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갑제: 이제 우리는 논산으로 갈 겁니다. 논산이 황산벌 아닙니까. 제 2훈련소에서 훈련받으셨던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훈련소 노래에도 나옵니다. 거기에 계백 장군 무덤이 있습니다. 1600년대에 손질을 했다가 최근 다시 보수를 했는데 거기를 구경하고 부여로 갈 겁니다. 부여에 도착하면 조금 늦을 거 같습니다. 부여에 가서 식사를 한 다음에 낙화암이 있는 부소산에 갔다가 정림사지로 갈 겁니다.
백제가 망하기 전에 만든 탑이 두 개가 있습니다. 定林寺(정림사)지 탑과 미륵사지 탑입니다. 옛날에 우리가 학교에서 배울 때는 平濟塔(평제탑)이라고 그랬습니다. 요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정림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유물이 발견되면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그 후에 새로 뚫린 논산-천안 고속도로를 통해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서울에 도착하면 오후 7시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지금까지는 신라 중심으로 유적을 보셨는데 이제는 백제 유적지를 보실 겁니다. 아마 분위기가 조금 다를 겁니다. 두 나라의 유물을 비교하면서 보시면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충청도하면 백제라고 생각하실 텐데 지역마다 조금씩 다르죠. 같은 충청도라도 진천에서는 김유신을 모시고 부여에서는 백제를 중심으로 계백을 모시는 걸 보면 지역마다 다른 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선입견을 가지고 신라니 백제니 하고 뭉뚱그려서 보면 안맞는다는 겁니다. 현장 향토사를 중심으로 구석구석 다녀봐야 뭔가 다른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향토사는 굉장히 정직합니다. 왜냐하면 중앙에서 만드는 官學, 정부가 주도하는 역사는 잘못하면 御用으로 변해서 국가 중심, 민족 중심을 부르짖으며 우월주의로 빠지게 됩니다. 일본이 그 예입니다. 나라(奈良)나 도쿄(東京)에서 보는 역사와 규슈(九州), 시마네(島根)에서 보는 역사가 조금 달라요. 지방에 가면 한반도로부터의 영향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편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지방에 다녀보면 지역감정을 넘어서는 鄕土愛(향토애)를 발견하게 됩니다. 때문에 괜히 圖式的(도식적)으로 백제, 신라 이런 식으로 구분하는 것은 모두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나라 지역감정의 발달을 백제, 신라로 보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겁니다. 그건 최근 수십 년 동안 정치인들이 역사를 이용해 먹으려고 만든 겁니다. 예컨대 견훤이 경북 상주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백제, 신라를 들먹이면서 전라도, 경상도 싸움으로 몰아간다는 게 웃깁니다.
지역감정이나 인종주의는 세계 어느 나라나 다 있는 겁니다만 선동하는 정치인만 없으면 괜찮습니다. 그걸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려고 선동하는 정치인이 나타나면 잠재돼 있던 악감정들이 격화되면서 결국 서로 죽이는 상황도 나타납니다.
최근의 사례가 유고슬라비아입니다. 티토 대통령 당시에는 6개의 지역이 연방을 구성해서 잘 살았습니다. 티토가 죽고 냉전이 와해되니까 세르비아 지역에서 세르비아 주의를 주창하는 사람들이 들고 일어납니다. 그들은 과거 오스만 투르크 시대의 역사까지 들먹이면서 너는 이슬람이고 너는 그리스 정교고 우리는 가톨릭이다 이렇게 서로 구분하면서 싸웁니다. 그들은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에서 인종청소를 한다며 몇십만 명을 죽였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하여튼 인종주의나 지역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 선동하는 정치인들은 세상의 毒입니다.
