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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8-11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요한 1서 4장 7절-11절
장로님과 아주 불편한 관계로 지내는 어느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으로부터 e-mail을 한 통 받았습니다.
장로님은 교회 문제로 인해서 목회자에게 받은 상처가 깊어서 날마다 괴로워했습니다. 그렇게 늘 괴로워하던 중 평소 늘 존경해 오던 목사님께 e-mail을 보낸 것입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자꾸 소화불량과 위에 통증이 있어서 위 내시경검사를 해 보았습니다. 그 결과 위벽에 아주 날카로운 손톱으로 할퀸 것과 같은 생채기가 두 줄이 나 있어 피가 고인 상태로 아물지 않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가 무슨 독한 약을 복용했거나 또는 극심하게 신경을 쓰는 일이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저는 약을 복용한 적이 없다고 답변을 했지요. 그러자 의사 선생님은 자신은 독실한 불교 신자라고 소개하면서 저에게 충고했습니다. ‘선생님! 종교 한번 가져 보시지요.’ 그 말을 들은 저와 제 아내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 방을 나왔습니다. 이제 무슨 망신입니까? 하나님께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정말 이 편지의 내용은 그냥 지나칠 일이 아니었습니다. 의사가 보기에 얼마나 그 상처가 깊었으면, 그래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신 분에게 자신이 심취해 있는 종교에 귀의해 보라고 권했겠는가? 하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장로님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목사님은 어떤 형편이겠습니까?
목사님 또한 바로 그 장로님과의 갈등으로 인하여 심장부정맥으로 고통당하고 계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신앙이 없어서입니까? 그러나 이 두 분 모두 나무랄 데 없이 인격적이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어디 가나 존경받는 신앙인들이었음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목사와 장로의 신분으로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의식지도 못하는 가운데 이렇듯이 상대의 생명을 서로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특정 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적지 않은 교회가 목사와 장로, 성도와 성도 간에 갈등을 겪고 있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우리들의 대답은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크리스천이 있다면 결코 참된 크리스천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것을 안다고 해서 모두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씀드릴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말씀하신 요한 1서 1장 5절의 말씀과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하신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과 함께 하나님의 속성을 말씀하시는 세 가지의 표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빛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는 두 표현은 추상적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는 표현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잘 나타내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살리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9절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영국 북부의 에든버러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도시 한 공원에다가 사람들은 열두 그루의 그늘이 좋은 느릅나무(Elm)를 심었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느릅나무 열두 그루에 각각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베드로, 안드레, 요한, 마태, 빌립 나무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유다 나무라고 이름 지어진 나무도 당연히 있었습니다. 날마다 나무들은 자랐습니다. 마침내 열두 그루의 나무들이 제법 그늘을 지어낼 만큼 자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두 나무의 그늘을 찾았습니다. 하늘이 열두 그루의 나무 가운데 어느 나무에게만 햇빛을 많이 주고, 비를 많이 내린 것이 아니므로 서로 비슷한 크기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달랐습니다. 유독 한 그루의 나무에게만 차별대우를 했습니다. 바로 ‘유다’라고 이름이 붙여진 나무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 나무의 그늘에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유다나무를 걷어차면서 욕을 해대며 미워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깊은 사람일수록 더 심했습니다. 유다나무는 몇 해를 못 견디고 말라 죽었습니다. 물리적인 핍박과 차별이 유다나무에게 치명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나 나무나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엔모또 마사루’의 ‘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에서도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합니다.
물이 죽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물을 얼리기 전에 컵에 사랑, 감사, 기쁨 등의 단어를 써서 붙여 놓은 후, 얼음의 결정체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아주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해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반대로 물에다 증오, 미움, 악마 등의 단어를 붙여 놓은 후에 얼리면 정말 흉한 모습으로 변한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모든 생명체를 살리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여야 합니다. 사랑하여 우리도 살고, 상대방도 살립시다.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살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사랑하고 서로를 살립시다. 관심을 갖고, 기대를 갖고, 격려하며 사랑하는 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아야 살아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명예가 드높아도 사랑받지 못하면 살 수 없고,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우리의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그리고 사랑은 생명을 살리는 놀라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히 살리려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친히 죽으시면서 사랑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서로를 위하여 죽을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하여 살립시다.
또한 화목케 하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0절입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 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케 하는 제물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화목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범죄 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노여움을 사고, 원수 되었던 우리와 하나님의 사이에 하나님의 노여움을 가라앉히고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케 하려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이 제사에는 제물이 필요하였는데, 이 제물은 양이나 염소로써 피를 제단에 뿌리고, 기름을 불에 태우면서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의 제물이 되어서 우리 죄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피를 뿌리고, 몸을 찢어서 하나님께 드려진 희생하신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반드시 희생이 요구된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바라본 천국과 지옥은 참 이상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모두가 팔이 굽어지지 않는 이상한 모습이었습니다. 천국의 사람들은 얼굴에 윤기가 돌고 건강해 보였고,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피골이 상 접한 상태의 비쩍 마른 사람들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식사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난 후 곧바로 그 사람은 천국과 지옥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서로 다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먹을 것이 들어오자 그릇 속의 음식을 수저로 퍼서 자기 입에 넣으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팔이 굽혀지지 않아서 입에 음식을 넣지 못하고 결국 다 바닥에 쏟아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배가 고프니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합니다. 그러나 천국의 모습은 전혀 달랐습니다. 먹을 것이 들어오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굽혀지지 않는 팔로 수저를 들고, 그릇에 든 음식을 퍼서 자기의 입으로 가져가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에게 먹여주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에 꼭 요구되는 것이 있다면 희생입니다.
