천역의 가을은 어떤 모습일까?
차창 가까이 밤나무들이 지나치는데 밤송이들이 제법 부풀어 오르고 있다. 열차는 작은 언덕을 넘어 하동역으로 미끌어 들어갔다. 몇 사람 없는 열차 객실은 나에게 편안한 자리를 만들어준다. 하동역 저기 플라스틱 의자가 정겹다. 몇 년 전 섬진강 백리길 걸어와 저곳에 앉았었다. 그 가을날에 배낭과 나는 순천행 기차를 기다렸었다. 지금 이 역에서는 아무도 타지 않고 열차는 곧 출발했다. 섬진강이 넓게 펼쳐진 다리를 넘는데 강 상류 끝으로 어제 내려온 지리산이 8월 하늘 끝에 닿아있다. 어제가 바로 몇 년 지나온 것 같다.
깜박 잠든 사이 열차는 순천역을 벗어나고 있다. 갑자기 젊은이들로 열차는 만원으로 변해있다. 정원 박람회를 관람하고 귀가길인가? 그들의 재잘거림을 실고 열차는 또 달려간다. 벌교역에서 몇 사람 내리고 차 도로를 곁에 두고 작은 열차는 들로 나아갔다. 얼마 전 익숙한 저 길 따라 걸으면서 나는 열차에 손을 흔들었다. 지금 도로는 한산하다. 조성역을 지나는 저 도로 아래 공장이 낯익다. 그날 사나운 개 한 마리 나를 쫓아오며 으르렁 거렸는데 잘 지내고 있을까? 저 논에서 허리 굽혀 구멍 난 벼 못자리를 손보던 아주머니는 이 땡볕에 집안일을 하고 있겠지? 사진 찍다 마주친 그 모습 생생하다. 예당역을 지나고 저수지 옆 정자도 반갑다. 하지만 열차는 무심히 조만식선생 은거지를 지나 터널을 넘어 보성역으로 들어갔다. 여기서 그 많던 대학생들은 내렸다. 차밭에 집단으로 가려는가 아니면 어떤 MT에 가려는지 또 궁금하다. 다시 열차는 조용해지며 새로운 간이역, 명봉역을 지나고 방향은 크게 북서진한다.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 열차는 장흥을 지나 강진 땅을 거슬러 바로 목포로 이어지면 안 되었을까? 물론 목포로 넘어가려면 커다란 철교가 만들어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찌되었든 열차는 도시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화순을 지나고 S 곡선을 그리며 서광주로 들어섰다. 옆에 앉아 졸고 있던 할아버지도 그곳에서 내렸다.
지금은 광주 송정역에서 낙지비빔밥을 먹고 수원행 무궁화 열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 때 앞 의자에 두 남녀가 물건을 건네받으며 서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한 수녀와 한 할아버지. 에스컬레이터 끝까지 눈이 따라간 그 노인은 계속 손을 흔든다. 바람 같이 가느다란 수녀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똑같이 손을 흔들었다. 그녀가 보이지 않도록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35도 열기 속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그의 어깨가 앞으로 푹 처지는 것이 보였다.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한 아버지와 그 딸, 그렇게 그들이 헤어지는 그날 수원행 무궁화 열차를 기다리며 나는 서 있었다.
명봉역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 속에 서 있겠지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나의 아버지
저녁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트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 헤어진 간이역
눈앞의 빙판길
미리 알고
봉황새 울어 주던 그날
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
눈 시리게 서 있겠지요.
(문정희 시인)
첫댓글 기차 언제 타 봤는지 기억에도 없네요.
서울역에서 밤 11시 목포행 완행열차를 타고 다음 날 낮 12시에 영산포에서 내렸던... 까마득한 옛날
네. 기차 여행이 예전만큼 싶지가 않습니다. 그래도 가끔 KTX 보다 무궁화 완행 열차가 재미가 있지요. 개동 선생님도 한 번 이용해보시지요. 가령 목포를 경유하여 고향 강진을요.
그러네요.. 기차를 타면 왠지 풍경들이 눈에 들어와요.. ktx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정서가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