신라가 통일한 다음에 잘한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백제, 고구려 遺民(유민)들을 별로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정복국가같으면 멸망한 나라의 遺民들을 노예로 만들고 핍박했을 텐데 그런 게 없었습니다. 더구나 당나라와 싸울 때는 백제, 고구려 유민과 신라 사람들이 모두 한 덩어리가 돼 싸웠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나라의 민족주의가 시작된 거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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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때 학도병으로 많이 간 중학교의 순위를 한 번 매겨봤습니다. 그랬더니 군산에 있는 학교가 1위를 했습니다. 두 번째가 경북중학교였습니다. 학도병이 대구 지방에서 많이 나왔는데 그 중에는 열네 살에서 열일곱 살 사이의 소년병들도 많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전선이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오니까 학교에서 지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부모님께 알리지도 않고 지원입대한 경우도 있습니다. 전사한 사람이 약 2500명 된다고 합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사람들이 전부 열네 살, 열다섯 살 등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희생을 戰史(전사)로 잘 써야 하는데 늘 이스라엘 예만 들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최근에야 전쟁기념관에 명단을 새겨놓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여기 오신 선생님들 중에서는 해군 출신들이 세 분 계시죠. 우리 해군이 6·25 당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 아십니까. 6·25 사변이 나자마자 북한은 게릴라들을 부산에 침투시키려고 배를 내려보냅니다. 제 기억으로는 6월 26일입니다. 6월 26일 새벽에 이 배는 부산 앞바다에서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과 만나게 됩니다. 백두산함이 이 배를 격침시켰습니다. 당시 북한 배에 타고 있던 인원을 약 700명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게 만약 우리 후방에, 부산 근방에 상륙했으면 어떻게 됐겠습니까.
그런데 이 백두산 호라는 배가 재미있습니다.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은 배인데 태평양을 넘어오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700톤 정도밖에 안되는 작은 배였습니다. 그렇게 우리나라에 와서는 한 달 만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그래서 이 해전을 대한민국을 살린 해전이라고 합니다.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해전이 1950년 6월 26일 새벽에 부산 오륙도 근방에서 일어났던 겁니다. 이것은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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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노래방에서 말씀을 들었는데 정 선생님께서 고등학교 때 연극을 하시면서 문무왕 역할을 맡으신 적이 있으시다죠? 그 연극 제목이 元述郞(원술랑)이었다고 합니다. 원술랑은 교과서에서 배우셔서 아시죠. 요새 아이들에게 원술랑을 물어보면 잘 모른다고 합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아이들에게 원술랑과 관창에 대해서 아느냐고 한 번 물어보세요. 알 거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원술랑은 실화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술랑은 김유신의 아들입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싸울 때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왔습니다. 본인은 전투에서 죽으려고 했지만 부하가 억지로 구해서 왔습니다. 그걸 안 김유신은 화가 났습니다. 전투에서 죽었어야 했다고 생각하고는 敵前(적전) 도망이기 때문에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문무왕에게 건의를 했습니다. 그런데 문무왕이 알아보니까 사형에 처할 일이 아닌 겁니다. 원술랑이 사형되지 않자 김유신은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며 부자 간에 義絶(의절)해버립니다.
원술랑은 작심을 하고 다시 전쟁에 나가 對唐(대당) 결전을 할 때는 크게 이겼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김유신이 죽었습니다. 원술랑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장례식에 들어가려 하자 사람들이 못들어가게 막습니다. 이럴 수 있느냐 해서 어머니에게 만나자고 하니까 김유신의 부인도 만나주지 않습니다. 이유가 뭐냐하면 ‘내 남편이 너를 아들로 보지 않았으니 나도 너를 아들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원술랑은 중이 됐다는 이런 스토리입니다. 연극 속에서는 원술랑이 고간이라는 당나라 장수의 목을 베었다고 나와 있습니다.
흔히 아시는 買肖城(매초성) 전투라는 게 있는데 675년 고간이라는 사람이 지휘한 당나라 군대와 신라 군대가 전투를 한 겁니다. 그게 마지막 對唐 전투 중의 하나입니다. 원술랑이 고간의 목을 벴다는 것은 시나리오상의 설정을 위한 것인 거 같고 실제는 아닙니다. 관창 이야기는 잘 아실 겁니다.
