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근 화백 이야기
“하루는 좀 일찍 들어오시더니 ‘나는 외출했다가 돌아올 때 우리 집 용마루만 보아도 집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다. 뭐가 그렇게도 사랑스러우냐고 물었더니
‘먼발치에서 바라보면 저 집안에 죽었다 살아온 나의 사랑하는 처자식과 동생이 있다는 생각을 하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고 하셨다.” (아내 김복순 씨가 박수근 20주기 전에 쓴 글 ‘나의 남편 박수근과의 25년’ 중에서)
6.25 한국 전쟁 직후 미 8군 PX에서 함께 일했던 소설가 박완서(朴婉緖/1931~2011)는 박수근의 나무그림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그와 내가 같은 일터에서 일한 것은 일 년 미만 이었지만 그동안에는 봄, 여름, 가을도 있었을 텐데, 왠지 그와 같이 걸었던 길가엔 겨울 풍경만 있었던 것처럼 회상된다.
그가 즐겨 그린 나목(裸木) 때문일까, 그가 그린 나목을 볼 때 마다 내 눈엔 마냥 춥고 헐벗어만 보이던 겨울나무가 그의 눈엔 어찌 그리 늠름하고도 숨 쉬듯이 정겹게 비쳐졌을까가 가슴 저리게 신기해지곤 한다.”(1999년 호암갤러리에서 연 ‘우리의 화가 박수근’ 전에 보내온 글)
“그이는 아침 10경에 붓을 들면 저녁 4시까지 그림을 그리고 5시 쯤 시내에 나가서 전시회를 보고 친구들과 만나 저녁까지 대화를 나누다 들어오시곤 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며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임종시 마지막 남긴 말
박수근(朴壽根/1914~1965) 화백은 강원도 양구에서 출생하는데 1952년 월남(越南)하여 서울 창신동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호(號)는 미석(美石)
그는 가난 때문에 양구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도 못했으며 정규적인 미술교육도 받지 못했다. 1965년 5월, 간경화로 사망하기까지 그림을 그리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았다.
그의 창신동 집에는 팔리지 않은 그림들이 방에 가득했다고 한다. 부인은 김복순, 자녀 다섯 을 낳았는데 둘은 병사, 2남 1녀 중 장남 성남과 장녀 인숙이 화가다.
「6.25 전쟁 직후 한 가난한 화가가 미군이 주둔하던 호텔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그림을 팔아 가족이 먹을 끼니와 그림 도구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화가를 유심히 바라보던 미군 한 명이 일본에서 사온 붓과 물감을 건네주었다. 화가는 그 대가로 그림 한 점을 선사했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미군이 지하 창고에 처박아 두었던 그림을 꺼내어 경매 시장에 내놓는 순간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당시로선 사상 최고가였던 45억 원이란 금액에 팔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알려진 그림이 바로 국민화가 박수근의 대표작 『빨래터』이다.」
너무나 가난했던 박수근은 두 아들을 병원에 데려가 보지도 못하고 잃었다. 자신도 돈이 없어 백내장 수술을 받지 못해 한쪽 눈을 실명하고 간경화가 악화되어 51세로 생을 마감한다.
한국 전쟁 후 주한 미 대사관 문정관의 부인이었던 마거릿 밀러(Margaret Miller) 여사는 박수근의 그림이 마음에 들어 30여 점 구입하였고 귀국 후에도 꾸준히 박수근의 그림을 구입하여 총 60여 점이나 소장했다고 한다. 물감조차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박수근은 언젠가 “그림 값 50달러로 물감을 사서 보내 달라.”고 하기도 했단다.
당시 그의 그림은 크기에 따라 그림 1점 당 20~50달러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호당(엽서 크기) 2~3억 원을 호가한다니 놀라울 뿐이다.
2006년 『노상』이 10억 4천만 원, 2007년 『시장사람들』이 25억 원, 같은 해 『빨래터』가 45억 2천만 원으로 국내 미술품 경매사상 당시 최고가를 경신하며 거래되었다.
생전에 그림을 단 두 점 밖에 팔지 못하고 가난에 허덕이다 권총 자살한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도 있다. 팔린 두 점의 그림은 그의 동생이 샀다고 한다.
황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 이중섭(1916~1956)은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속의 은박지에 그림을 그렸다. 가족을 부양할 능력이 없어 일본인 부인은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자 항상 가족을 그리며 홀로 살아야 했다. 정신질환에 시달리던 중섭은 서대문 적십자 병원에서 홀로 숨진 뒤 무연고자로 처리돼 사흘간이나 무연고 시체실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들은 살아생전에는 찢어지게 가난에 허덕였지만 죽은 후 오늘날 그들의 그림은 수 십 억, 혹은 수 백 억 원에 거래된다. 그런데 그 돈들은 야속하게도 그들의 가족도, 지인도 아닌 엉뚱한 사람들 지갑 속으로 들어간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 집에서... 부인 김복순 여사와 장녀 인숙
경매사상 최고액 45억 2천 만 원을 기록한 '빨래터'(1950년대 후반 작품, 캔버스에 유채, 37×72cm)
* 위작에 휘말려 재판까지... 위의 두 그림(인터넷에서 퍼옴)도 어딘가 다르다. ???
첫댓글 옛날 예술인들의 삶이 대부분 그랬지요
활동중에 인기를 얻는 예술인들은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가
뒤늦게 인정을 받은 예술가들은 그 삶이 팍팍하다보니
더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 그렇습니다. '팍팍한 삶'......