희생 없이 결코 참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양초가 빛을 발하려면 자기의 몸을 태워야 하듯이 참된 사랑은 자기의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된 사랑을 전하는 일은 더 더욱 희생이 필요할 것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잃지 않으면서 무엇인가를 얻으려 한다면 그것은 상당한 착각이고, 망상에 불과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2절과 3절에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는 사랑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12절입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고 하나님의 사랑의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사랑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말같이 생각같이 쉽지가 않습니다.
월터 휘트만(Walter Whitman 1819-1892)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시에서 서민들의 희망과 자유를 진실하게 노래합니다. 히트만은 모든 인류가 하나임과 인간의 가치가 얼마나 큰가를 노래하는 시인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말년에 여러 가지 질병으로 결코 행복하지 않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의사가 하는 말을 듣고 그가 노래한 인간의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가를 새삼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 의사의 말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저는 의사가 된지 어언 30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처방을 해 왔습니다만 아픈 사람에게 가장 좋은 처방 약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이 말을 들은 휘트만은 크게 공감하면서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약이 듣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단호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땐 처방 약을 두 배로 늘리면 되지요.”
서로 사랑하려면 생각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을 극복하는데 가장 좋고 확실한 방법은 그 사랑의 양을 두 배로 늘리는 것입니다. 또 두 배로도 되지 않으면 세 배로 늘리면 가능할 것입니다.
아직도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건만 꿈적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두 배로, 세 배로 여러분의 사랑의 양을 늘려 보십시오. 그렇게 하고도 결과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닮은 사랑까지 양을 늘려 보십시오. 죽기까지 하시는 사랑, 끝까지 하시는 사랑, 결코 포기하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26세의 가정 학습지 방문교사인 효진 씨는 동갑내기 남편과 빠듯한 살림을 꾸려가던 중, 시어머님이 간경화 말기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간이식 외에는 치료 방법이 없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누가 시어머니에게 간을 기증하겠습니까? 그러다가 효진씨는 간 기증이 적합할지 테스트를 받았습니다. 다행히 효진 씨는 적합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양가 집안에서는 젊은 효진 씨의 간 기증을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효진 씨는 굽히지 않고 간이식 수술대에 올랐습니다. 결국 16시간이라는 긴 수술 끝에 자기 간의 60%를 시어머니에게 드리고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시어머니는 눈물을 적시며 며느리에게 사랑을 고백했습니다. 이 애틋한 사연을 들은 신문기자가 원무과에 찾아가서 효진 씨가 제출한 “장기 이식 대상자 선정 사유서”를 보니 효진 씨의 친필로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그분을 사랑합니다. 사랑하면 내 몸도 나눌 수 있습니다. 사랑하면 아픔과 고통도 감내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사랑하는 곳입니다. 지옥은 어떤 곳입니까? 사랑이 없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두말할 것 없이 사랑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몇 사람 모이지만 그곳에서 서로 사랑하며, 서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며, 하나님과 화목케 하려 노력할 때, 그곳에 아무리 작은 무리가 모였을지라도 천국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씀드린 목사님과 장로님처럼 서로 사랑하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화목하지 못하고, 미워하므로 서로의 생명을 죽이고 있다면 그곳에 아무리 많은 무리가 모여서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곳이라 하더라도 교회가 아니고 지옥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서로 사랑하지 않는 곳은 교회가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참된 크리스천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나와서 예배드리는 글로벌 찬양의 교회가 천국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아니면 지옥이기를 원하십니까? 두 말 할 것 없이 천국이 되기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서로 사랑하십시오. 아니 서로 사랑합시다. 가뜩이나 외롭고, 힘들고, 서러운데, 우리끼리 사랑하지 못하면 그것은 지옥의 삶입니다. 그러나 서로 사랑하면 아무리 외롭고, 힘들고, 서럽더라도 이곳이 천국입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은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내가 할 탓이요, 내가 마음먹을 탓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목사님과 장로님도 서로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으려고 만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결과가 그렇게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이해하기 보다는 내 입장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용서하기보다는 내 상처를 아파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기보다는 내 감정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마음이 필요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우리는 결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중요한 상황에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명령을 준행하여야 할 시기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명령을 준행하기 전에 먼저 해야 할 것이 있는데,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로 사랑합시다.
그러니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살리고, 서로에게 화목제물이 되고, 서로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우리 가정을 천국으로 만들고 우리 교회를 천국으로 만들고, 이 세상도 천국으로 만들어 이 놀라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죽어서 뿐만 아니라 살아서도 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