사람이 참 이상합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나면 원균 꼴이 납니다. 원균에 대해서 이렇게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에 조정에서 功臣都鑑(공신도감)이라는 것을 만들어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웠던 사람들의 점수를 매겼습니다. 1등 공신이 세 사람 있습니다. 누구냐하면 이순신, 권율, 원균입니다. 이건 잘 모르셨죠.
그런데 지금 알려져 있는 것은 원균은 역적이고 이순신은 충신이라고 합니다. 이순신을 높이기 위해서 원균을 깎아내리고 있습니다. 이건 좀 잘못된 거죠.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면 이순신이 원균을 개인적으로 굉장히 미워하고 경멸했다는 것이 나와 있습니다. 난중일기에서 원균 욕하는 것을 찾아보면 약 스무 번쯤 됩니다. 그 내용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들이었습니다.
이순신은 굉장히 꼼꼼하고 선비같고, 외유내강인 스타일인 반면 원균은 호탕하고 술 잘 마시고 이런, 좀 건달끼가 있는 그 정도의 사람으로 비쳐집니다.
그러나 원균이 사실 그렇게 무리한 전투를 한 게 아니고 나중에 패전해서 육상에서 일본군에게 잡혀 죽었다는 것이 치욕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그것도 본인이 하기 싫은 전투를 권율이 억지로 밀어서 한 것 아닙니까.
이순신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질 전투를 안합니다. 열두 번의 전투에서 한 번도 지지 않은 이유는 질 전투는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선조가 보니까 좀 괘씸하거든요. 자기가 전투하러 나가라 했는데 이유를 대면서 안나갔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불러가지고 고문하고 파면한 겁니다.
장수에게 제일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자기 병력을 보전하는 겁니다. 자기 병력이 날아가버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이길 전쟁만 한다는 이야기는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전쟁은 원래 이길 전쟁을 해야 한다’는 원칙을 따른 겁니다. 지는 게 뻔한 전쟁을 왜 합니까.
그런데 위에서 보기에는 이순신이 뺀질뺀질하게 빠지니까 원균을 내보낸 겁니다. 원균은 무모하게 나갔다가, 그것도 자기가 나선 게 아니고 위에서 억지로 시킨 전투에 갔다가 패한 겁니다. 어떻게 보면 이순신이 당할 것을 원균이 대신 당하고 욕도 대신 먹은 겁니다.
이래서 원씨들이 굉장히 불만이 많습니다. 예전에는 텔레비전에 원균을 나쁘게 표현하면 소송도 하고 그랬습니다. 제가 내막을 보니까 원씨들의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겁니다.
신라에서 그와 관련된 것이 관창의 이야기입니다. 현장에 가면 제 말씀을 듣고 느끼기만 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660년에 나당 연합군이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蘇定方(소정방)이 이끄는 13만 군대가 서해를 건너 덕적도에 상륙하기로 했습니다. 신라는 5만 군대를 이끌고 문무왕과 김유신이 직접 출전을 했습니다. 원래 약속은 두 군대가 7월에 어디선가 만나기로 한 겁니다. 그 상태에서 진격을 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김유신의 군대는 경기도 이천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되돌아와 논산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논산에서 대결을 하게 됩니다.
당시 부여가 방어하기 좋은 곳은 탄현이라는 곳입니다만 이상하게 황산벌로 나가 넒은 곳에서 겨루게 됩니다. 이게 좀 잘못된 거죠.
당시 계백 장군의 군사는 5000명이고 신라는 5만 명입니다. 이게 하나의 미스터리입니다. 인구는 백제가 더 많았는데 왜 5000명밖에 동원할 수 없었느냐 하는 겁니다. 일설에는 당시 왕권이 제대로 정비되지 않아 부하들이나 지방 토호들이 병력 동원을 제대로 안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나당 연합군이 어디로 쳐들어올지 몰라 병력을 분산배치해서 동원하지 못했다는 것이 있습니다. 하여튼 백제는 병력 동원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660년 7월 10일 황산벌 전투가 벌어집니다. 삼국사기가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제가 날짜까지 댈 수 있습니다. 황산벌 전투는 하루 정도 있었습니다. 이틀사흘 가는 持久戰(지구전)이 아니라 넒은 개활지에서 벌어진 전투였기 때문에 하루 만에 끝났습니다.
