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들의 요구에 따라서 강론할 때는 마스크를 벗겠습니다. 마스크 때문에 할머니들이 그 보청기를 끼었는데도 잘 들리지가 않는다고 그래서 총회장님하고 상의해서 강론할 때만 마스크를 벗는 걸로 그렇게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되도록이면 많이 가리려고 했는데 이제 노출시키겠습니다.
오늘 성탄절입니다. 예수님이 탄생한 날입니다. 이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탄생하는 날이 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탄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고유하고 거룩한 이 밤에 여러분들에게 이제 강론을 한다기보다 조용히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조용히 묵상하는 그런 강론을 드리는 것이 훨씬 더 우리에게도 유익하고 새로 태어나는 날을 한번 깊이 묵상하리라 이렇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일찍이 2천 년 전 요셉이 임신한 마리아와 함께 여관에 머무를 곳이 없어서 소나 양이 머무는 마구간 구유 안에 그 맏아들을 낳음으로서 이 거친 세상에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서 생일 축하를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가 믿고 있듯이 동정녀의 태중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 세계로 들어오십니다. 비좁은 어머니의 태중에 위에서의 성령이란 공경에, 허덕이는 조국에, 불행한 시대에, 편협한 이웃의 단절된 육체 아래, 노동자의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철저한 실패로 끝날 일생에, 신이 죽을 황량한 세계에, 죽음이 어두운 밤하늘로 찾아오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역사의 이 비극을 무슨 희한한 구경거리처럼 굽어보시지 않으시고 당신의 지엄하신 하늘에서 내려오시어 우리와 똑같이 이 인생의 무대 위에서 당신의 배역을 몸소 진지하게 연출하심으로써, 이 세상에 빛이 되어 우리 역사의 마지막 장에 비극으로 끝나는 것을 막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이름을 탁월한 경륜과 용사이신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은 여관에 머무를 방에 없어 마구간에 누워야 했습니다. 여관은 세상이 수분이 모이는 곳, 이 세상에서 찬미를 받는 내로라하는 자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쾌락과 부정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마구간은 이 세상에서 버림받고 가난과 고통에 지친 사람들이 쉬었다 가는 곳 구세주가 탄생하신 곳입니다.
그렇습니다. 구세주의 성탄, 흥청거리는 파티에 징글벨이 울리는 호텔이 아니라 헐벗고 굶주리며 이 추위에 떨고 있는 형제들이 마구간 구유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이 땅 위에 천주 성자가 태어나실 장소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던 곳이 있었다면 물론 그곳은 으리으리한 인류 호텔이나 어느 고관집의 안방 아랫목 한 자리였을 것입니다. 천주 성자께서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탄생하리라고는 그 누구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태양을 창조하여 지구를 따뜻하게 할 수 있던 하느님께서 당신의 몸을 덮게 하시기 위하여 소나 양의 해를 필요로 하시리라고는...보은들로 덮으신 분이 당신은 벌거숭이로 계시리라고는, 또한 당신이 손가락으로 우주 만물과 세계를 내신 분이 고사리같이 작은 손을 가지고 계실 줄은, 그리고 영원한 말씀이 벙어리처럼 침묵을 지키고 계시리라고는, 이 세상 일에만 골몰하는 사람이나 이 세상이 지혜만으로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신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되신 천주 성자께서 빛이 되시어 당신의 세계에 이 땅에 오시는데도 뒷문으로 조용히 들어오시고, 이 땅 위에서 무지한 당신 백성들을 피해 가축들이 머무는 마구간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어둠 속에 빛으로 오시는 구세주를 뵈옵고 새로이 태어나 성숙한 신앙인이 데려는 예수님과 같이 마구간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나 마구간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은 누구나 말씀이 사랑이 되시듯이 겸손이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혀야 합니다. 그러므로 겸손이 머리를 숙이고 몸을 굽히기를 시도하는 교만한 자는 결코 후세들의 성탄을 보지 못할 것이며 성숙한 신앙인이 되지도 못할 것입니다. 성탄의 참된 기쁨과 평화는 그리스도와 같이 나 자신이 겸손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데 있는 것입니다.
구상 시인이 나이 쉰을 넘어서 쓴 ‘성탄을 쉰 번도 넘어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구상 시인이십니다. 저도 이제 성탄을 쉰 번이 아니라 예순 번, 일흔 번이 다 되었습니다. 구상 시인이 쓴 시는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해줍니다.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본능의 천주만을 모시고 있어 저 베들렘 왕국 위로 오신 그 무한한 사랑 앞에 양을 치던 목동들처럼 순수함으로 조배할 줄 모르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는 허영과 마귀들이 들긇고 있어 지극히 높은 데서는 천주께 영광, 땅에서는 마음이 좋은 사람들에게 평화 그날 밤 천사의 영원한 찬미와 축복에 지내고 있음에.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고도
나의 안에 악의 짐승만이 살고 있어 헤로데의 폭정 속 세상에 오셔 십자가로 완성하신 그 고난의 생애는 외면하고 부활만을 탐내 바라고 있습네.
성탄을 쉰 번도 넘게 맞이하여도
나 자신은 거듭나지 않고선 누릴 수 없는 명절이오.
시인의 고백처럼 우리는 성탄을 수없이 맞이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떠한 예수님을 기대하는가가 문제인 것입니다. 거기에 따라 성탄의 의미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처지를 헤아리시어 가장 높은 분께서 가장 낮은 자리에 오신 그 크신 사랑에 고개 숙여 경배 드릴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나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평화
여러분의 마음과 가정에 즐거운 성탄의 기쁨과 평화가 함께하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예수님의 성탄이 이만큼 중요하고 경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새로 태어나지 않는다면 그 성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깊이 뉘우칠 수 있어야 됩니다.
가장 큰 분이 가장 작은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도 가장 작은 모습을 취하는 것, 우리 가장 큰 모습으로 생을 막아줄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명심하시고 언제까지나 겸손이라는 단어를 결코 잃어버리지 않도록 각별히 노력해 주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낮은 곳, 구유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받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도록 더욱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