계백은 출전할 때 자기 가족들을 다 죽이고 일종의 배수진을 쳤습니다. 그리고 결사적으로 전투에 임합니다. 그러니까 전투에서 매번 신라군이 졌습니다. 이럴 때 김유신이 쓰는 수법이 있습니다. 불리하면 자기 부하를 특공작전으로 보내서 죽게 만들고 그것을 자신의 병사들에게 보여줘 부하들을 흥분시켜서 달려들도록 만드는 이런 수법을 여러 번 썼습니다.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 중에서 김유신이 원술랑을 왜 괘씸하게 생각했느냐 하는 답이 나옵니다. 자기는 자기 부하들을 그런 식으로 죽였는데 자기 아들이 살아돌아온다는 게 말이 아니다 하는 이런 자책감을 느꼈습니다.
백제의 강력한 저항으로 황산벌 전투가 교착상태에 빠지자 당시 부사령관이던 품석이 자기 아들 官昌(관창)을 내보냅니다. 계백 장군이 관창을 포로로 잡아 투구를 벗기니까 아직 어린 소년인 겁니다. 그러니까 죽이지 않고 돌려보내지 않습니까. ‘뭐 이런 것들이 있나. 이건 죽였다가는 오히려 우리가 당한다’고 생각해 돌려보냅니다. 돌려보내니까 관창이 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쳐들어 온 겁니다. 그러자 계백이 다시 붙잡아서 이번에는 관창의 목을 쳐서 목을 매달아서 신라군에 돌려줬습니다. 그 모습을 본 신라 군대가 흥분해서 쳐들어가 백제군을 이겼다는 게 다들 아시는 이야기입니다.
이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습니다. 관창이 그렇게 죽기 전에 盤屈(반굴)이라는 사람이 똑같은 식으로 죽었습니다. 이 사람도 소년 화랑입니다. 반굴은 누구의 아들이냐. 김유신이 대장군이고 그 옆에 부사령관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품석이고 하나는 欽純(흠순)입니다. 이 반굴은 흠순의 아들입니다. 김흠순은 김유신의 동생입니다. 그러니까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였던 겁니다.
자,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부사령관의 두 아들이 죽었습니다. 반굴과 관창이 이런 특공대 요원으로 소모품처럼 된 거죠. 그러나 그 덕분에 전쟁에서 이겼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러일 전쟁 때도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은 여순 요새를 함락시키려다 3만 명이 죽었습니다. 그때 노기(乃木) 대장이라는 사람이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일본군이 요새를 공격하는 전술이 시원치 않은데다 신무기였던 기관총이 설치된 토치카 때문에 인명손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기서 노기 대장은 자신의 두 아들을 전사케 합니다. 결국 여순 요새를 점령하게 됩니다.
러일 전쟁을 이기고 나서 메이지(明治) 천황이 이 이야기를 듣고는 노기 대장의 성격으로 봐서 자살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는 노기 대장에게 자살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노기 대장은 그 명령을 받고는 자살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천황이 죽은 이틀 후 부부가 함께 할복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떤 일본 소설가가 그 부검결과 같은 것을 가지고 꼼꼼하게 조사해 쓴 소설이 있어요. 좀 참혹한 이야기인데 그 부부가 죽기 전날에도 평상시처럼 손님을 접대하고 이렇게 했습니다. 부부가 어떻게 자살을 하겠습니까. 남편이 아내를 칼로 찌른 거죠. 과연 부인도 죽고 싶어 했겠느냐 하는 것은 조금 의문입니다.
자살 문화라는 게 있습니다. 자살 문화는 명예에 대한 가치가 높아지는 분위기에서 나타납니다. 로마 시대에 자살한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나라는 삼국통일시대에 자살이 많습니다. 일본은 요새는 자살을 가끔 합니다만 옛날 무사 시대에는 할복자살이 하나의 문화였습니다. 일본 武士道(무사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살 문화에 대해서 아셔야 합니다. 하라키리(割腹)라고 합니다. 자살이라는 것은 사형하고는 다릅니다. 사형은 징벌이고 하라키리는 무사가 명예를 지키면서 죽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사람에게 하라키리를 허용하는 것은 봐주는 겁니다. 스스로 죽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사의 명예를 지키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반드시 목을 쳤습니다.
이 하라키리라고 하는 것은 단도로 배를 옆으로 가르는데 그 도중이나 마지막에는 힘이 빠질 것 아닙니까. 그렇게 힘이 빠질 때를 대비해 뒤에서 할복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할복하는 사람이 칼로 배를 가를 때 뒤에서 목을 칩니다. 무사들은 이런 조역을 할 사람을 데리고 다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 육군장관 아나미(阿南)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終戰(종전)에 반대했습니다. 그래도 천황이 결정한 것이니까 할 수 없죠. 그래서 8월 15일 정오에 항복방송한다는 것을 알고는 그날 아침에 자살을 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라키리를 할 때 옆에서 목을 쳐주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나는 내 실력으로 죽겠다’해서 배를 가르고 피를 쏟으면서 세 시간 동안 신음하다가 죽었습니다. 바로 그 옆에 사위가 있었습니다. 사위가 ‘제가 도와드릴까요’ 하니까 ‘그러지 마라’고 합니다.
그때 아나미 육군장관집에 누가 놀러와 있었느냐 하면 우리나라 군번 1번인 이형근 대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육군 참모총장도 하고 하다가 최근에 돌아가셨는데 이 사람이 아나미 육군장관의 아들과 친구였습니다. 그래서 휴가나와서 친구 집에 놀러간 겁니다.
그런데 8월 15일 아침에 일어나니까 아나미 육군장관의 부인이 이형근 장군에게 아침상을 차려주고 ‘꼭 아침을 들고 가라’고 하더니 어디로 갑자기 나가더랍니다. 바로 그렇게 나간 게 자신의 남편이 官舍(관사)에서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간 겁니다. 나가기 전에 자기 아들 친구 아침밥까지 다 차려주고 나갔다 이런 이야기를 이형근 장군에게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형근 장군이 8월 15일인가 다음다음 날인가 누구를 찾아갔느냐 하면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라는 英王 李垠(영왕 이은)을 찾아갑니다. 당시 이은公은 일본군 장교가 돼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나라를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하던 참에 일본 군복을 입고 있던 젊은 한국인 장교들을 데리고 이은公을 찾아갔습니다.
그 전에는 이은 공을 찾아가도 일본말만 하고 냉랭하게 대하니까 기분이 나빴답니다. 그런데 그 날 이은 공을 찾아가자 비로소 한국말을 하면서 첫 마디가 그러더래요.
“조선이 왜 망했느냐. 바로 文弱(문약)해서, 尙武(상무) 정신이 없어서, 군대를 키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가 망한 것이다. 그러니까 귀관들은 돌아가면 제발 군대부터 제대로 키워주기 바란다.” 하는 말을 유언처럼 하더랍니다. 그게 바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가 한 이야기입니다.
조선이 왜 망했는가. 간단히 이야기하면 自衛力(자위력)이 없어서, 군대가 없어서 망한 거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나라도 마침내 해방 이후에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마어마한 대군을 가지게 되었고 국민 개병제도 실시하면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군을 만든 겁니다.
최근에는 이런 상무정신이 상당히 줄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상무정신이 사라지면 대한민국도 그 運(운)이 상당히 나빠질 거라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문약하게 될 수 있는 소지가 많지만 지금은 상무정신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나라 젊은 사람들, 철없이 생활하다 군대 다녀온 다음에는 조금 달라지지 않습니까. 만약 그 군대과정이 없다고 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될지 상당히 걱정스럽습니다.
이상으로 제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